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대로 침입한 주제에 이름도 밝히지 않다니 무례하다. 나는 이 홀든 가의 차남 벨져 홀든.
홀든 가문에는 다이무스와 이글 말고 또 한 명의 아들이 있어. 가문에서 공개를 꺼려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
-홀든 가문의 관리인 바스티안
Ⅰ.
“워. 형답지 않은 짓이네.”
“그래서 나를 막아서기라도 할 생각이냐? 이글.”
약간의 경박함이 섞인 놀라움의 말투에 낮은 경계의 음성이 의문을 표한다.
으음. 그 질문에 짧은 망설임을 비췄던 이글 홀든은 이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의 형 벨져 홀든은 귀엽지 못한 동생이 말린다고 해서 순순히 들어줄 인물이 아니거니와, 그를 저지하고 싶었다면 지금까지 많은 기회가 있어왔다. 그러니 이제 와서 벨져의 흥을 깨는 건 이글에게도 그리 탐탁지 않은 짓이었다.
“아니, 설마. 그건 다이무스나 하는 짓이지. 저번엔 나한테 편지까지 쥐어줬는데 읽어 볼래? 멋들어지게 써놓은 것 같던데.”
“사양한다. 그리고 다이무스에게는─”
싸늘한 대답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이글은 손사래를 치며 벨져의 공연한 잔소리를 만류했다.
“아─. 당연하지. 그 난리를 치는 꼴을 왜 내가 사서 보겠어.”
그들의 큰형은 가문을 짊어진다는, 또 말썽밖에 일으키지 않는 두 동생의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 덕에 융통성이라곤 찾아볼 수 인물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어떻게든 벨져를 끌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밖에 하지 않을 게 뻔하니 가문의 검은 양이 그와의 연락을 기피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중에 얼굴 보게 되면 알아서 해. 거기까진 내가 못 도와줘.”
그 말에 응해서 들려오는 낮은 코웃음엔 여러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가 다이무스를 다시 만날 기회라는 것이 있기는 할지, 또 과연 벨져 홀든에게 도움이란 것이 필요할 것인지.
두 은발의 사내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장소는 세계수의 둥치 아래 위치한 빌로시티. 포트레너드에서도 가장 어둡고 낙후된 이곳은 음울한 기운과 가스등의 불빛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땅이다. 그렇기에 떳떳치 못한 이들은 종종 비밀을 숨기기 위한 장소로 이곳을 선택했고, 지금 여기서 태연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피를 보는 것으로 희열을 감각하는 이들의 대화도 분명 그 중 한 종류에 속할 것이다.
“어차피 요즘은 회사다 뭐다 일 때문에 정신없는 모양이더라고. 그러게 은행일은 빨리 때려치우라니까 안 듣고.”
연합의 백수라는 멸칭이자 사실적인 애칭을 가진 이글이 근엄한 얼굴의 다이무스를 떠올리며 덧붙인다. 그러나 가벼운 농담을 꺼내며 웃음 짓는 입가와 달리 이글의 눈매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날카로움을 잃은 적이 없었다.
“괜한 소리 말고 본론만 말해라.”
그에 반해 입가에 작은 미소조차 올린 적이 없는 벨져는 명백히 조급해하고 있었다. 시간이 촉박하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다. 이글은 그런 그의 태도를 날카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 어쨌거나. 지금 형이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
도발적인 이글 홀든의 말에, 거의 창백하게까지 느껴지는 피부 위로 매끄러운 은발을 늘어뜨린 수려한 용모의 사내는 오만한 태도로 상대를 마주했다. ‘미쳤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고귀한 자태의 그는 실로 완벽한 위장을 취하고 있다.
“이글, 네가 할 만한 소리는 아닌 것 같다만.”
“난 적어도 적당히 미친 선을 분간할 줄은 안다고. 그런데 형은……”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내게는 불가능하다 이건가?”
상대의 말문을 막아버리는 화법. 물론 평소라면 이글은 이쯤에서 벨져의 말을 적당히 넘어가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이글은 지금 이곳에서 얼굴을 마주한 상대를 그가 지금껏 알아온 작은형의 모습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우리가 다르다는 건 인정해야지, 응? ……아, 이거 하나만 확실히 하자. 내가 믿는 건 형이 아니라 우리 집안이야. 형이 무슨 짓을 벌여도 어떻게든 수습은 될 테니까 말이야.”
이글은 평소의 벨져를 적어도 다이무스만큼은 믿을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어떤 계기로 많은 조사를 해오며 이글은 F로 시작해서 K로 끝나는 불길한 명칭의 족속들을 믿지 않기로 결정한 바가 있다.
