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티엔마틴] 「검은양」통판용 샘플
마른쪽 배포전 '당신은 감동이에요!' 에 냈던 티엔마틴 동거하는 이야기입니다.
표지는 름구님께서 그려주셨습니다:D
전체연령가 / A 5 / 100p / 10,000원.
곰쮸뿌님이 주최하셨던 크리스마스 합작으로 썼던 티엔마틴 글과
그 이어지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IF설정, 평온한 분위기, 달달함(아마도).
기존의 합작글 부분에는 수정+추가되는 부분이 다소 있습니다.
통판 수량조사 폼: me2.do/FhTwIfoL
샘플은 이쪽! 뒷이야기의 앞부분입니다.
그는 한참이나 낯선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 발걸음에는 확신이, 입가에는 기대가 서려 있다. 약간의 경사를 넘자 서서히 눈에 익은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이제서야. 금발의 청년은 그의 목적지를 향해 가벼운 걸음을 옮겼다.
약간 낡은 인상을 주는 공동주택의 한구석에 위치한 어느 현관은 아무런 표식도 없는 것이 도리어 표식이었다. 호수가 표기된 문패가 떨어진 것을 지금 살고 있는 이를 포함한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하던가. 얼마 전까지는 이곳에 찾아오는 사람도 극히 드물었으니 아무래도 좋았을 만도 했다.
쓰이지도 않으면서 언제나 마틴의 주머니에 담겨있던 자그마한 열쇠가 드디어 제 용도를 되찾았다. 그것은 현관문 위 자물쇠의 틈새로 부드럽게 밀려들었고, 마틴이 열쇠를 가볍게 비틀자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그런 당연한 일의 연속이, 마틴에게는 마치 이 집이 그를 환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금발 청년은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래된 책 냄새나 부드러운 겨울 햇살의 내음이 은은히 깔린 그 안은, 생활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방문자 마틴 챌피는 낯익은 풍경을 바라보며 그리운 기분에 휩싸였다. 타인의 등을 빌려 이곳에 발을 들인지는 두 달, 그리고 이곳을 떠난 지는 그보다 약간 적은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짧은 시간을 이 공간과 함께했던 마틴이 그리움을 느꼈다는 것은 우스운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마틴은 몇 번이고 이곳으로 돌아오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눈앞의 풍경이나 냄새, 문의 감촉 등 상상 그대로의 재현에 청년은 작게 미소 지었다.
근방에서 보기 드문 동양인인 티엔 정의 집은 그러니까, 마틴이 남몰래 내렸던 평가에 따르면 어느 날 아무런 준비 없이 타인을 들이더라도 남부끄러울 것이 없을 거처였다. 그 어떤 서먹한 인연이 이곳에 찾아오더라도 아마 딱 티엔씨 같은 집이로군요, 라는 건조한 감상을 남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마틴이 바라본 집안은 떠났을 때와 달라진 것이 그리 없어 보였다. 장식이라는 개념이 희박한 실용적인 물건들과 역시나 효율을 중시한 배치들. 무채색의 물건들이 깔끔하게 놓인 가운데 간간이 보이는 낯선 문자들이 조금 기묘한 느낌을 더하고 있다. 그렇게 마틴이 그대로인 것과 아닌 것을 열심히 눈동자에 새기고 있었을 때에, 그의 눈에 신경 쓰이는 작은 변화가 들어왔다. 식탁으로 곧잘 쓰이는 부엌 근처의 탁자는 평소 깨끗하게 비어 있었는데, 지금 그 위에는 작은 찻잎통과 함께 하얀 천이 쓰인 그릇이 놓여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에 마틴은 잠깐 망설이다가, 곧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 천을 들춰 보았다. 일렁이고 있던 마음속에 기분 좋은 파문이, 그리고 고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쩌면, 좀 더 기대하고 왔어도 좋았을 걸 그랬어요.
마틴은 주전자에 물을 채워 스토브 위에 올렸다. 그리고 끓는 소리가 시끄럽게 날 때까지, 그는 탁자 앞에 앉아 티엔에 관한 생각을 했다. 좋아하는 장소에서, 좋아하는 먹을거리들. 이제 부족한 것은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마틴은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는 것에 익숙했지만, 자신이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기다리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언제 돌아올까. 그는 마틴을 보고서 무슨 표정을 짓고, 무슨 말을 할까.
문제아였던 금발 청년이 티엔을 떠나있던 동안에도 그들은 이따금 연락을 주고받았다. 마틴은 사정상 한동안 어딘가에 정착해있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다이얼을 돌리는 쪽은 언제나 그였다. 그들이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하고 질문을 던지던 그 시간은 보통 티엔이 취침하기 직전이었다. 보통이라면 꽤 실례가 되었을 일이지만 그건 티엔의 일정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마틴의 의도였기에 티엔도 그 점에 대해 책망하지 않았다.
