우중충한 하늘 아래의 세계수, 그리고 그 거대한 그늘 위의 사람들. 그들은 제각각 쌀쌀한 바람과 추적거리는 빗방울로부터 몸을 숨기려 겉옷을 굳게 여미고 있었다. 계절의 경계선이 종종 지독한 방식으로 윤곽을 드러내곤 하는 탓이었다.
빗물에 씻겨나가 회색빛으로 물든 거리는 사람 외의 것의 소리로 메워져 누군가에게는 소음이, 또 누군가에게는 고요가 된다. 무채색의 가운데서 밝게 빛나는 금발을 가진 이 남자에게는 단연 후자. 그는 달콤한 정적을 곱씹으며 모자를 가볍게 눌러썼다.
주말이라는 시기와 아직 이른 시각, 그리고 싸늘한 날씨는 마치 그가 세상에 마지막 남은 사람인 듯한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일까, 본디 무거워야 할 그의 발걸음에는 다소의 경쾌함이 섞여 있었다. 적어도 어느 모퉁이에선가 쓸데없이 부지런한 성미의 회계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남자는 입가에 드리웠던 미소를 지우고 그가 드러낼 수 있는 가장 무심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러나 습관. 그 망할 습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에게 결국 쓸데없는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건 단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주위의 사람이 어떤 복장, 어떤 표정으로 그를 스쳐 가고 어떤 행동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지도.
물론 그의 일에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한 습관이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유쾌했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 남자는 다른 무언가를 떠올리려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별 볼 일 없던 아침 식사. 특별한 것 없이 우울한 날씨. 오늘 이루어질 대화에 관한 예측할 수 없는 전망. 다행스럽게도 그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한숨을 쉬는 대신 주의를 환기할 무언가를 간신히 떠올렸다.
남자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조금 전 그의 기분을 수직으로 낙하시킨 이가 입고 있던 검은 코트였다.
그가 곧 만나게 될 누군가도 그런 어두운색의 옷을 즐겨 입었다. 말 그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취향에 실용적인 의미는 적었다. 적어도 지금으로선, 외출을 하는 사이 지저분한 흙탕물이 코트 자락이나 바짓단을 더럽힐 걱정이 없을 테니 말이다. 그자는 남자와 만난 이후 문밖을 나선 적이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검은 옷이 그에게 잘 어울린다는 점만은 부정하지 못한다.
주위는 다시 옅은 웅얼거림 같은 빗소리만이 남아 조용해졌다. 금발의 사내는 걸음을 재촉하며 품에 안은 식료품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고쳐 잡았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사람을 위해 바쁜 시간을 쪼개며 찾아와야 하니 그 번거로움은 결코 적지 않다. 외출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떻게 되었든 몸의 피곤함은 도리어 원망을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다.
따로 사람을 구할 생각을 해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남자는 필요 이상의 위험을 감수하기보단 자신의 불편을 택하고 말았다. 그 문 안에 들어있는 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이라면, 단 한 가지의 사각을 제외한다면 그 공간은 충분한 안전을 보장하고 있다. 그 사각도 지금은 서서히 메워지고 있노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남자가 깊은 생각에 빠져들기 직전, 길 한구석에서 다소 어울리지 않는 색조가 그의 눈에 띄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그 사람과 닮은 수선화 빛깔. 밝은 노란색이었을 스카프는 이미 대부분이 비에 젖은 길바닥에 물들어 있었다.
아주 잠깐의 감상은 안심을, 그리고 이어서 당혹감을 불러왔다. 그는 지금 무엇을 보더라도 그 사람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자각 탓이었다.
남자는 한숨을 내쉰다. 그 사람. 테드 파워즈, 혹은 루드비히 와일드. 스스로가 능력자이자 능력자의 천적인 헌터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이름이 알려져 있을 유명인. 그자는 이 남자, ‘매력’의 코드네임을 가진 독심술사 마틴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는 인물이었다. 그들은 본디 얽혀서도, 그럴 만한 계기조차도 없는 것이 서로에게 이로웠을 것이다.
마틴과는 다른 종류의 선명한 금발, 얼핏 섬뜩한 느낌을 주는 밝은 빛깔의 눈, 날카로운 이목구비, 빛이라는 능력을 가지고도 어둠 속에 숨어드는 자. 물론 그가 거대한 스캔들을 터트린 지금은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들리는 소문으로 루드빅은 그 사건으로 인해 같은 헌터들에게조차 적대시되고 있다고 한다. 그가 자신의 행적을 과시하며 의뢰인들로 하여금 헌터라는 족속들에게의 신뢰-물론 애초부터 웃기는 소리라고 마틴은 생각하지만-를 무너지게 한 탓이었다.
온전한 아군이라고는 없는 주제에 구태여 수많은 적을 만든 존재. 말 그대로 내면의 소리까지 읽어낼 수 있는 마틴조차도 그를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에게서 읽은 과거는 마틴이 몸으로 느껴온 세계와 동떨어져 있었고, 현재의 그가 가진 생각들은 일반적인 것들과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그건 아마 그 자신도 마찬가지로, 그가 타인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다른 무엇보다 스스로 그런 걸 원하지도, 또 노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마틴은 품에 안은 며칠 분량의 식량이 새삼스레 무겁게 느껴졌다. 얼마간은 재단의 일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려면 오늘 안에 많은 걸 준비해야 했다. 이번에는 어떻게 말을 떼고 어떻게 말을 돌려야 할지. 그리고 또 어떤 암시를 걸어야 할지. 마틴은 그를 만나기 전까지 그런 것들을 보류해두기로 했다.
루드빅이 독일 출신인 것을 감안해 마틴은 일부러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재료를 골라 담아오곤 했다. 흰 아스파라거스. 무거운 식감의 빵. 그리고 그 위에 발라먹을 수 있는 피 햄까지. 물론 그게 자기만족일 뿐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자각하고 있다. 그가 사나운 맹수라고 한다면 우리 안에 던져지는 먹이의 맛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홀로 남은 시간이면 주로 과거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틴이 가리고 뒤바꾸어 인과가 흐릿해진 기억들은 그리 쉽게 매듭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의도치 않은 시간 벌이는 마틴에게도 달가울 일이지만 마인드리더는 다소 복잡한 마음을 느꼈다.
마틴이 모퉁이를 돌자 그가 있을 장소가 모습을 드러내고, 청년이 발을 디딘 돌계단 위에 옅은 빛깔의 축축한 발자국이 남았다.
그 주택은 검은 지붕과 회색빛 외벽으로 단장되어 있었다. 창의 덧문이 닫혀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어느 평범한 영국인 부부가 살고 있을 법한 그 외관에서 특이한 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마틴은 문 앞에 멈춰 섰지만 초인종을 눌러 그를 부를 생각은 없었다. 그 헌터는 분명 깨어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마틴을 마중할 생각은 없을 것이 분명하다. 루드비히가 그런 식으로 반가움을 표시할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가 쫓고 있는 사냥감, 그 외의 선택지는 없었다.
지금쯤이면 그는 늦은 식사라도 준비하고 있지 않을까. 그가 스스로를 먹일 줄 안다는 사실은 마틴에게 그리 나쁘지 않은 소식이었다. 헌터로서나 한 인간으로서 홀로 지낸 생활이 긴 만큼 그에게는 당연한 일일 테지만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마틴이 꽂아 넣은 열쇠는 현관문에 깔끔하게 맞아 들어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달각’, 이라는 맥 빠지는 소리.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청년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경쾌함이라고는 없이 조용한 울림은 공회전을 의미하고 있었다. 애초에 잠겨있지 않던 장치가 다시 풀릴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게 의미하는 것.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깨닫기도 전에 찾아오는 예감에, 마틴은 자신의 직감이 틀렸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스터우터의 자리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마틴은 그가 오기 전부터 관련된 일을 다수 처리하고 있었다. 때문에 업무상의 이유로 그들이 자주 마주치게 되는 건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마틴으로서는 속이 끓는 일이었지만 그는 하던 일을 그만두거나 남에게 미루지 않았다.
재단의 이방인인 티엔에게 자신의 일을 맡겨두기는 찜찜했고, 또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파악할 파악한 필요가 있었다. 능력이 통하지 않더라도 관찰이라는 수단은 여전히 유효할 터였다.
