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충한 하늘 아래의 세계수, 그리고 그 거대한 그늘 위의 사람들. 그들은 제각각 쌀쌀한 바람과 추적거리는 빗방울로부터 몸을 숨기려 겉옷을 굳게 여미고 있었다. 계절의 경계선이 종종 지독한 방식으로 윤곽을 드러내곤 하는 탓이었다.
빗물에 씻겨나가 회색빛으로 물든 거리는 사람 외의 것의 소리로 메워져 누군가에게는 소음이, 또 누군가에게는 고요가 된다. 무채색의 가운데서 밝게 빛나는 금발을 가진 이 남자에게는 단연 후자. 그는 달콤한 정적을 곱씹으며 모자를 가볍게 눌러썼다.
주말이라는 시기와 아직 이른 시각, 그리고 싸늘한 날씨는 마치 그가 세상에 마지막 남은 사람인 듯한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일까, 본디 무거워야 할 그의 발걸음에는 다소의 경쾌함이 섞여 있었다. 적어도 어느 모퉁이에선가 쓸데없이 부지런한 성미의 회계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남자는 입가에 드리웠던 미소를 지우고 그가 드러낼 수 있는 가장 무심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러나 습관. 그 망할 습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에게 결국 쓸데없는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건 단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주위의 사람이 어떤 복장, 어떤 표정으로 그를 스쳐 가고 어떤 행동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지도.
물론 그의 일에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한 습관이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유쾌했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 남자는 다른 무언가를 떠올리려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별 볼 일 없던 아침 식사. 특별한 것 없이 우울한 날씨. 오늘 이루어질 대화에 관한 예측할 수 없는 전망. 다행스럽게도 그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한숨을 쉬는 대신 주의를 환기할 무언가를 간신히 떠올렸다.
남자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조금 전 그의 기분을 수직으로 낙하시킨 이가 입고 있던 검은 코트였다.
그가 곧 만나게 될 누군가도 그런 어두운색의 옷을 즐겨 입었다. 말 그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취향에 실용적인 의미는 적었다. 적어도 지금으로선, 외출을 하는 사이 지저분한 흙탕물이 코트 자락이나 바짓단을 더럽힐 걱정이 없을 테니 말이다. 그자는 남자와 만난 이후 문밖을 나선 적이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검은 옷이 그에게 잘 어울린다는 점만은 부정하지 못한다.
주위는 다시 옅은 웅얼거림 같은 빗소리만이 남아 조용해졌다. 금발의 사내는 걸음을 재촉하며 품에 안은 식료품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고쳐 잡았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사람을 위해 바쁜 시간을 쪼개며 찾아와야 하니 그 번거로움은 결코 적지 않다. 외출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떻게 되었든 몸의 피곤함은 도리어 원망을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다.
따로 사람을 구할 생각을 해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남자는 필요 이상의 위험을 감수하기보단 자신의 불편을 택하고 말았다. 그 문 안에 들어있는 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이라면, 단 한 가지의 사각을 제외한다면 그 공간은 충분한 안전을 보장하고 있다. 그 사각도 지금은 서서히 메워지고 있노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남자가 깊은 생각에 빠져들기 직전, 길 한구석에서 다소 어울리지 않는 색조가 그의 눈에 띄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그 사람과 닮은 수선화 빛깔. 밝은 노란색이었을 스카프는 이미 대부분이 비에 젖은 길바닥에 물들어 있었다.
아주 잠깐의 감상은 안심을, 그리고 이어서 당혹감을 불러왔다. 그는 지금 무엇을 보더라도 그 사람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자각 탓이었다.
남자는 한숨을 내쉰다. 그 사람. 테드 파워즈, 혹은 루드비히 와일드. 스스로가 능력자이자 능력자의 천적인 헌터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이름이 알려져 있을 유명인. 그자는 이 남자, ‘매력’의 코드네임을 가진 독심술사 마틴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는 인물이었다. 그들은 본디 얽혀서도, 그럴 만한 계기조차도 없는 것이 서로에게 이로웠을 것이다.
