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스 몸을 일으켜 눈을 비비는 아이에게 건넸던 다정한 인사는 짜증 섞인 대답에 묻혀버렸다. 그러고 보면 마리나는 어젯밤 잠들기 전 악몽을 자주 꾼다고 말했던 것 같다. 가엾은 아이. 깨어 있을 때나 잠들어 있을 때나 이 애는 마음 놓고 쉴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거 유감이네.”
“이건 다 네 탓인데?”
“그것까지 포함해서 말이야.”
내 차분한 말씨가 문제였던 걸까,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표정을 한껏 구긴 마리나는 달랑달랑한 털방울이 달린 수면모자를 벗어들곤 내가 앉아 있는 횃대를 향해 있는 힘껏 던져왔다. 아직 날갯짓이 익숙하지 않은 나는 고개를 한껏 움츠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고 모자는 그런 내 머리깃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침실 한 구석에 처량하게 놓여있던 커다란 곰인형은 나보다 운이 좋지 못했다. 털방울과 뒤얽혀 픽 쓰러져버리는 그 덩치를 지켜보고 있던 나는 자신도 모르게 온 몸의 깃털을 세워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안 돼, 마리나! 사람에게 모자를 던지는 건 나쁜 짓이야.”
새된 소리로 비명을 지르는 내게 마리나는 더 큰 목소리로 악을 쓴다.
“시끄러워, 넌 사람도 아니잖아!”
“오, 그렇네. 내 말은, 그러니까 살아있는 것들한테 말이야! 방금은 정말로 위험했다고.”
내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은 채, 아이는 던질만한 다른 물건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커다란 침대 위에서 마리나의 작은 손에 잡히는 거라곤 무겁고 푹신한 베개와 솜이불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아, 정말 짜증나.”
투덜거리며 이불 사이를 빠져나온 마리나는 부스스하게 일어나있는 초콜릿 빛깔 머리칼을 탁자에 놓여있던 노란 끈으로 아무렇게나 붙잡아 매었다. 제멋대로 뒤엉키는 곱슬머리가 안타깝지만 내 날개로 머리를 빗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발터, 내 톱이 어디 있지?”
꼬마 마녀의 질문은 내게 어제의 일을 상기시켰다. 마리나는 작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톱을 다루는 솜씨가 놀라울 만큼 좋은 아이였다.
“아마 1층 계단 앞에 있을 거야. 밟지 않게 조심하라고 말하려고 했지. 그런데 톱은 왜?”
“네 머리를 바깥 울타리에 걸어둘 거야. 그렇게 하면 나를 방해하는 멍청이가 조금은 줄어들겠지.”
아하. 하긴 그런 장식이 있다면 나라도 이곳에 발을 들이기 전에 한 번쯤 망설였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일이다.
“마리나, 내게 쓰기엔 그 톱이 너무 크지 않겠어?”
방을 나서려던 작은 숙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내가 작은 머리통을 갸웃하며 던진 질문은 어떤 이유에선지 가라앉았던 마리나의 심기를 다시 한 번 건드린 것 같았다.
“아니, 바보야. 네가 어제까지 쓰던 인간 머리 말이야!”
“아, 저런. 그걸 잊고 있었지 뭐야.”
아이는 현관문 앞, 아마도 곰가죽 카펫 위에 그대로 쓰러져 있을 나의 옛 몸뚱이를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이 떨어진 직후 마틴은 그의 의문이 옆얼굴에 닿아오는 것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오래 전부터 예견된 일이라고 생각해 미소 지으며 꺼낼 수 있던 말이었다. 역시 이 사람에게는 더 확실한 언어가 나았을 거라는 짧은 감상. 마틴은 그렇게 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는 곧장 이어져야 할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꽤 길었던 관계를 끝낼 때가 왔노라고, 하지만 앞으로도 좋은 인연이 될 수는 있을 거라고.
방 안의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시계 초침이 똑딱이는 소리와 느릿한 자신의 숨소리만이 마틴의 귓가를 맴돌고, 우중충하게 내려앉은 구름 사이로 드리우는 빛은 크게 나있는 유리창을 통해 작은 공간을 시리게 비춘다. 책상 위에 약간 어지럽게 놓여있는 서류며 필기구들은 마틴이 앉은 책상 위로 제멋대로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언제라도 누군가 찾아와 그들을 방해할 수 있는 마틴의 사무실. 어트랙티브는 계산적인 자신의 모습을 좋아할 수 없으면서도 그것들을 끝까지 활용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게 당신이 정말 원했던 건가?”
과연, 티엔은 마틴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묻지는 않았다.
“숨이 막히잖아요. 당신도, 저도.”
“……그래. 그랬었지.”
숨이 막힌다는 표현을 먼저 사용한 건 티엔이었다. 그때 그는 조용히 화를 내고 있었고 다소 격한 표현이었을지언정 그 말에 거짓은 없었을 터였다.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 별로 달라질 것도 없겠군.”
무표정과 검은 눈동자의 시선이 마틴에게로 공허하게 내려앉았다. 그 시선을 피해 의미 없이 책상 위를 훑던 마틴의 눈길은 어느 서류철의 제목 위에서 멈춰 선다. ‘그랑플람 재단 아시아 지부: 동양 능력자 발굴의 진척 상황 보고. ─티엔 정.’
“이건 돌려주는 게 낫겠나?”
착잡해졌던 표정을 수습한 마틴이 올려다 본 티엔의 손 안에는 그들의 감정을 물질로 표현한 몇 안 되는 물건이 들어있었다. 그건 마틴이 수십 번 상상했던 지금 이 순간 중에서도 미처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었다.
“……당신이 원한다면요.”
마틴은 탐탁지 않았던 대답을 그에게 고스란히 되돌려주었고, 티엔은 말없이 다가와 매끈하게 빛나는 반지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정작 그의 손에 끼워진 일이 드물었던 작은 상징물은 마틴이 그걸 그에게 건넸던 날과 다를 바 없이 보였다.
영원할 거라느니, 변하지 않겠다는 둥의 의미 없는 맹세를 해본 기억은 없었다. 그럼에도 일종의 약속이었던 무언가가 자신의 손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마틴을 묘한 기분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감상에 빠질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별을 고한 이는 그를 떠나려 방을 나서는 이를 불러 세워야했던 것이다.
“이걸로 끝이에요?”
이렇게 남은 걸 되돌려주는 것 외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말이 없느냐는 질문에 마틴을 돌아보는 티엔의 눈은 여전히 예의 그 공허한 빛을 띠고 있었다.
“가볼 시간이다.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하지.”
도피는 티엔 정이라는 사람답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지금껏 해왔던 일들의 전부는 그들을 헝클어뜨리는 과정의 일부였으므로 이제는 무엇이 일어나도 놀랄 것은 없었다.
앞으로도 좋은 인연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런 말을 꺼내려던 시도에 무색하게도, 마틴은 티엔이 뒤돌아 떠나기 직전의 굳은 표정을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힘겹게 느껴졌다.
신화 속 네메아의 사자는 어떤 무기에도 상처 입지 않았으나 결국 영웅의 손에 목 졸려 죽어버렸다.
우리는 서로 다른 종류의 사자였다. 그는 칼날이 들지 못할 거칠고 뻣뻣한 털가죽을, 나는 칼날을 능히 빗겨낼 교활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없으리라 여겼다. 그가 나의, 내가 그의 목을 조르기 전까지는.
다음날 그들은 짧은 통화를 나눴다. 티엔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는 서로의 거처에 남은 물건을 어떻게 처분할지에 대한 논의, 또는 통보였고 그걸로 끝이었다. 연인들 사이에 으레 있다고 하는 미련의 흐느낌도, 인상적인 작별인사조차도 없었다.
잘 지내요. 억지로 짜낸 마틴의 인사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말로 간만에 보내는 혼자만의 밤. 같은 침대를 쓰지 않는 밤에도 두 사람은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야만 했던 이유를 떠올릴 때면 마틴은 어디론가 고개를 파묻고 가라앉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비참함. 내가 나의 비참에 대해 그에게 말한 적이 있던가?
간혹 찾아오던 우울은 언제부터인가 그와 함께 있을 때 더욱 심해지곤 했다. 정신계 능력을 가진 사이퍼에게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하던가. 마음껏 남의 속을 들여다보곤 비웃고 동정한 뒤에야 가라앉곤 하던 우울. 하지만 이 안개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나는 그렇게 해낼 수 없었다.
나를 안심시키던 무지(無知)가 나를 괴롭히는 순간에, 상대의 잘못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불안이 차올라 작은 말과 행동에 상처받았다. 그 상처가 썩고 곪은 뒤에는 또다시 새로운 상처가 새겨지고, 다시, 또다시, 사랑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여겨질 정도로.
당시에는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지만 아마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나의 상처는 나만의 것으로 끝나지 못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상처를 내보이는 데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웃는 얼굴을, 그리고 적당히 감싸 안아줄 수 있는 정도의 슬픔을 사랑했고 나는 언제나 사랑받고자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견딜 수 없을 때면 혼자 틀어박히거나, 일에 집중하거나, 타인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걸로 자신을 위로하곤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티엔에게 나의 괴로움을 털어놓았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관계는 더 일찍 끝나게 되었을 테지만, 어쨌거나 결과를 바꾸지는 못했으니 우스운 일이다.
“미안하다. 위로 같은 건 익숙하지 못하군.”
잠자코 듣고 있던 그는 뜻밖의 사과를 건넸다. 그러나 무뚝뚝한 그에게서 받는 서툰 위안의 말은 기대 이상의 것이어서─ 심지어 그는 나를 이해하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때의 나는 어쩌면 앞으로 다시는 불행하지 않으리라는 기대마저 가지게 되었다. 글쎄. 수많은 감정들과 그 끝을 읽어온 마인드리더에게도 희망 정도는 있을 수 있는 법이다.
