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꽤나 정적인 사람이다. 전투에 임하거나 무술의 수련을 할 때를 제외하면 그는 고여 있는 물과 같이 고요했고, 명상을 하거나 능숙한 솜씨로 자수를 놓을 때 특히 그러했다. 그의 그런 행동은 재단 사람들에게 동양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심는 데에 일조하고 있지만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곳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화려한 모란꽃을 수놓고 있었다. 흰 천 위에 붉은빛이 선명한 꽃잎이 만개했고, 새파란 잎사귀가 그 주위를 휘감고 있다. 사물의 선정에 별다른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날따라 반짇고리 한구석의 붉은 색 실이 눈에 띄었을 뿐. 그리고 문득, 모란의 흐드러지는 자태에서 옛 제자가 떠올라 남자는 묘한 기분이 되었다.
다행인지- 그가 감상에 빠지기 직전, 그의 뺨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아왔다. 자신의 손으로 피워낸 모란을 내려다보고 있던 티엔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침착하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얼음물이 담긴 유리잔. 부쩍 더워진 날씨 덕에 잔의 표면에는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안 놀라네요.”
“그걸 바랐다면 기척이라도 숨기고 다가왔어야 하지 않나.”
작게 웃으며 불평을 말하는 측은 마틴 챌피. 그걸 받아치는 쪽은 같은 재단 소속의 티엔 정이다. 마틴은 고개를 허리를 굽히고 천 위에 피어난 꽃을 내려다보았다.
“꽤 열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신작인가요?”
유리잔 안에는 얼음 외에도 얇게 썬 레몬 슬라이스가 들어있었다. 티엔은 그것을 자수틀과 함께 실과 반짇고리가 놓여있는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렇게까지 칭할 물건은 아니다만.”
직전에 떠올렸던 옛 제자에 관한 생각에 티엔은 자수에 관한 언급이 그리 마음 편치 않았다. 이제는 언급조차 피하고 있는 그 일을 굳이 떠올릴 필요는 없다. 그는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 정도 수작업이면 내놓을 만하죠.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어요?”
마틴이 그의 대답을 듣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티엔은 이 독심술사가 거의 유일하게 마음을 엿들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 이유 탓에 마틴은 꽤 오랜 시간 그를 멀리해왔었고, 놀랍게도 그들이 서로와 가까워지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던 날 티엔은 상대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기로 약속한 적이 있었다. 그는 사실과 ‘답하고 싶지 않다’는 대답 사이에서 잠시간 망설였다.
“유쾌하지 못한 예전 일이 떠올랐다.”
“그런가요. 별일이네요, 티엔 당신은 앞만 보고 사는 줄 알았는데.”
“당신이 묻지 않았다면 그렇게 하고 있었겠지.”
시큰둥한 대답에 마틴은 이 기공사가 무엇을 떠올렸는지 궁금해졌으나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그는 색색의 실패를 정리하는 티엔의 곁에 자리 잡고서 남자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할 말이 있는 게 아니었나?”
“음-”
마틴은 특별한 목적이 있어 이곳을 들린 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도 잠깐 휴식을 가지고 싶었다는 것 정도. 그러나 의문이 섞인 물음에 마틴은 좀 더 그럴싸한 대답을 짜맞춰보았다.
“꽤 낭만적이잖아요? 아무 용건 없이도 얼굴을 본다는 건.”
태연한 미소에 티엔은 알 수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얼음물 잔에 맺힌 물방울이 흘러 티엔이 수를 놓던 천을 적시고 있었다.
“그런가.”
정적인 시간이 흐른다. 대화는 적었고, 아직 남아있는 휴식 시간 동안 티엔은 자투리 천 위에 새롭게 자수를 놓았다. 때때로 손을 멈추고 곁에 자리한 청년을 바라보던 그의 손끝에는 옅은 금빛의 꽃들이 수 놓여 있었다.
그가 다음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아직 이른 새벽이었다. 옅은 안개를 두른 초목이 맑은 기운을 내뿜고, 차가운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있었다.
티엔은 이곳을 알고 있다. 그는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수많은 발걸음이 다녀간 길을 찾아냈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산을 올랐다. 그 희미한 과거의 기억에 그립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 날은, 몇 번째의 거절이었던가. 문득 떠오른 의문을 머리에서 지워낸 그는 짧은 심호흡을 하곤 자신의 몸에 푸른 기를 둘렀다. 지금의 그는 이전과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스승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첫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의 한계를 증명하고자 했다.
정 티엔, 무인이며 기를 다루는 기공사. 이 얕은 산을 오갔을 많은 발길 중 하나가 그의 목적을 이루어줄 수 있을지. 기대는 적었다. 남자는 단지 멈춰 설 수 없을 뿐이었다.