그런 와중 티엔 측에서는 오히려 그를 나쁘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대개 그렇듯 마틴이 잘생긴 얼굴을 가졌다거나, 그 생김새에 어울릴 만큼의 고운 말을 쓸 줄 안다는 이유는 아니었다. 티엔은 처음에 마틴의 생김새조차 흐릿하게 기억했으며 그들은 인상적일 만큼의 긴 대화를 나눌 일이 거의 없었다.
티엔의 눈에는 그의 외견이나 성격보다도 서류를 처음 읽는 사람도 알기 쉽도록 정리된 메모, 손이 두 번 가지 않는 깔끔한 일처리 같은 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함께 일을 한다면 이런 사람이 이상적일 거라는, 그가 던질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마틴을 향했지만 물론 마틴은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또 다른 이유라면 마틴은 그에게 말을 많이 걸지 않았다. 티엔은 안녕하세요, 에 이어지는 안부 인사나 날씨가 좋다는 둥의 사족을 좋아하지 않는다. 때문에 깔끔한 서론, 본론, 그리고 결론으로 이어지는 마틴의 화법은 그에게 썩 달가운 존재였다. 공교롭게도 이 점은 그 마인드리더가 티엔을 껄끄럽게 생각한 탓이었지만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마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거 알아요? 당신의 뒷얘기를 옮기는 후원자가 있다는 거.”
별다른 특별한 일이 있던 날이 아니었다. 그날에 관해 티엔의 기억에 남아있는 건 바로 이 대화뿐일 정도였다.
뜻밖의 이야기였지만 그가 듣기에 마틴의 말에 걱정의 기색은 없었다. 사실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마틴은 여전히 티엔을 좋게 보지 못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이유가 많지만. 단순히 출신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고요. 유감으로 생각해요. 제게 대놓고 하는 소리는 아니어서 손을 쓰기는 어렵군요.”
“중국에서는 그런 걸 ‘閑話’라고 하지. 쓸데없는 소리라는 뜻이다.”
티엔은 그의 말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직접적으로 받은 불이익은 없었고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낸다면 그들도 무어라 할 수 없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 마음가짐에 나쁠 것은 없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걸 전하는 티엔의 태도는 그리 바람직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담담하게 말을 전했던 마틴도 그의 짤막한 대답에는 굳은 얼굴이 되었다.
“글쎄요. 당신은 고립되는 게 두렵지 않나 보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외면 받는다거나.”
“그럴 일을 만들지 않으면 되는 게 아닌가.”
“완벽하다는 건 모든 상황을 대비한다는 것 아닌가요? 완벽이라는 게 당신의 목표라고 들었는데요.”
“완벽에 대한 견해가 서로 다른가 보군.”
마틴은 불편한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의 대화는 어쩐지 티엔의 기억에 남아 오랫동안 이어졌다. 마지막의, 완벽에 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후략)
더 작은 이야기
“그리고, 그녀가 말을 할 때마다 고운 입술에서 반짝이는 금화가 떨어져 내렸습니다……”
그날 재단 건물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었다.
티엔의 제자가 아직 영어로 된 대화에 서투르던 시절. 그 나이대의 아이들은 빨리 배우기 마련이지만 친절한 마틴 챌피는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고자 했다.
소년과 자주 대화를 나누는 것 외에도 그에게 읽어줄 수 있을만한 이야기를 고민하던 마틴은 동화책을 빌려왔다. 처음에는 무슨 애 취급이냐며 가볍게 성을 내던 하랑은 어느새 조선에는 없던 사악한 용이며, 마녀, 왕자와 공주 따위의 이야기를 꽤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이제는 그것도 오래 전의 일이 되었다. 꽤 듣기 좋은 목소리라고, 그들의 수업을 언뜻 엿들은 티엔은 생각했다. 아마 그날의 그 생각이 바로 티엔이 자각한 첫 호감이었을 것이다.
마틴은 여러 지표를 번갈아 보며 재단의 재정상황을 걱정스럽게 살펴보고 있었다. 제때 팔리지 않은 물건들을 손해를 봐가며 빠르게 자금으로 바꾸어야 할지. 혹은 시간을 들여서라도 물건의 가치를 지켜야 할지.
시대가 빠르게 변하는 만큼 새로운 물건을 들여오는 데엔 위험이 따르고, 가끔은 재단이 그리 좋은 판단을 내리지 못할 때가 있었다.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 지금은 그런 작은 실수들이 모여 꽤나 뼈아픈 결과로 돌아오곤 한다.
“어쩌면 돈을 만들어내는 능력자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화폐 가치에 타격이 가겠군.”
탄식을 내뱉었던 마틴은 그의 화를 부추기는 목소리의 방향으로 눈을 흘겼다. 그러나 이쪽을 돌아보지 않는 티엔에게 그의 감정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데이트란 대부분이 이런 식이다. 각자의 일을 하고, 그 사이에 끼워지는 드문 대화는 그들의 사이가 멀어지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때로는 그 반대의 작용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하랑-경미한 손목 부상. 안정 권고. 잔나비 사용 시의 안정성. 영을 다스리는 훈련 위주로 전환.
8월 20일 월요일
마틴 챌피의 방문.
“잠깐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바람에 너울거리는 엷은 비의 장막이 도시 전체를 감싼 어느 날이었다. 울적한 날씨에 익숙한 영국인들은 늘 그렇듯 우중충한 얼굴을 하고선 태연하게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날씨를 감상할 여유 따위가 없는 티엔도 그렇기는 마찬가지였다.
마틴은 문가부터 높이 쌓여있는 서류며 책무더기를 지나 티엔의 앞에 서있었다. 이 넓지 못한 공간이 지금으로서는 그랑플람 재단 아시아지부에게 할당된 전부다. 불공평함을 논하기엔 재단의 사정이 그리 좋지 못하고, 또 어떤 면에서 이 상황은 별다른 협업을 원하지 않는 티엔의 의향이 반영된 결과기도 했다.
마틴의 방문은 티엔에게 그리 달가울 수 없었다. 일단 그의 용건은 무역과 관련된 중국 측과의 교류에 티엔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현재 재단에 속해있는 유일한 중국인, 나아가 유이한 아시아 출신의 그에게는 간혹 이런 식의 성가신 요청이 들어온다. 그러나 한없이 딱딱한 기공사에게 직접 말을 전하기 어려워하는 몇몇 후원자들은 다른 누군가를 사자로 삼아 그에게 보내오곤 했다. 대개는 타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 누군가, 이를테면 지금의 마틴처럼 말이다.
인간관계라는 복잡한 그물망에서 티엔은 신경의 스위치를 내려버린 지 오래지만, 그렇다고 적대적인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무디진 못했다. 그걸 안다고 해서 언행에 큰 변화가 생기지는 않는다. 단지 그 상대의 존재를 전보다 더욱 외면하고자 할 뿐. 이런 안일함은 티엔이 자신에게 용납하는 몇 안 되는 나태라고 할 수 있었다.
저 독심술사는 첫 대면에서부터 티엔을 좋게 보지 않았다. 그 뒤 그의 독심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고선 더더욱. 그럼에도 그는 업무와 관련된 일이라면 티엔을 착실하게 상대할 줄 알았고, 티엔은 마틴의 그런 점을 꽤 높이 사고 있었다. 용건이 끝난 후 그의 돌변하는 태도를 알기만 한다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멸, 시기, 혹은 다른 무언가. 제대로 된 명칭을 알 수 없는 마틴의 악감정에 티엔은 늘 그래왔듯 마틴 챌피라는 존재 자체를 잊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꾸준히 대면할 수밖에 없는 그이기에 간혹 무용하게 감정을 소모하는 상대를 약간 기이하게 여긴 적은 있었다.
그랬던 마틴이 개인적인 용건을 입에 담은 건 공적인 용무가 끝나 그 이상 티엔을 시야에 둘 이유가 없는 시점이었다. 그들 사이에 개인적 친분 따위가 있을 리 없기에 티엔은 마인드리더가 하려는 말을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알아야 하는 일인가?”
“아니요.”