이어진 긴 시간은 최악과 안도의 반복이었다.
나 자신을 담보로 쥐고서 누군가를 흔들어대는 건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기복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 감정과 주워 담을 수 없는 말들은 그로 하여금 필요 이상으로 나의 기분을 살피며 입을 다물게 했다. ‘가끔은 죽어버리고 싶어요.’ 나는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다.
우리 둘 중 누군가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건 분명 나의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런 식의 동정은 필요 없다고, 그의 시선이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고 외칠 수 없었다.
그날의 나는 그와의 관계에 유달리 집중할 수가 없었다. 반사적으로 내뱉는 신음과 본능적인 몸의 반응, 그게 전부였다. 바닥끝까지 가라앉아있던 내게는 모든 것이 우스웠다. 잘도 이런 내게 욕정하는 남성이나 그 아래에서 쾌락을 연기하는 나의 모습까지.
비웃음을 알았던 걸까, 늘 있던 진득한 후희 따위가 이날 밤의 우리에게는 없었다. 하긴. 마음은 몰라도 몸에 관해서만은 정통한 그가 나의 성의 없는 반응을 모를 리가 없다.
“의사표현은 확실히 해라.”
말없이 뒤처리를 끝낸 그가 처음으로 뱉은 말이었다. 네, 그렇게 하죠. 미안해요. 대답은 내 머릿속에서밖에 들려오지 않았다.
그 뒤로 우리는 양측의 확실한 동의 없이는 육체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날 이후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사실, 그 이전부터 우리는 낮은 속삭임으로 끊임없이 서로를 상기시켰다. 곧 죽더라도 너를 사랑하겠다는 달콤한 고백이 아니라 서로의 길이 갈린다면 가차 없이 떠날 수밖에 없다는 말들. 우리는 그런 식의 연애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만큼이나 자신의 시간, 자신의 공간, 자신의 결정 같은 것들을 어그러뜨릴 생각이 없는 사람들의 만남이란 꽤나 한정적이다. 그럼에도 이런 관계가 지속될 수 있었던 건 우리의 삶 속에 아주 약간의 부드러운 이음매가 필요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그의 입장을 완전히는 이해할 수 없고, 또 앞으로도 영영 알 수 없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존재가 짐으로 느껴지는 순간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 티엔이 점점 초조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나를 떠나지 못했던 건,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가볍게 여겼던 애착이라는 감정이나, 동정, 또는 어떤 종류의 관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함께 비참해지느니 차라리 혼자 견디겠다고. 그게 나의 결론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다시 이틀이, 그리고 또 사흘이.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뜻밖에도 마틴은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어려운 업무와 협상들을 훌륭하게 수행했고, 옛 후원자의 신뢰를 얻어냄으로써 재단의 영광을 되찾는 데에 이바지했다. 심지어 그는 전보다 더 밝은 얼굴로 웃을 수 있었다.
누구 머릿속이라도 엿보고 있는 거 아냐? 기분 나쁘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미소를 보낼 수 있는 여유가 이전의 그에게는 있을 수 없었다. 답답함과 죄책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뒤의 세계는, 이전보다 훨씬 더 밝은 색채로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기시감에 의해 마틴은 과거의 우울이 고스란히 자신의 발자국을 따라붙고 있음을 알았다. 평화가 지속되리라는 믿음은 이번으로 처음이 아니었기에.
“챌피씨, 이번 회의에 티엔 정씨가 불참했는데 혹시 왜인지 아세요?”
당연하게도 마인드리더의 평온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전혀 관련이 없어야 할 이에게 티엔의 행방을 넌지시 묻는 그녀는 어렴풋하게나마 그들의 사이를 눈치 채고 있던 사람 중 하나였다. 문제가 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해 내버려두었던 씨앗이 자라나 발목을 잡는 순간 마틴은 약간의 짜증과 낭패, 그리고 옅은 의문을 느꼈다.
“글쎄요. 저도 별로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아니라서요.”
“그런가요……?”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여성의 의혹은 매력적인 능력자의 작은 암시에 의해 그게 존재했다는 기억조차 깨끗이 지워졌으나 마틴의 의문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였다. 그토록 가라앉았던 날들 속에서도 자신의 일을 그르치는 적이 없던 이었던 것이다.
“그게 전달할 사항인 거죠? 제가 맡아서 전해드릴게요.”
“네? 아,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지만……”
“마침 저도 볼일이 있어서요. 제가 할 수 있게 해주세요.”
뜻밖의 용기는 마틴 스스로를 놀라게 했다. 설령 그 용기의 또다른 이름이 비열함일지라도.
스스로의 판단에 의하면, 티엔 정은 누군가의 연인으로 적합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와 마틴 챌피에 대해 논하자면 그들 사이에는 티엔이 끔찍이 미워하는 부조화가 자리 잡고 있다. 그렇게 시작부터 잘못되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선을 긋지 못한 것이 화근으로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패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첫 울음이 터져 나왔을 때 티엔이 느꼈던 감정은 배신감이었다. 아마 잘못은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사랑받고 사랑을 주는 방법을 아는 마틴과 달리 티엔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서툴렀고 그 사실을 굳이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뜻하는 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때부터 그는 끝을 생각했다. 어긋난 톱니바퀴가 맞물려야 하는 이유를 그는 생각해낼 수 없었으므로. 상대가 소중해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그의 고장 난 감정조차도 마틴을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그를 설득하고 있었다.
견딜 수가 없어요. 미안해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연인이 털어놓은 괴로움에 티엔의 결심은 무너졌다. 마틴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와 닮아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능력에 먹힐 것만 같은 두려움. 자신의 잘못만이 아니었다는 깨달음과 예전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은 기시감에 티엔은 그를 두고 떠나갈 수 없었다.
적어도, 아주 적어도 그가 상대를 보듬을 수 있을 만큼 강인한 동안에는.
“안녕하세요.”
뜻밖의 방문자는 너무도 평범한 노크와 함께 찾아왔다. 가능하면 다시 보기를 원치 않았던 금발, 단정한 옷차림, 옅은 주근깨의 사내. 그의 눈빛은 여전히 티엔의 시선과 비껴나간 곳을 향해 있었다.
“음.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마틴이 꺼낸 말은 티엔에게 아직 살아있는지, 혹은 미치지 않았는지를 묻는 뜻으로 들렸고 그는 그 물음에 긍정을 표했다.
“그래. 아직은 그렇지.”
상대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쥐었다 펴보는 검은 손에서는 아직 떨림이 제대로 멎지 않았다. 매슥거리던 속은 많이 나아진 편이지만 몸의 구석구석이 제 상태를 되찾는 데에는 아직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무슨 일이지?”
굳은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한 티엔의 노력은 그로 하여금 불쾌함을 가장하게 했다. 가시 돋친 물음에 마틴의 입에서는 더욱 사무적인 태도의 말들이 흘러나왔다.
“회의 불참 건으로 부탁을 받아서요. 그리고 그때 논의된 사항으로……”
짧은 점멸. 불길한 회색빛과 부스러지는 환상이 티엔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이런 자리를 골라서. 거의 분노를 느끼는 그는 아프도록 주먹을 쥔 채로 시야가 되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티엔? ……티엔씨.”
“그 일에 대해서는 이미 해명을 했다. 볼일은 그게 다인가?”
이를 악물고 되묻는 기공사의 싸늘한 태도에 마틴은 그 이상의 대화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네. 그런 것 같네요.”
마틴은 짧은 시간 동안 작별의 인사에 대해 고민했다. 어떻게 봐도 자신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는 이에게 다시 보자는 말은 너무도 무책임하게 들렸고 긴 작별을 이야기하기엔 그들은 너무나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고마웠어요.”
이전에 티엔은 때로 마틴을 초대한 자리에서 이국의 요리를 만들곤 했다. 본인이 고향에서 먹던 음식이나, 하랑의 고향인 조선 땅의 음식까지. 사실 마틴은 그 둘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지만 어느 쪽도 맛은 썩 나쁘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언젠가부터인가 그는 동양을 방문해본 적이 없는 마틴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음식의 유래나, 맛을 내는 과정, 그걸 먹는 지방의 사람들의 이야기 따위를 알려주곤 했다. 그건 정말로 티엔 정이라는 사람답지 않은 일이어서, 마틴은 그의 말을 흥미롭게 듣는 한편 이런 식의 특별한 쓸모가 없는 이야기들을 쏟아내는 그의 머릿속을 상상해보곤 했다.
사실 그에게는 전하고 싶은 말이 훨씬 더 많은 게 아닐까, 하는. 하지만 그것들을 전부 들려줄 만큼 자신이 그에게 가까운 존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마틴은 때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했다.
오래 전에 타인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린 티엔은 그의 말을 통해 세상을 보았다. 사람들의 감정이 얼마나 다양한가를 알게 되는 건 때로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티엔 자신이 놓쳐버린 것들을 상기시켜주는 말들. 때로 마틴은 짓궂게도 티엔을 향하는 다른 이들의 감정을 알리기도 했다.
그것도, ‘숨이 막히게’ 된 후로는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목숨을 위협하는 불안에 사로잡힌 이가 다른 누군가를 위로하기란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 괴로워하고 있는 연인에게 자신의 짐까지 지울 수 없다는 핑계와 자신의 실패를 드러낸다는 부담감.
연인에게는 자신 외에도 많은 인연과 그를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 티엔은 제대로 된 버팀목이 될 수 없는 자신을 그의 곁에 두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이렇게나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본 건 처음이었다. 회색과 검정, 그리고 하얀 빛으로 뒤섞인 하늘에서 흘러넘치는 물줄기들은 마틴이 지금까지 써왔던 ‘쏟아진다’는 표현을 가소롭게 만든다. 우산에 몸을 파묻고 지나가는 행인, 작은 개울이 만들어진 배수로, 주인을 놓쳐버려 길바닥을 뒹구는 레이스 손수건. 호박색 눈에 비치는 그 모든 것들은 물에 번져 흐릿하게 번져보였다.
