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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티엔마틴] 독신주의
전개를 생각해두지 않고 손이 가는대로 쓴 글인데 꽤 즐거웠어요!
마틴과 하랑이 친하고 티엔은 마틴에게 마음이 있습니다.
더 쓰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 급한 마무리.
티엔에게 아버지란 신기루와 같은 존재였다. 생김새조차 모르는 아버지가 그의 삶에 실제로 개입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의 곁에는 늘 ‘아버지와 닮았다’라는 말이 함께했고, 그 말과 함께 주어진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티엔은 어느새 아버지의 등을 쫓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목표가 되는 사람의 모습을 알지 못하니 그 등을 따라잡을 길은 없었으며, 소년이었던 그는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자라나 아버지가 아닌 또 다른 목표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가 눈을 돌리면 여전히 희미한 아버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지만 이제 그는 그것이 사라지지도 따라 잡히지도 않는 신기루임을 알기에 미련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그런 환영 같은 아버지가 남긴 눈에 보이는 형태의 유류품은 단 하나, 티엔 정 자신뿐이었다. 아버지와 닮은,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것. 그는 때로 자신이 여전히 아버지와 닮았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잡생각을 허용치 않는 충실한 일정 덕에 이에 대해 숙고할 여유는 없었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티엔은 마음 한 구석에 있는 어떤 다짐 하나를 되새기곤 했다.
아버지가 티엔에게 남긴 인상은 단지 강한 무인이란 것뿐만이 아니었다. 자신과 닮았다는 점에 앞서 아버지에 대한 티엔의 첫 인식은 그의 부재였다. 그 사람은 어떤 이유에서든 티엔과 그의 어머니를 남겨둔 채 떠나간 것이다. 사별인지, 어떤 이유가 있어 함께하지 못한 것인지는 차마 묻지 못했지만 그가 가정 내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만은 확고한 사실이었다.
어린 티엔은 의젓했고 홀로 그를 키운 어머니는 강인했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그런 성정을 가졌는지, 누군가의 빈자리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넉넉하지 못한 삶이나마 티엔이 부족함을 느낀 적은 많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부재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 되었을지 아이였던 그로서는 전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만일 아버지가 살아계시고, 그저 그들 모자를 버리고 간 것이라면. 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라나고 있던 티엔은 생각했다. 만일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지, 아버지를 닮았다는 그는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가족의 존재가 대의에 어긋났기 때문에.
설령 그것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티엔은 자신이 가장 첫 번째로 떠올린 이유를 통해 아버지가 아닌 스스로가 어떤 인간인지를 깨닫고 말았다. 만일 그가 자신의 목표와 가정을 저울질해야 한다면 그는 가정을 버리는 선택을 할 것이다. 실제로 티엔은 사랑하는 어머니를 홀로 남겨둔 채 수행의 길에 올랐으니까. 조용히 티엔을 보내면서도 너마저, 라고 말하고 있던 어머니의 눈빛을 그는 잊지 않았다.
티엔은 결코 자신들 모자의 삶을 슬프거나 비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자신은 자신과 어머니 같은 존재를 남기지 않으리라고, 그는 오래 전부터 다짐했다. 애초에 반려나 가정에 대한 관심이 적기도 했지만 혹여 마음이 흔들려 일을 그르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버리지 않겠다는 다짐보다도 가지지 않겠다는 다짐이 앞서는 자신을 돌아볼 때면 티엔의 판단은 옳을 수밖에 없어 보였다.
마틴에게 말이란 덧없는 허상이었다. 생각이 소리가 되어 공기를 떨리게 만들곤 타인의 생각으로 흘러 들거나 그대로 사라져버리는 것.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모태가 되었던 본래의 생각은 놀라우리만치 원형을 잃어버리곤 했다.
생각과 말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실로 다양해서 사람에게 존재하는 모든 감정이 구실로 덧붙여질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생각과 말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알고 있기에 타인의 말을 다시 한 번 곡해해 받아들이곤 한다. 그 일련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마틴에게는 매우 답답한 노릇이다.
말뿐 아니라 행동도 생각과 다르게 표출되기는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몸짓은 쓸데없는 울림으로 마틴을 괴롭히지 않았다. 사실 그가 말에 부정적인 인상을 가진 것은 생각과 말을 모두 소리로 인식하기 때문이 컸다.
연이어 들려오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소리는 늘 마틴을 괴롭혔고 그가 생각을 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생각과 전혀 다른 말을 던지는 이들 앞에서 쓴웃음을 참은 지도 오래 되었다. 그것이 예의이고 사람을 대하는 당연한 방식임을 알면서도 그의 마음 한 구석에서 빈정거림이 피어 오르는 것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본래라면 불쾌한 속마음을 감춰주어 감사해야 마땅하겠으나, 마틴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대개 마인드리더인 마틴이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납득하곤 했지만, 마틴은 다른 이들보다 인간관계에 더 많은 관심을 쏟고서야 지금의 성과를 가질 수 있었다. 자신에게 들리는 것들을 어떻게 활용할지, 같은 뜻을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더 호감으로 비춰질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를 포함해 타인의 생각과 말을 구분해 기억하는 것. 마음을 조종해 환심을 사려는 게 아니라면, 타인의 요청이 없을 시 마인드리딩에 대해 드러내는 일은 최소한이어야만 한다. 말은 이런 면에서도 마틴에게 또 다른 과제를 안겨주는 성가신 존재였다.
마틴은 때로 침묵을 바랬다. 말에 의해 왜곡되지도 혼동되지도 않고 온전히 마음만을 나눌 수 있도록. 하지만 마음을 들을 수 있는 쪽은 마틴뿐이었고 침묵은 통상적으로 단절을 의미했다.
지금껏 마틴에게 평균 이상의 호감을 가진 이들은 수없이 많았고 그도 사람인지라 더러 설렘을 느낀 적이 있었지만 진지한 만남을 가진 적은 없었다. 마음을 훤히 들여다볼 줄 알면서 마음을 나눈다는 것이 반칙으로 느껴졌을 뿐더러 사랑하는 이의 말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누군가와 특별한 관계를 맺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말에 의해 고통 받으면서도 말에 의존해 매력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마틴은 거짓이 섞여 더 견고해지는 관계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차마 그 거짓을 알면서 받아들일 자신은 없었기에, 또 거짓이 없을 거라 믿는 순진함도 잃은 지 오래였기에 재단의 마인드리더는 조금은 로맨틱한 연애를 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는 학창시절의 소소한 꿈을 포기하고 말았다. 적어도 지금의 그에게 그런 삶은 먼 곳의 이야기로만 느껴졌다.