티엔의 물음에는 꽤나 시원스러운 답변이 돌아왔다. 이 견고한 무인은 생각지 못한 순간에 쓸데없이 시간을 빼앗기는 것을 혐오하다시피 하며 그와 관련된 재단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런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 단칼에 거절당할 가능성이 한없이 높은 요청을 굳이 꺼낼 이유가 무엇인가.
남자가 가장 먼저 떠올린 가능성은 마틴의 심술이었다. 공적이지 않은, 그러나 중요한 이야기를 자신이 흘려듣도록 하는 식의. 그러나 건네받은 자료를 훑던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인 마틴의 표정은 그런 치졸한 수작을 부리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진중함 뒤로 피로가 비쳐 보이는 그의 이런 얼굴을 티엔은 지금껏 목격한 적이 없다.
흘끗 바라본 시계는 3시 12분을 가리키고, 스카우터는 이미 충분히 많은 시간을 뺏겼다. 그가 내릴 결론은 본디 정해져 있어야 했다.
“짧게 끝낸다면.”
티엔은 떠넘겨진 서류를 갈무리하며 질문에 대답했다. 그답지 않은 변덕이었다. 이때 무엇인지도 모를 말을 듣지 않은 채 넘어갔다면 그는 저 어트랙티브의 이상한 태도 따위를 금세 잊고 말았을 테고, 따라서 이 간단한 답변은 그에게 있어 막중한 실수가 되고 말았다.
“그럴 거예요. 복잡한 이야기도 아니니까. 티엔씨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내용이기도 하고요.”
역시나 내용을 파악할 수조차 없는 서론에 티엔은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미 동의를 구한 이야기를 멈출 생각은 없는지 마틴은 그의 허리께까지 쌓인 박스와 종이뭉치에 신경을 집중하며 긴장을 풀고자 노력하는 것 같았다.
“저는…… 두 달 전쯤에 죽으려 했어요. 딱 6월의 이맘때였겠네요.”
평소와 달리 상대의 눈이 아닌 다른 어딘가를 비껴보고 있는 마틴은, 그의 말대로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기묘한 이야기를 꺼냈다.
“보시다시피 실패했지만요. 잘 됐죠, 그래요. 앞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순 없겠지만. 그러려고 노력은 해보려고요. 그리고 다시는 시도하지 않을 거예요.”
단정한 입술이 느릿하게 토해내는 말들은 거의 의무적으로 들렸다. 티엔은 어떤 타인의 불행에 대한 무덤덤함과 이 상황에 관한 혼란을 동시에 경험하며 이어지는 청년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마틴이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인 듯 그는 들이마셨던 숨을 천천히 내뱉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틴은 이전에 어떤 식으로든 목숨을 끊으려 시도했고, 실패했다. 그런 그는 꽤 긴 시간이 지난 오늘 과거와 앞으로의 결심을 그와 아무런 친분이 없던 티엔에게 전한 것이다.
재단의 유이한 동양인은 영국인들에게 이런 대화가 일반적인가를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유추해보았다. 딱딱한 유머(라고 설명 받았던 몇 가지 상황들)나 쓸데없는 엄숙함 이상으로 그가 아직 파악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지 모른다. 평범하게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 이런 우중충한 도시라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허나 그 상대가 자신이어야 했던 이유를 그는 좀처럼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런 걸 왜 내게 말하는 거지?”
티엔이 꺼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질문에 마틴은 가장 솔직하고도 이기적인 대답을 내놓는다.
“그냥……. 누군가에게는 말하고 싶었어요. 이왕이면 능력이 통하지 않고 제 생사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사람에게. 그 외에 바라는 건 없습니다.”
톡. 톡. 펜을 쥐는 자리에 굳은살이 박여 있는 마틴의 손가락은 그의 곁에 놓은 종이뭉치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의 눈길 또한 티엔을 마주보지 못하는 채다.
상대가 누구라도 좋았으나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고. 사전경고가 있었고 말을 꺼내도 되는가에 대한 허락마저 구했으므로 티엔은 괜한 시간을 뺏었다 그를 탓할 수도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군. 이야기는 그게 다인가?”
“네.”
최소한의 예의가 마음에 걸려 말을 마치자마자 등 돌려 떠나지 못했던 마틴은 그제서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이만큼의 무덤덤함이라면 마틴이 바라마지 않던 반응이다.
“……불편을 끼쳐 죄송합니다. 일에 대해서도 이야기는 끝났고……. 이걸로 충분할 것 같네요. 그럼 이만.”
긴장을 묻어나던 손을 거둬들인 마틴이 떠나려는 기색을 보이자 티엔은 문득 떠오른 말을 덧붙였다.
“그 이야기는 비밀에 부쳐두지.”
그는 내뱉은 문장이 선심을 쓰는 어조가 되었음을 약간 후회했다. 애초에 새어나갈 것을 걱정했다면 털어놓지 말았어야 하는 이야기다. 마틴이 굳이 언급하지 않은 조건 중에는 아마 과묵함, 또는 지극히 좁은 인간관계 등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예. 고맙군요.”
잠깐 동안 잡다한 물건을 허물어뜨리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고서, 곧 아시아 지부라는 명패를 단 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약함을 멋대로 드러냈던 금발의 청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티엔이 있는 공간에서부터 사라져 있었다.
조용해진 사무실에서 티엔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그가 요청 받은 일들을 지체 없이 완벽하게 처리해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8월 21일 화요일
티엔은 스스로 죽음을 결심하는 자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자신의 살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탓도 있지만 가장 주요한 이유는 역시 지금까지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우연히 먼발치에서 발견한 마틴의 모습은 여느 때와 같이 밝고 건강해 보였다. 화사한 미소며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태도.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청년은 분명 속내를 터놓는 즉시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청년은 굳이 그리 가깝지도 않은 악연을 골라 가장 어두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티엔은 그 점에 관해 깊이 생각할수록 자신이 무시당했는지 혹은 과대평가를 받았는가를 구분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8월 22일 수요일
이하랑-완치 판정.
8월 23일 목요일.
8월 24일 금요일
티엔은 잠깐 생각에 빠질 때면 자신의 눈길이 특정한 누군가에게로 향해있는 걸 깨달았다. 그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는 그와 달리 마틴은 전과 달라진 점이 눈에 띄지 않는다. 다른 이들을 향하던 미소가 티엔을 향할 때면 굳어버린다거나, 애초에 눈길을 거의 그의 쪽으로 돌리지 않는다거나.
티엔이 가진 희미한 기억에 따르면 2달 전의 마틴도 지금과 그리 다를 바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엔가 집으로 돌아가 죽으려는 생각을 했을 테고, 시도까지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서 태연한 척 재단에 얼굴을 비추었으리라.
역시나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건 티엔의 관심사 밖에 있어야 할 일이었다.
8월 25일 토요일.
8월 26일 일요일.
8월 27일 월요일
이 날 티엔은 능력에 대한 조사의 일환으로 지하연합의 영역을 방문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다는 소식에 살 것 같다는 반응을 보인 제자를 생각해서라도 그는 가능한 한 빠르게 돌아가고자 했으나, 미리 연락을 취했음에도 해당 능력자-전투에 참가한다는 사실이 놀랍도록 어린 구성원이다-를 보이기 꺼려하는 연합원의 제지로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본래부터 환영받지 못할 용건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는 바지만 틀어진 계획에 티엔의 심기는 결코 편할 수 없다. 물론 그는 일정이 지연된 정확한 원인이 어린 능력자의 변덕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채다.
무료한 대기의 시간을 보내며 무인은 주변의 풍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연합은 넓은 세력권을 가지고 있으며 겉으로 보기엔 일반적인 거주구와 큰 차이가 없으므로 그는 시야에 들어오는 극히 일부만으론 별다른 정보를 알아낼 수 없다. 그러나 이국의, 그것도 다수의 능력자로 이루어진 공동체라는 사실만으로 티엔에게 생소한 느낌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기다림이 지루한 건 안내역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그랑플람의 별난 스카우터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대화를 이어갈 의지가 보이지 않는, 혹은 충분히 그렇게 느껴질 만한 대답을 듣고서도 그에게 불쾌한 기색이 없는 이유는 연합 내에도 꽤나 다양한 종류의 인간상이 있는 덕분이다.