마틴과는 다른 종류의 선명한 금발, 얼핏 섬뜩한 느낌을 주는 밝은 빛깔의 눈, 날카로운 이목구비, 빛이라는 능력을 가지고도 어둠 속에 숨어드는 자. 물론 그가 거대한 스캔들을 터트린 지금은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들리는 소문으로 루드빅은 그 사건으로 인해 같은 헌터들에게조차 적대시되고 있다고 한다. 그가 자신의 행적을 과시하며 의뢰인들로 하여금 헌터라는 족속들에게의 신뢰-물론 애초부터 웃기는 소리라고 마틴은 생각하지만-를 무너지게 한 탓이었다.
온전한 아군이라고는 없는 주제에 구태여 수많은 적을 만든 존재. 말 그대로 내면의 소리까지 읽어낼 수 있는 마틴조차도 그를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에게서 읽은 과거는 마틴이 몸으로 느껴온 세계와 동떨어져 있었고, 현재의 그가 가진 생각들은 일반적인 것들과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그건 아마 그 자신도 마찬가지로, 그가 타인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다른 무엇보다 스스로 그런 걸 원하지도, 또 노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마틴은 품에 안은 며칠 분량의 식량이 새삼스레 무겁게 느껴졌다. 얼마간은 재단의 일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려면 오늘 안에 많은 걸 준비해야 했다. 이번에는 어떻게 말을 떼고 어떻게 말을 돌려야 할지. 그리고 또 어떤 암시를 걸어야 할지. 마틴은 그를 만나기 전까지 그런 것들을 보류해두기로 했다.
루드빅이 독일 출신인 것을 감안해 마틴은 일부러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재료를 골라 담아오곤 했다. 흰 아스파라거스. 무거운 식감의 빵. 그리고 그 위에 발라먹을 수 있는 피 햄까지. 물론 그게 자기만족일 뿐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자각하고 있다. 그가 사나운 맹수라고 한다면 우리 안에 던져지는 먹이의 맛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홀로 남은 시간이면 주로 과거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틴이 가리고 뒤바꾸어 인과가 흐릿해진 기억들은 그리 쉽게 매듭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의도치 않은 시간 벌이는 마틴에게도 달가울 일이지만 마인드리더는 다소 복잡한 마음을 느꼈다.
마틴이 모퉁이를 돌자 그가 있을 장소가 모습을 드러내고, 청년이 발을 디딘 돌계단 위에 옅은 빛깔의 축축한 발자국이 남았다.
그 주택은 검은 지붕과 회색빛 외벽으로 단장되어 있었다. 창의 덧문이 닫혀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어느 평범한 영국인 부부가 살고 있을 법한 그 외관에서 특이한 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마틴은 문 앞에 멈춰 섰지만 초인종을 눌러 그를 부를 생각은 없었다. 그 헌터는 분명 깨어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마틴을 마중할 생각은 없을 것이 분명하다. 루드비히가 그런 식으로 반가움을 표시할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가 쫓고 있는 사냥감, 그 외의 선택지는 없었다.
지금쯤이면 그는 늦은 식사라도 준비하고 있지 않을까. 그가 스스로를 먹일 줄 안다는 사실은 마틴에게 그리 나쁘지 않은 소식이었다. 헌터로서나 한 인간으로서 홀로 지낸 생활이 긴 만큼 그에게는 당연한 일일 테지만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마틴이 꽂아 넣은 열쇠는 현관문에 깔끔하게 맞아 들어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달각’, 이라는 맥 빠지는 소리.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청년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경쾌함이라고는 없이 조용한 울림은 공회전을 의미하고 있었다. 애초에 잠겨있지 않던 장치가 다시 풀릴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게 의미하는 것.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깨닫기도 전에 찾아오는 예감에, 마틴은 자신의 직감이 틀렸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