홀린 듯 좁은 전망을 내다보던 영국 청년이 살짝 유리창을 열고 그 너머에 손을 내밀자 굵은 빗방울이 그의 손목을 아프도록 때리곤 다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아련하게 들려오던 우레가 점점 더 가까운 곳에서 무너지는 소리를 낼 때쯤 창을 닫고 낡은 의자를 끌어와 그 앞에 턱을 괴고 앉은 마틴은 자신이 낯선 땅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했다.
이날 동양에서의 첫 아침을 맞이한 마틴은 고장 난 라디오의 잡음 같은 소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아마 무더위에 시달렸던 전날의 피곤 때문인지 그리 이른 시간은 아니었지만 몸은 여전히 개운하지 못하다. 다행히 중요한 일정은 다음날부터 시작이지만 사나운 날씨에 더해 이대로는 눅눅한 숙소 방에서 꼼짝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멍하니 의자 위에 늘어져 있던 청년은 길가에서 잡화나 과일을 팔고 있던 노점상들이 지금은 무얼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들은 서툰 발음의 영어로 열심히 호객행위를 했으나 마틴과 함께 온 동료는 그런 이들을 무시로 일관했고, 이동 경로에서의 주도권은 그에게 있었으므로 바쁜 첫날 동안 마틴은 새로운 지역을 제대로 둘러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 와중 그가 그나마 건질 수 있던 건 새빨간 자두 몇 알 정도로, 마틴은 생각난 김에 탁자 위에 놓여있는 마지막 과일을 집어 들었다. 이것 외에 방 안에는 낡은 가구와 몇 안 되는 여행 짐뿐이었는데, 배가 견딜 수 없게 고파지기 전에 날씨가 나아지면 좋겠지만 그런 운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마틴이 막 자두를 입에 물려는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이런 일정하고 분명한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를 알았고 마인드리딩인 그의 능력도 상대가 누구인가를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다. 유리창에서 시선을 뗀 청년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좁은 방을 가로질렀다.
“나가요─.”
별 망설임 없이 연 뻑뻑한 나무문 너머에서 마틴이 읽을 수 없는 검고 흰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검은 머리칼은 물기로 흐트러져 있고 역시나 검은 색 바탕에 은은히 용이 수놓인 창파오 자락도 물에 젖어 전등 아래서 반질거리고 있었다. 이런 날씨에 벌써부터 어딘가를 다녀오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드디어 일어났군.”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티엔이 한숨을 쉬며 꺼낸 말에 마틴은 의아함을 표한다.
“일찍 왔었어요? 못 들었는데.”
“그때는 노크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면 대체 어떻게 일어나지 않은 걸 알았느냐는 당연한 의문이 마틴의 뇌리를 스쳤지만 아마 대답은 ‘감’ 정도일 게 뻔했다. 평소에는 합리성을 그렇게 따지는 사람이 자신에 관해서는 왜 이런 식이 되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심지어 그의 판단은 잘 들어맞기까지 했다.
“어……. 네. 그건 뭐예요?”
티엔은 한 팔에 우산을 걸치고 다른 한쪽 손에는 두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 질문을 받은 그가 말없이 건넨 봉투에는 점점이 물방울이 튀어 있고, 마틴이 그것들을 열어보자 안에는 각각 샌드위치와 빠오즈(包子)가 두 개씩 들어있다. 서양식과 동양식의 아침식사였다.
“고마워요.”
꽤 인상적인 배려에 웃음이 나는 마틴은 봉투 안의 음식을 꺼내 나눠 담아 한 쪽을 티엔에게 돌려주고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행동에 옮겼다.
“여기요, 답례.”
티엔은 입가로 들이밀어진 통통한 자두에 약간의 의아함을 보였지만 이내 축축한 과육을 작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나 떠오르는 표정을 보아하니 그는 이 간식거리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 시기에는 별로라고 했잖나.”
뚱한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마틴은 자두의 반대편을 본인의 입 안에 밀어 넣었는데, 씹는 순간에 느껴지는 껍질의 신맛이나 습한 기후가 그대로 녹아든 과육은 확실히 맛이 좋다고는 하기는 어려웠다.
“어때요, 맛만 있는데. 당신은 아침을 사러 나갔던 거예요?”
“아니. 다녀오는 김이다. 능력에 대한 소문을 모아봤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군.”
두 사람이 먼 홍콩 땅까지 와야 했던 이번 출장의 목적은 새로운 거래처와의 교섭, 그리고 기존에 수집한 동양 능력자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고 갱신하는 일이다. 티엔이 벌써부터 업무에 착수하고 있는 건 지나치게 그리 놀라울 것도 없지만, 마틴은 이 사람이 대체 어떤 식의 탐문을 했을지 꽤 궁금해졌다.
“안 바쁘면 들어와서 같이 먹을래요?”
“나중에. 정리할 일이 몇 가지 있어서 말이다.”
“네, 뭐. 문은 열어둘 테니까 그냥 들어와요.”
뒤돌아 떠나기 전에 티엔은 아직 정돈하지 않아 삐죽빼죽 솟아있는 금발 머리칼을 쓰다듬어 더욱 헝클어뜨렸다. 딱딱하기 그지없는 그가 즐기는 정말로 몇 안 되는 장난이었다. 마틴이 그렇게 저 좋은 대로만 하고 떠나려는 연인을 붙잡아 살짝 입 맞추자 그도 싫지 않은지 덤덤하던 그의 얼굴에는 피식 미소가 떠올랐다.
“금방 오지.”
이마를 맞댄 채 건네는 속삭임이 마틴의 귀를 간질인다. 그래서일까, 그가 떠난 방은 여전히 눅눅했고 밖은 폭우의 물줄기로 가득 차있었지만 그 거칠기만 하던 소음은 이제 마틴에게 꽤나 상쾌한 소리로 들려오고 있었다.
아, 잘도 웃는군. 그 전까진 평온하다거나, 차분했다고 묘사할 수 있었을 만한 내 기분은 곧장 바닥으로 추락하고, 방금 전까지 준비해뒀던 온갖 미사여구나 대화를 이어가려 기억해뒀던 수십 가지의 화제는 순식간에 내 머릿속에서 종적을 감춰버렸다. 하지만 대체 왜? 내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오늘 아침에 이마에 미열이 있던가? 방금 손댔던 와인잔에 금이 가있어서, 내 손톱 밑에 유리조각을 박아 넣기라도 했나? 아니면 그 안에 담긴 와인이 상해있기라도 했던가? 그 모든 질문에 대답은 전부 ‘아니’였다.
결국 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말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불쌍한 몰골이 되고서야-물론 그 와중에 방긋방긋 미소짓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그건 내 천성이자 나의 가장 놀라운 기술이다-내 상태의 원인을 인정하기로 했다. 티엔은 실제로 웃을 줄을 알았던 것이다! 그 기분 나쁜 비웃음이나 어이없다는 코웃음을 제외하고도 말이다. 그리고 나는, 다른 누가 아닌 그의 연인이라는 신분의 마틴 챌피는 그걸 타인을 향한 그의 표정에서부터 알아야만 했다. 이게 세상의 부조리함이 아니라면 대체 뭐란 말인가.
(……)
그는 멍청이가 아니다. 애인의 기분 하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말을 걸지는 않겠지. 그래, 한때는 그렇게 믿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티엔은 똑바로 나를 향해 다가왔고, 심지어 너무도 태연하게 입을 열어 내가 가장 원치 않는 물음을 던지기까지 했다.
“무슨 일 있었나?”
제길. 정정한다. 그는 남들과 다를 바 없는 멍텅구리였다. 이건 전적으로 아직까지 그가 얼마나 둔한지를 깨닫지 못했던 내 탓이다. 언제나, 모든 게! 누구보다 이해심이 뛰어난 내가 누굴 탓할 수 있으랴.
“오, 아뇨.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그러니까 가던 길 그대로 가시라고요.”
나는 안면에 경련이 일어나도록 미소를 지으며 가버려라, 라는 말에 최대한 감정을 담아 쏘아붙였지만 별 효과가 없는 것 같았다. 길가의 돌담보다도 더 뻣뻣한 그에겐 협박이나 회유 따위가 물론 거의 먹혀들지 않는다. 이 점까지 잊고 있던 건 아니지만, 아무리 이해심이 많은 나라도 희망사항 정도는 가질 수 있지 않겠나.
“지금 화가 난 건가?”
“아뇨.”
“화났군.”
꼴같잖게 걱정하는 얼굴을 하고서 꺼내는 단정적인 어조가 내 화를 두 배는 더 부채질한다. 지금 여기선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점도 큰 문제 중 하나였다. 나는 어느 회사에서 야심차게 내놨다는 말하는 인형처럼 같은 말을 반복할지, 아니면 지금 당장 화를 쏟아낼지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래서 둘 중 이 상황을 좀 더 원만히 넘어갈 수 있는 게 어느 쪽인지는 두 말할 필요도 없겠다.
“아, 잘 아시네요! 어디 왜 그런지도 맞춰보지 그래요?”
훨씬 낫군. 드디어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무고한 얼굴이 내 화를 부추겼다는 건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대답을 주지 않고 곧장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하려 했지만 티엔 정이 얽힌 일이 그렇게 만족스럽게 끝날 리 없다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저기요? 좀 비켜줄래요?”
“누가 당신을 모욕하기라도 하던가?”
“아, 네. 그랬긴 하죠.”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의 얼굴이 더 심각해졌다. 누군지 알면 한 대 치기라도 할 기세군.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애석할 뿐이다.
(……)
“당연히 억울하죠, 저한테는 안 그러면서!”
“어차피 그게 거짓표정이라도 말인가?”
