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생각나서 써본 아무말입니다.
마틴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당황하는 티엔(?)
가라앉은 분위기.
연성은 제목 짓기가 제일로 어려워요.
8월 17일 금요일
이하랑-령부의 범위 확장, 진전 없음. 영문 비속어 표현 사용. 습득 경로 불명.
8월 18일 토요일
이하랑-신호의 정확도 개선됨. 결박부 직후의 대응 미숙.
무기명의 우편. 무용함.
8월 19일 일요일
이하랑-경미한 손목 부상. 안정 권고. 잔나비 사용 시의 안정성. 영을 다스리는 훈련 위주로 전환.
8월 20일 월요일
마틴 챌피의 방문.
“잠깐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바람에 너울거리는 엷은 비의 장막이 도시 전체를 감싼 어느 날이었다. 울적한 날씨에 익숙한 영국인들은 늘 그렇듯 우중충한 얼굴을 하고선 태연하게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날씨를 감상할 여유 따위가 없는 티엔도 그렇기는 마찬가지였다.
마틴은 문가부터 높이 쌓여있는 서류며 책무더기를 지나 티엔의 앞에 서있었다. 이 넓지 못한 공간이 지금으로서는 그랑플람 재단 아시아지부에게 할당된 전부다. 불공평함을 논하기엔 재단의 사정이 그리 좋지 못하고, 또 어떤 면에서 이 상황은 별다른 협업을 원하지 않는 티엔의 의향이 반영된 결과기도 했다.
마틴의 방문은 티엔에게 그리 달가울 수 없었다. 일단 그의 용건은 무역과 관련된 중국 측과의 교류에 티엔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현재 재단에 속해있는 유일한 중국인, 나아가 유이한 아시아 출신의 그에게는 간혹 이런 식의 성가신 요청이 들어온다. 그러나 한없이 딱딱한 기공사에게 직접 말을 전하기 어려워하는 몇몇 후원자들은 다른 누군가를 사자로 삼아 그에게 보내오곤 했다. 대개는 타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 누군가, 이를테면 지금의 마틴처럼 말이다.
인간관계라는 복잡한 그물망에서 티엔은 신경의 스위치를 내려버린 지 오래지만, 그렇다고 적대적인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무디진 못했다. 그걸 안다고 해서 언행에 큰 변화가 생기지는 않는다. 단지 그 상대의 존재를 전보다 더욱 외면하고자 할 뿐. 이런 안일함은 티엔이 자신에게 용납하는 몇 안 되는 나태라고 할 수 있었다.
저 독심술사는 첫 대면에서부터 티엔을 좋게 보지 않았다. 그 뒤 그의 독심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고선 더더욱. 그럼에도 그는 업무와 관련된 일이라면 티엔을 착실하게 상대할 줄 알았고, 티엔은 마틴의 그런 점을 꽤 높이 사고 있었다. 용건이 끝난 후 그의 돌변하는 태도를 알기만 한다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멸, 시기, 혹은 다른 무언가. 제대로 된 명칭을 알 수 없는 마틴의 악감정에 티엔은 늘 그래왔듯 마틴 챌피라는 존재 자체를 잊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꾸준히 대면할 수밖에 없는 그이기에 간혹 무용하게 감정을 소모하는 상대를 약간 기이하게 여긴 적은 있었다.
그랬던 마틴이 개인적인 용건을 입에 담은 건 공적인 용무가 끝나 그 이상 티엔을 시야에 둘 이유가 없는 시점이었다. 그들 사이에 개인적 친분 따위가 있을 리 없기에 티엔은 마인드리더가 하려는 말을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알아야 하는 일인가?”
“아니요.”
티엔의 물음에는 꽤나 시원스러운 답변이 돌아왔다. 이 견고한 무인은 생각지 못한 순간에 쓸데없이 시간을 빼앗기는 것을 혐오하다시피 하며 그와 관련된 재단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런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 단칼에 거절당할 가능성이 한없이 높은 요청을 굳이 꺼낼 이유가 무엇인가.
남자가 가장 먼저 떠올린 가능성은 마틴의 심술이었다. 공적이지 않은, 그러나 중요한 이야기를 자신이 흘려듣도록 하는 식의. 그러나 건네받은 자료를 훑던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인 마틴의 표정은 그런 치졸한 수작을 부리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진중함 뒤로 피로가 비쳐 보이는 그의 이런 얼굴을 티엔은 지금껏 목격한 적이 없다.
흘끗 바라본 시계는 3시 12분을 가리키고, 스카우터는 이미 충분히 많은 시간을 뺏겼다. 그가 내릴 결론은 본디 정해져 있어야 했다.
“짧게 끝낸다면.”
티엔은 떠넘겨진 서류를 갈무리하며 질문에 대답했다. 그답지 않은 변덕이었다. 이때 무엇인지도 모를 말을 듣지 않은 채 넘어갔다면 그는 저 어트랙티브의 이상한 태도 따위를 금세 잊고 말았을 테고, 따라서 이 간단한 답변은 그에게 있어 막중한 실수가 되고 말았다.
