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흔하디흔한 능력을 가지고서 유명한 능력자 가문의 일원과 맞서 싸웠고, 정당한 승리를 거머쥐어 연합의 수장을 지켜냈다. 거듭되는 싸움 속에서 그는 믿기 어려울만큼 놀라운 성장을 이뤄내 그가 본디 3급 능력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연합에는 그의 활약상을 동경해 찾아온 능력자들이 생겼다. 연합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바로 그였다든가, 나아가서는 그의 뒤를 잇는 영웅이 되기를 꿈꾼다든가. 그런 이들이 찾아올 때면 연합의 동료들은 그의 등을 두드렸지만, 그의 마음은 결코 편하지만은 않았다. 영웅이라 불리는 압박감, 평탄하지 못한 길을 선택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하지만 자신을 쫓아 함께하게 된 이들을 진심으로 동료로서 생각하게 되며 더 크게 자라난 마음은 바로 책임감이었다. 그들을 지켜야 한다. 그러니 더 강해져야 하고, 더 침착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평정을 유지할 수 없는 순간들은 결국 찾아오곤 했다.
“역시 능력자들은 소름 끼친다니까.”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길가를 지나는 능력자들은 쉽게 반론을 꺼내지 못했다. 비능력자는 언제나 사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며 한 능력자 개인의 범죄는 능력자 전반에 대한 인식을 깎아내릴 수밖에 없다. 이번과 같은 살인, 그것도 능력을 사용해 저지른 케이스라면 더더욱 그랬다.
피해자는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고 날카로운 흉기에 수 차례 복부를 찔려 사망했다. 현장에서 흉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영국 경찰은 그리 무능하지 않았다. 피해자의 원한 관계를 조사하고 약간의 편견과 심증을 섞어 진행한 심문이 결국 옳았다고 밝혀진 것이다.
범인은 피해자의 동생이자 독신으로 살고 있는 제빵사였으며 능력자였다.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사연 속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끈 점은 살해의 방식이었다. 그는 수분을 굳혀 자신의 손을 송곳처럼 만들었다. 마치, 아마도 영국 내에서 가장 유명할 결정사인 루이스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못 찾을 줄 알았어?”
웃음을 머금은 그녀의 입가는 언제나 그렇듯 고혹적으로 반짝인다. 그러나 그보다 조금 위에 자리한 그녀의 날카로운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트리비아.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
“언제는 아니었던 것처럼, 흠?”
그녀는 루이스가 얼굴을 굳히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머리 위를 미끄러지듯 스쳐 지나갔다. 그의 행동반경 내에서 가장 완전한 황혼을 바라볼 수 있는 건물의 옥상. 그는 뻔한 습관을 바꾸지 않았고 그녀는 홀로 우울함을 삭히는 그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공중을 선회한 트리비아 카리나는 곧 유연한 날개를 접고 골칫거리인 그녀의 연인 곁에 발을 디뎠다.
희미한 구름으로 덮여있는 하늘은 뿌연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언젠가는 그녀만의 공간이었던 도시의 음울하고도 아름다운 황혼과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그곳과 달리 이곳의 하늘은 지나가는 시간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태양이 천천히 건물 사이로 가라앉는 동안 그들의 등 뒤에 펼쳐진 하늘은 서서히 짙은 푸른색과 섞이며 온갖 빛깔을 자아내고 있었다.
“당신 잘못이 아니야.”
“알고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우울을 떨치지 못하는 연인을 트리비아는 딱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다만 그토록 섬세한 감정을 가슴으로 공감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가엾은 루이스. 그럼에도 그는 어느 것 하나를 포기할 줄 모른다.
“어때, 이제 조금은 떠날 마음이 들었어?”
“그 얘기를 지금 할 필요는 없잖아.”
“그럼 언제가 좋을까? 내일 아침 네 기분이 나아졌을 때? 어린애들이 전투에 뛰어드는 걸 보고서 또 마음이 착잡해졌을 때?”
루이스의 손이 닿아 있는 난간에 엷은 서리가 맺혔다.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트리비아의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이곳에 남아야 할 이유를 다시금 곱씹게 된다. 그녀는 종종 함께 멀리 사라져 버리자고 속삭이곤 했다. 마치 이전에 그녀가 가장 빛나던 시기에 패션계를 훌쩍 떠났던 것처럼.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말들은 루이스의 결심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되어 왔다.
“아직은 떠날 수 없어. 언젠가, 이 전쟁이 끝나면. 그때라면……”
“겨우 이런 일에 흔들리는 주제에 모두를 구하겠다느니. 웃기지도 않네.”
그 말 그대로 트리비아의 목소리에는 단 한 점의 웃음기도 들어 있지 않다.
“그리고 전쟁은 아주 오랫동안 끝나지 않겠지.”
희망 따위를 집어넣지 않은 관측에 루이스는 이의를 표하지 않았다. 아직 그들은 이 끝이 어떤 형태가 될지조차 가늠할 수 없다. 개인의 노력으로는 그저 지키겠다는 다짐만이 전부. 스스로를 짓누르는 선택으로 나아가는 루이스에게 트리비아는 손을 내밀지만, 그는 아직 그 손길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순순히 자신을 따르기만 하는 사람이라면 오래전에 질려 버렸을 것을 트리비아는 잘 알고 있다. 이 정도의 결심과 강단이 없었다면 지금의 루이스라는 사람이 존재할 수 없었을 것 또한.
“그렇게나 영웅 놀이를 하고 싶다면, 죽지 마. 그랬다간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알고 있어, 여왕님.”
영웅은 깊고 차가운 한숨을 내쉬고, 여왕은 그런 그에게 입을 맞췄다. 그는 여왕의 기사가 아니며 여왕은 그를 지배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불화가 생겨난 것도 사실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