“그래서요? 나한테는 진심으로 웃을 수도 없다는 말이잖아요.”
티엔은 여러모로 심기가 불편한 것 같았지만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안 그래도 심란하던 관계를 이 참에 아주 끝내버릴까 하는 생각이 물씬 피어오르고 있으니 말 다한 셈이다.
쓸데없는 말을 토하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한참 동안 숨을 고른 뒤에 그는 너무나 정석적인 사과의 언어를 꺼냈다.
“미안하다.”
(……)
“거짓으로라도 남에게 이런 짓은 하지 않겠지.”
시간아 멈추어라, 너는 실로 아름답다! 웃기는 소리다. 나는 이 시간이 당장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대로 화를 누그러뜨리기엔 내 꼴이 우스워질 텐데 그러지 않을 수도 없으니 말이다.
-아 둘이 입맞추면 좋겠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누가 먼저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두 사람에게는 모두 제대로 된 경험이 없었다. 이런 상황 자체를 겪을 일이 없었거나, 혹은 약간의 편법으로 모든 상황을 조율할 줄 알았거나. 그것은 곧, 그 둘이 모두 예상치 못한 상황에 터무니없이 취약하다는 뜻이었다.
“음.”
먼저 입을 연 쪽은 마틴 챌피였다. 그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라도 자신이 서투르다는 티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말 한 마디를 꺼내기 위해 마틴은 지금까지 지켜왔던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의 자부심이나 오기 같은 것들을.
“고마웠어요. 티엔.”
그건 티엔에게 있어서도 뜻밖의 말이었다. 그는 이 어트랙티브가 끝까지 오만한 태도를 유지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이 만남이 끝이 어색하고, 뒷맛이 좋지 않을 것까지도. 예상을 빗겨나간 반응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당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이대로 작별의 인사와 함께 헤어졌어야 했던 그 둘의 관계는 깨지고 사라져버렸다.
“진심인가?”
그런 물음을 들어야 하는 이는 결코 달갑지 않다. 다시 한 번 스스로의 자부심을 꺾어야 하는 그 순간에, 금발 청년은 언제나와 달리 상대에게로 그 책임을 모두 전가해버렸다.
“무슨 대답을 바라는데요?”
의도치 않게도 그 둘의 간격은 지나치게 가까웠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더라도 서로의 존재를 필요 이상으로 의식할 수 있는 거리. 아마 그들은 그쯤에서 영영 헤어지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그건 분명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올바른 해피엔딩이었다. 그랬던 적도 있었지, 라는 회상과 함께.
손끝이 맞닿고 입술이 마주치는 순간, 그들은 서로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또 어디에서 멈춰야만 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긴 입맞춤, 얇은 잠옷 아래로 닿는 손길, 침대 곁 스탠드 조명의 은근한 불빛. 다음 단계를 위한 완벽한 조건은 갖춰진지 오래다. 그들 중 한쪽이 지구 반대편에서 얌전히 업무를 하고 있어야 했다는 점만 빼고는.
“잠깐, 잠깐만요. 가야한다면서요?”
무드야 어쨌든 할 일은 할 일이다. 늘 바쁘다느니, 돌아가야 한다느니 하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을 붙잡는 짓을 올곧은 심성을 가진 마틴 챌피로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었다. 그게 단순한 도피의 일환이라면 더더욱.
“정말……. 제가 아직 자고 있었으면 어쩌려고 했나 모르겠네요.”
“그랬다면 얌전히 돌아갔겠지. 당연한 것 아니오?”
아, 역시. 간혹 마틴은 배려심 넘치는 누군가가 잠든 그의 곁을 다녀갔다는 흔적을 느낄 때가 있었다. 물론 여분의 현관 열쇠는 집 안 서랍 깊숙이 처박혀 있는 참이었다.
“그대는 자는 얼굴도 사랑스러우니 괜찮소.”
24세의 영국 신사는 남의 어깨에 늘어져 실없는 소리를 잘도 내뱉는 33세의 회사원의 등을 도닥였다.
“또 누가 그렇게 힘들게 했어요? 저한테 말해 봐요.”
“……그거 알고 있소, 말디(Martie)? 나는 그냥 이대로 있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아.”
챌피는 손쉽게 그의 마음을 엿듣는 대신에 아날로그적인 방식을 선택했고, 톰슨은 그런 마인드리더를 믿고 비밀을 남긴다.
그리고 릭은 마틴이 별로 달갑지 않다고 밝혔던 애칭을 쓰고 있었다. 그새 약속을 잊어버린 게 아니라면 이건 곧 죽을 것 같다는 신호였고, 어쩔 수 없다. 이마에 한 번, 볼에 한 번, 입술에 한 번. 마틴은 거의 필사적이던 스킨십과 달리 안정감 있는 모닝키스를 선사했다. 영국의 시간으로는 조금 이르고 신대륙의 시간은 아직 깊은 밤에 멈춰있는 참이었지만.
지쳐있던 얼굴 위로 미소가 퍼지고, 마틴은 가볍게 마주 웃었다. ‘사랑스럽다’ 같은 말을 거리낌 없이 쓰는 그야말로 때때로 보이는 모습이 사랑스럽고 귀여워 머리라도 쓰다듬고 싶을 지경이다.
"고맙소. 이제 힘이 나는 것 같아."
“힘들면 언제라도 찾아와요. 오늘처럼 급하게 굴지는 말고요.”
더 지체할 수 없게 된 릭이 급하게 떠나며 남긴 허전함이 방을 채우고, 마틴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루를 시작할 준비며 재단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에 대한 생각.
그는 지금쯤 사무실로 돌아가 있을까. 한숨을 내쉬고, 작성해야 할 보고서라도 내려다보면서. 청년은 그가 안쓰러우면서도 웃음이 났다. 벌써부터 그를 다시 보고 싶지만 그 마음은 잠시 눌러둘 수밖에.
[티엔마틴] 강아지
7살 남짓 되어 보이는 아이가 들뜬 얼굴로 자그마한 강아지를 안고서 재잘대고 있다. 아버지일 듯한 사람의 손에 들린 사료봉지와, 언뜻 들려오는 아이와 어머니의 대화. 밥도 네가 꼭 챙겨줘야 하고, 괴롭히거나 하지 말고…… 물론이죠, 제가 다 할게요!…… 분명 아이는 꿈에 그리던 선물을 받아 부푼 마음으로 귀가하는 도중이리라.
그러나 스쳐지나가는 가족의 화목한 풍경을 지켜보는 눈빛은 매서웠다. 평소 사람을 향하는 얼굴은 늘상 미소가 만면했던 마틴이었기에 티엔은 파트너의 그런 반응이 꽤나 기묘하게 여겨졌다. 아직 어색한 사이의 팀원과 묶여 약속시간을 어긴 증인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건 분명 짜증이 치밀 일이지만- 약간 혐오의 기색마저 엿보이는 그의 표정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개를 싫어하나?”
“……아뇨? 좋아하는 편이에요.”
최대한 논리적으로 상황을 정리해 물음을 던진 티엔에게 돌아온 것은 간결한 대답이다. 좋으나 싫으나 붙어있어야 할 파트너에 대해서 알아둬야 한다는 원칙 하의 노력이었지만 별 소득은 없는 셈이었다. 하긴, 개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있어도 싫어하는 사람은 분명 드문 편이다.
“귀엽고 똑똑하잖아요.”
자신의 답변에 말뚝이라도 박으려는 듯 부연설명을 더한 마틴은 곧장 증인을 독촉하는 전화를 걸었고, 이날 둘 사이에는 그 이상 업무 외의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먼 지역의 부서로 옮겨가게 된 팀원의 송별회가 있던 날이었다. 이런 자리에 참여할 정도의, 딱 거기까지의 사교성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티엔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혼자 음료를 마시고 있는 참이었고 마틴은 미우나 고우나 그런 사람을 파트너로 두고 있다. 둘의 사이가 전과 같았다면 젊은 형사는 이런 사람을 모른 척 하고 평범한 사교활동을 즐기고 있었을 것이다.
“이봐요.”
다가가 곁에 자리 잡은 마틴에게 파트너는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고, 딱히 할 말이 없었던 둘은 조용히 잔을 홀짝였다. 평소라면 일과 관련된 이야기로 그리 어색하지는 않았겠지만 챌피는 이런 날의 대화에까지 업무를 끌고 오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개를 싫어하냐고 물었던 거요.”
옛 파트너의 송별회에 참가하지 못했던 기억 때문인지, 조금 감상적인 기분의 마틴은 꽤 예전의 일을 떠올렸다. 아직 티엔이 기억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어떤 식의 오해를 했을지 신경 쓰이면서도 굳이 설명할 필요는 느끼지 못해 묻어두었던 일이었다.
“전 그 강아지가 가여워서 그랬어요. 자길 사들고 갔다고 해서 그 가족을 맹목적으로 좋아하게 되겠죠, 분명.”
“아마 대부분의 개들이 그렇게 살고 있겠지.”
그도 당시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고, 의외로 그 강아지도 좋은 가정에서 사랑을 받을 거라느니 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전 그런 게 싫어요. 제대로 된 선택이 아니잖아요. 어떤 사정으로 버려지거나 잘못 대해지거나 학대당해도 강아지는 주인을 여전히 그리워할 테니까.”
티엔은 자신의 파트너가 보기보다 냉소적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걸 자신의 입으로 시인하는 걸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가, 라며 고해성사 같은 말들을 넘겨버린 그에게 마틴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이야기 들어봤어요? 사랑에 대한 말과 소년 이야기요.”
고개를 젓는 그에게 호박색의 눈은 그럴 줄 알았다는 웃음을 짓는다.
“요약하자면 이거예요. 어떤 소년이 아픈 말에게 찬물을 먹인 탓에 병이 악화되고 말은 죽고 말았는데, 소년의 그런 행동은 사랑과 무지에서 우러나온 거였죠. 제 생각엔 아마 말도 그 소년을 좋아했을 거예요.”
