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고 어둡던 욕실에 전등이 환하게 밝혀졌다. 세면대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둥근 거울의 광택 위로 부스스한 검은 머리칼이 비치는가 싶더니, 곧 색이 전혀 다른 양팔이며 잘 단련된 상체근육이 그의 시야 속 거울을 가득 메웠다. 그랑플람의 스카우터 티엔 정의 하루가 막 시작된 참이었다.
티엔은 그대로일 것을 알면서도 그의 쇄골 가까이까지 타고 올라와 있는 반점을 가장 먼저 확인한다. 늘 몸의 변화를 경계해야 했던 그에게는 십 년도 넘은 습관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함, 이상 무. 일상적 절차를 마친 티엔은 이미 거의 사라져 있는 잠기운을 쫓아내기 위해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이 날도 긴 하루가 될 것이고,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다.
적당히 세면을 마친 동양의 무인은 밤새 까슬해진 자리에 크림을 고루 펴 바르곤 그 위에 서늘한 면도날을 가져다 대었다. 꼼꼼한 손놀림이 지나간 곳에는 깔끔한 흔적이 남고, 상처나 빠트리는 부분 없이 면도를 마친 티엔은 고개를 돌려가며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흠. 그가 하는 일이니 지극히 당연할 수밖에 없지만 약간의 기분 좋은 뿌듯함 정도는 있는 법이다.
그 뒤로 간단한 머리정돈을 마친 티엔은 새벽단련을 위해 욕실을 나섰다. 거울에 비춰지던 상이 사라지고, 전등 스위치를 내리는 소리와 함께 욕실에는 다시 어둠과 정적이 내려앉았다.
·또 다른 남자
휘청이며 욕실로 걸어 들어온 금발의 남성이 연신 하품을 내뱉는다. 멍하니 세면대 앞으로 다가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한껏 기지개를 켜보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무거운 채였다. 안락한 침대나 부드러운 잠옷도 그에게 좋은 아침을 가져다주기엔 무리였던 모양이다. 마틴 챌피의 다소 피곤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그리 좋은 컨디션은 아니지만 곧 나아질 것을 알기에 마틴은 조바심내지 않았다. 다 괜찮을 거라는 자기 자신에게의 미소 한 번. 먼저 그는 세면대에 온수와 냉수를 섞어 미지근한 물을 채워 넣고 가볍게 얼굴을 적셨다. 그리곤 누군가에게 선물로 받았던 비누로 꼼꼼하게 거품을 내고, 얼굴 전체에 골고루 문질러 간밤의 찝찝한 느낌을 깨끗하게 지워버렸다. 따듯한 물로 하얀 거품을 헹궈내며 마틴은 비누향이 썩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
푹신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낸 청년은 적당량의 치약을 칫솔 위에 덜어 입가로 가져갔다. 거울 속의 그는 이제 한결 맑은 눈을 하고 있지만 생각은 여전히 혼란한 채였고, 마틴은 이날 만나게 될 사람들과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천천히 정리해보고 있었다. 그 전에는 어떤 식의 만남을 가졌고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몇 가지 사항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긴 생각에 간단한 마침표를 찍은 마틴은 입 안 가득한 포말을 뱉어냈다. 그는 오늘도 재단의 훌륭한 후원자이자 마인드리더였다.
훨씬 개운해진 기분으로 거울을 바라본 마틴은 다양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자, 오늘도 힘내야지. 크게 심호흡한 그는 뒤돌아 세상과 마주할 준비들을 하러 나섰다.
·그 두 사람
“하하.”
어느 가게의 커다란 쇼윈도를 지나던 마틴이 작게 웃음 지었다. 내부에 불이 꺼져 어두운 탓에 그 유리창에 비치고 있는 건 함께 걷고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이었고, 웃음소리를 들은 마틴의 동행은 퉁명스러운 질문을 내뱉었다.
“뭐가 웃긴가.”
“우리가 정말 다르구나 싶어서요.”
서로 다른 머리색과 피부색. 단호한 무표정과 웃음이 내려앉은 부드러운 얼굴이며 동양풍과 서양풍의 복식. 그리고 그 모든 점이 모여 두 사람은 서로 전혀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다른 누군가가 보기에는 이 둘이 어째서 함께 있는지조차 의아하게 생각될 것이 틀림없는 모습이었다.
“그게 불만인가?”
재미있다는 얼굴로 창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는 마틴과 달리 티엔은 딱딱한 응대로 일관했다. 약간 일그러진 티엔의 거울상은 마치 그의 불편한 심기를 나타내듯 옅게 흔들리고 있다.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마틴은 그가 눈치 채지 못할 만큼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때로 이 사람을 대하는 건 그 누구를 상대할 때보다 피곤한 일이 되곤 했다.
“뭐예요, 아까 일 때문에 그래요? 당신도 괜찮다고 했잖아요.”
잊었을 리 없는 그 자신의 발언을 상기시켜 보아도 티엔의 기분은 전혀 나아진 것 같지 않았으나 물론 마틴은 그런 결과를 기대한 적이 없었다. 티엔이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는 그의 질투심 탓에 마틴은 가끔 이날처럼 곤혹을 겪었다. 티엔 본인조차 그런 자신을 당혹스럽게 여기고 있지만 그가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하는 상대가 그걸 달갑게 여길 수 있을 리는 더욱 만무했다.
“엘리엇은 그냥 동료라니까요.”
“그래, 수십 번은 들은 얘기다.”
“그런데 당신이 듣지를 않으니까 문제라고요. 아니에요?”
뭐라고 말을 꺼내려던 티엔은 곧 입을 다물어버렸다. 자신의 행동이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걸 알고는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화는 가라앉지 않고, 이런 일에 평정심을 잃은 데에 다시 한 번 화가 나고, 그야말로 감정의 악순환이다.
“아, 그래요. 집에 가서 얘기하죠, 집에 가서.”
결국 마틴은 시간을 끌기보다는 당장의 일을 뒤로 미루기를 선택하기로 했다. 그의 기분을 보아하니 귀가 후 당장은 대화라는 걸 나눌 시간이 없을 것 같았지만. 이런 날이면 티엔은 마틴과의 관계를 말과는 다른 방식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른데 어째서.
문득 어느 유리면에 또다시 비춰지는 인영을 바라보았던 마틴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다른 그들은 이미 끌린 마음 탓에 서로를 진심으로 미워할 수 없는 것만은 같아서, 둘은 각자의 심란을 안고서도 함께 보폭을 맞춰 걸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