가벼운 대화에서 짧은 대답을 내놓는 역을 맡고 있던 티엔은 문득 머리 한구석에 떠오른 질문을 그대로 내뱉었다. 마틴 챌피를 알고 있느냐고. 물론 재단 안팎으로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그를 모르는 능력자는 포트레너드에 흔치 않을 것이다.
자리에 없는 제3자에 관한 피상적인 이야기가 오가고, 상대가 챌피에 관해 알고 있는 항목이 자신보다 나을 게 없다는 걸 확인한 티엔은 곧 대화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친절하다. 적을 만들지 않는다. 재단에 헌신한다. 두 번째 사항에 관하여 티엔은 몇 가지 이견이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단언하기 어렵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능력을 생각하면 대단하지.”
그러나 덧붙여진 한 마디는 그에게 꽤 뜻밖의 충격을 주었다.
능력에 비해서. 지금껏 그런 적은 없지만 만일 티엔 본인이 이 말을 듣는다면 그건 아마 전혀 다른 맥락으로, 예컨대 아직까지 살아남았다는 점 등을 든 발언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능력이 가진 가장 큰 패널티는 그의 목숨과 관련되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마틴 챌피는 단지 이타적인 태도와 훌륭한 인간관계를 가진 것만으로 놀랍다는 반응을 얻는다.
어쩌면 도무지 상상할 수 없던 마틴의 속내는 이런 시선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티엔은 약간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8월 28일 화요일.
8월 29일 수요일.
8월 30일 목요일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도 되겠나?”
전과는 다른 용건, 다른 장소에서 두 사람은 단 둘만의 대화를 가졌다. 이번에는 티엔이 그의 사무실을 들렸고, 공적인 용무가 막 끝난 참이었다.
그는 마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챌피와 달리 그는 타인에의 배려가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당신이 살기를 바란다.”
개인적이고, 또 마틴과 큰 관련은 없는 이야기다. 그는 마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고 싶었으나 불행히도 그의 능력은 티엔에게 통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으면서도 그의 말은 마틴이 결코 기대하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어째서요? 당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 텐데.
떠오르는 싸늘한 대꾸를 그대로 입에 옮길 수는 없다. 그리고 이번에는 예의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었다.
생명은 소중하니까, 혹은 주변 사람들이 아파할 테니까. 그런 소리가 그의 입에서 나온다면 실망할 것 같았다. 실망이라니, 애초에 어떤 식으로든 기대가 있었던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던 마틴은 그의 말에 어떤 식으로든 대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조금 긴 침묵이 흐르고, 서류철의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는 마틴의 손길이 멈췄을 때, 티엔은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마워요. 아니, 사실 별로 고맙지는 않지만.”
마틴은 작게 한숨을 내쉰다. 그도 자신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아닐 테지만, 그 짧은 말 한 마디는 무겁게 가슴 속에 내려앉는다. 불편하면서, 어딘가 간지럽고, 기묘한 기분이었다.
“기억해둘게요.”
작은 목소리의 대답을 끝으로 마틴은 고개를 돌렸다. 이전에 티엔이 그랬듯 꽤 오랜 시간 그는 긴 고민을 하게 될 예정이었다.
제가 정말로 케이크버스 회지를 내버렸습니다. 벨져릭 연성을 많이 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덜컥 내버린 건 아닐까 걱정이네요. 웹연성을 하려고 플롯을 짜다보니 책으로 내고 싶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원작에서부터 언밸런스한 둘의 관계가 여러모로 좋다고 생각합니다.
2.
책의 수위에 대해 고민했었는데, 식인 등의 묘사는 원래부터 넣지 않을 예정이었고 지금까지 봐온 정발 서적들을 두고 생각해보니 굳이 제한을 걸 필요는 없을 것 같았어요.
3.
제 안의 릭과 벨져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토끼와 앨리스.
벨져는 릭을 통해서 말 그대로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됐을 것 같아요.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고, 이런 생활이 있고, 덤으로 이런저런 장소들이 있고 뭐 그런 것들. 본편에서는 포크로서의 자각이 시작이었지만요. 반면에 릭에게 벨져는 지금까지 봐온 중에서 꽤 특이할 뿐인 사람이다가 점점 특별한 존재가 되었을 것 같고. 확신이 생긴 건 아마 벨져가 포크라는 걸 밝혔을 때? 사실 그걸 굳이 밝힐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4.
왠지 모르게 늘어난 이글의 비중. 처음부터 이런저런 연결고리가 될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쓰다보니 비중이 생각보다 많아져 놀랐습니다. 분량이나 이야기 흐름 상 다무와 이글이 대화하는 장면은 넣지 못했는데 그것도 들어갔으면 거의 삼주인공 체제가 되어버렸을 수도요.
사실 과거회상에서 비밀을 먼저 눈치채고 다무에게 알렸던 사람은 이글. 이래저래 직접 결단을 내리진 않지만 타인의 선택에 영향을 주는 모습으로 쓰고 싶었습니다.
5.
잘린 내용 중엔 벨져가 버티지 못하고 아주 살짝 무력을 쓰는 장면도 있었는데, 릭의 (참아줘서) 고맙다는 말은 이때 들어갈 예정이었어요. 그 상황에 그 얘길 들으면 벨져는 아마 세 배쯤 화났을 것.
어쨌거나 일단 무너지면 바로 모든 게 끝나지 않을까 싶어 그 내용은 빠지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모습에서도 무너지기 직전까진 아니었을 것으로.
6.
반지..... 원래는 미리 전해줬어야 했는데 쓰다보니 그러질 못했네요. 릭은 모르지만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라는 연결고리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릭의 눈동자 색을 닮은 에메랄드가 박혔을 것 같아요. 언젠간 전해주게 될 수도 있겠죠! 릭도 기뻐할 거예요.
나름대로 시리어스라고 싸본 회지인데 어땠을지 잘 모르겠네요'///')> 아쉬운 점도 있고 마음에 드는 점도 있고. 모쪼록 읽어주시는 분들이 즐거우셨다면 좋겠습니다. 행복한 두 사람을 기원하며.
이번 여름.... 너무나 더웠지요..... 거의 절반 정도 분량은 더위 먹은 채로 쓴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잘 써지지 않아서 굉장히 미뤄버렸는데 미친 짓이었습니다. 과거의 연초 대체 무슨 짓을? 마무리가 많이 급해서 죄송합니다 구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2.
회지의 설정이나 기본 플롯 자체는 거의 반년 전에 콘티로 써뒀었지요. 첫회지 후보 중 하나. 이래저래 뒤엎어서 뼈대나 몇몇 에피소드만 남았지만서도. 설정을 짜게 된 계기는 오메가버스의 각인 관련 리트윗이었는데, 티엔이 마틴한테 귀속되는 게 보고 싶다!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첫 콘티에선 대강 회지 내 세계보다 몇십년 뒤? 같은 느낌으로 정부에서 의존형을 따로 관리도 하고 적극적으로 메이트 모집도 하고 있었어요. 마틴은 부모님이 그렇게 이어진 케이스여서 본인도 원래부터 의존형인 배우자를 맞을 생각이 있었던 것. 첫만남은 본편과 비슷했는데 콘티에서의 마틴은 스스로 반했다는 자각이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금방 가까워져서 달달...했을 예정인데 이래저래 뒤엎어서 그만......(머리박음
3.
오리지널 캐릭터를 조금 넣었는데.....(식은땀) 왠지 관련 얘기가 나오면 부끄러워 죽을 것 같습니다.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집어넣긴 했지만. 분량이 적은 걔는 특히나요.
그 뫄는 콘티에선 티엔의 제자 중에 하나고 강제로 형질을 잃은 의존형이었는데, 설정은 달라도 에피소드 자체는 꼭 넣고 싶었어요. 급하게 써서 제일 아쉬운 부분. 형질을 잃게 만드는 이야기는 나중에 혹시라도 이후 이야기를 쓰게 되면 다루고 싶습니다.
4.