그날 마틴은 하랑에게 전해줄 물건이 있었다. 오전 중에 재단에 도착한 우편물 중 ‘하랑 이’라는 이름이 기묘한 서체로 쓰인 편지가 있었고, 자신의 우편을 찾으러 왔던 마틴은 그것이 먼 땅에서 도달한 물건임을 직감했다. 굳이 그가 전달하지 않아도 결국엔 하랑의 손에 들어가게 되겠지만, 마침 일정이 비어있던 참에 소년이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편지와 함께 하랑을 찾아 나서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틴은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와 인사를 건낼 수 있을 정도로 양호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가 세 번째로 들린 곳에서 드디어 하랑을 찾아냈을 때 마틴의 기분은 예상과 다르게 수직선을 그리며 하락하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하랑군. 그리고 티엔.”
“어, 마틴 형? 웬일이야?”
간단한 휴게실 겸 회의실로 쓰이는 그곳에서 잔소리라도 듣고 있던 와중인지, 하랑이 반색을 하며 마틴을 맞아들였다. 그에 비해 맞은편에 앉아있던 하랑의 스승 티엔은 훼방꾼의 등장이 썩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틴, 아직 용무가 끝나지 않았는데 방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여기 사용 등록을 해놓은 것도 아니잖아요. 들어오는 것 정도야 제 자유라고요. 당신은 오늘 안에 올릴 서류가 있는 것 아니었어요?”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는 티엔에게 마틴은 절로 눈을 흘기고 말았다. 있으면 안 될 사람이 왜 여기 있느냐는 타박은 덤이었다.
“그쯤은 처리해둔 지 오래다. 독촉이라도 하려고 일부러 찾아왔나?”
“아- 착각하지 마시죠. 전 하랑을 찾아온 거니까.”
이 둘에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다툼이었지만, 그 사이에 낀 하랑은 평소보다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누구라도 찾아와 방해해주길 바라긴 했지만, 반가워하고 보니 하랑에게는 상황이 더 악화되었을 뿐이었다. 지금 티엔의 심사가 뒤틀려 피해를 볼 것은 자신임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아, 사부! 그러니까, 어─”
말싸움이 더 번지기 전에, 하랑은 실없이 티엔을 불러 주의를 끌고는 마틴이 찾아온 용무인 듯한 편지를 잽싸게 받아 들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고맙다는 인사는 빼놓지는 않았다.
“브루스 할배가 그러는데 사부가 여자를 안 만나는 건 할배 따라서 그러는 거라면서? 그게 사실이유?”
뜬금없는 하랑의 질문에 티엔의 굳은 표정이 살짝 움직였다.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브루스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일이다.”
“허…… 내 그럴 줄 알았지. 할배는 마틴형도 그렇다던데.”
“네? 브루스씨가요?”
마틴은 차마 말도 안 된다며 직접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난감한 웃음소리로 답을 대신했다. 아마 질문은 하랑이 먼저 꺼냈겠지만 브루스가 마틴까지 그런 식으로 설명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아마 이전에는 마틴에게도 가끔 던지곤 하던 웃지 못할 농담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뭐야, 그럼 둘 다 아니잖아. 난 혹시 나도 그래야 하나 걱정했네.”
반쯤 진심이 담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제자를 지켜보던 스승은 문득 깨달은 듯 하랑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하랑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흠. 아직도 잡생각이 많은 걸 보아하니 수련시간을 더 늘려도 되겠구나.”
“뭐요? 아, 사부! 저번에는 입맛 없다는 걸로 늘렸잖아! 그거 그냥 다 핑계 아냐?!”
하랑과 티엔이 수련에 관해 티격대기 시작하자 마틴은 그 자리에 더 남아있기가 무안해졌다. 상황을 수습해보려던 하랑의 시도는 오히려 하랑 자신에게 불똥을 튀겼음이 분명하다. 둘의 이야기가 길어질 듯 하고 용무는 어정쩡하게나마 끝낸 참인지라, 결국 마틴은 하랑이 간간히 보내오는 구조 신호에 안타까운 눈빛으로 화답하며 들리지 않는 작별인사와 함께 회의실을 떠났다.
마틴 자신도 알고 있긴 했지만, 일이 바쁘다는 것만으론 사귀는 사람이 없는 것에 대한 핑계가 되지 못하는 듯 하다. 재단의 ATTRACTIVE는 그 이명 그대로 매력적인,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고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를 조금 떨어져 지켜보는 이들은 마틴이 누구에게나 친절할 뿐 특별한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 상대는 없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생각하곤 했다. 물론 그 정도로 마틴의 평판 등에 문제가 되진 않지만, 그런 말을 듣거나 읽었을 때 쓴 맛이 느껴지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능력을 가지기 전에도 그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게 노력하는 편이었지만, 그때까지는 평범하게 설레는 마음을 가져본 적도 있고 미숙하나마 연애 비슷한 관계로 발전하기도 했었다. 모두에게 매력적이게 되었지만 반대로 특별한 한 사람을 가지기는 어렵게 되었다니 우스운 일이다.
만약 자신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면- 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마틴은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의 얼굴을 떨치려 미간을 찌푸렸다. 왜 하필 그런 자가, 그런 능력과 그런 위치와 그런 성격으로 나타났는지 마틴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만약 세계가 마틴의 신경을 최대한으로 거슬리게 만들고 싶었던 거라면 탁월한 선택이라 감탄이라도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해당되는 일이지만, 마틴은 자신을 괴롭히는 종류의 고민과는 일말의 연관도 없을 듯한 티엔이 평소보다도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상에 사탕과 편지에 의한 고문이 있다면 그 고문을 기념하는 날은 바로 화이트데이다. 그 외에는 도무지 유래를 짐작할 수 없는 이 날에 마틴은 올해도 어김없이 그리 즐기지도 않는 사탕을 폭격처럼 맞은 참이었다. 듣기로 이 날은 여성이 선물을 받는 날이라던데, 어차피 그저 즐기기 위해 생겨난 기념일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은 그런 제한에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점심시간을 반쯤 넘겼을 때, 겨우 선물 공세에서 벗어난 마틴은 사탕을 사무실에 놓아두고 편지들을 챙겨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나섰다. 그는 한숨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나중을 위해서라도 편지들의 답장은 미리 생각해두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직접 전달받는 선물은 차라리 낫지만, 우편을 통하거나 부재중일 때 전달된 것들은 마틴의 손목과 어휘를 시험하는 숙제와도 같았다. 물론 호의에는 감사하고 있지만 그는 이런 기념일을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었다.
마틴이 막 건물의 출구로 통하는 복도에 들어섰을 때, 누군가가 빠른 걸음으로 그를 지나쳤다. 몇 번인가 얼굴을 본 기억이 있는 여성 후원자였다. 그 와중 마인드리더에게 무심코 읽힌 그녀의 마음은 부끄러움과 당혹, 그리고 욕설이 섞여있다. 마틴은 ‘꽉 막힌 동양인’이라는 단어에서 그녀의 심기를 어지럽힌 사람이 누구인지를 바로 유추해낼 수 있었다.