웃음은 곧 쓴웃음이 되고 마틴은 씁쓸한 기억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뭐, 사람 사이라고 해서 그런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이 일을 하다보면 보는 것들이 말이죠……. 맹목적인 감정이나 방법도 모르고 상처를 주는 것들이요. 어쩌면 당신도 강아지를 잘 돌보겠다고 말하는 아이였다가, 어느새 말에게 찬물을 먹이고 있게 될 수도 있죠.”
“……여전히 무례하군.”
애초에 누군가에게 그런 식으로 감정을 쏟는다는 생각을 티엔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그런 건 불필요한 감정이었으니까. 따라서 이 흑발 사내의 뇌리를 스친, 그렇다면 직접 확인해보겠느냐는 말은 너무도 우스웠다. 그는 마치 이상스럽게 말이 많아진 파트너 탓에 생각에 혼선이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흠, 부정은 안 할게요.”
애매하게 대화를 끝마친 마틴은 다른 동료가 있는 곳을 향해 떠났고, 티엔은 예정보다 일찍 작별인사를 남기곤 자리를 피했다. 아직도 밖은 날이 저물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꿈은 무의식의 영역이다. 따라서 아무리 마인드리더라도 남의 꿈을 들여다보는 일은 쉽지 않은데, 굳이 그렇게 하고 싶을 때의 편법은 다음과 같다. 잠들어있는 사람을 강제로 깨운 뒤 마음을 읽거나(물론 이 경우 꿈의 내용은 상당수 유실되어버린다), 혹은 반쯤 깨어있는 사람의 꿈을 엿듣거나. 이런 시도에서 나는 간혹 흥미로운 결과를 보기도 했지만, 여기저기 뒤틀려있는 얕은 꿈은 대부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의미한 기억의 나열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독심술사의 자서전에서.
미지근하고 습기 찬 공기가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날이었다. 피로 탓인지 무엇 때문인지 모를 미열에 마틴의 하루는 다른 이들보다 더 느리고 힘겹게 흘러가고 있었고, 그게 딱 견딜 수 있을 만큼의 불편이라는 점은 그의 심기를 교묘하게 건드리고 있다.
이것만 하고 쉬면 될 것 같은데. 아니, 이것만. 이것만. 또 이것만. 이런 식으로 미루기를 거의 세 시간 째, 마틴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편하게 둘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나섰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 푹신한 침대에 파묻히고 싶은 욕망이 그를 부추기지만, 아쉽게도 청년은 잠깐의 휴식 후 자신이 남은 몇 시간을 버텨낼 수 있으리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거의 맹목적인 그 믿음은 워커홀릭의 오만한 자가진단이다.
반쯤 열려있는 문 안으로 발을 들이기 전, 마틴은 내부의 동향을 확인하기 위해 아주 약간의 능력을 사용했다. 그는 잠깐의 쉬는 시간을 평온하게 보내고 싶었을 뿐 다른 의도가 없었음을 이름을 걸고 맹세라도 할 수 있었다. 휴게실이 조용하다면 능력을 더 쓰게 될 일도 없을 테고, 그렇지 않다면 마틴 본인이 다른 곳을 찾아 떠나면 되는 문제일 뿐이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기에 가졌던 기대와 달리 그곳엔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딱 한 사람. 어쩌지? 도리어 피곤해지는 건 정말이지 사양이지만 발걸음을 돌리기에는 애매한 숫자였다. 마인드리더가 가벼운 고민에 빠지려던 바로 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뜻밖의 단어가 흘러들어왔다. 마틴. 그건 바로 그 자신의 이름이었다.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생각의 음색이 누구의 것인지를 깨달은 마틴 챌피는 더 큰 고민에 빠졌다. 이제 와 새삼 누구의 마음을 읽는 데에 거부감을 가지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 아이는─ 특히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지금껏 그 애를 피해온 이유가 무엇이었는데.
무겁던 머리가 이제는 거의 지끈거리고 있다. 하느냐, 하지 않느냐.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선택의 갈래에서 그는 결국 자신의 능력의 힘에 굴복하고 만다. 들을 수 있는 것을 듣지 않기로 선택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신중히 둘러본 주위에는 눈에 띄는 사람이 없었고, 마틴은 복도에 기대어 문 너머의 생각에게로 정신을 집중했다.
혼자임에도 대화의 형식을 가진 소리들. 묘하게 섞이는 잡음. 그제서 마틴은 아이가 생각에 잠긴 것이 아니라 꿈을 꾸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건 아주 약간의 방해만 있어도 깨어져버릴 얕은 꿈이었지만 아이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깨어나기 직전의 혼란이 더해져서인지 들려오는 생각의 맥락은 여기저기가 빠지거나 군더더기가 붙어 매끄럽지 못하다. 그러나 확실한 건 아이가 악몽을 꾸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마틴이 등장하는, 그리고 떠나간다는 내용의. 그 한결같음에 마틴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그 아이는 보호자를 찾아 울먹이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마틴보다 예닐곱 살은 어리지만 영국에서 제대로 교과과정을 밟았다면 슬슬 A-level을 공부할 나이고, 동양 특유의 앳된 얼굴을 가지고도 신체는 꽤나 성숙하다는 느낌이 있다. 이하랑, 17세, 영을 다루는 독특한 능력자. 그리고 또 다른 특이사항으로는─ 같은 재단 소속의 마틴 챌피를 사모하고 있다.
하랑이 처음으로 호감을 표시했을 때만 해도 마틴은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 알지 못했다. 나이가 예닐곱은 차이 나는 선배를, 그리고 무엇보다 남자를? 마음을 읽었으니 그게 마틴의 착각일리는 없다. 이제 아이는 꿈에서까지 마틴을 그리고 있었다.
하랑은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적이 없지만 설령 그랬더라도 마틴이 그걸 받아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가 하랑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제쳐두고서라도, 과연 주변에서 그들을 어떤 눈으로 볼지. 특히 하랑의 보호자인 브루스나 티엔은 마틴이 아이의 마음을 가지고 놀고 있다 여길 게 뻔했다.
만약 그들이 이 일을 알게 되면. 하랑, 그건 네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란다. 저 독심술사가 네게 손을 쓴 게야. ……아니라는 변명조차 우스워지는 상황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손을 써야 할까.
마틴은 손쉽게 남의 호감을 살 수 있는 만큼 그 반대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함께했던 몇 가지 추억이나, 밤새도록 누군가를 그리며 설레던 기억을 지워버릴 수도 있다. 감정의 무게를 서서히 덜어내고 최종적으로는 그게 존재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도록.
그렇게 하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더라. 마틴은 등에 닿는 서늘한 콘크리트 벽을 느끼며 생각에 빠졌다. 처음부터 자신을 꽤 마음에 들어 하기에 이 동양 소년에게는 굳이 능력을 쓸 필요조차 거의 없었다. 그랬던 마음이 이렇게까지 자라난 건 글쎄, 꽤 기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며 또 그때마다 적절한 조치를 취해왔다는 점을 제외하기만 한다면 썩 괜찮은 설명이다.
결론을 내리지 못한 마틴은 아직 하랑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자신을 보고 웃는 얼굴이며 태연한 척 노력하는 말투까지. 그게 안타까워 견딜 수 없어졌을 때 무언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지, 마틴은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었다.
여전히 몸은 좋지 않고 하랑의 악몽은 이어지고 있다. 마지막 이기심으로 그의 마음에 관여한 동시에 들려오는,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나는 소리.
선잠에서 깨어난 소년이 꿈의 내용을 다시 떠올리기 전, 청년은 발소리를 죽인 채 그 자리를 황급히 떠나버렸다.
약간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날이었다. 싱그럽던 이파리들은 어느새 반짝이던 윤기를 잃었고 덤불 사이에 붙잡혀있던 장마의 습기는 점차 말라가고 있다. 여름의 결실로 피어나 자라난 풍요는, 곧 멀리서 메마른 북풍이 불어올 때에 빠르게 스러지고 말리라.
인기척이 있기 전에 온갖 미물들은 먹이를 찾거나 위험을 피해 분주하게 움직이며 낮은 웅성임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한순간 그것들은 일제히 모습을 감추어버리고, 작은 소란 뒤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하늘이라는 이름의 사내. 어두운 빛깔의 가벼운 차림을 한 그는 잘 단련된 신체와 단단한 인상의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길조차 나지 않은 나무와 수풀 사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헤치는 그는 숲의 고요를 깨고는 다시 정적을 내려앉게 만들곤 한다.
산의 짐승들은 이미 그를 여러 번 보고 겪어왔음에도 이상스러울 만치 그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쉬이 놀라 굴속에 몸을 숨기는 털뭉치들은 물론, 날개 달린 것들이나 발톱이 날카로운 영리한 것들도 그에게는 호기심의 눈빛마저 보내지 않는다. 오랜 시간 이곳에 자리 잡고 있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산의 일부가 아닌 존재였다.
티엔에게는 왕래가 있는 친지도, 단 몇 마디를 나눌 말벗조차 없었다. 사실 그의 곁에 풀이나 나무가 아니라 수십 수백 명의 사람이 있었다 해도 그는 지금과 똑같은 삶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거처이자 무덤인 곳에서 달이 이지러지고 차오르기를 반복하며 티엔은 날을 헤아리길 그만두었고, 정말로 긴, 오직 혼자만의 시간이 흘러갔다.