기존 사퍼캐들도 더 많이 넣고 싶었는데 이래저래 등장하지 못하게 됐네요. 생각해뒀던 건 루이스와 트리비아, 타라 정도. 루이스랑 마틴은 왠지 대화를 시키고 싶어요. 루이스가 했던 말에서 힌트를 얻은 마틴이 후반부의 의문을 푸는 그런 전개였는데 분량이라든가 여러가지 문제로 그만.
5.
전부터 좀 길게 뭔가를 쓰면 떡밥을 잔뜩 넣어보고 싶다~ 했는데 나름.... 소원을.... 성취한 것도 같고..... 그렇군요..... 네......
둘이 사귀는 얘기로 바로 넘어가다가 미처 해결 못하고 넘어간 게 있었는데, 둘이 어찌어찌 해결은 했습니다. 아마도. 좀 싸웠을지도 모르고 대화로 잘 풀었을지도 모르고.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6.
티엔이 개? 강아지? 같다는 감상을 들었는데 그렇군요 그럴 수밖에 없군요 이것은 빤히 쳐다보면서 졸졸 따라다니는 강아지......(우람) 본편에서도 비슷한 표현을 쓰기도 했고. 쓰면서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구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표지에 코팅을 잊어서 많이 팔랑거리고 흠집도 잘 나고mm) 면목 없습니다. 언젠가 여유가 된다면 내용도 좀 더 붙이고 표지도 빳빳하게 재판해서 교환해드리고 싶네요.......
블라인드 사이로 오전의 부드러운 햇살이 내려앉았다. 모처럼 맑게 갠 하늘이 내리는 은총을 담뿍 받는 창틀의 제라늄은 물기를 머금은 붉은 꽃을 한껏 뽐내고, 그 주변에 놓인 일관되지 않은 취향의 장식물 사이로는 빛의 부스러기처럼 보이는 티끌이 천천히 부유하고 있다.
책장에 가지런히 정리되려다 만듯한 책들, 계절에 맞지 않는 작은 크리스마스 장식, 이런저런 메모가 표시된 수수한 벽걸이 달력. 그렇게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이는 한 장면의 구석에는 금발의 남성이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책은 이미 여러 번 읽혀 페이지의 빛이 바래고 모서리가 매끈하게 닳아있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는 내용임에도 문장의 구석구석을 훑는 남자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 그만큼 책의 내용이나 그 책 자체가 그에게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탓이다.
약간 제멋대로의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걸터앉아있는 그는, 근방에서 성실하고 친절하기로 소문난 청년 마틴 챌피다. 그가 주말의 한가한 시간을 틈타 다시 한 번 펴든 책의 이름은 <능력의 연대기>. 약간 딱딱한 문체가 흠이라면 흠이지만 약 100년에 달하는 사이퍼의 역사, 그 중에서도 영국에서의 능력 관련 사건들을 훌륭하게 간추려 담아낸 서적이다.
거대일식과 환영의 도시로 시작된 갈등. 정부에 의한 탄압, 능력자 단체 간의 항쟁, 나아가 전쟁이라 불릴 만한 여러 사건들이 지나고─ 각고의 노력 끝에 현재의 세계는 불균형한 안정을 찾았노라고 책은 말하고 있다. 여전히 능력에 관해서는 나날이 새로운 문제가 터져 나와 어떤 식으로든 논쟁이 끊이지 않는 주제였지만 말이다.
마틴이 <능력의 연대기>를 꺼내들 때는 보통 두 가지의 경우였다. 자신이 하는 일에 회의감을 느끼거나, 단순히 무언가를 읽고 싶은데 그 책이 손에 닿는 거리에 있거나.
그의 눈길이 막 2차 능력자 전쟁이라는 소제목에 닿은 바로 그때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집안의 부드러운 침묵을 깨트렸다. 화들짝 고개를 드는 몸짓에 그의 주위를 맴돌던 티끌이 빛의 선을 벗어나 어딘가 먼 곳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런 시간에 연락을 해올 사람이 있던가.
마틴은 읽고 있던 페이지 사이에 가름끈을 끼워 넣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게 기지개를 펴자 몸 곳곳에서 뿌득이는 소리가 나고, 멀지 않은 곳에 놓인 수화기에 마틴이 손을 뻗을 즈음엔 전화벨이 세 번쯤 울린 뒤였다.
“여보세요?”
「마틴 챌피씨 되십니까?」
수화기 너머에서는 낯선 여성의 침착한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네, 제가 챌피입니다만. 누구시죠?”
「저는 능력발달연구소 소속의 아넷 도슨입니다. 브랜든 터너씨의 소개를 받고 연락을 드리게 되었어요.」
브랜든. 꽤 오랜만에 듣는 인명이다. 근래에 들어서는 제대로 된 연락을 해본 적도 없는 이가 그를 누군가에게 소개했다니, 마틴에게는 좋지 않은 예감이 스쳤다.
「챌피씨는 높은 등급의 마인드리더시죠. 저희 연구소에서 간단한 협력을 부탁드리고 싶은데, 귀중한 시간을 내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소정의…」
능력. 분명 마틴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능력을 알고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는 대개 좋은 식으로 풀릴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죄송합니다만.”
상대가 이야기를 더 진행하기 전, 마틴은 빠르게 그녀의 말과 말 사이에 끼어드는데 성공했다. 지금은 주말 오전이고, 그는 이 소중한 시간을 쓸데없는 설득으로 낭비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저는 타인의 요청으로 능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규정에 대해서는 알고 계실 텐데요.”
잠깐의 침묵이 지나갔다. 그 연구소라는 곳에 이렇게나 빠른 거절에 대한 매뉴얼은 미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마틴이 더욱 단호한 거절을 해야 할지, 아니면 곧바로 통화를 끝마쳐야 하는지 약간 망설이고 있던 사이 이 여성 연구원은 이 상황에 적절한 문장을 조합해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오해를 드린 것 같군요, 사과드립니다. 저희는 정보를 빼내거나 기억을 조작하는 일을 부탁드리는 게 아니에요. 그보다는, 오히려 반대에 가까울 것 같네요.」
남의 마음을 읽는 것과 반대? 마틴은 그 말의 논지를 짚어낼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는 마틴이 이야기를 끝까지 들을 만큼의 흥미를 끌어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챌피씨의 능력이 저희 측 사람에게 통하는지. 알고 싶은 사항은 그것뿐입니다.」
***
마틴은 태양이 높이 떠있는 시간을 피해 다소 한가한 대중교통을 능숙하게 갈아탔다. 평소라면 그도 이런 주말 시간에 공원이나 영화관이 아닌 곳을 향해 떠날 예정 따위는 만들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마틴이 시설 근처에 도착했을 때 통화상대였던 아넷은 미리 마중을 나와 있었다. 연구원이라는 직업에서 하얀 가운을 연상했던 것과 달리 그녀는 단정한 세미 정장 차림에 소속을 알리는 명찰을 소지하고 있었다.
“거리가 멀지 않은 곳이어서 다행이네요.”
“챌피씨께 우선적으로 연락을 드렸던 이유 중의 하나죠.”
목소리에서 받았던 인상과 똑같이 딱딱하고 사무적인 표정의 아넷은 마틴에게 방문자용 명찰을 건넸다. 면회용. 그녀는 먼저 몇 가지 주의사항을 알렸고, 결론적으로는 그건 멋대로 시설 내부를 돌아다니지 말라는 뜻의 당부로 귀결될 수 있었다.
오전의 통화에서 이어진 설명에 따르면 사실 마틴의 능력을 빌려야 하는 사유는 그들의 연구 주제와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어떤 연구를 진행하던 도중 우연히 정신계열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 희귀한 능력자를 발견했고, 혹여 능력의 등급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외부의 인력을 빌려오게 되었다고.
“능력의 상성에 대한 연구는 늘 흥미로웠죠. 전에는 그 주제로 논문을 발표한 적도 있었죠.”
그리고 마틴이 반쯤 확신하건데, 굳이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마틴의 도움까지 빌리게 된 데에는 이 여성 본인의 흥미가 다소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정식 절차를 통해 특정 능력자를 요청하는 건 여러모로 귀찮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때문에 그녀는 그런 수고를 덜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마틴의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물론 다른 이유였다면 단칼에 부탁을 거절했을 마틴이지만 자신의 능력이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흥미를 느낀 그는 연구를 위해 격리된 대상을 면회한다는 핑계로 이곳에 와있었다.