“당신이죠? 방금 지나간 분을 화나게 한 게.”
아니나 다를까, 건물 밖에는 딱딱한 얼굴로 어울리지 않는 사탕봉지를 들고 있는 티엔이 있었다. 사탕에 고통 받기는 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상황에서 안쓰러운 쪽은 분명 그 여성이었을 것이다.
“이런 청탁은 곤란하다고 전했을 뿐이다만.”
“이봐요. 그건 성의라든가, 호의의 문제라고요. 이 정도 선물로 기껏 챙겨준 사람에게 무안을 줄 것까진 없잖아요.”
“그게 내 호감을 사고자 한 거라면 청탁이나 다를 바가 없지.”
사탕을 들어 보이며 말하는 티엔에게 마틴은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그의 태도는 사뭇 진지했다.
“가망이 없는 일에 거절 의사를 밝히는 것도 예의의 일종이다.”
티엔이 덧붙인 말은 마틴에게 꽤 의외였다. 그는 머리에 일밖에 들어있지 않아 아예 눈치가 없는 것인가 했는데 마냥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렇네요. 당신은 어차피 일이니 수련에 미쳐서 연애 같은 데엔 관심이 없을 테니까.”
“책임지지 못할 일에 손대서 좋을 게 없지.”
“……누가 들으면 청혼이라도 받은 줄 알겠네요.”
“어차피 거리를 두면서 하나하나 대응해주는 쪽이 더 가혹한 것 아닌가?”
티엔의 시선은 마틴이 들고 있는 편지 뭉치로 향해있었다. 서류 봉투에라도 넣어왔어야 했는데, 하고 속으로 투덜거린 마틴은 그에게 신경 꺼달라며 쏘아붙였고, 티엔도 동감을 표하며 둘은 각자 갈 길을 향했다.
“하랑. 저번에 했던 얘기 말인데요.”
때는 어느 일요일 오후, 하랑에게 거리 구경을 약속한 마틴이 회심의 아이스크림 가게를 소개한 참이었다. 가끔밖에 시간을 내지 못하지만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신기한 단것에 탐닉하는 하랑을 보고 있자면 마틴도 덩달아 유쾌해지는 기분이다.
“하랑군은 제가 애인을 왜 안 사귄다고 생각해요? 다른 뜻은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지가 궁금해서.”
마틴의 질문에 하랑은 아이스크림의 냉기로 시원해진 스푼을 물고 질문의 의도며 적절한 대답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흐응……. 그냥 그럴 생각이 없는 거 아냐? 형이 사람이 없어서 못 사귀진 않을 거 아냐.”
틀렸다고 할 수는 없는 하랑의 대답을 들은 마틴은 웃어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그것이 소년의 머릿속 결론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점도, 마틴이 하랑을 퍽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 중 하나다.
“그것 참 원초적인 대답이네요.”
“아,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할배한테 물어본 건 물어본 건데, 사부야 누구랑 붙어있어 봐야 피곤할 상이고. 형은 뭐…… 여자 없으면 나랑 놀아주고 좋지 뭘.”
하긴 마틴에게 애인이 있다면 이 시간에 하랑과 디저트를 함께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티엔은 제자와 일부러 화목한 시간을 보내는 데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하랑은 마틴이 이런 시간을 내주는 것을 굉장히 반기곤 했다.
제 스승과는 달리 남을 대하는 모습이 이렇게 귀여운지라, 마틴도 가끔은 소년을 놀려먹기를 즐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하랑군도 티엔처럼 될지도 몰라요, 저야 아직 젊지만.”
“아니거든-? 두고 봐, 내가 번듯한 여자 데려다가 형한테 제일 먼저 소개시켜 준다.”
한입 가득 아이스크림을 물고 하기엔 적절치 않은 말 같았지만, 마틴은 웃으며 하랑의 용기를 북돋아줬고 둘은 한동안 티엔에 대한 가벼운 험담이나 하랑의 미래계획 등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하랑과 헤어져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마틴은 그날 나눴던 대화를 곱씹었다. 만약 하랑이나 다른 가까운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찾아온다면 자신은 그들을 진심으로 축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질투를 떠나 둘 중 하나가 변심하진 않을지, 서로 비밀을 만들고 그 비밀이 탄로나지는 않을지, 그들에게는 실례가 될 암울한 미래들이 먼저 떠오른다. 마틴은 지금까지 본의 아니게 목격해온 갈등이 너무도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애정의 관계를 맺는 이들을 어리석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막 사랑에 빠지고 행복에 젖은 기분이 어떤 것인지도 수없이 읽어왔기 때문이었다. 다만 스스로는 그런 감정을 제대로 느끼기 전에 상대를 판단하거나 환멸을 겪어야 할 뿐.
또다시 생각이 혼자인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별로 달가운 주제도 아닌 것이 자꾸 떠오르자 마틴은 자신이 외로운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사람이 반드시 연애를 하란 법은 없지만 적어도 마틴의 본래 적성에 독신은 그리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인간관계에서의 감정소모는 질릴 정도로 하고 있으면서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아직 여유가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마틴은 비꼬듯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지만 역시 기분은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이러한 사람이면 자신도- 라는 생각에 다시금 떠오른 누군가에 의해 마틴의 기분은 더욱 착잡해졌다. 웃기지도 않는 생각이다. 마틴은 이제 그가 혼자라는 점까지 거슬리기 시작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점에 그의 잘못이랄 것은 없는데도 말이다.
전에 우연히 마주쳤을 때, 티엔은 분명 이성이 그에게 보이는 호의를 ‘책임지지 못할 일’이라고 말했다. 목표가 최우선인 완벽주의자에게 다른 곳에 눈 돌릴 여유는 없다는 뜻이겠지. 그도 마음은 있으나 자제하는 것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마틴에겐 뜻 모를 억울함이 피어 올랐다.
티엔은 적어도 자신의 선택으로 혼자 남았다. 그에 비해 포기를 강요당한 자신이 외로울 때 떠올리는 사람은 다른 누가 아닌 티엔이었다. 그저 능력 때문이라지만 그에게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불쾌함에 더해 마틴의 자존심을 긁어 내리는 일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쾌한 생각에 마틴은 간만에 보낸 유쾌한 시간이 반동을 가져온 것이라 결론짓곤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생각들을 떨쳐냈다. 쓸데없는 잡생각에 시간을 빼앗기기엔 그의 남은 주말이 더 소중했다.