“그럴 거예요. 복잡한 이야기도 아니니까. 티엔씨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내용이기도 하고요.”
역시나 내용을 파악할 수조차 없는 서론에 티엔은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미 동의를 구한 이야기를 멈출 생각은 없는지 마틴은 그의 허리께까지 쌓인 박스와 종이뭉치에 신경을 집중하며 긴장을 풀고자 노력하는 것 같았다.
“저는…… 두 달 전쯤에 죽으려 했어요. 딱 6월의 이맘때였겠네요.”
평소와 달리 상대의 눈이 아닌 다른 어딘가를 비껴보고 있는 마틴은, 그의 말대로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기묘한 이야기를 꺼냈다.
“보시다시피 실패했지만요. 잘 됐죠, 그래요. 앞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순 없겠지만. 그러려고 노력은 해보려고요. 그리고 다시는 시도하지 않을 거예요.”
단정한 입술이 느릿하게 토해내는 말들은 거의 의무적으로 들렸다. 티엔은 어떤 타인의 불행에 대한 무덤덤함과 이 상황에 관한 혼란을 동시에 경험하며 이어지는 청년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마틴이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인 듯 그는 들이마셨던 숨을 천천히 내뱉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틴은 이전에 어떤 식으로든 목숨을 끊으려 시도했고, 실패했다. 그런 그는 꽤 긴 시간이 지난 오늘 과거와 앞으로의 결심을 그와 아무런 친분이 없던 티엔에게 전한 것이다.
재단의 유이한 동양인은 영국인들에게 이런 대화가 일반적인가를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유추해보았다. 딱딱한 유머(라고 설명 받았던 몇 가지 상황들)나 쓸데없는 엄숙함 이상으로 그가 아직 파악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지 모른다. 평범하게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 이런 우중충한 도시라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허나 그 상대가 자신이어야 했던 이유를 그는 좀처럼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런 걸 왜 내게 말하는 거지?”
티엔이 꺼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질문에 마틴은 가장 솔직하고도 이기적인 대답을 내놓는다.
“그냥……. 누군가에게는 말하고 싶었어요. 이왕이면 능력이 통하지 않고 제 생사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사람에게. 그 외에 바라는 건 없습니다.”
톡. 톡. 펜을 쥐는 자리에 굳은살이 박여 있는 마틴의 손가락은 그의 곁에 놓은 종이뭉치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의 눈길 또한 티엔을 마주보지 못하는 채다.
상대가 누구라도 좋았으나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고. 사전경고가 있었고 말을 꺼내도 되는가에 대한 허락마저 구했으므로 티엔은 괜한 시간을 뺏었다 그를 탓할 수도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군. 이야기는 그게 다인가?”
“네.”
최소한의 예의가 마음에 걸려 말을 마치자마자 등 돌려 떠나지 못했던 마틴은 그제서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이만큼의 무덤덤함이라면 마틴이 바라마지 않던 반응이다.
“……불편을 끼쳐 죄송합니다. 일에 대해서도 이야기는 끝났고……. 이걸로 충분할 것 같네요. 그럼 이만.”
긴장을 묻어나던 손을 거둬들인 마틴이 떠나려는 기색을 보이자 티엔은 문득 떠오른 말을 덧붙였다.
“그 이야기는 비밀에 부쳐두지.”
그는 내뱉은 문장이 선심을 쓰는 어조가 되었음을 약간 후회했다. 애초에 새어나갈 것을 걱정했다면 털어놓지 말았어야 하는 이야기다. 마틴이 굳이 언급하지 않은 조건 중에는 아마 과묵함, 또는 지극히 좁은 인간관계 등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예. 고맙군요.”
잠깐 동안 잡다한 물건을 허물어뜨리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고서, 곧 아시아 지부라는 명패를 단 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약함을 멋대로 드러냈던 금발의 청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티엔이 있는 공간에서부터 사라져 있었다.
조용해진 사무실에서 티엔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그가 요청 받은 일들을 지체 없이 완벽하게 처리해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8월 21일 화요일
티엔은 스스로 죽음을 결심하는 자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자신의 살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탓도 있지만 가장 주요한 이유는 역시 지금까지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우연히 먼발치에서 발견한 마틴의 모습은 여느 때와 같이 밝고 건강해 보였다. 화사한 미소며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태도.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청년은 분명 속내를 터놓는 즉시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청년은 굳이 그리 가깝지도 않은 악연을 골라 가장 어두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티엔은 그 점에 관해 깊이 생각할수록 자신이 무시당했는지 혹은 과대평가를 받았는가를 구분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8월 22일 수요일
이하랑-완치 판정.
8월 23일 목요일.
8월 24일 금요일
티엔은 잠깐 생각에 빠질 때면 자신의 눈길이 특정한 누군가에게로 향해있는 걸 깨달았다. 그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는 그와 달리 마틴은 전과 달라진 점이 눈에 띄지 않는다. 다른 이들을 향하던 미소가 티엔을 향할 때면 굳어버린다거나, 애초에 눈길을 거의 그의 쪽으로 돌리지 않는다거나.