치열함에서 튕겨져 나와 무료 속에 던져진 티엔은 매일같이 정처 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계절을 좇아 느릿하게 변하는 풍경. 그 사이에서 오직 그만이 변하지 않은 채 멈춰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새로운 것이 그를 맞이하는 일은 드물다. 마치 지금 이 순간 그의 시선을 빼앗은 누군가의 존재처럼. 이곳에서 볼 수 없을 빛깔에 티엔은 잠시 눈을 의심하고야 말았다. 금실로 엮은 듯 밝게 빛나는 머리칼. 뿐만 아니라 나무그늘 아래서 유난히 희게 보이는 피부를 더해 그 사내는 마치 수풀 사이에 던져진 백옥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
이질적인 풍경에 티엔은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기척을 눈치 챈 사내가 티엔에게로 눈길을 돌리고, 위화감은 더욱 커져간다. 이 부근에서 사람을 만나본 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아주 심각하게 길을 잃었거나, 희귀한 약초라도 찾고 있거나, 결론적으로 그런 이들에게는 어떤 종류인가의 절박함이 있었다. 그러나 이 사내는 달랐다. 절박은커녕, 그에게서는 일말의 곤란함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이거, 그 집 건 아니죠?”
산간에 어울리지 않는 멀끔한 차림을 한 사내의 손에는 모가지를 붙잡힌 검은 수탉 한 마리가 축 늘어져 있다. 번질거리는 깃털로 뒤덮인 커다란 몸체는 분명 숨이 붙어있을 적 분명 닭장에서 가장 높은 횃대를 차지했으리라. 기이하지 않은 부분이라곤 없어 보이는 그는 약간 섬뜩한 느낌마저 드는 옅은 색의 눈으로 티엔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니.”
짧은 대답. 애초에 티엔은 가축을 키우지 않는다. 안심의 표현인지 사내는 눈꼬리를 휘며 웃음을 짓는데, 어쩐지 그 표정만은 어딘가 기시감이 있어 그는 더욱 더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잘 됐네요. 혼자서는 좀 많은데 같이 먹을래요?”
“……사양하지.”
티엔의 눈살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대체 무얼 권하는 걸까. 사내의 모습을 좀 더 찬찬히 뜯어보니 그의 복장은 그리 화려하지는 않아도 부드럽게 몸을 감싸는 모양새가 질 좋은 비단으로 되어 있는 게 확실하다. 적어도 이런 곳에서 낯선 이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새고기를 나눠먹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사실 그가 누구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티엔은 이런 자와 엮일 필요가 없다고 여겨 예의상의 작별인사조차 없이 가던 길을 그대로 향하는데, 묘한 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그 사내가 태연한 얼굴을 하고서 그를 뒤따르고 있었다. 그 자는 보기와는 달리 가볍게 산을 탈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왜 따라오지?”
“우연히 가는 길이 같나 보네요.”
빙글 웃는 얼굴은 특이한 용모와는 별개로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상이지만, 지금의 상황이며 티엔의 성격 같은 것들은 사내의 행동을 웃어넘길 수 없게 만들었다.
“이 앞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럼 당신은요?”
아무것도 없는 곳을 향하는 남자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험한 곳이다. 길을 잃은 게 아니라면 당장 돌아가는 게 좋아.”
“음─.”
반응은 석연치 않지만 그의 경고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사내가 꺼낸 첫 마디가 그렇게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었다면 티엔이 가장 먼저 던졌을 말은 이것이 되었을 것이다.
“산속에 이상한 사람이 있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네요.”
가볍게 웃으며 뱉는 그 말에 티엔은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굳이 이상(異常)에 대해 논하자면 지금 이 시점에서는 그보다 금발 사내 쪽이 훨씬 더 어울릴 게 틀림없었다.
“걱정해주는 거라면 고마워요. 그런데, 전 제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거든요.”
사내는 제법 자신에 찬 태도였다. 글쎄. 과연 어떨까. 몸을 지킬 무기라도 숨기고 있는지는 몰라도 산에는 제법 위험한 짐승들이 있고, 심각한 예외이긴 하지만 만일 티엔에게 그럴 의향이 있었다면 사내는 이미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훔친 물건은 혼자 조용히 처리하는 게 좋을 텐데.”
슬슬 짜증이 동한 티엔의 대꾸에 그는 짐짓 속상한 채 항변한다.
“산에 있는 걸 잡았으니 훔친 건 아니죠. 어차피 그냥 두면 산짐승한테 먹힐 테고.”
그 말을 짜 맞춰 보자면, 어느 집에선가 자유를 찾아 떠난 용감한 수탉이 결국 이 사내의 손아귀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게 과연 떳떳한 사유일지는 제쳐두고서라도 티엔은 그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이상 무슨 말을 하더라도 능청스럽게 넘겨버릴 것이라는 예감에 의하여. 그는 좀처럼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시도를 달갑게 여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더 대화를 잇기를 그만 둔 티엔은 그 자의 존재를 무시하기로 했다. 그런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한 건지 냉정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등 뒤로는 더 이상 인기척이 들려오지 않는다.
“뭐, 오늘이 때가 아니면 다음에 제대로 선물이라도 들고 찾아갈게요.”
멀찍이서 작지만 또렷한 외침이 들려오고, 흘끗 돌아본 곳에 어디에서도 눈에 띌 듯 밝았던 그 빛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묘한 이였다. ─찾아온다고. 되새겨본 그 말은 꼭 상대가 어디에 사는지를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티엔은 그 일을 잊어버렸다. 물론 주위에 무심한 그로서도 종종 그런 일이 있었지, 라고 떠올릴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몰개성 사이에 끼어든 특별함은 신기하리만치 아득해지는 법이라, 언젠가 티엔이 그 만남을 꿈이라 의심하게 되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가 꿈을 꾸지 않은지 꽤 오래 되었다는 점을 제외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티엔은 또 하루의 길고 무의미한 여정을 끝마치고 그의 거처인 낡은 암자로 돌아온 참이었다. 단, 이날 그만의 공간이었던 이곳은 뜻밖의 침입을 허용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수년 간 알고 지냈던 사이 마냥 태연스럽게 암자에 자리 잡고 있던 금발의 사내는 여전히 헛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예상치 못한 방문이었지만 티엔은 그 자를 무심한 눈으로 비껴보았을 뿐 그를 쫓아 보내지는 않았다. 어쩌면 찾아오겠다는 것을 확실히 물리지 않은 게 잘못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때 그의 심정은 아마도, 기가 막히다, 라는 표현이 가장 알맞았다.
사내는 예고했던 대로 이번에는 죽은 닭 같은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음식을 펴놓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왔는지, 왜 굳이 원치도 않을 방문을 했는지 따져 물을만한 점은 적지 않다. 하지만 너무나도 당당한 그의 태도에 티엔은 말을 꺼낼 의욕 자체를 잃고 말았다.
마지못해 그와 마주보고 앉았을 때, 끊임없이 말을 하는 것 치고 사내는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다. 티엔 측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런 연유로 둘 사이의 대화는 바람처럼 가볍고, 도랑처럼 굽이쳤다. 그 중 티엔의 대답은 대부분 매우 짧거나 혹은 존재조차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바로 어제는 말이죠……”
그 자는 신기할 정도로 일대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산중에 어느 늙은 나무가 쓰러졌다느니, 서쪽 마을의 어느 집 여식이 혼례를 올렸다느니. 그 중 몇 가지, 특히 산에 관한 이야기들은 티엔도 알고 있는 바였기에 그 기묘한 사내는 과하게 수상할지언정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허풍쟁이는 아닌 것 같았다.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 있던 티엔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즈음 선물이라던 간식거리들은 결국 전부가 원 주인의 뱃속으로 떨어져 있다. 손님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서는 집주인이 마지막으로 돌아봤을 때, 서늘함이 서렸다 여겼던 옅은 눈은 이번엔 약간의 서운함을 담고 있었다.
슬슬 때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에는 어긋남이 없었다. 받지도 않을 선물을 핑계로 찾아오는 사내는, 슬슬 티엔도 그가 범인(凡人)이라 여길 수 없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뭔가 특별한 모습을 보이는 건 아니었다. 외모나 온갖 특이한 점들이 무색하게도 그 자는 단지 티엔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달빛이 고스란히 방 안에 고여 연못을 이루고 있던 밤이었다. 창밖의 나무그림자가 수초 마냥 흐늘거리며 티엔의 팔을 살며시 간질였지만 그의 심기는 여느 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익숙해진 방문도 이 날만은 때가 좋지 않아, 티엔은 평소보다도 과묵했고 사내는 간간히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며 홀로 호박색의 액체를 홀짝였다.
언제나와 같이 잔은 둘이었다. 이제껏 티엔은 그가 권하는 것들을 받아먹은 적이 없었고, 상대는 그저 마음이 동한다면 언제든지, 라며 그의 무관심을 웃어넘겼다. 그런 사정이 있었기에 티엔이 잔에 손을 뻗었을 때 사내는 약간의 놀라움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첫 찻물을 씻어내듯 입에 대지도 않은 술을 반상 위로 흘려버렸다. 맑게 빛나는 작은 웅덩이가 금발 사내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비추었지만 티엔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왜요, 이런 건 입에 안 맞나요?”
그는 보이는 기색에 비해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뱀 그림자가 비치기에.”
그 말의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티엔이 지금까지 보였던 것 중 가장 무례한 행동에도 사내는 예의 그 낯익은 웃음을 입에 올렸다.
“달이 이렇게 좋은데 아쉽네요.”
그 말대로 이 날은 달무리를 두른 보름달이 휘황하게 떠있다. 단지 그 점이 티엔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점을 사내는 알지 못할 뿐이다. 흘려버린 술이 아쉽다는 듯 그는 자신의 잔을 다시 한가득 채워 넣었다.
“당신은 혼자인데 쓸쓸하지 않아요?”
“전혀.”
단호한 대답에 금발의 앳된 청년은 약간 씁쓸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간 외롭게 죽을 거예요.”
티엔의 입장에서,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잘도 악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어차피 죽는다면 차이가 있나?”