최근 티엔은 자신이 해이해졌음을 느꼈다. 물론 행동으로 드러낼 정도로 정신을 놓친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빈틈이 생겼다. 여기까지 와서 일을 그르칠 수 없었기에 작은 요소도 놓치지 않으며 완벽하게 계획을 따라왔다 생각했건만, 티엔은 지금껏 없었던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문제는 다름 아닌 마틴 챌피, 재단의 마인드리더를 대할 때 생겨났다.
파벌을 달리 하고 있는 둘은 정적이라 할 수 있지만 티엔은 재단 내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제대로 처리할 수 있다면 다른 방면에는 되도록 신경을 쓰지 않는다. 따라서 마틴도 그에겐 그저 같은 집단 내의 한 인물에 지나지 않았지만, 사교성이라곤 없는 티엔의 성격과 마틴의 날 선 태도, 일 처리 방식에 따른 불협화음 등이 겹쳐 몇 번의 입씨름이 있고서 그 청년에게 불필요한 신경을 쏟게 되었다.
서로를 대할 때면 두 사람은 마치 원수라도 진 마냥 으르렁거렸고 주변인들이 걱정도 적지 않게 샀지만, 사실 티엔은 그런 말싸움이 기분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티엔은 그런 지속적인 악연을 처음으로 가졌기 때문에 날 선 대화가 꽤나 색다르게 느껴졌다. 마틴 쪽은 진심인 듯 하지만 티엔은 애초부터 별 악감정이 없었을 뿐더러 진지하게 상대하려 했다면 반대로 그를 무시하는 쪽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언제나 딱딱하거나 퉁명함에 가까운 티엔의 태도 덕에 이런 사실이 겉으로 드러날 일은 없었지만 티엔은 이런 스스로의 모습이 평소답지 않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밝은 금발이 반갑게 느껴지는 자신이 점점 낯설게 느껴진다. 겨우 그 정도의 인연으로 친근감을 느끼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상대는 자신과 정반대의 감정을 품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시시한 우화 속 등장인물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티엔도 이것이 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가능하다면 마틴과 평범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고, 짐작은 할 수 있지만 그가 티엔을 그토록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듣고 싶었다. 표면상의 관계가 나쁘다는 점에 방심했던 걸까, 한 번 그런 생각이 들자 떨쳐내 버리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마틴은 하랑과 언제 친해진 건지, 덩달아 티엔과 마주치는 일도 잦아졌다.
자신의 목표와 전혀 관계 없는 자가 눈에 밟힌다. 평소보다 날카로운 태도를 그를 대해보아도 자신이 너무 심했던 것은 아닌가 마음이 쓰이곤 한다. 티엔은 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계획의 흠집이 난 것 같아 불편해지고, 또 자신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는지를 알 수 없어 불안을 느끼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 마음을 다스리면 지나갈 것이다. 티엔은 그렇게 생각하며 문득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가 한 다짐은 지금의 상황과 별 관련이 없다 생각하지만, 목표에 방해가 되는 요소는 제거해야만 한다. 버리게 될 바에야 가지지 않는 편이 나을 터였다.
“왜요, 그럼 진지하지 않은 관계라면 괜찮아요?”
“…….”
퍼뜩 생각에서 깨어난 티엔은 잠시 동안 마틴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하랑과 마틴이 무언가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와중 제자를 찾아온 티엔이 본의 아니게 훼방을 놓았고, 평소처럼 가시 돋친 말 몇 마디가 오간 뒤 티엔은 새로 붙은 공고에 정신이 팔려있던 참이었다.
대답을 찾지 못하고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니, 다른 둘이 하던 대화를 계속하고 있을 때 제자의 말이 귀에 들어온 그가 한 마디를 거들었던 것도 같다. 그리고 마틴은 그 발언에 대해 추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궁금해서라기보단, 대화에 끼어든 티엔이 탐탁지 않았던 탓일 것이다.
“……글쎄.”
애초에 질문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티엔은 대답을 애매하게 넘겼고, 의아해하는 제자의 눈빛을 피해 자리를 떠났다. 뒤에서 하랑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급한 일이 떠오른 양 개의치 않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진지하지 않은 관계라면’.
마틴이 별 의미 없이 던졌을 한 마디가 티엔의 혀 끝을 맴돌았다. 그 말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진지하든 진지하지 않든, 그리고 그것이 어떤 관계이든 목표와 연관되지 않았다면 티엔에게는 모두 방해가 될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티엔은 그 말과 마틴의 얼굴이 함께 떠올랐다.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를 깨닫고 말았다.
마틴이 이런 자신의 마음을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티엔은 괴로워졌다. 그는 비웃을까, 아니면 조금은 안쓰럽다는 눈으로 바라봐줄까, 아니면…….
티엔은, 마틴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점이 지금만큼이나 다행으로, 그리고 아픔으로 느껴진 적은 없었다. 가망 없는 일이고 책임지지 못할 일임을 알면서도 마음이 끌린다는 고통을 그는 알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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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티엔마틴] 변한 것
[티엔마틴] 남은 것의 뒷이야기.
갑작스러운 시간의 흐름&분위기 변화 있습니다_(:3」∠)_
갑작스러운 변화는 그에 휘말린 이들 모두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마틴의 경우 그의 변화가 가져온 가장 큰 손실은 마틴 본인에게 있었고, 그가 일궈온 모든 것들이 그 영향권 아래 있었다. 당시 마틴은 그랑플람 재단에서 상징적으로나 업무상으로나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그는 변화가 가져온 결과에 대한 감상에 젖을 여유도 없이 결단을 강요 받았다. 안타깝게도, 마틴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는 결코 이전과 같은 위치에 남아있을 수 없었다.
겨울이 다가오던 어느 날, 마틴은 간단한 신변정리와 함께 요양이라는 명목으로 재단을 떠났다. 마틴의 갑작스러운 이탈은 재단 측에서도 당황스러운 사안이었으나 그를 막을만한 명확한 구실이 없었기에 이사회는 마틴이 알고 있는 재단의 기밀사항에 대해 영구히 함구한다는 조건을 걸고 마틴의 탈퇴를 받아들였다. 그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대부분의 절차를 서면으로 처리하였으며, 재단의 이름난 마인드리더, 일명 ‘ATTRACTIVE’는 그렇게 수많은 추측만을 남긴 채 조용히 사라졌다.
그가 환자 행세를 해가면서까지 능력의 상실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자신이 능력을 잃었다는 사실에 대한 타인의 반응을 마주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불필요한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이미 많은 것을 잃은 마틴에 대한 배려로 티엔과 브루스는 그들이 알고 있는 진실을 숨겼으며 특히 브루스는 마틴이 재단을 떠날 때의 뒤처리를 대부분 떠안았다. 때문에 재단 내에서 마틴의 탈퇴는 브루스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으나 그는 어떤 공식적인 입장도 내보이지 않고 묵묵히 마틴이 남긴 업무를 처리할 뿐이었다.