이내 작지 않은 규모의 도장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직 그곳에서는 이렇다 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으나 도장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 충분했다. 티엔은 잠시 동향을 살핀 후 자신의 아침 수련을 마치고 돌아오고자 했다.
그가 도장의 문 앞으로 다가간 그 순간이었다. 티엔이 손을 대기도 전에 기름을 잘 먹인 문은 미끄러지듯 조용히 열렸고, 그 너머에는 한 초로의 남성이 티엔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평온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은 그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티엔이 무어라 말을 꺼내려 했을 때 그는 손을 들어 기공사의 말을 제지했다. 뻔한 인사는 불필요하다. 노인은 그가 누구인가를 알았고, 티엔은 짐작으로 상대가 이 도장의 어떤 존재인가를 알았다. 찬찬히 티엔을 살핀 뒤에야 노인은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용건은 알고 있네. 허나 돌아가 주지 않겠나, 이 관에 자네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말일세.”
이미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의 도장을 지나며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던 그였다. 그의 소문은 멀리 떨어져있는 이곳에까지 도달해있었다. 허나 그렇다고는 해도 기척만으로 그의 도착을 알아챈 노인은 상당한 경지의 무인임이 틀림없었다.
“승패는 관계없소. 나는 배움을 청하기 위해 왔을 뿐이니.”
노인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배움이라, 그래. 말은 좋아! 자네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자네를 본 기억이 있네. 그때도 자네는 내 형님께 그리 말했었지……”
그 말에 티엔은 눈을 가늘게 뜨고 노인의 모습을 뜯어보았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남자는 이렇다 할 기억을 떠올릴 수 없었다. 티엔에게 그는 스쳐지나가는 군중의 일부였으나 상대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놀랍구만. 그때보다 더 흉흉해졌군, 자네의 기운은.”
일찍이 티엔의 기에 이런 수식이 붙은 적은 없었다. 기공사는 심기가 불편할 법도 한 그 말에 차분히 대답했다.
“내 수련이 모자라다는 뜻인가?”
“아니, 그 반대일세.”
그 물음에 껄껄 웃음을 터트린 노인의 얼굴에 씁쓸함이 서렸다. 티엔은 이해하지 못할, 이해해서는 안 될 감정이었다.
“모르겠는가? 자네 같이 힘을 타고난 강자가 우리 같은 사람에게 얼마나 불길하게 보이는지 말일세……. 뛰어 넘을 수도, 그렇다고 모방할 수도 없지. 그래, 내 어찌나 어리석었는지.”
자신의 한계를 알기 위해 이곳을 찾은 티엔과 달리 이 노인은 아직 어렸던 티엔을 통해 그의 한계를 보았다. 그리고 결국 그는 그것을 뛰어넘지 못했던 것이다.
“내 지금은 웃으며 자네를 볼 수 있지만, 내 제자들이 벌써부터 꺾이는 걸 두고 볼 수는 없네. 그만 돌아가 주게나.”
단호한 거절이었다. 그러나 티엔은 지극히 그답게도 눈앞의 노인을 이해할 수 없다. 도달할 수 없는 강자를 바라보는 기분이란 어떤 것이란 말인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침범할 권리가 그에게 있을 수는 없었다. 노인은 자신의 체면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티엔은 그를 경멸하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그 자리를 지키시오. 나는 나의 길을 갈 터이니.”
순순히 물러서는 티엔에게 노인은 복잡한 심경을 가졌다. 저 특별한 힘을 가진 젊은이는 그가 가진 자부심을 무참히 부쉈고, 또 앞으로도 누군가의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존재할 것이다.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그건 분명 이 젊은이의 잘못은 아니었다.
이곳에서의 목적을 잃은 채 수련을 위해 떠려나는 티엔에게, 노인은 거의 유일하게 그가 줄 수 있는 충고를 남겼다.
“무인이 해서는 안 될 말이지만, 나는 자네 이전에도 내 한계를 이미 보았다네. ……이 늙은 몸도 한때는 유망한 젊은이였지. 그럼에도 말일세.
내 감히 내다볼 수 없지만 자네에게도 언젠가 그런 날이 오겠지. 너무 상심하지 말게나.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한계가 있는 법일세.”
노인의 말에 티엔은 가벼운 목례로 답했다. 그는 아직 저 통탄이 섞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다르다. 티엔은 한계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 더 높은 곳을 필요로 했다.
재단 동료인 마틴이 지나가듯 던진 말에 티엔은 감사보다도 먼저 의아함을 느꼈다. 오늘, 양력 4월 29일은 확실히 그가 태어난 날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 자신도 신경 쓰지 않는 생일을 타인이 먼저 언급하는 건 별로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알았지?”