며칠 전의 통화는 꽤 간만이었다. 익숙한 시간에 울리는 벨소리와 짧은 신호음 뒤의 침묵. 둘은 서로를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저, 슬슬 돌아가고 싶어요.”
“……그런가.”
짧은 대답 뒤, 티엔은 단어 선택에 대해 고심했다. 이곳이 정말 ‘돌아올’ 곳이 맞는지, 일들은 잘 마무리되었는지, 이곳에서 무얼 하고 싶은지. 그가 꺼낼 수 있는 말이나 물음은 수십 가지였다. 하지만 결국 그는 짤막한 한 마디로 그런 것들을 대신했다.
“기다리고 있으마.”
티엔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마틴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의 마중이며, 함께하는 식사, 등 뒤로 닿는 체온 따위의. 너무나 당연했던 그의 혼자만의 시간은, 어느새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일상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좀 더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날 그들은 서로에게 가장 깊숙한 상처를 내보였다. 단지 털어놓는 것만으로 기억에서는 아픔이 되살아났지만, 그건 피하고 있던 과거를 마주보는 일이기도 했다. 그는 마틴의 위로에 한없이 가라앉으면서도 비어있던 무언가가 채워지는 감각을 느꼈다. 결국, 그는 스스로도 잊고 있었던 자신의 외로움을 인정했다.
그는 마틴을, 또 그 온기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현관문 앞에 멈춰 섰을 때, 티엔은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혹은, 그보다는 어떤 예감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달라진 것에 대해 언어로 표현해낼 수 없으면서도, 이 너머에 무언가 바뀌어 있을 것이라는, 그런 예감. 티엔은 그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을 해보며 굳게 닫혀있는 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마음의 준비가 있고서야, 그는 마치 숨을 고르듯, 조금 느린 동작으로 문을 열었다. 안으로부터 따듯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곧이어 의자가 끌리는 소리와, 다가오는 발소리. 낯설고도 그리운 인기척이 그 안에 있었다.
“티엔?”
기대에 찬 귀에 익은 목소리는 곧 하나의 인영이 되어 그의 앞에 드리웠다. 실망은 없었다. 상상 그대로의 재현에 그는 오히려 당황하고 말았다. 어쩌면, 충분히 기뻐할 수 없을까 하는 걱정마저 있었는데. 그런 걱정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 같았다.
“어서 와요.”
금발과 주근깨, 둥글게 휜 눈을 가진 변함없는 얼굴이 따스한 미소를 띠었다. 벌써부터 집주인 행세를 하는 그 뻔뻔하고 사랑스러운 태도에는, 아무리 그라도 작게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그가 속마음과 좀 더 비슷한 얼굴로 반가운 이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고 할까.
“잘 왔다, 마틴.”
덩달아 더 큰 미소를 짓는 마틴을 바라보며, 티엔은 그의 키가 약간 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그건 전보다 어른스러워진 그의 분위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마틴은 굳이 티엔의 얼마 되지 않는 짐을 받아들고 짧은 복도를 나란히 걸어 들어갔다.
“제가 좋아하는 걸 용케 알고 있었네요.”
그렇게 말하며 청년이 고갯짓으로 가리키는 것은 탁자 위에 놓인, 양이 조금 줄어있는 간식더미와 홍차가 담긴 찻잔이 있었다. 마틴은 티엔이 그런 걸 신경써주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티엔은 중국인답게 차를 즐겨 마셨지만 그가 입에 대는 것은 주로 흑차나 청차 종류였다. 그런데도 일부러 잘 보이는 곳에 홍차를 꺼내둔 것은 언제 올지도 확실치 않은 마틴을 위한 것임이 분명했다. 게다가 접시에 놓인 간식들은 마틴이 좋아하는 것들만으로 가득했다. 마치 기다린다는 말을 그대로 옮겨둔 듯한 그의 행동은 작지 않은 감동이었고 또 설렘이었다.
“그걸 모를 리가 없지 않나.”
티엔은 전에 가게에 들렀을 때 마틴이 조용히 눈을 빛내던 것이며, 좋아하는 과자를 아껴가며 신중히 입에 넣던 것을 꽤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다. 군것질에는 전혀 취미가 없는 자신과 정반대인 마틴을 신기하게 느낀 덕분이었다.
“간만이겠다, 나이트 티 한 잔 할래요?”
또 늦게까지 잠 못들 생각이냐는 가벼운 타박을 던지면서도 티엔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그들에게는 할 말이 잔뜩 남아있었다. 물론 티엔의 생활은 전과 다를 것이 별로 없기에, 전부터 이어진 통화에서도 이야기를 하는 쪽은 주로 마틴이었다.
청년이 다시금 차를 우리는 사이 그들은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마틴은 약간 망설이다 가족의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밤, 마틴은 몇 년간 떨어져 있던 가족에게 처음으로 연락을 했다. 그가 떠나기 전에 걸었던 자신을 잊어달라는 암시는 오래전부터 흐려져 있던 것 같았다. 능력이 좀 더 미숙하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당시 마틴에게는 망설임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차마 밝히지 못했던 마틴의 이름을 먼저 입에 담은 것은 그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마틴은, 자신에게 울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 오랫동안, 정말 긴 시간을 고민했다.