헌데 그렇게 비밀을 공유한 브루스조차 알지 못했던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마틴이 그리 멀리 떠나가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재단을 떠난 뒤, 마틴은 자신을 아는 이들과 마주칠 가능성이 적고 능력자 밀도가 낮은 지역에 방을 구했다. 하지만 그곳은 원한다면 이전의 생활반경으로 충분히 돌아갈 수 있는 거리로, 마틴이 재단에서의 인연과 완전히 관계를 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마틴이 능력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티엔은 마틴을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사실 이 추상적인 약속의 내용은 둘 사이에서 정확히 언급된 바가 없었지만 티엔은 자신 나름대로의 해석으로 약속의 도리를 다했다. 그는 마틴이 가족을 제외하고 연락을 유지한 유일한 사람이었고, 시간이 빌 때는 서로 식사를 대접하거나 티타임을 함께하기도 했다. 이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조합과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런 사적인 만남에서의 대화에 익숙하지 않은 티엔을 앉혀두고 과거의 일부터 일상의 소소한 사건까지 털어놓곤 하는 마틴을 보며, 티엔은 그가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다. 뜻밖에도 이 잠깐의 여유는 티엔에게 그리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으며 드물게는 그가 먼저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비록 티엔이 시간을 내기 어려워 대면하는 일 자체가 드물긴 했지만. 그 둘은 친구라기엔 다소 거리를 유지했지만 더 이상은 직장동료도 아닌, 다소 기묘한 관계를 지속했다.
거의 10년만에 시작하는 평범한 사람의 일상에서 마틴은 지금껏 접하지 못한 삶을 만회하려는 듯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다. 가게의 판매원, 작은 회사의 직원, 식당의 접시닦이까지. 마틴은 어떤 일에도 열심이었고 결코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또 주변 동료들과 가깝진 않더라도 언제나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기에, 직장 내에서 마틴에 대한 평가가 양호했음은 당연했다.
하지만 많은 직업의 수는 그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처음 며칠은 아무런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마틴은 티엔과의 통화나 만남에서 슬슬 일에 익숙해졌다는 둥, 직장동료나 단골 손님과 친해졌다는 둥의 이야기를 전하고, 티엔은 그가 잘 지내고 있다 결론 내린다. 하지만 일정 시기가 지나면 마틴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새로운 일에 대해 언급했고, 이전의 직장에 대해서는 단지 그만두었다는 말뿐인 것이다.
티엔은 마틴이 먼저 요청해오지 않는 한 그의 생활에 관여하지 않고 있었으나, 열 몇 번째인가의 반복 끝에 무언가 변화가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자주 환경을 바꾸어 가면서도 지나치게 태연한 마틴의 태도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티엔은 어떤 문제를 가지고서도 그것을 숨기려 하는 이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어설프게 감춰진 사소한 요소들은 티엔이 계획하는 일들을 그르치게 만들 가능성이 있었고, 솔직하지 못한 자들의 태도는 티엔에게 그리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만일 마틴이 티엔을 떠났던 그들과 같다면 둘 사이의 약속엔 별 의미가 없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티엔은 언제나 계획을 세우고, 철저히 그에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이번 일에는 티엔에게 보이지 않거나 관여할 수 없는 요건이 너무도 많았다. 어쩌면 마틴을 외면하고 이 일을 흘려 보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티엔을 움직일 결정적인 요소는 마틴이라는 인물이 과연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는 점이었다.
“마틴. 언제까지 그렇게 정착하지 못하고 있을 생각이지?”
티엔이 이 말을 꺼냈을 때 둘은 한 중국식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장식은 다소 요란하지만 평온한 분위기에, 티엔같은 동양인들이 현지사람들과 섞여있는 이국적인 공간은 두 사람의 이질적인 느낌을 중화시켰다.
이 날은 여김 없이 열흘 만에 한 출판사에서의 일을 그만둔 마틴이 먼저 티엔을 불러냈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 사실을 전한 뒤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려 하던 참이었다. 아마 이곳의 차는 향이 제대로 우러나 향기롭네요, 이 자기는 빛깔이 독특한걸요, 같은 시답잖은 이야기를 꺼내려 했을 것이다.
뜻밖의 질문에 마틴은 티엔의 의도를 탐색하려는 듯 그와 눈을 맞췄다. 마틴은 들고 있던 찻잔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고, 막 우려내 따스한 차를 필요 이상으로 길게 홀짝였다. 그리고 이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띄우며 티엔을 마주했다.
“음……제 구직 상황에는 별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요.”
“그런 표현은 옳지 않군. 그 동안은 당신의 선택을 존중했을 뿐이다.”
“그랬나요?”
뜻밖이라는 어조다. 마틴은 티엔이 자신의 예상과 어긋났을 때 그런 식으로 반응하곤 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계속 존중해주었으면 좋겠네요. 이건 제 사생활이니까.”
여기까지, 더 이상은 다가오지 마세요. 마틴의 눈은 명백히 그런 의도를 전달하고 있었다. 마틴은 지금의 대화를 피하고 싶었고, 눈앞의 무뚝뚝한 기공사가 보이는 예상 외의 관심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도망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나?”
그러나 잠깐의 침묵이 있었을 뿐, 티엔은 더 강한 어조의 말을 내뱉었다. 마틴이 대화를 피하고자 하더라도 티엔은 결코 하려던 말을 도로 삼키는 타입의 인간이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티엔의 무례한 태도에 마틴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티엔은 마틴이 어딘가 피곤해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금발의 청년은 대화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지쳐있는 상태였다.
“전 도망치거나 했던 적이 없어요.”
“내가 보기엔 재단에서 도망쳤을 때와 별 다를 바도 없는 것 같군. 혼자 틀어박히지도, 그렇다고 어딘가에 남아있지도 못해 도망치지.”
“티엔. 지금 당신이 저에 대해 잘 안다고 착각하는 것 같은데요.”
“그렇다고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마틴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그의 말대로 티엔은 그를 깊이 알지는 못할 것이다. 전 마인드리더인 이 청년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스스로를 숨기는 데에 능숙했고, 티엔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묘한 신호를 잡아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티엔은 마틴이라는 인물을 그 어느 때보다도 주시하고 있었고 그에게선 어떤 위화감이 느껴졌다. 만일 그가 예전과 같이 철저히 평정을 가장할 수 있었다면 티엔은 결코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뭔가요, 그새 제 능력이 당신에게 옮겨가기라도 했나 보죠?”
