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마음 위에 아로새긴 이유 없는 생각에 남자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물론 이유가 없다는 말은 그 자신이 그렇게 정했다는 뜻일 뿐, 어디서도 가져다 붙일 수 있는 명목 하나를 끌어오지 않은 건 조금이나마 비참함을 덜고자 하는 그의 발버둥에 불과했다.
만일 무기력할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바람을 스스로 쟁취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추락, 실혈, 질식, 중독, 그 외의 다른 모든 방법들. 그러나 잠시 몸을 뉘일 시간도 아깝게 느껴지는 그에게 필요성이 부족한 고민은 일종의 사치다. 지금도 그는 머리는 기계적으로 앞으로의 일정을 정리하며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남은 시간을 초조하게 재어보는 중이었다.
그에게는 죽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죽고 싶지 않을 이유에 대해 말해보자면, 글쎄. 안타깝게도 남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을 만큼의 상상력을 가지지 못했다. 그가 알고 있는 이유라면 물론 다양하다. 자신의 목숨은 소중하니까. 앞으로의 삶이 좀 더 행복해질 수도 있는 거니까. 그를 아는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게 될 테니까. 운운.
남자는 간혹 얼마 없는 전 재산을 긁어모아 어딘가 멀리로 떠나는 생각을 했다. 좋은 걸 보고, 듣고, 먹고, 느끼고, 그러고서 영영 눈을 감아 버린다면. 그건 분명 하나의 해피엔딩으로, 그의 깔끔한 마지막에 고통의 유무 따위는 중요치 않을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할 때면 그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번진다. 마치 소중한 기억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마냥.
다만 최악의 시나리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을 알기에 그의 일상에는 상대적 평온함이 이어져 갔다. ‘삶은 꽤 아름다운 것 같아. 조금 더 살아봐도 괜찮지 않을까?’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 ‘사실 난 죽고 싶지 않았어. 고통스러울 거야. 괴로울 거야.’ 의지도 없는 겁쟁이. ‘일탈은 충분해. 슬슬 돌아갈 때야.’ 그리고 그 자신. 그는 스스로 일생에 걸친 관성을 무시할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다.
생각의 끝은 요란한 자명종 소리와 함께 찾아왔다. 삶을 살아가야 할 시간이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그는 또 한 걸음, 그렇게 좀 더 느릿한 방식으로 언젠가 다가올 죽음에게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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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붙잡고, 입을 맞추고, 그의 빈틈에 내 일부를 끼워 맞춰 보아도 결국 나는 그와 단절되어 있다. 간혹 느끼던 충족감이 단지 착각일 뿐인지, 아니면 붙잡아 두지 못할 흘러가는 감정일 뿐인지는 아마도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그와 있을 때는 즐겁고, 마음이 따스해지고, 그러니까, 행복했다. 그가 나와의 시간을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걸 깨달았던 그때가 바로 나의 시작이었다. 당시에는 타인의 마음에 의지하는 감정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점차 서로가 당연해지고 감사의 말이 죽어가기 시작하며 나는 처음의 불안감이 오히려 달콤한 설렘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타인과 다르다는 감각을 느낀 지는 정말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어쩌면 나는 그런 점까지도 다른 모두와 같을 수도 있겠다. 모든 사람은 특별하다고 하던가. 불공평 속에서 듣는 그 말은 공허할 뿐이었다. 단지, 간혹 세상의 모두가 나와 같이, 혹은 나와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살아갈 것을 생각하면 견딜 수 없이 두려워졌다. 내 작은 머리통에 들어찬 것만큼 많은 것들이 너의, 그의, 그들의 안에 뒤엉켜 있다는 공포. 하지만 도무지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어서, 나는 곧 내가 그들과 다르다는 결론을 내려버린다.
그렇다면 그는?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나와 달랐다. 그래야만 했다. 그는 늘 나보다 나은 인간이었으니까. 그는 완벽하지 않지만 나보다 조금 더 선량했고, 꽤 많이 성실했으며, 내게 분수에 넘치는 감정을 주었다.
그토록 사랑스러운 그에게 나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더 이상 다가갈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가 응당 지켜야 할 선이잖아, 안 그래? 비겁한 변명은 양심의 얼굴을 하고서 내게 속삭인다. 예의야. 당연한 거야. 소중하니까.
그랬다. 그는 내게 분명 소중한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들은 가슴 속에 고여 썩어가거나 말라붙어 버렸다.
사실 나는 내가 말하는 만큼 널 좋아하진 않아. 네가 기쁘길 바랐을 뿐이지.
이 이상 널 알고 싶지도 않고. 어차피 난 절대 진심을 말할 수 없을 테니까.
그에게 솔직할 수 있을 만큼 그를 사랑하지 못한다는 죄책감. 그가 나와 다를 것이라는 괴로움. 그가 나와 같을 것이라는 두려움. 그 전부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나의 존재가 바로 그와 내 사이의 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