티엔은 딱 그 한 마디를 마치고서 곧장 자신의 업무로 돌아가려던 사람을 불러 세웠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마틴의 태도는 티엔이 그런 사담에 관심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네? 아. 생일 말이죠. 하랑이 말해줬어요. 아까 그 애가 후원품 정리를 도와줬거든요.”
“그런가.”
하나의 의문이 풀리자 또 하나의 의문이 남는다. 본인이 말한 적 없는 생일을 그의 제자는 또 어떻게 알고 있었단 말인가?
“왜요, 당신 마음이라도 읽었을까봐서요?”
“그럴 수 있을 리가.”
“또 모르죠. 지금도 읽고 있을지.”
“헛수고다.”
마틴이 농담이 아닌 농담을 던지는 건 브루스와 약간 닮은 구석이 있었다. 물론 그가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천적’의 앞에서 뿐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발언은 농담이 아니라 협박이 되었을 테니 당연한 일이다.
“이런 날엔 인심이라도 써주지 그래요? 오늘도 앓는 소리를 하고 있던데.”
“하는 걸 보고 생각해보지.”
제자에게 수련 시간을 알리기 위해 떠나는 티엔의 어깨너머로 덧붙인 말에 그는 하나마나 한 소리, 그러니까 수련의 성과를 보고 판단하겠다는 대답을 남겼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방침에 마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엾은 그의 제자는 오늘도 여전히 고통 받게 되리라.
그렇게 마틴 챌피와 헤어져 제자를 찾던 티엔은 문득 자신이 축하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는 생일 축하를 마지막으로 들어본 게 언제였는지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라도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테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이하랑.”
“아- 간다고, 가!”
티엔이 채 수련 시간이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제자는 곧장 방에서 튀어나왔다. 하랑이 전에 밝히기로 그 단어에는 신경쇠약이 생길 지경이라나, 이유야 어찌되었건 스승으로서는 꽤 뿌듯한 일이다.
“부적은 제대로 준비해뒀겠지? 오늘은 자령의 수행이다.”
“그제부터 귀가 따갑게 말했는데 까먹을 리가 있나. 아주 손이 아작 나게 썼구만! 그런데 사부, 오늘 생일이라며?”
암만 투덜거려도 제 능력이 그런 것은 티엔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꺼내는 생일 이야기에 티엔은 또다시 묘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건 어디서 들은 거냐. 마틴은 네게 들어 알고 있다더군.”
“어? 생일? 그야 곰 할배가 말해줬지. 아마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을걸.”
과연. 브루스라면 서류를 통해 티엔의 생일을 알아둘 수 있다. 기공사는 오늘 그와 마주치게 된다면 매우 우렁찬 축하인사를 들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거 뇌물 아니니까 받아두쇼. 들어놓고 암것도 안 주는 건 뭐 해서.”
그렇게 말하며 하랑이 내민 것은 찻잎이 들어있는 작은 금속제 통이었다. 그건 소년이 오전부터 마틴을 찾아갔던 이유 중 하나로, 재단의 후원품 중에서 선물로 쓸 만한 물건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쨌거나 거창한 건 받지도 않을 테고, 제 생일은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갔던 사람에게 주는 선물인지라 하랑은 그 중에서도 소소하게 보이는 걸 골라잡았다.
축하에 이은 선물. 수련밖에 모르고 살았던 사람에게는 낯선 일의 연속이었다.
“이럴 필요까진 없다만……”
“그래서, 생일날인데 뭐 맛있는 거 안 먹어? 난 저번에 할배가 사준 소고기가 맛있던 데 말이오.”
고맙다는 말은 또 기회를 놓쳐버렸다. 작은 선물이 그의 손에 전해지자마자 눈을 빛내는 제자에게 티엔은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주지 않는다.
“흠. 뇌물이 아니라고는 네 입으로 분명 말한 것 같다만.”
“어허, 같이 먹을 거면 뇌물이 아닙니다, 사부. 오늘 수련도 열심히 할 거라고!”
“그건 당연한 일이 아니냐.”
수련 장소인 공터를 향하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티격대며 흥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간간히, 두 사람과 마주치는 후원자가 티엔에게 말을 걸어온다.
“티엔 씨, 오늘이 생일이라면서요?”
티엔은 속으로 작은 한숨을 쉬었다.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 날이다. 이 묘한 기분은 아마 이 하루가 끝날 때까지 이어지게 될 것 같았다.
어느 평일 오후, 마틴의 일터 가까이에서 우연히 마주친-과연 우연일까?-두 사람은 짧은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잠시 다른 후원자에게 자리를 맡긴 재단의 인재는 작게 마련된 휴식 공간에서 손수 끓인 홍차와 작은 비스킷을 내왔다.