아, 이젠 제 능력도 아니지만. 그렇게 덧붙이는 마틴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자신을 방어하려던 방금 전까지의 미소와 달리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그깟 일 좀 그만뒀다고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네요. 단순히 그 자리가 저와 안 맞았을 뿐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당신이 납득할 이유를 일일이 읊어줄 의무 따위는 없는데요.”
“그래서 이번 일은 몇 번째였지? 반 년도 안 되는 사이에 사직만 열세 번. 어쩌면 더 있을지도 모르겠군.”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마틴에게 티엔은 거의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가 순순히 문제를 시인하지 않는다면 티엔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물론 마틴도 그 점에선 마찬가지였다. 마주 본 그들 사이에선 미처 다 비우지 못한 차가 서서히 식어갔다.
“편협한 생각에 제 생활을 끼워 맞추지 마시죠. 전 당신처럼 일 하나에 미쳐서 휘둘리고 있어야 숨통이 트이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지금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말하는 건가?”
“그만할 수 없어요? 걱정이라면 고맙지만, 당신은 지금 결론을 내려놓고 제게 그걸 강요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마틴에게선 고마움은커녕, 티엔과 재단에서 대립하던 시절의 냉랭한 기운만이 느껴졌다.
막다른골목이다. 마틴이 이렇게 나온다면 이 논쟁은 끝을 볼 수 없었다. 그 점을 알고 있는 티엔은 결국 되도록 피하고 싶던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말은 잘 하는군. 브루스가 이런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 것 같나?”
“브루스씨 얘기가 왜 여기서 나오죠?”
뜻밖의 이름이 거론되자 마틴의 눈빛에 분노가 서렸다. 둘 사이의 다툼에서 브루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반칙이나 다름 없었다. 비록 이전에도 지금도 마틴과는 단절되다시피 한 인물이지만, 마틴은 여전히 브루스를 존경했고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
“나 하나의 생각으로 인정할 생각이 없다면 어쩔 수 없지.”
“티엔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마음대로 해요. 거기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려고 하다니 비겁하다고요!”
티엔은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기에 그에 대해 이렇다 할 반박을 하지는 않았다. 한편 언성이 높아지는 그들을 훑던 주변의 시선이 경계심을 띄기 시작했지만, 둘 모두 그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 문제 없다면 신경 쓸 필요도 없지 않나? 내일이라도 당장─”
“왜 제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데요?”
티엔의 뻔뻔하기 그지없는 태도에 마틴은 분노했다. 자신을 몰아붙이는 악랄함에는 치가 떨리고, 지금껏 그와 교류하며 잊고 있던 악감정이 되살아났다. 마틴은 그의 발언들을 자신을 괴롭히려는 의도로밖에는 해석할 수 없었다.
그는 결코 그들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가길 바라지 않았다. 싫으나 좋으나 티엔은 마틴의 이전과 지금의 모습 모두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마틴이 자신의 현재나 과거를 숨기지 않고 교류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현재와 과거의 삶을 비교하며 털어놓을 수 있는 것도, 자신은 어떻게 살고 있다는 정도의 안부를 전하는 것도, 가까웠던 이들을 모두 자신의 손으로 밀어내버린 마틴에게는 꽤나 위안이 되는 일이었기에 그는 그리도 껄끄러워하던 이를 불러내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티엔은 지금 마틴에게서 그 정도의 휴식조차 앗아가려 하고 있다. 자신이 숨기고자 하는 것은 모르는 척 넘어가줄 수 있을 것을, 이 완벽주의자는 마틴이 편히 쉬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뜻 모를 약속을 수락하고 지켜주는 그에게 고마움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마틴은 지금의 그가 야속했다. 애초에 그 덕분에 가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최악의 시간으로 만들고 있는 그가 야속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왜냐고요, 지금의 제가 무능하고 불쌍해 보여서? 제가 뭘 하든 비참해 보여서 그래요?!”
“─당신마저도?”
설움이 북받쳐 말을 쏟아낸 뒤, 마틴은 자신이 실언을 했음을 깨달았다. 그의 마지막 말은 자신의 약점을 시인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게 이유였나? 스스로가 비참하게 보일 거라 생각해서?”
티엔은 드디어 꼬리를 잡았다는 듯 본인의 의견도 묻지 않은 채 상황을 정리했다. 아니었다. 적어도 마틴은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곤 여기지 않았다. 그가 굳이 털어놓지 않은 감정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티엔이 말하는 그런 식의 마음가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태도에 질려버린 마틴은 해명이나 부정을 포기하고 눈앞의 이에게 울분을 토해냈다.
“아니요. 하지만 당신 말이 맞는다고 치죠. 그래서 제가 도망치는 게 잘못인가요? 누구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당신처럼 능력이 건재하지도 무신경하지도 못해서 도망쳤다는 게, 그게 잘못됐다고요?”
“문제를 내버려두고 아닌 척 하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하나 보지?”
마틴이 이를 악무는 기분으로 쏟아낸 말들을 티엔은 강경하게 받아 쳤다.
“기껏 도망친 뒤엔 또 나를 찾아 태연한 척 수다나 떨 생각인가?”
티엔의 말과 함께, 마틴의 안에서 무언가가 끊기는 소리가 났다. 지금껏 이 무뚝뚝한 남자의 불필요한 주의를 끌까 봐서, 혹은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서 웃음지으며 평범하게 나눈 대화들을 그는 단 한 마디로 일축해버렸다. 그 시간들을 즐겁게 여겼던 스스로가 우스워지는 순간이었다.
“하. 결국 그게 문제였나요? 미안합니다. 저같이 나약한 인간이 당신같이 완벽한 사람의 시간을 뺏다니 주제넘었군요.”
말을 마치자마자 금발 청년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실례하죠.”
빠른 걸음으로 가게를 빠져나가는 마틴을 보며 티엔은 작게 한숨 쉬었고, 자리 반대편에 놓여있는 잔을 응시했다. 만일 티엔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오늘의 이 자리도 평범하게, 언뜻 단란해 보이는 담소로 끝맺었을 것이다. 그렇게 두지 않은 자신의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며, 티엔은 마틴의 화난 뒷모습을 뒤따랐다. 그에게는 아직 꺼내지 못한 말이 남아있었다.
둘은 번화가에서 떨어진 장소에 약속을 잡았기 때문에 오갈 사람이 많을 시간대임에도 거리는 꽤나 한산했다. 때문에 티엔은 그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마틴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차도를 건너기 직전 그는 마틴을 불러 세웠지만, 마틴은 그를 돌아보지 않았기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꽤나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나 보군, 마틴. 나는 시간을 낭비하러 온 게 아니다.”
“그렇겠죠. 앞으로는 당신의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러 온 줄 알았는데요.”