심지어 그 대상은 능력약화나 무효 등의 능력을 가진 게 아니라는 설명이 마틴의 주의를 끌었다. 상대를 가리지 않는 보편성과 특수성 탓에 마틴의 능력에는 ‘위험’이라는 딱지가 붙어있다. 만일 정말로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면 그건 마틴에게 나름의 위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아넷을 따라 몇 개인가의 복도와 계단을 지난 후, 어느 금속으로 된 문 안으로 들어설 때 마틴은 곁에 붙어있는 ‘격리 구역’이라는 표지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구실이라 생각했던 이야기가 완전히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마틴의 시선을 눈치 챈 아넷은 다소 민감할지도 모르는 주제에 관련해 처음으로 입을 뗐다.
“혹시 ‘의존형’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과연. 마틴은 그에게 왜 격리가 필요한가를 단번에 이해했다. 약간 생소한 그 단어를 마틴은 얼마 전 보았던 신문의 능력면에 실린 기사로 접해본 적이 있었다. 오직 능력자 사이에서 드물게 발현한다는 특질 중 하나. 만일 더 이전에, 그러니까 빅토리아 선언이 효력을 발휘하던 시절 같은 때에 발견되었다면 능력자 탄압의 좋은 핑계가 되었을 만한 이야기였다.
“네. 꽤 논란이 될 만한 주제더군요.”
마틴은 그가 읽었던 기사의 논조를 떠올리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사이퍼들 중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이들은 적지 않지만 대개는 능력 탓에 조성된 불안정한 환경 등을 원인으로 본다. 주위의 기대나 두려움, 또 가끔은 강력한 능력을 제한당하는 반발심까지.
그런데 얼마 전 발표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들 중 일부는 실제로 유전자 레벨에서 반사회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있어온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발견이죠. 실제로 존재하는 현상을 외면할 수도 없으니까요.”
아넷의 담담한 말과 그녀의 단화가 바닥에서 타박이는 소리를 들으며 마틴은 생각에 잠겼다.
의존형은, 능력자 중에서도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그들은 어떤 이유에선가 다른 능력자에게 강한 끌림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의존의 상대와 오랫동안 떨어져 있게 될 경우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상태까지 치닫게 된다고. 그리고 그 비정상적인 집착의 대상은 거의 무작위로 선택된다고 한다. 실로 까다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상에게 이미 배우자나 연인이 있거나, 단순히 의존형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를 거부하거나, 그런 식의 여러 가지 이유로 의존형 인자를 가진 이들은 공격성을 띄게 될 가능성마저 있다. 또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비능력자보다 까다로운 상대기 때문에 의존형의 그런 특성은 다수에게 그리고 특히 의존형이 각인하고 따르는 상대에게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었다.
“저희는 그 의존형을 연구하고 있는 중인데, 지금 찾아갈 그는 꽤 특이한 케이스죠. 일단 아시아 출신이라는 점부터 들 수 있겠네요.”
아넷은 자신의 사원증으로 보안장치의 잠금을 풀며 설명을 계속했다.
“영국에는 잠깐 체류할 목적으로 입국했던 중국인 남성이고, 능력 분류는 미확인, 무작위로 실시했던 검사에서 의존형 인자가 발견되었습니다. 처음 내려진 결정은 강제귀국이었지만 저희는 당국과 그 본인을 설득할 수 있었어요. 마침 동양인 능력자에 대한 정보는 부족했고 그에겐 아직 각인상대가 없다는 점도 중요했죠. 그렇지 않았다면 저희는 그를 가둬두는 데 더해서 약물에 흠뻑 절여둬야 했을 테니까요. 다른 가엾은 분들과 함께 말이에요.”
누군가의 천성이 위험하기 때문에, 아직 저지른 적이 없는 범죄를 막기 위한 격리. 지난 100년간 능력자들이 박해 받았던 것과 똑같은 논리다. 늘 친절하다거나 상냥하다는 평가를 받는 마틴 챌피지만 그는 그런 식의 발언에 대해서는 유한 태도를 보이기가 힘들었다.
“위험한 능력자들을 모두 격리해야 한다는 주장과 비슷하게 들리네요. 과거에도 거의 비슷한 시설이 있기는 했었죠.”
비꼬는 투의 그의 말뜻을 짚어낸 아넷은 사무적인 미소와 함께 그 말을 맞받아친다.
“위험한 존재를 대중으로부터 분리하는 건 사회의 의무죠. 과거에 문제가 됐던 건 단순히 강력한 능력자들을 일괄적으로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챌피씨가 말씀하고 싶으신 건 앤더슨 빌 조약이겠죠? 물론 저도 안나 드로스트의 회고록을 감명 깊게 읽었답니다.”
그녀가 말하는 회고록이란 앤더슨 빌 조약이 효력을 가지던 당시 가혹했던 미 정부의 능력자 박해를 생생하게 담아낸 글이다.
“하지만 이 케이스는 그런 것과 달라요, 챌피씨. 원치 않게 타인을 해치고 괴로워하게 내버려두는 건 그들을 위한 게 아니죠. 그리고 저희의 연구는 그분들을 돕기 위해 있습니다.”
“아, 그래서 그분을 돕기 위해서 왜 마인드리딩이 필요했는지는 꽤 궁금하네요. 아직 남을 해칠만한 이유도 없는 사람에게요.”
마틴이 마음에 걸렸던 점을 그대로 쏘아붙이자 아넷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굳어있던 표정을 밝게 바꾸었다.
“오, 모든 리더가 챌피씨처럼 분명한 문장을 읽어낼 수 있는 건 아니죠. 저희는 간단한 정신 감별을 요청했을 뿐입니다. 대상도 동의한 사항이었죠……. 그런데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어요. 아마 그의 능력과 관련이 있는 것 같더군요. 그리고 사실, 그 사람에게 뭔가를 강요하는 게 저희에게 가능할지는 모르겠네요.”
그 즈음 마틴은 아넷의 안내로 커다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의 다른 방을 관찰할 수 있는 작은 공간에 도착했다.
유리창 너머에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한 사람은 아마도 연구원 중 하나일 법한, 단정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지적인 안경을 낀 갈색머리의 남자. 하지만 그의 존재는 그보다 편한 차림을 한 동양인 남성의 존재에 밀려 거의 느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건장한 신체며 특이한 빛깔로 물들어 있는 양 팔. 조용한 위압감을 주는 그의 모습에서 마틴은 아넷이 그에 관해 덧붙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상은 왼편에 있는 남성입니다. 내용에 대해선 함구하셔도 문제없으니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알려주세요.”
“여기서 말인가요?”
아넷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비공식적이라지만 생각보다도 간단한 절차였다.
대화의 내용을 들을 수는 없지만 유리창 너머의 그들은 이쪽 편을 볼 수 없는 게 틀림없다. 유리창은 분명 그들에게 보일만한 각도에 있었음에도 두 사람은 마틴과 아넷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자신의 능력까지 더해 방금까지 옹호하고자 했던 사람을 이중으로 관음하는 느낌에 마틴은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지만, 이미 약속된 사항을 빠르게 끝낼 수 있다면 이 편이 나을 거라는 생각에 따로 의견을 표하지는 않았다.
잠깐의 심호흡. 마틴은 억누르고 있던 능력을 풀어헤쳤다. 그건 그에게 숨을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냉철한 얼굴을 하고서 짙은 호기심에 차있는 아넷의 생각이나, 별 의미 없는 상담보다는 편안한 집으로 돌아가길 희망하는 연구원의 마음. 그러나 그에게 들려야 했을 다른 한 사람분의 소리는 놀라울 만치의 공백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들리지 않아요.”
“더 가까이 가거나, 접촉한다면 뭔가 달라질까요?”
아넷의 물음에 마틴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능력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게 아니었다.
예전에 마틴이 능력약화를 경험했을 때는 자신의 능력이 지워진다는 선명한 감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읽히지 않는다, 는 사실을 깨닫고서 마틴은 그에게로 점점 더 능력을 집중했다. 그러나 마틴은 저 검은머리 남성에게 모든 능력을 향할 때조차 마치 안개가 낀 창밖을 바라보는 듯한 감각밖에 느낄 수가 없었다.