사실 이전에도 여러 번의 고민이나 시도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마틴은 자신에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가족의 목소리를 마주하고서야, 적절한 마음의 준비 따위는 영영 불가능했음을 청년은 깨달았다. 당시 티엔은 마틴에게 자신의 집을 내어주곤 어디론가 자리를 피해 있었는데, 그건 마틴에게 있어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잘 지내고 계세요. 여기 오기 전에도 잠시 들렸었고…… 아, 당신에 대해서 말했을 땐 좋은 사람일 거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요즘 같은 때 보기 드문 사람일 것 같다고.”
마틴은 그의 부모님 앞에서 지었던 수줍은 웃음을 그대로 지어 보였다. 정작 칭찬을 들은 사람은 그 말에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몰라 조용히 차를 홀짝였다. 그런 말에 무어라 평할 붙임성이 그에게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제 여동생도 정말 많이 자랐어요.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키가 훨씬 컸고……. 성적도 좋고, 친구도 많고. 그야말로 집안의 자랑이에요.”
그 말에 티엔은 마틴과 비슷한 인상의, 그러나 평범하게 자라났을 여자아이를 상상해보았다. 어린 나이부터 집을 떠나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마틴은 집을 떠난 이후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았다. 그런 사정 탓에 여동생에 대해 자랑스럽게 말하면서도 마틴에게는 어딘가 씁쓸한 기색이 비쳤다. 티엔은 그것이 자신의 착각인지 어떤지를 알 수 없었기에, 그저 조용히 축하의 말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마틴이 모든 이야기를 입에 올린 것은 아니었다. 감동의 재회나 용서, 화해 같은 것들이 있었지만 결국 마틴은 자신이 그곳에 남을 수 없음을 알았다. 그곳에는 이미 마틴의 자리가 남아있지 않았고, 마틴은 그들이 느끼는 부담과 죄책감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티엔에게 알려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음, 그리고 얼마 전까진 예전 일들을 마무리하러 다녔고요. 대부분은 잘 끝났다고 생각해요.”
마틴이 말하는 ‘예전 일’이란 그가 이전에 몸을 의탁했던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다. 마틴은 그동안 능력을 남용해왔지만 눈에 띄는 일을 벌인 적이 없고, 필요 이상의 것을 받은 일도 드물었으므로 마틴이 이용해왔던 사람들은 단지 자발적으로 가엾은 아이를 돕는 친절한 이들로 비치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마틴은 지금껏 타인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인식이 희미했다. 어쩌면 일부러 그런 식으로 죄의식을 지우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마틴은 고민 끝에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고자 결심했다. 다시 찾아갈 수 없는 이들도 있었고, 대부분이 마틴을 기억하지 못하게 됐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행동은 철저한 자기만족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제 마음은 조금 편해진… 것 같지만. 사실 좋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정작 제가 잘못했던 걸 잊어버리면 안 되잖아요.”
그렇게 말하고 마틴은 쓰게 웃었다. 티엔은 그런 마틴을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적어도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죄책감을 가진 채로 사는 게 어떤 일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마워요.”
그에게 알리지 못한 것들에 관한 복잡한 감정과, 자신을 생각해주는 그에 대한 고마움으로 마틴은 작게 웃었다. 한편으로, 마틴은 자신이 지나온 자리들을 더듬어가며 지금껏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음을 되새겼다. 그건 티엔이 그에게 있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를 자각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 뒤로 마틴은 티엔의 생활에 관해 물으며, 그가 여전히 재미없는 사람이라며 웃었다. 바로 그의 그런 점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티엔이 무미건조한 사람이라는 건 차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정말 간혹, 그렇지 않을 때가 있었지만.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아마…… 네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
예전에 받았던 뜻밖의 선물도 그렇지만, 티엔의 이런 불시의 기습에 마틴은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다.
“음……. 좋아요. 다 좋네요. 저도 당신 생각을 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의아한 눈빛을 보이는 티엔에게 마틴은 당황의 이유를 알리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행동을 자각하고 나면, 이런 무심코 던지는 말들을 듣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슬슬 일터에서 막 돌아온 사람을 길게 잡아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틴은 그만 씻으라며 티엔을 일으켜 세웠다.
“티엔, 잠시만요.”
아직 남은 말이 있는가 하여 티엔이 멈춰 섰을 때에, 금발 청년은 다가가 미소 짓더니 그를 자신의 품 안에 폭 안았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뒤따르는 건 여전히, 그리고 어쩌면 전보다 더 어색한 반응.
“다녀왔어요.”
귓가에 속삭여오는 말을 들으며, 망설이던 티엔의 양손은 그제야 마틴을 마주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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