티엔은 그 나름대로 최대한 고압적인 태도를 버리고 말하고자 시도했지만, 마틴에게는 결코 그런 식으로 들릴 리 없었다.
“그런 말을 한 기억은 없군. 방금 인정했으면서 또 도망칠 생각부터 하는 건가.”
“도망쳤다고 하지 말아요. 당신의 일이 아니라고 멋대로 판단하지 말라고요. 그리고 전 남이 절 가여워할까 봐 두려운 게 아니에요.”
마틴은 저 무신경한 인간을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노라 되뇌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신경을 긁는 티엔의 말을 참지 못하고 못다한 말을 퍼부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내뱉을 때, 마틴은 티엔을 똑바로 마주 보고 소리질렀다.
“그래서 제가 어쩌길 바라는 건데요? 지금 절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 건 당신이잖아요!”
마틴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티엔은 처음으로 약간 놀란 표정을 보였다. 마틴에게는 그의 태도가 가증스럽게만 느껴졌고, 그가 어떤 대답을 내놓든 뒤돌아 가던 길을 갈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 만일 그가 다시 붙잡는다면 비명이라도 질러 떼어놓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마틴의 눈에는 미처 보이지 않았지만, 티엔에게 전에 없던 망설임과 결단이 스쳐가고 있었다.
어떻게 하기를, 이라. 티엔은 마틴의 말을 반복해 작게 읊조렸다. 그리고 그가 어렵게 꺼낸 한 마디는 마틴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나 해명이라기보다는 어떤 요청에 가까웠다.
“……함께 살지 않겠나?”
잠시 동안 마틴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문장에 담긴 티엔의 뜻은 전 마인드리더의 내면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당신을 혼자 두기엔 안심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마틴을 향해 티엔이 물었다. 막 귀가한 티엔은 어디선가 사 들고 온 물건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집 안에 채워 넣고 있던 참이었다. 서적이나 약품, 옷가지 등, 그는 때때로 그의 공간에서 필요 없어진 물건을 치워내고 새로운 것으로 그 자리를 메우곤 한다. 이제는 익숙하지만 마틴은 여전히 그의 그런 행동에 대해 기묘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음, 그냥. 확 나가서 살까 생각 중이었어요.”
“이제 와서 말인가?”
그 발언에 진심이 담겨있지 않은 것을 알고 있기에 티엔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지만, 때때로 마틴이 심통이 나면 그런 요지의 말을 꺼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잠시 동안 무엇이 마틴의 심경을 건드렸는지에 대해 고심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틴의 말에 그는 그 이유를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예전 생각이 좀 나서요. ……그때 전 정말 상처받았거든요? 보통 걱정된다는 상대한테 폭언을 퍼붓진 않는다고요.”
“처음부터 순순히 문제가 있다고 시인했다면 결론부터 말했겠지.”
“인정을 잘도 하겠네요. 나는 능력 없이는 사회부적응자라도 된다고.”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티엔의 태도는 언제 봐도 얄미워서, 이 둘의 대화는 서로 비꼬는 것으로 끝날 때가 많았으며 이제는 이런 식의 전개가 거의 일반적인 대화로 느껴졌다. 서로 약간씩 기분이 상하면서도 이런 대화를 그만둘 수 없는 것은 이것이 솔직하지 못한 두 사람이 앙금을 풀어내는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인정했으니 상관 없지 않나?”
“정말로 그런 문제가 아니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마틴의 물음에 티엔은 하던 일을 멈추고 조금 생각하더니, 무언가를 떠올리곤 당시에 가졌던 확신의 이유를 답했다.
“적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굳이 날 찾아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마틴이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점만으로도 티엔의 의심을 뒷받침하기엔 충분했을 것이다. 만일 다투던 와중 그가 이 사실을 언급했다면 마틴은 부정하려 했겠지만 지금 와서는 별 의미가 없었다. 마틴이 당시의 삶에 제대로 적응하고 있었다면 티엔을 찾는 빈도는 훨씬 적었을 것이 분명했고, 그때의 다툼은 처음부터 마틴의 수가 훤히 읽히고 있던 것이다.
“뭐……. 그래도 그 말은 섭하네요. 그냥 보고 싶어서 찾아갔다곤 생각 안 한다는 말이잖아요?”
“흠. 그랬었나?”
“글쎄요. 지금 생각해보면 왜 하필 당신 같은 사람을 찾아갔는지 모르겠네요.”
마틴의 발언은 두 가지 방면에서 상대를 기만했다. 당시 마틴은 티엔의 생각대로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였고, 굳이 다른 이가 아닌 티엔을 찾은 것도 명확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틴의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것이라 여긴 티엔의 추측은 그리 정확하지 않았다. 마틴을 심하게 몰아붙였던 그날 이후론 자세한 사항을 캐묻지 않았기에 밝히지도 않았지만, 마틴의 불안은 대부분 타인을 믿지 못하고 현재의 삶에 실망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에서 기인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 감정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마틴을 괴롭혀 왔으나 약속대로 자신을 떠나지 않는 티엔이 곁에 있어 그는 자신의 감정에게서 눈을 돌리거나 내색을 하지 않고 지나갈 수 있었다.
만일 티엔이 그때의 뜬구름을 잡는 듯한 제안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마틴은 깊게 생각하지 않도록 노력하곤 했다.
“티엔.”
이런저런 생각에서 깨어난 마틴이 티엔을 불렀을 때, 그는 여전히 정리중인 물건을 품에 안고 한 손에는 여러 권의 책을 들고 있었다.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에게 다가가 한참을 말 없이 바라보던 마틴은 그의 검은 눈이 굉장히 마음에 든다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티엔이 자신의 눈을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의문으로 부끄러움을 덮으려 노력하며, 눈을 감고 가볍게 그와 입술을 겹쳤다.
입을 마주 대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티엔의 몸의 일부가 부드러울 수 있다는 사실은 마틴에게 꽤나 생소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단지 감촉일 뿐인 이것이 가슴을 뛰게 만든다는 것은 둘 모두에게 너무도 낯선 일이었다.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살며시 눈을 뜨자 약간 당황한듯한 티엔의 얼굴이 비쳤다. 이전에는 잘도 했던 것을, 이런 뜻밖의 상황에는 그도 어쩔 수 없는 듯 했다. 그들은 아직 서로 알아가야 할 부분이 많았다.
마틴은 그런 티엔의 모습에 만족하며 그에게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지금도 제가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어요.”
마틴은 능력을 잃은 이후 찾아온 또 다른 변화에서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자신이 아닐까 생각했다. 변한 것은 티엔도 마찬가지였지만 마틴의 마음 한 구석에 찾아온 평안과 설렘은 그만큼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대개 서로에게 관대한 편이 아니었고, 마틴의 불안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었으나, 둘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들의 삶을 행복이라 정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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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마틴]그가 웃었다 의 프리퀄(?)