놀라움도 잠시. 마틴은 다음 순간 진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건 능력이 통하지 않는 것과는 상관없는 어떤 이유 때문이었다.
유리창 너머의 남자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한 없이 검은 눈으로 마틴의 방향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시선에 마틴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 남자의 입이 움직였다. 그의 눈길은 여전히 같은 방향에 고정되어 있는 채였다.
“……저를 볼 수 있는 건가요?”
“아뇨. 저편에서는 여기를 볼 수 없어요.”
실제로 아넷은 마틴과 비슷할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또 인가?’
‘이런 건 통하지 않는다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남자와 함께 있는 연구원의 마음을 통해 마틴은 그의 말을 또렷하게 전해 들었다. 남자의 표정이나 연구원이 느끼는 감정에 따르면 그는 화를 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마틴은 그 잠깐의 사이 자신의 맥박이 세차게 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멋대로 침입한 주제에 이름도 밝히지 않다니 무례하다. 나는 이 홀든 가의 차남 벨져 홀든.
홀든 가문에는 다이무스와 이글 말고 또 한 명의 아들이 있어. 가문에서 공개를 꺼려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
-홀든 가문의 관리인 바스티안
Ⅰ.
“워. 형답지 않은 짓이네.”
“그래서 나를 막아서기라도 할 생각이냐? 이글.”
약간의 경박함이 섞인 놀라움의 말투에 낮은 경계의 음성이 의문을 표한다.
으음. 그 질문에 짧은 망설임을 비췄던 이글 홀든은 이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의 형 벨져 홀든은 귀엽지 못한 동생이 말린다고 해서 순순히 들어줄 인물이 아니거니와, 그를 저지하고 싶었다면 지금까지 많은 기회가 있어왔다. 그러니 이제 와서 벨져의 흥을 깨는 건 이글에게도 그리 탐탁지 않은 짓이었다.
“아니, 설마. 그건 다이무스나 하는 짓이지. 저번엔 나한테 편지까지 쥐어줬는데 읽어 볼래? 멋들어지게 써놓은 것 같던데.”
“사양한다. 그리고 다이무스에게는─”
싸늘한 대답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이글은 손사래를 치며 벨져의 공연한 잔소리를 만류했다.
“아─. 당연하지. 그 난리를 치는 꼴을 왜 내가 사서 보겠어.”
그들의 큰형은 가문을 짊어진다는, 또 말썽밖에 일으키지 않는 두 동생의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 덕에 융통성이라곤 찾아볼 수 인물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어떻게든 벨져를 끌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밖에 하지 않을 게 뻔하니 가문의 검은 양이 그와의 연락을 기피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중에 얼굴 보게 되면 알아서 해. 거기까진 내가 못 도와줘.”
그 말에 응해서 들려오는 낮은 코웃음엔 여러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가 다이무스를 다시 만날 기회라는 것이 있기는 할지, 또 과연 벨져 홀든에게 도움이란 것이 필요할 것인지.
두 은발의 사내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장소는 세계수의 둥치 아래 위치한 빌로시티. 포트레너드에서도 가장 어둡고 낙후된 이곳은 음울한 기운과 가스등의 불빛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땅이다. 그렇기에 떳떳치 못한 이들은 종종 비밀을 숨기기 위한 장소로 이곳을 선택했고, 지금 여기서 태연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피를 보는 것으로 희열을 감각하는 이들의 대화도 분명 그 중 한 종류에 속할 것이다.
“어차피 요즘은 회사다 뭐다 일 때문에 정신없는 모양이더라고. 그러게 은행일은 빨리 때려치우라니까 안 듣고.”
연합의 백수라는 멸칭이자 사실적인 애칭을 가진 이글이 근엄한 얼굴의 다이무스를 떠올리며 덧붙인다. 그러나 가벼운 농담을 꺼내며 웃음 짓는 입가와 달리 이글의 눈매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날카로움을 잃은 적이 없었다.
“괜한 소리 말고 본론만 말해라.”
그에 반해 입가에 작은 미소조차 올린 적이 없는 벨져는 명백히 조급해하고 있었다. 시간이 촉박하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다. 이글은 그런 그의 태도를 날카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 어쨌거나. 지금 형이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
도발적인 이글 홀든의 말에, 거의 창백하게까지 느껴지는 피부 위로 매끄러운 은발을 늘어뜨린 수려한 용모의 사내는 오만한 태도로 상대를 마주했다. ‘미쳤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고귀한 자태의 그는 실로 완벽한 위장을 취하고 있다.
“이글, 네가 할 만한 소리는 아닌 것 같다만.”
“난 적어도 적당히 미친 선을 분간할 줄은 안다고. 그런데 형은……”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내게는 불가능하다 이건가?”
상대의 말문을 막아버리는 화법. 물론 평소라면 이글은 이쯤에서 벨져의 말을 적당히 넘어가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이글은 지금 이곳에서 얼굴을 마주한 상대를 그가 지금껏 알아온 작은형의 모습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우리가 다르다는 건 인정해야지, 응? ……아, 이거 하나만 확실히 하자. 내가 믿는 건 형이 아니라 우리 집안이야. 형이 무슨 짓을 벌여도 어떻게든 수습은 될 테니까 말이야.”
이글은 평소의 벨져를 적어도 다이무스만큼은 믿을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어떤 계기로 많은 조사를 해오며 이글은 F로 시작해서 K로 끝나는 불길한 명칭의 족속들을 믿지 않기로 결정한 바가 있다.
과연 그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일주일? 한 달? 알려져 있는 최장기록은 8년이다. 물론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지만. 당연하게도 이글은 굳이 그 상황 속에 형의 모습을 대입해 떠올리지는 않기로 했다.
대답 없는 오만한 이의 모습에 이글은 다시금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만일 벨져 자신조차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있다면 이후에 펼쳐질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뻔한 일이다.
“자, 여기.”
이글은 잊지 않도록 손에 쥐고 있던 꾸러미를 몇 발자국 너머의 거리의 벨져에게 던져주었다. 여기서 그는 어릴 적의 공놀이를 연상했지만 그의 작은형은 그때와 비할 바도 없이 빠른 동작으로 그것을 낚아챘다.
“부탁했던 거. 몰래 가져오느라 고생 좀 했다?”
그런 생색에도 불구하고 감사인사는 없었지만 애초부터 이글은 그런 걸 기대하지 않았다. 그가 빚을 잊지는 않을 테니 이후에 따를 일에 사과해야 할 수고는 줄어들겠지만.
지금으로서 이글에겐 여전히 그의 형이 무사하며, 또 그의 사냥감이 멀쩡하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게 최선일 뿐이었다.
“그럼 잘 지내보라고. 몸조심이나 하고.”
마지막으로 흘끗 뒤를 돌아보는 이글의 시선은 직전까지의 대화상대가 아닌 어두운 골목의 한 구석에 향해있었다.
두려움이나 동요 따위가 없는 기척의 소재. 직접 대면 비슷한 걸 하기로는 처음이지만 이글은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생김새나 능력, 간단한 성격과 지금까지의 행적 같은 것들. 사실 지금 생각하면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대로 모른 척 하는 게 이글 본인에게 가장 편한 길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쓸데없는 간섭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는 신물 나게 경험한데다 어쩌면 그는 이 둘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될 일 따위가 없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어떤 노력을 하든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너무도 높았다.
망할.
이글은 속으로 작게 투덜거리며 가스등의 불빛조차 없는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벨져의 이번 부름은 치밀한 계산 아래 있다. 만일 그 예상이 맞다면 이글은 도저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거래를 하고 있었다.
“갔소?”
이글이 떠나간 곳을 주시하고 있는 벨져의 곁으로 한 인영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홀든가의 두 형제와 달리 부드러운 눈매를 가진 갈색 머리의 그는, 민무늬 티에 코트라는 편한 차림으로 바로 곁에 선 벨져의 화려함과 대비되는 모습을 하고 있다.
공간능력자 릭 톰슨.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이는 그는 사실 모든 일의 핵심이었다. 벨져가 가문을 떠난 이유이자 목표, 그리고 이글이 이 자리에 오게 된 이유.