과연 그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일주일? 한 달? 알려져 있는 최장기록은 8년이다. 물론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지만. 당연하게도 이글은 굳이 그 상황 속에 형의 모습을 대입해 떠올리지는 않기로 했다.
대답 없는 오만한 이의 모습에 이글은 다시금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만일 벨져 자신조차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있다면 이후에 펼쳐질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뻔한 일이다.
“자, 여기.”
이글은 잊지 않도록 손에 쥐고 있던 꾸러미를 몇 발자국 너머의 거리의 벨져에게 던져주었다. 여기서 그는 어릴 적의 공놀이를 연상했지만 그의 작은형은 그때와 비할 바도 없이 빠른 동작으로 그것을 낚아챘다.
“부탁했던 거. 몰래 가져오느라 고생 좀 했다?”
그런 생색에도 불구하고 감사인사는 없었지만 애초부터 이글은 그런 걸 기대하지 않았다. 그가 빚을 잊지는 않을 테니 이후에 따를 일에 사과해야 할 수고는 줄어들겠지만.
지금으로서 이글에겐 여전히 그의 형이 무사하며, 또 그의 사냥감이 멀쩡하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게 최선일 뿐이었다.
“그럼 잘 지내보라고. 몸조심이나 하고.”
마지막으로 흘끗 뒤를 돌아보는 이글의 시선은 직전까지의 대화상대가 아닌 어두운 골목의 한 구석에 향해있었다.
두려움이나 동요 따위가 없는 기척의 소재. 직접 대면 비슷한 걸 하기로는 처음이지만 이글은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생김새나 능력, 간단한 성격과 지금까지의 행적 같은 것들. 사실 지금 생각하면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대로 모른 척 하는 게 이글 본인에게 가장 편한 길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쓸데없는 간섭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는 신물 나게 경험한데다 어쩌면 그는 이 둘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될 일 따위가 없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어떤 노력을 하든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너무도 높았다.
망할.
이글은 속으로 작게 투덜거리며 가스등의 불빛조차 없는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벨져의 이번 부름은 치밀한 계산 아래 있다. 만일 그 예상이 맞다면 이글은 도저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거래를 하고 있었다.
“갔소?”
이글이 떠나간 곳을 주시하고 있는 벨져의 곁으로 한 인영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홀든가의 두 형제와 달리 부드러운 눈매를 가진 갈색 머리의 그는, 민무늬 티에 코트라는 편한 차림으로 바로 곁에 선 벨져의 화려함과 대비되는 모습을 하고 있다.
공간능력자 릭 톰슨.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이는 그는 사실 모든 일의 핵심이었다. 벨져가 가문을 떠난 이유이자 목표, 그리고 이글이 이 자리에 오게 된 이유.
릭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두 형제의 이야기를 엿듣지 못할 거리에 있었지만 그리 유쾌하지 못한 대화가 오갔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벨져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걱정의 뜻을 드러낸다.
“어차피 네가 거기 있는 걸 알았을 거다.”
벨져는 직전의 대화를 곱씹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 영악한 동생을 일부러 불러들였던 의미가 과연 있을 것인지.
“아, 차라리 다른 곳에 있을 걸 그랬나.”
“내 시야에서 사라질 생각은 말아라.”
머쓱한 웃음을 짓는 릭에게 벨져는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쓸데없는 걱정이며 지금껏 단 한 번을 제외하곤 태연함을 잃은 적 없는 태도까지. 이 여행자에겐 그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는 것을 찾기가 더 힘들다.
“하하. 시야보다는 후각 범위 같은 게 아니었소?”
벨져는 릭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진해지는 충동을 억누르려 검집을 부여잡았다. 조금 더.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인내심을 기르는 훈련을 지겹도록, 실로 넘치도록 받아왔었다.
미칠 듯이 진하고 달콤한 향을 풍기며 태연히 다가오는 릭을 무시하려 부단한 노력을 쏟아 부은 끝에 홀든가의 차남은 겨우 냉철한 목소리를 내뱉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만 돌아간다.”
“좋지, 도련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뜻밖의 호칭에 벨져가 미간을 찡그리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여행자는 넉살 좋게 웃어 보인다.
곧 그들의 발밑에는 푸른 기운이 서린 이질적인 틈새가 생겨나고, 거의 릭의 일방적인 이야기로 이어지는 둘의 대화는 이내 끊겨 골목 사이에는 흔들리는 불빛과 정적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