첫인상과 진전에 대해서
무례하게도 타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려 하는 오만한 능력자. 그것이 바로 티엔이 본 마틴 챌피였다.
그들의 첫번째 만남은 브루스와 함께 어색한 시간으로 지나갔고 서로에게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했다. 마틴은 낯선 동양인에게 경계심을 품었지만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했고, 티엔은 눈 앞의 마인드리더보다는 앞으로 자신이 할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번째 만남은 티엔의 생각을 읽으려던 마틴의 시도로 그들 모두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그 일 이후로 마틴은 티엔을 더욱 경계하게 되었고, 티엔은 마틴을 대할 때 묘하게 비꼬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사실 누구라도 마틴의 행동을 눈치챌 수만 있다면 불쾌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 누구도 머릿속을 침범 받길 원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티엔의 불쾌함 가운데에는 그가 깨닫지 못할 일종의 동족혐오가 섞여있었다.
티엔은 아마도 선천적인 능력자였지만 자신이 특별하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다. 혹은, 그의 무의식이 그렇게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의 노력은 누구보다 간절하고 치밀했기에 타인이 그의 특별함을 말할지라도 티엔은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티엔을 부러워하는 이들 중 티엔 만큼의 노력을 실제로 행한 이는 없었다. 티엔은 그들의 말을 듣는 대신에 그들이 어째서 더 수련에 힘을 쏟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오랜 시간이 흘러 결국 그는 다른 이들과 다른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는 타인의 경외나 질투, 혹은 충고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지금까지와 다른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이전의 자신이 그저 더 높은 경지를 원했다면, 타인과 다른 출발점을 가진 자신은 누구보다도 더 높은 경지를 찾아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스승이 그에게 말했던 ‘완벽’이라는 목표였고, 그의 검고 흰 손은 완벽을 움켜쥐고자 지금까지보다 더욱 강한 힘을 원하게 되었다.
그 스스로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다름에 대한 자각과 완벽을 위한 노력은 점차 그를 오만하게 만들었다. 그는 타인과 자신을 구분했고 타인에게 많은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들은 절대 완벽하지 못하며 심지어 완벽을 추구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직 완벽하다 칭할 수 없는 스스로의 성과에 무감각한 만큼 그는 자신을 향한 찬사에도 아무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악의 없는 오만함은 누군가에게는 매력으로,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인상으로 돌아오곤 했다.
한편, 마틴은 그와 전혀 다른 의미의 오만을 가지고 있었다. 타인의 정신을 읽고 마음껏 조종할 수 있는 능력. 사람을 상대함에 있어 마틴만큼 고요하면서도 강력한 능력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마틴은 능력자를 위한 단체인 그랑플람에서조차 위험한 능력이라 하여 거부당한 이력이 있었다.
하지만 마틴은 지금 그 강대한 능력을 공공을 위해 사용하고 있었으며 지금껏 문제시되는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그랑플람에 들어오고자 한 선택부터, 그는 의심과 경계를 받을지언정 타인에게 질타를 받은 일은 없었다.
타인을 내려다보는 것과 같은 위치에 서 있으며, '낮은 곳'에 선 이들을 위해 기꺼이 가면을 쓰는 그가 마음 속 어딘가에 오만함을 감추고 있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마틴은 자신의 오만을 깨닫고 있었고 그 마음이 자라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했다. 도를 넘은 우월감은 마틴이 지금껏 지켜온 무언가를 삽시간에 무너뜨릴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마틴은 티엔과 달리 오만을 선의로 숨길 줄 알았기에, 그는 누구에게나 매력적이었다.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마음을 읽으려는 마틴의 행동에서 티엔은 마틴이 실패를 겪은 적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능력이 저지당했을 때 마틴의 동요하는 모습은 그의 추론을 확신을 실어주었다.
그 알량한 능력을 믿고 나를 읽을 수 있다고 믿었단 말인가?
더 높은 곳을 추구할 생각조차 하지 않을 이가, 능력만을 믿고서.
티엔이 굳이 마틴에게 면박을 준 데에는 그런 심술이 섞여있었다. 그는 마틴이 어떤 자이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지 못했지만 완벽할 리 없는 마틴이 능력에 대한 확신과 오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사실 티엔은 그 날의 일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동족혐오가 때때로 그로 하여금 마틴을 주시하게 했다. 그렇기에 다른 누군가가 꺼낸 말이었다면 넘어갔을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거나 의견 차이에 반박을 가하는 일이 잦았고, 결과적으로 마틴에게 티엔은 그 누구보다도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되었다. 티엔 자신은 전혀 깨닫지 못했지만.
그렇게 의도치 않게 오랜 시간 마틴을 관찰한 결과, 티엔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마틴이 성실하며, 또 그와는 다른 방면에서 일종의 완벽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았다. 티엔이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인간관계라는 가치를 마틴은 놀라운 방식으로 성립하고, 유지하며 유기적으로 활용할 줄 알았다. 게다가 능력을 썼을 가능성을 감안하더라도 마틴의 태도는 타인에게 호감이 될 수밖에 없어 보였다.
물론 티엔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 그런 방면에 무딘 티엔의 눈으로도 알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마틴의 수완은 대단했다.
무표정하게 서류를 넘기던 티엔의 미간이 좁혀졌다.
“여기 빠진 부분이 있군. 이 협상 건은 누가 맡았지?”
“아. 그건 챌피씨가 담당했을 거예요. 수정하라고 말해뒀었는데, 어휴.”
하랑과의 수련을 안배하기 위해 재단의 일정을 검토하던 티엔은 부주의한 후원자가 빠트린 서류의 빈 칸을 채워 넣었다. 회사와의 마찰을 완화하기 위한 형식적인 협상. 이번 협상에서 재단은 전보다 많은 조건을 내세웠지만, 이 정도의 일은 마틴이 나선다면 순조롭게 진행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었다.
마틴 챌피. 자신의 글자로 쓰여진 인명을 속으로 읊조려본 티엔의 입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것은 티엔이 서류를 읽으며 일어날 법한 일은 아니었다. 아주 짧게 그 점에 대한 의문을 가졌던 티엔은, 그 감정이 적절한 인선에 대한 만족감이라 정의했다. 그리고 마틴이 자신의 이런 생각을 읽을 수 없다는 점을 다행으로 여겼다.
티엔과 마틴은 각자의 능력에 있어 오만했다. 그 미묘한 공통점은 그 둘 사이의 몇 안 되는 연결점이었고, 티엔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연결점 너머의 마틴에게 눈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이 둘 사이의 관계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 작은 감정일지라도, 티엔은 그로 인해 때때로 미소지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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