릭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두 형제의 이야기를 엿듣지 못할 거리에 있었지만 그리 유쾌하지 못한 대화가 오갔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벨져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걱정의 뜻을 드러낸다.
“어차피 네가 거기 있는 걸 알았을 거다.”
벨져는 직전의 대화를 곱씹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 영악한 동생을 일부러 불러들였던 의미가 과연 있을 것인지.
“아, 차라리 다른 곳에 있을 걸 그랬나.”
“내 시야에서 사라질 생각은 말아라.”
머쓱한 웃음을 짓는 릭에게 벨져는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쓸데없는 걱정이며 지금껏 단 한 번을 제외하곤 태연함을 잃은 적 없는 태도까지. 이 여행자에겐 그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는 것을 찾기가 더 힘들다.
“하하. 시야보다는 후각 범위 같은 게 아니었소?”
벨져는 릭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진해지는 충동을 억누르려 검집을 부여잡았다. 조금 더.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인내심을 기르는 훈련을 지겹도록, 실로 넘치도록 받아왔었다.
미칠 듯이 진하고 달콤한 향을 풍기며 태연히 다가오는 릭을 무시하려 부단한 노력을 쏟아 부은 끝에 홀든가의 차남은 겨우 냉철한 목소리를 내뱉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만 돌아간다.”
“좋지, 도련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뜻밖의 호칭에 벨져가 미간을 찡그리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여행자는 넉살 좋게 웃어 보인다.
곧 그들의 발밑에는 푸른 기운이 서린 이질적인 틈새가 생겨나고, 거의 릭의 일방적인 이야기로 이어지는 둘의 대화는 이내 끊겨 골목 사이에는 흔들리는 불빛과 정적만이 남았다.
조용하고 어둡던 욕실에 전등이 환하게 밝혀졌다. 세면대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둥근 거울의 광택 위로 부스스한 검은 머리칼이 비치는가 싶더니, 곧 색이 전혀 다른 양팔이며 잘 단련된 상체근육이 그의 시야 속 거울을 가득 메웠다. 그랑플람의 스카우터 티엔 정의 하루가 막 시작된 참이었다.
티엔은 그대로일 것을 알면서도 그의 쇄골 가까이까지 타고 올라와 있는 반점을 가장 먼저 확인한다. 늘 몸의 변화를 경계해야 했던 그에게는 십 년도 넘은 습관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함, 이상 무. 일상적 절차를 마친 티엔은 이미 거의 사라져 있는 잠기운을 쫓아내기 위해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이 날도 긴 하루가 될 것이고,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다.
적당히 세면을 마친 동양의 무인은 밤새 까슬해진 자리에 크림을 고루 펴 바르곤 그 위에 서늘한 면도날을 가져다 대었다. 꼼꼼한 손놀림이 지나간 곳에는 깔끔한 흔적이 남고, 상처나 빠트리는 부분 없이 면도를 마친 티엔은 고개를 돌려가며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흠. 그가 하는 일이니 지극히 당연할 수밖에 없지만 약간의 기분 좋은 뿌듯함 정도는 있는 법이다.
그 뒤로 간단한 머리정돈을 마친 티엔은 새벽단련을 위해 욕실을 나섰다. 거울에 비춰지던 상이 사라지고, 전등 스위치를 내리는 소리와 함께 욕실에는 다시 어둠과 정적이 내려앉았다.
·또 다른 남자
휘청이며 욕실로 걸어 들어온 금발의 남성이 연신 하품을 내뱉는다. 멍하니 세면대 앞으로 다가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한껏 기지개를 켜보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무거운 채였다. 안락한 침대나 부드러운 잠옷도 그에게 좋은 아침을 가져다주기엔 무리였던 모양이다. 마틴 챌피의 다소 피곤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그리 좋은 컨디션은 아니지만 곧 나아질 것을 알기에 마틴은 조바심내지 않았다. 다 괜찮을 거라는 자기 자신에게의 미소 한 번. 먼저 그는 세면대에 온수와 냉수를 섞어 미지근한 물을 채워 넣고 가볍게 얼굴을 적셨다. 그리곤 누군가에게 선물로 받았던 비누로 꼼꼼하게 거품을 내고, 얼굴 전체에 골고루 문질러 간밤의 찝찝한 느낌을 깨끗하게 지워버렸다. 따듯한 물로 하얀 거품을 헹궈내며 마틴은 비누향이 썩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
푹신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낸 청년은 적당량의 치약을 칫솔 위에 덜어 입가로 가져갔다. 거울 속의 그는 이제 한결 맑은 눈을 하고 있지만 생각은 여전히 혼란한 채였고, 마틴은 이날 만나게 될 사람들과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천천히 정리해보고 있었다. 그 전에는 어떤 식의 만남을 가졌고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몇 가지 사항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긴 생각에 간단한 마침표를 찍은 마틴은 입 안 가득한 포말을 뱉어냈다. 그는 오늘도 재단의 훌륭한 후원자이자 마인드리더였다.
훨씬 개운해진 기분으로 거울을 바라본 마틴은 다양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자, 오늘도 힘내야지. 크게 심호흡한 그는 뒤돌아 세상과 마주할 준비들을 하러 나섰다.
·그 두 사람
“하하.”
어느 가게의 커다란 쇼윈도를 지나던 마틴이 작게 웃음 지었다. 내부에 불이 꺼져 어두운 탓에 그 유리창에 비치고 있는 건 함께 걷고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이었고, 웃음소리를 들은 마틴의 동행은 퉁명스러운 질문을 내뱉었다.
“뭐가 웃긴가.”
“우리가 정말 다르구나 싶어서요.”
서로 다른 머리색과 피부색. 단호한 무표정과 웃음이 내려앉은 부드러운 얼굴이며 동양풍과 서양풍의 복식. 그리고 그 모든 점이 모여 두 사람은 서로 전혀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다른 누군가가 보기에는 이 둘이 어째서 함께 있는지조차 의아하게 생각될 것이 틀림없는 모습이었다.
“그게 불만인가?”
재미있다는 얼굴로 창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는 마틴과 달리 티엔은 딱딱한 응대로 일관했다. 약간 일그러진 티엔의 거울상은 마치 그의 불편한 심기를 나타내듯 옅게 흔들리고 있다.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마틴은 그가 눈치 채지 못할 만큼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때로 이 사람을 대하는 건 그 누구를 상대할 때보다 피곤한 일이 되곤 했다.
“뭐예요, 아까 일 때문에 그래요? 당신도 괜찮다고 했잖아요.”
잊었을 리 없는 그 자신의 발언을 상기시켜 보아도 티엔의 기분은 전혀 나아진 것 같지 않았으나 물론 마틴은 그런 결과를 기대한 적이 없었다. 티엔이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는 그의 질투심 탓에 마틴은 가끔 이날처럼 곤혹을 겪었다. 티엔 본인조차 그런 자신을 당혹스럽게 여기고 있지만 그가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하는 상대가 그걸 달갑게 여길 수 있을 리는 더욱 만무했다.
“엘리엇은 그냥 동료라니까요.”
“그래, 수십 번은 들은 얘기다.”
“그런데 당신이 듣지를 않으니까 문제라고요. 아니에요?”
뭐라고 말을 꺼내려던 티엔은 곧 입을 다물어버렸다. 자신의 행동이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걸 알고는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화는 가라앉지 않고, 이런 일에 평정심을 잃은 데에 다시 한 번 화가 나고, 그야말로 감정의 악순환이다.
“아, 그래요. 집에 가서 얘기하죠, 집에 가서.”
결국 마틴은 시간을 끌기보다는 당장의 일을 뒤로 미루기를 선택하기로 했다. 그의 기분을 보아하니 귀가 후 당장은 대화라는 걸 나눌 시간이 없을 것 같았지만. 이런 날이면 티엔은 마틴과의 관계를 말과는 다른 방식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른데 어째서.
문득 어느 유리면에 또다시 비춰지는 인영을 바라보았던 마틴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다른 그들은 이미 끌린 마음 탓에 서로를 진심으로 미워할 수 없는 것만은 같아서, 둘은 각자의 심란을 안고서도 함께 보폭을 맞춰 걸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