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무의식의 영역이다. 따라서 아무리 마인드리더라도 남의 꿈을 들여다보는 일은 쉽지 않은데, 굳이 그렇게 하고 싶을 때의 편법은 다음과 같다. 잠들어있는 사람을 강제로 깨운 뒤 마음을 읽거나(물론 이 경우 꿈의 내용은 상당수 유실되어버린다), 혹은 반쯤 깨어있는 사람의 꿈을 엿듣거나. 이런 시도에서 나는 간혹 흥미로운 결과를 보기도 했지만, 여기저기 뒤틀려있는 얕은 꿈은 대부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의미한 기억의 나열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독심술사의 자서전에서.
미지근하고 습기 찬 공기가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날이었다. 피로 탓인지 무엇 때문인지 모를 미열에 마틴의 하루는 다른 이들보다 더 느리고 힘겹게 흘러가고 있었고, 그게 딱 견딜 수 있을 만큼의 불편이라는 점은 그의 심기를 교묘하게 건드리고 있다.
이것만 하고 쉬면 될 것 같은데. 아니, 이것만. 이것만. 또 이것만. 이런 식으로 미루기를 거의 세 시간 째, 마틴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편하게 둘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나섰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 푹신한 침대에 파묻히고 싶은 욕망이 그를 부추기지만, 아쉽게도 청년은 잠깐의 휴식 후 자신이 남은 몇 시간을 버텨낼 수 있으리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거의 맹목적인 그 믿음은 워커홀릭의 오만한 자가진단이다.
반쯤 열려있는 문 안으로 발을 들이기 전, 마틴은 내부의 동향을 확인하기 위해 아주 약간의 능력을 사용했다. 그는 잠깐의 쉬는 시간을 평온하게 보내고 싶었을 뿐 다른 의도가 없었음을 이름을 걸고 맹세라도 할 수 있었다. 휴게실이 조용하다면 능력을 더 쓰게 될 일도 없을 테고, 그렇지 않다면 마틴 본인이 다른 곳을 찾아 떠나면 되는 문제일 뿐이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기에 가졌던 기대와 달리 그곳엔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딱 한 사람. 어쩌지? 도리어 피곤해지는 건 정말이지 사양이지만 발걸음을 돌리기에는 애매한 숫자였다. 마인드리더가 가벼운 고민에 빠지려던 바로 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뜻밖의 단어가 흘러들어왔다. 마틴. 그건 바로 그 자신의 이름이었다.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생각의 음색이 누구의 것인지를 깨달은 마틴 챌피는 더 큰 고민에 빠졌다. 이제 와 새삼 누구의 마음을 읽는 데에 거부감을 가지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 아이는─ 특히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지금껏 그 애를 피해온 이유가 무엇이었는데.
무겁던 머리가 이제는 거의 지끈거리고 있다. 하느냐, 하지 않느냐.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선택의 갈래에서 그는 결국 자신의 능력의 힘에 굴복하고 만다. 들을 수 있는 것을 듣지 않기로 선택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신중히 둘러본 주위에는 눈에 띄는 사람이 없었고, 마틴은 복도에 기대어 문 너머의 생각에게로 정신을 집중했다.
혼자임에도 대화의 형식을 가진 소리들. 묘하게 섞이는 잡음. 그제서 마틴은 아이가 생각에 잠긴 것이 아니라 꿈을 꾸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건 아주 약간의 방해만 있어도 깨어져버릴 얕은 꿈이었지만 아이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깨어나기 직전의 혼란이 더해져서인지 들려오는 생각의 맥락은 여기저기가 빠지거나 군더더기가 붙어 매끄럽지 못하다. 그러나 확실한 건 아이가 악몽을 꾸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마틴이 등장하는, 그리고 떠나간다는 내용의. 그 한결같음에 마틴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그 아이는 보호자를 찾아 울먹이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마틴보다 예닐곱 살은 어리지만 영국에서 제대로 교과과정을 밟았다면 슬슬 A-level을 공부할 나이고, 동양 특유의 앳된 얼굴을 가지고도 신체는 꽤나 성숙하다는 느낌이 있다. 이하랑, 17세, 영을 다루는 독특한 능력자. 그리고 또 다른 특이사항으로는─ 같은 재단 소속의 마틴 챌피를 사모하고 있다.
하랑이 처음으로 호감을 표시했을 때만 해도 마틴은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 알지 못했다. 나이가 예닐곱은 차이 나는 선배를, 그리고 무엇보다 남자를? 마음을 읽었으니 그게 마틴의 착각일리는 없다. 이제 아이는 꿈에서까지 마틴을 그리고 있었다.
하랑은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적이 없지만 설령 그랬더라도 마틴이 그걸 받아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가 하랑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제쳐두고서라도, 과연 주변에서 그들을 어떤 눈으로 볼지. 특히 하랑의 보호자인 브루스나 티엔은 마틴이 아이의 마음을 가지고 놀고 있다 여길 게 뻔했다.
만약 그들이 이 일을 알게 되면. 하랑, 그건 네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란다. 저 독심술사가 네게 손을 쓴 게야. ……아니라는 변명조차 우스워지는 상황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손을 써야 할까.
마틴은 손쉽게 남의 호감을 살 수 있는 만큼 그 반대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함께했던 몇 가지 추억이나, 밤새도록 누군가를 그리며 설레던 기억을 지워버릴 수도 있다. 감정의 무게를 서서히 덜어내고 최종적으로는 그게 존재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도록.
그렇게 하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더라. 마틴은 등에 닿는 서늘한 콘크리트 벽을 느끼며 생각에 빠졌다. 처음부터 자신을 꽤 마음에 들어 하기에 이 동양 소년에게는 굳이 능력을 쓸 필요조차 거의 없었다. 그랬던 마음이 이렇게까지 자라난 건 글쎄, 꽤 기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며 또 그때마다 적절한 조치를 취해왔다는 점을 제외하기만 한다면 썩 괜찮은 설명이다.
결론을 내리지 못한 마틴은 아직 하랑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자신을 보고 웃는 얼굴이며 태연한 척 노력하는 말투까지. 그게 안타까워 견딜 수 없어졌을 때 무언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지, 마틴은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었다.
여전히 몸은 좋지 않고 하랑의 악몽은 이어지고 있다. 마지막 이기심으로 그의 마음에 관여한 동시에 들려오는,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나는 소리.
선잠에서 깨어난 소년이 꿈의 내용을 다시 떠올리기 전, 청년은 발소리를 죽인 채 그 자리를 황급히 떠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