“글쎄요. 아마…… 조금은 덜 비참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나는 이미 비참하게 죽었다는 뜻이로군. 티엔으로서는 드문 차가운 비아냥거림이 그의 머리를 채웠다. 바로 이런 달이 떴던 날에 그의 숨은 한 번 멎었던 적이 있다. 그날 이후 티엔은 나아갈 길을 잃었다.
“당신은 뭐에 그렇게 화난 거예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티엔은 자신의 생각이 그렇게나 쉽게 드러났는지 의아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 의문은 지금 그가 보였던 반응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무슨 말이지?”
“언제나 화나 있잖아요. 아니에요?”
말문이 막힌다. 이제까지 아무도 그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 긴 시간 동안 그의 곁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오랜 날이 지나고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고. 그는 자신이 단지 이전의 치열했던 날들을 그리워하고 있다고만 여겼다.
“너는 내게 뭘 원하지?”
“아무것도요.”
“그렇다면 왜 여기에 있나.”
“당신이 저와 닮은 건 아닐까 싶었죠. 그런 사람이 외롭게 죽을까봐 걱정했다는 건 어때요?”
불확실한 대답은 티엔을 거슬리게 했다. 그는 아직 손에 쥐어져있는 잔 바닥에 찰랑이는 액체를 들여다보았다. 그를 배신했던 자들은 이미 없고, 이제는 자신이 가진 노기가 누구를 향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적어도 그게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든 호의를 가진 이를 향해서는 안 된다는 걸, 그는 머리로 이해하고 있었다.
“뱀은 갔나요?”
화를 누그러뜨린 티엔이 작게 숨을 내쉬자 사내는 언제나와 같이 빙긋이 웃었다. 여전히 뻔뻔한 그 모습에, 방황하는 선인은 지금껏 성가시게만 여겼던 그 존재에게 약간의 미움을 가져보기로 했다.
非人
어느 곳인가, 본성과 어긋나는 일들을 해내는 기이한 것들이 있었다. 닿지 못할 곳에 능히 닿으며 다른 존재의 모습을 빌릴 줄 아는 그것들은 실로 선(仙)의 영역에 닿아있었다. 그러나 그것들 사이에서 난 작은 것은 낑낑대며 울 줄만을 알 뿐이라, 두 짐승은 젖을 뗀 자식아이에게 풀을 먹는 것들을 사냥하고 사람을 피하는 방법을 가르쳐 세상에 내보냈다. 홀로 땅 위에 선 그것은 부드러운 금빛 털가죽을 가진 유려한 몸체의 여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작은 포식동물로서 넘치도록 영특했던 여우는 남들보다 눈에 띄는 털빛을 가지고도 살아가는 데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털북숭이들과 날개 달린 것들을 사냥했고, 한 번 사람이 길러낸 것들의 단맛을 알고서는 종종 마을로 내려가 그들의 수확물을 눈에 띄지 않을 만큼 훔쳐내기도 했다.
어쩌면 여우는 어디선가 다른 영리한 암여우를 만나 유대를 맺고, 이전에 제 부모가 그랬듯 후대를 길러 내보내는 그야말로 여우다운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뒤늦게 보이지 않던 것이, 들리지 않던 것이 그것에게 흘러들며 근심 없던 짐승의 삶은 멀어지고 말았다.
본래 하던 대로 사람을 피하며 살다가도, 원치 않게 이해하게 되어버린 그들의 말에는 호기심이 동하고 만다. 자신이 사람의 모습을 취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여우는 망설임 없이 그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처음 보고, 듣고, 먹고, 입는 것들. 한 차례의 혼란이 지난 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여우는 누군가를 속였고 한편으로는 그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렇게 하면 그들이 기뻐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놀라워했고 또 사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결국은 싫증이 났다. 점차 말뿐만이 아니라 사람의 속내까지 알게 되어버린 탓이 컸을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영특한 요물이라 하여도 이전까진 아무도 그에게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여우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몇 번의 실패와 실망 끝에 이질적인 존재는 정착하지 못한 채 긴 시간을 떠돌았다.
처음 그의 소문을 듣고서, 여우는 그가 혹시 자신과 비슷한 것인가 싶어 반쯤 억지로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나 여우의 기대와 달리 그들의 공통점은 사람을 닮았다는 것뿐이었다. 평범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인지 여우는 그의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늘 화나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 몸을 가지고도 무엇이 그리도 억울한지. 뜻밖에도, 그 점을 지적했을 때 그는 전에 없이 동요한 모습을 보였다. 그건 반쯤은 여우가 그에게 부리는 심술이었음에도.
“네 머리색과 닮았군.”
그가 무심하게 던진 한 마디가 계기였다. 여우는 잠깐 동안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여우가 그에게 보인 건 어느 개울가에서 주운 황옥 요패(腰佩)였다. 여우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사람 남자의 모습을 취했으니 본래라면 그의 말은 터무니없는 소리다. 하지만 여우의 털빛이라면 분명 그 빛깔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렇게나 이질적인 모습으로 보였음에도 별 말이 없던 그는 무심한 걸까, 아니면 단순히 관심이 없는 걸까. 다른 이들과 달리 자신을 길가의 돌멩이 보듯 하는 그의 태도가 시원섭섭하면서도, 여우는 그가 드물게 보인 뜻밖의 관심에 자신의 마음이 들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 이름을 말한 적이 있던가.”
어느 날인가 그가 던졌던 질문도 그 드문 관심 중 하나였다. 과연 이름을 안다고 그걸 부르기나 할 생각이었을까.
“글쎄요. 그러는 당신은요?”
웃으며 답해 넘겨버렸지만 대답이 궁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까지 여우가 써왔던 이름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빌린 것들뿐이라, 새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는 않지만 만일 그가 정말로 그런 가칭을 불러준다면 기분이 썩 좋지 못할 것 같았다.
다행인지 그는 다시 여우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일도 없었다. 언제나 둘뿐인 그들 사이에는 너, 당신. 그 정도의 호칭만으로 충분했던 탓이다.
한동안 못 올 거예요.
작별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을 때 그는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끝까지 무어라 말을 꺼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오히려 죄책감을 느꼈던 건 여우가 아는 한 그는 그런 표정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그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기에 꿈속의 사람에게 그런 얼굴을 하게 만들었는가. 여우는 깊이 생각해보았지만 전에 없던 애매한 관계에 요물은 이렇다 할 결론을 낼 수 없었다.
꿈과 함께 찾아온 구체적이고 불길한 예감에 먼 길을 떠나며, 여우는 꿈의 내용과 달리 그에게 인사를 남기지 않았다. 어차피 기다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과 자신을 기다려주길 바라는 마음이 뒤섞여 발걸음을 붙잡았지만─ 이미 떠난 길을 뒤돌기에는 남은 시간이 너무도 적었다. 게다가 그는 언제나 그 자리에 멈춰있을 테니까.
아주 오랜 시간 네 발로, 그리고 두 발로 걸어 도착한 곳은 한때 여우가 찾아가곤 했던 도성의 번화한 거리였다. 전보다도 화려해진 그곳은 장이 서지 않는 날임에도 인파의 웅성임과 음식점의 고소한 기름 냄새로 가득했다. 그곳에는 여우가 어설프게 사람과 같고자 노력했을 때 가까워졌던 지인이 있다. 멀리서 도성을 구경하러 온, 어느 부유한 집안의 넷째 아들이라고. 그런 성의 없는 사칭과 몇 가지의 편법으로 그럴듯한 우정을 쌓았던 둘은 결국 여우의 거짓이 들통 나며 깨져버렸다.
이 여우 같은 영물과는 달리 사람은 빠르게 늙어간다. 여우가 조용히 들어선 어느 방 안에는 낯선 얼굴을 한 주름진 노인이 화려한 비단 침상에 누워 멍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누구냐. 전과 아주 똑같은 모습이구나.”
가만히 다가간 젊은 얼굴을 알아본 늙은 친구가 한숨을 섞은 말을 토해냈다. 그 안에 원망은 비치지 않지만 여우의 어깨는 작게 움츠러든다.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까봐서 이전과 같은 모습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가 이런 이질감을 미워할까봐서 여우는 한동안 문 앞을 서성이고만 있었다.
“그래, 슬슬 그럴 때가 되었단 말이지……. 아직도 사람들을 속이고 다니는 게냐?”
여우가 찾아온 이유를 그는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물음은, 그가 아직 옛 친구를 용서하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미안해요.”
그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기력을 다해가는 벗은 그 이상 여우를 추궁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쌓은 것들을 볼 때마다 네가 떠올랐었지.”
그의 말은 호의의 뜻이 아니다. 일개 상인이었던 그에게 여우의 ‘선의’는 한때 그를 비참하게, 또 분노케 했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제가 떠난 이후로 모든 건 전적으로 당신의 수완이었어요.”
“그래…….”
벗은 드디어 짐을 내려놨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쁘지 않은 삶이었지.”
옛 추억을 떠올리던 노인은 마지막으로, 옛 친구가 바랐을 한 마디를 어렵게 입 밖으로 꺼냈다.
“찾아와주어 고맙구나.”
벗의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을 때 여우는 일부러 인기척을 내어 사용인들의 주의를 끌었다. 몰래 지켜본 그의 마지막은 결코 편안했다곤 할 수 없지만 노인은 끝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아마 한 번 숨이 멎고도 땅에 매여 있는 듯한 사람을 알기는 하지만 다른 평범한 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여우는 조금 울었고, 그것은 곧 낌새를 차리고 짖기 시작한 마을의 개들을 피해 다시 먼 산속으로 떠나버렸다.
여우가 돌아온 건 그가 마지막으로 들렸던 날과 같이 그믐달이 뜬 밤이었다.
마치 어제도 그랬다는 양 태연한 얼굴로 찾아온 여우는 짭조름한 무떡과 약간 술냄새가 나는 달큰한 산사육(山査肉)을 들고 있었다. 단출한 암자 앞에 선 그는 여전히 놀랍도록 같은 모습이었고, 그건 여우도 마찬가지다.