티엔이 가진 희미한 기억에 따르면 2달 전의 마틴도 지금과 그리 다를 바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엔가 집으로 돌아가 죽으려는 생각을 했을 테고, 시도까지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서 태연한 척 재단에 얼굴을 비추었으리라.
역시나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건 티엔의 관심사 밖에 있어야 할 일이었다.
8월 25일 토요일.
8월 26일 일요일.
8월 27일 월요일
이 날 티엔은 능력에 대한 조사의 일환으로 지하연합의 영역을 방문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다는 소식에 살 것 같다는 반응을 보인 제자를 생각해서라도 그는 가능한 한 빠르게 돌아가고자 했으나, 미리 연락을 취했음에도 해당 능력자-전투에 참가한다는 사실이 놀랍도록 어린 구성원이다-를 보이기 꺼려하는 연합원의 제지로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본래부터 환영받지 못할 용건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는 바지만 틀어진 계획에 티엔의 심기는 결코 편할 수 없다. 물론 그는 일정이 지연된 정확한 원인이 어린 능력자의 변덕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채다.
무료한 대기의 시간을 보내며 무인은 주변의 풍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연합은 넓은 세력권을 가지고 있으며 겉으로 보기엔 일반적인 거주구와 큰 차이가 없으므로 그는 시야에 들어오는 극히 일부만으론 별다른 정보를 알아낼 수 없다. 그러나 이국의, 그것도 다수의 능력자로 이루어진 공동체라는 사실만으로 티엔에게 생소한 느낌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기다림이 지루한 건 안내역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그랑플람의 별난 스카우터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대화를 이어갈 의지가 보이지 않는, 혹은 충분히 그렇게 느껴질 만한 대답을 듣고서도 그에게 불쾌한 기색이 없는 이유는 연합 내에도 꽤나 다양한 종류의 인간상이 있는 덕분이다.
가벼운 대화에서 짧은 대답을 내놓는 역을 맡고 있던 티엔은 문득 머리 한구석에 떠오른 질문을 그대로 내뱉었다. 마틴 챌피를 알고 있느냐고. 물론 재단 안팎으로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그를 모르는 능력자는 포트레너드에 흔치 않을 것이다.
자리에 없는 제3자에 관한 피상적인 이야기가 오가고, 상대가 챌피에 관해 알고 있는 항목이 자신보다 나을 게 없다는 걸 확인한 티엔은 곧 대화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친절하다. 적을 만들지 않는다. 재단에 헌신한다. 두 번째 사항에 관하여 티엔은 몇 가지 이견이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단언하기 어렵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능력을 생각하면 대단하지.”
그러나 덧붙여진 한 마디는 그에게 꽤 뜻밖의 충격을 주었다.
능력에 비해서. 지금껏 그런 적은 없지만 만일 티엔 본인이 이 말을 듣는다면 그건 아마 전혀 다른 맥락으로, 예컨대 아직까지 살아남았다는 점 등을 든 발언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능력이 가진 가장 큰 패널티는 그의 목숨과 관련되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마틴 챌피는 단지 이타적인 태도와 훌륭한 인간관계를 가진 것만으로 놀랍다는 반응을 얻는다.
어쩌면 도무지 상상할 수 없던 마틴의 속내는 이런 시선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티엔은 약간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8월 28일 화요일.
8월 29일 수요일.
8월 30일 목요일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도 되겠나?”
전과는 다른 용건, 다른 장소에서 두 사람은 단 둘만의 대화를 가졌다. 이번에는 티엔이 그의 사무실을 들렸고, 공적인 용무가 막 끝난 참이었다.
그는 마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챌피와 달리 그는 타인에의 배려가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당신이 살기를 바란다.”
개인적이고, 또 마틴과 큰 관련은 없는 이야기다. 그는 마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고 싶었으나 불행히도 그의 능력은 티엔에게 통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으면서도 그의 말은 마틴이 결코 기대하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어째서요? 당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 텐데.
떠오르는 싸늘한 대꾸를 그대로 입에 옮길 수는 없다. 그리고 이번에는 예의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었다.
생명은 소중하니까, 혹은 주변 사람들이 아파할 테니까. 그런 소리가 그의 입에서 나온다면 실망할 것 같았다. 실망이라니, 애초에 어떤 식으로든 기대가 있었던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던 마틴은 그의 말에 어떤 식으로든 대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조금 긴 침묵이 흐르고, 서류철의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는 마틴의 손길이 멈췄을 때, 티엔은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마워요. 아니, 사실 별로 고맙지는 않지만.”
마틴은 작게 한숨을 내쉰다. 그도 자신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아닐 테지만, 그 짧은 말 한 마디는 무겁게 가슴 속에 내려앉는다. 불편하면서, 어딘가 간지럽고, 기묘한 기분이었다.
“기억해둘게요.”
작은 목소리의 대답을 끝으로 마틴은 고개를 돌렸다. 이전에 티엔이 그랬듯 꽤 오랜 시간 그는 긴 고민을 하게 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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