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닥터후를 볼 때 썼다가.... 제대로 쓰려면 엄청나게 길어야 할 거 같아서 더 못쓴 글.
짧은 프롤로그 느낌입니다.
이어서 쓰진 못할 거 같지만 이런 분위기 릭마가 보고 싶어요:D
“오.”
잔잔한 바람에 실린 낯선 목소리의 첫 마디는, 기쁨이 서린 자그마한 탄성이었다.
우울감에 빠져있던 젊은이는 천천히 목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곳은 마틴의 비밀 장소로, 그는 홀로 조용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유일한 출입구를 잠가두었다. 게다가 그 낡은 철문은 여닫을 때마다 끔찍하게 긁히는 소리를 내곤 했다.
“좋은 저녁이지, 그렇지 않소?”
“어……. 지금은…… 저녁이 아닌데요.”
신비한 불청객은 듣는 사람의 기분마저 바꿀 수 있을 만큼 유쾌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당혹으로 가득 차있던 마틴마저 얼빠진 목소리를 토해내고 말았다.
환한 미소를 띤 그는 마틴이 몸을 기댄 난간으로 곧장 다가왔다. 그리곤 마틴이 움찔 놀라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곁에 자리 잡았다.
“멋진 곳이로군! 조금 좁고 많이 불편하지만. 아, 이 음침한 화분이라니. 하지만 별이 아주 잘 보여.”
남자는 시든 제라늄이 든 화분을 발로 밀어내며 시선을 위로 향했다. 그의 말대로 여기서는 탁 트인 하늘을 두 눈에 담을 수 있다.
마틴은 인기척을 들은 바로 그 순간부터 자신의 비밀 장소에 발을 들인 낯선 이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처음부터 이곳에 있어야 했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풍경 속에 녹아들었다. 남자의 검푸른 코트자락은 밤하늘과 같은 재질인 듯이 조용히 나부꼈고, 별빛에 반짝이는 두 눈은 녹슨 난간마저 그의 밤색 머리칼과 잘 어울렸다.
약간 넋을 잃고 이 기이한 남자를 바라보던 마틴은 고개를 두어 번 흔들고서야 현실 감각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저기... 누구시죠?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음, 나는 사람을 찾으러 왔지. 그런데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군.”
줄곧 유쾌하게 보였던 남자의 눈에 안타까운 기색이 서렸다.
“하지만 우리도 지금부터 친구가 될 수 있지. 만나서 반갑소. 나는, 타키온이라고 부르면 된다오.”
“타키온?”
이상한 이름이었다. 어디의 것이라고 특정 짓기 어려운 억양 하며, 마틴은 그가 어딘가 먼 곳에서 온 사람일 것을 완전히 확신했다.
“그렇소, 타키온. 나는 그 어감이 참 좋단 말이야. 게다가 빛보다 빠르다니 낭만적이기도 하지. 흠, 들어본 적 없소? 아니, 아니.”
남자는 자문자답을 하며 빙글 돌아 마틴을 마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약간 장난스러운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지금은... 아직 그런 이름이 없겠군. 제럴드가 몇 십 년 쯤 빨리 태어났어야 하는 건데 말이오.”
“네?”
“오, 이름을 아주 멋지게 지을 줄 아는 친구지. 실제로 만나본 적은 없지만 분명 괜찮은 사람일거야. 이름을 그리스어에서 따올 생각을 하다니!”
그건 1960년대에나 일어날 일이지만 말이오.
“1960년대요?”
“그래, 제럴드가 처음으로 그 이름을 지은 게 바로..... 오, 이런.”
그의 말 중 가장 어처구니없는 부분을 마틴이 멍하니 반복했을 때, 남자는 말을 잇다 만 채 묘한 눈빛으로 마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았소? 지금은 1934년일 텐데?”
마틴은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입을 다물었다. 또 실수한 게 틀림없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그의 말과 생각을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음,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건 그냥-”
“과연! 그렇지, 그래야 맞지. 날 부른 게 그대겠지, 응? 아주 간절히 말이오.”
“네? 아뇨! 전... 아무도 부르지 않았는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마틴은 그가 나타난 시점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와 함께 가지 않겠소? 멋진 곳들을 보여주지. 지금껏 상상도 해보지 못한 곳들을.”
그러나 그의 보석 같은 녹색 눈동자는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다. 설령 이 남자가 단순히 미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눈빛과 목소리를 접한 사람은 그를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마틴은 그의 마음속에 피어난 순수한 기쁨을 엿들을 수 있었다. 단지 마틴과 만났다는 사실 그 자체, 그리고 함께 여행을 떠나리라는 기대로 인한 기쁨이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말했지 않소. 타키온이라고. 원한다면 다르게 불러도 상관없지. 그대는? 그대는 어떤 멋진 이름을 가지고 있소?”
이 사람을 믿어도 될까? 지금 당장 도망치는 게 옳은 선택이 아닐까? 그런 고민 속에서도 마틴은 결국 입을 열었다. 그렇게, 그들은 긴 여행의 시작에 첫 인사를 마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