“오랜만이에요.”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네는 여우에게, 남자는 길게 침묵하고는 겨우 한 마디를 답한다.
“다시 오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럴까도 생각했죠.”
어린 호선(狐仙)의 말은 진심이다. 먼 옛날처럼 평범한 여우의 삶을 사는 게 옳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오래도록 했었다. 하지만 이미 알아들을 수 있게 된 말들을 무시하기란, 그리고 이미 맺은 관계를 포기하기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부산스러운 준비가 끝나자 어느새 뭉근한 화톳불 위에 황주(黃酒)가 데워지고, 두 비인(非人)은 따스한 기운이 피어오르는 곁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잔을 채운 호박색의 술. 여우는 기억을 더듬어 그리 유쾌하지 않았던 그 날의 대화를 떠올리곤 자조의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예전에 했던 말은 취소해야겠어요.”
그리 매끄럽지 못한 대화의 흐름에도 그는 언제나와 같이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린다. 어쩌면 관심이 없기 때문일 수도, 또 어쩌면 해야 할 말을 모르기 때문일 수도.
“외롭게 죽는 건 제가 될 것 같네요.”
늙고 쇠약해져 누군가를 마음대로 휘두를 기력도 남지 않았을 때에, 외롭게, 혼자서, 곁을 지켜줄 사람도 없이. 아마 그게 거짓을 살아온 대가가 될 거라고 여우는 생각했다. 아직도 그게 어째서 잘못인지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누군가는 그게 잘못이었다고 말했다. 여우는 결국 죄책감을 가졌으므로 그의 말은 옳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
뜻밖의 단어의 조합에 여우는 놀란 눈으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날의 그는 예의 그 화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어쩌면 오히려, 그 표정은 언젠가 꿈속에서 보았던 모습과 닮아있기도 했다.
“제가 싫지 않다는 말이에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지만 그는 여우의 해석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여우가 건넨 술잔을 매만지다 천천히 입가로 가져간다. 여전히 대답은 없지만 여우는 조금 더 오래, 천천히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평범하지 않은 그 둘에게는 아직 꽤 긴 시간이 남아있었다.
호선(狐仙): 중국 전설 속 여우가 도를 닦아서 되었다고 하는 신선.
시해선(尸解仙): 도교가 분류하는 선인의 한 종류. 도사가 육신을 버리고 선인이 되거나, 죽은 후 유해를 남기지 않고 혹은 유해의 대체품만을 남긴 채 선인으로 화한 경우.
배중사영(杯中蛇影): 술잔 속의 뱀 그림자. 스스로 의혹된 마음이 생겨 고민함. 의심암귀로 인한 두려움.
거대일식과 함께 사막 한가운데에 떠오른 환영의 도시. 그 거대한 기계의 다발이 내뿜는 찬란한 빛은 끊임없는 모래바람 속에서도 건재하게 자신의 위용을 뽐낸다. 일찍이 본 적 없는 기술로 짜 맞추어진 메트로폴리스의 등장은 긴 시간에 걸쳐 수많은 무력과 정치상의 분쟁을 불러일으켰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이곳을 일부러 찾는 이들은 한가하거나 열성적인 학자들뿐이다. 단, 이 도시로 숨어든 누군가를 쫓기 위해서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추격자들 중 한 명. 낡은 로브로 전신을 감싸고 있는 은발의 사내는 모래의 바다를 내다보며 ‘숙녀’가 남긴 말을 곱씹었다. 본래의 목적이었던 액자의 회수는 뒤로 미뤄졌지만 그것은 자의에 의한 선택이다. 시바 포는 그의 우선순위가 안타리우스에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짧은 대화 속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한 그들은 이날의 충돌을 다른 언젠가의 것으로 남겨두었다.
그의 짧은 기다림은 무료함과 거리가 멀었다. 남자는 그의 허리춤에 메여있는 두 자루의 검을 차례로 손질하며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인기척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의 추측이 맞는다면 여배우가 언급한 ‘신사’는 그의 등 뒤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기계의 웅성임이 가득한 이곳에서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사람의 소리를 경계하는 것. 물론 그건 그에게 있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남자가 멀리 내다본 사막의 풍경은, 메트로폴리스의 불빛과 밤하늘에 수놓인 별들의 빛으로 선명하게 반짝이는 모래언덕의 윤곽이 마치 몰아치는 파도와 같았다. 장대한 자연의 조소를 감상하는 것도 잠시. 어느 순간 모래의 바다 사이에서 일어난 기이한 현상이 그의 눈에 똑똑히 새겨진다. ‘공간이 일그러졌다’는 생소한 표현이 어울리는, 뒤섞인 색채와 야릇한 광채로 이루어진 둥근 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새겨졌던 점은 이내 흐릿한 사람의 형체를 뱉어냈다. 담담히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남자는 곧 이어질 예정 조화의 사건을 기다렸다.
“누가 이곳으로 오는지 기다리고 있었네. 나, 시바 포, 그리고 네가 세 번째. 나와 동행할 자격이 있군.”
메트로폴리스의 세 번째 방문자. 사막에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차림에, 암살자를 추격하는 도중임에도 빈틈이 곳곳에 엿보이는 그야말로 일반인다운 경계의 태세. 이 남자, 릭 톰슨이야말로 시바 포가 지명한 루사노 수도원으로의 안내자였다. 그러나 오직 액자도둑의 이름에 정신이 팔린 그는 눈앞의 낯선 이가 누구이며 왜 여기에 있는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시바 포……! 그녀를 찾아야 해. 그녀가 노인의 액자를 가지고 사라졌어.”
까딱, 후드를 쓴 남자의 고개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기울어진다. 여행자의 목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어쩌면 시바를 놓친 책임의 일부는 그녀를 놓아준 이에게 있지만 그렇다고 죄책감을 가질 이유나 필요가 있을 리 없다. 이토록 쓸모 있는 능력을 가지고도 뒤늦게 도착한 건 다른 누가 아닌 릭 톰슨 자신의 책임이었다.
“흠, 이런. 그녀는 이미 이 곳을 떠났네. 액자는 그녀가 며칠 더 갖고 있기로 했어.”
무심한 대답에 릭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에게는 전투도, 누군가를 추격하는 것도 모두 난생 처음의 일이다. 그의 첫 전투는 기대 그 이상의 성과로 모두를 놀라게 했지만, 그렇다고 후자가 순조로우리라는 예상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었다. 릭이 가진 단서는 여배우가 남긴 ‘메트로폴리스’라는 단어 하나뿐. 직전까지 느끼던 긴장과 전혀 다른 의미의 거친 맥박이 머리를 통해 전해지고, 결의를 담았던 눈망울은 순간 빛을 잃어버렸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만 것이다.
한 여행자의 절망의 순간을 감정 없이 목도하던 은발의 남자, 벨져 홀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가 릭에게 시바 포의 부재를 전한 것은 그를 포기하거나 주저앉게 만들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정보를 줄 수도 있지.”
릭의 표정이 눈에 띄게 변하고, 벨져는 그가 꽤나 알기 쉬운 종류의 남자임을 확신했다. 그래, 분명 이 공간능력자는 이런 세계와 어울리지 않았으며 자신이 속해야 할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벨져가 그에게 동정을 느낄 여지는 없다. 그건 이 오만한 검사의 성격 탓만은 아니었다. 설령 정 반대의 상황에 놓여있었다 하더라도 벨져는 상대가 쓸데없는 감정으로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키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자신의 조건의 제시했다.
“하지만 먼저 날 루사노 수도원으로 데려다 주게. 그 곳에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어.”
루사노. 그 단어에 릭은 단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안타리우스는 이미 자신과 다른 이들의 손으로 파괴되지 않았던가? 시바와 액자를 제쳐두고 이미 비어있을 그곳을 찾아가려는 남자의 의도를 여행자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벨져 홀든이다. 네 이름은?”
홀든. 그 귀족가의 성과 후드 사이로 엿보이는 은발, 유창하면서도 독일어의 특색이 느껴지는 억양으로 릭은 그가 인형실 끊기 작전을 함께한 다이무스의 혈연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직전에 피어올랐던 의심이 다소 허물어지고, 릭은 높였던 언성을 억누른 채 그의 물음에 답했다.
“릭. 릭 톰슨.”
벨져는 다소 낯선 신대륙의 이름을 혀끝에 굴려보았다. 품위는 느껴지지 않지만 나쁘지 않다. 그리고 벨져 홀든은, 그들이 마주한 이래 처음으로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릭, 루사노는 당신에게도 꽤 흥미로운 장소일 거야.”
릭은 그의 단언이 단지 자신의 주의를 끌고자 하는 수단인지, 아니면 모종의 오만인가를 판단할 수 없었지만 자신이 그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할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짧은 한숨을 내쉬고, 릭은 더 이상 스쳐가는 인연이 아니게 된 그의 얼굴을 자신의 눈에 새기듯 담아 넣었다. 은발과 옅은 녹안,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창백하게 빛나는 피부. 날카로움과 수려함을 겸비한 그의 얼굴은 아마 릭의 결심이 없었을지라도 뇌리에서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좋아. 대신 약속은 지켜주시오.”
“물론.”
체념과 동시에 다른 종류의 의지를 띄우는 릭의 눈빛에, 벨져는 합격이라는 평가를 부여한다. 험난한 길을 헤쳐가게 될 것이 자명하지만, 어울리지 않는 세계에 내던져졌음에도 도망치거나 그대로 멈춰서 짐덩이가 되지 않으려는 남자. 그런 릭 톰슨은 잠깐의 동행으로 불쾌하지 않은 자였다. 그렇다곤 해도, 이 위험할지 모르는 탐색에서 벨져가 지켜내야 할 짐짝임에는 변함이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