릭은 평소 차보다는 커피를 더 즐기는 회사원이지만 마틴의 홍차라면 언제든 환영이라며, 때로는 여행 도중 눈에 띄는 차를 선물로 들고 올 때도 있었다. 지금 그들 앞에 놓인 차도 그 선물 중 하나로, 마틴은 그것의 은은한 사과 향이 마음에 든다고 평했다.
서로의 근황 등을 물으며 즐거운 담소를 나누던 도중 릭은 마틴에게 저녁 식사를 제안했다. 독일의 뮌헨 지방에 며칠 동안 작은 축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게- 안타깝지만 목요일까지는 약속도 잡혀 있고... 최근엔 자선행사 준비로 조금 바쁘거든요."
시간 절약에 있어 릭의 능력은 분명 편리하지만, 그렇다고 없는 시간을 짜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진심으로 유감스러운 얼굴을 보이는 마틴에게 릭은 도리어 미안해지고 말았다. 막 바쁜 시기가 끝난 릭의 회사와 달리 재단의 일정은 여전히 숨차게 돌아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말디, 혹시 겉을 바삭하게 튀긴 닭을 먹어 본 적 있소? 영국에서는 거의 보지 못한 것 같은데."
릭은 어색한 사과 대신, 문득 떠오른 어떤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마틴은 여행자가 전하는 다양한 이야기를 매번 즐겁게 듣곤 했는데, 어릴 적부터 위대한 탐험가 그랑플람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이 청년은 여전히 바다 너머의 세상에 큰 흥미를 가지고 있다. 릭은 자신의 말에 고개를 갸웃이는 마틴을 보며 작게 웃었다.
튀긴 감자와 닭을 연결시켜 떠올리는 마틴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였다. 여행자는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기로 마음먹고, 그가 지금껏 먹어 왔던 튀긴 닭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음, 다른 곳에도 있지만 나는 내 고향에서 처음으로 먹어 보았지. 닭을 통째로 튀기는 게 아니라 먼저 먹기 좋은 크기로 조각 내고... 아, 여기엔 어린 닭이 좋다오. 특히 봄 닭이 제 맛이지! 그걸 우유에 재워 뒀다가, 소금과 후추, 그리고 파프리카 같은 걸 섞은 밀가루를 묻혀 뜨거운 기름에 빠르게 익히는 거요."
사실 그게 정확한 조리법이 맞는지는 릭 자신도 확신이 없다. 어쨌거나, 그는 지금 세계 요리 전집을 펴내려는 게 아니었으니 사소한 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너무 빠르거나 늦게 건져서는 안 돼. 그렇게 딱 알맞게 튀긴 닭다리을 베어 물면- 짭짤한 튀김옷이 입 안에서 부서지고, 촉촉한 살코기가 가득하게 씹히겠지! 특히 그 안의 육즙이 어찌나 감미로운지. 아, 레몬즙을 좀 곁들이는 것도 별미라오. 으깬 감자나 코울슬로도 함께 말이야."
별다른 과장을 덧붙이지 않았음에도 릭은 생생하게 떠오르는 음식의 맛에 군침을 삼켰다. 그리고 그건 곁에서 설명을 듣고 있던 이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이런, 너무하시네요- 점심도 별로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배가 고픈걸요. 아직 저녁까진 한참 남았는데 말이에요."
"하하, 내가 좀 들떴나? 음, 물론 굉장히 맛있기도 하지만. 만일 그대와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군. 이건 축제 때가 아니라도 괜찮을 텐데."
머쓱하게 웃음짓던 릭은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의 기대하는 눈빛을 마틴은 외면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주말에 시간이 되느냐고요?"
둥글게 휜 눈이 릭을 장난스럽게 바라보았다. 마음을 읽은 걸까? 아니면 이 미국인이 너무 뻔하게 굴고 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릭은 어느 쪽이라도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나쁘지 않겠네요. 음, 저번처럼 새벽에 점심을 먹으러 가는 게 아니라면야."
"알겠소, 그때는 정말로 어쩔 수 없었다니까?"
승낙의 말에 릭은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같은 사람과의 또 다른 추억. 그가 새롭게 찾은 즐거움은 언제나 그를 설레게 만들곤 했다.
마틴이 공성전에서 트릭시를 처음 마주쳤을때 들은것과 반응을 써주세요 이미 로봇이었던 것을 알아도 좋고 몰랐어도 좋았을것 같아요!
(+멜빈이 나오면 좋겠어요)
공성... 처음으로 시도해봤는데 넘나 어렵군요......:D
"아군 3번 타워 전방에 적이 셋. 안개 지역을 조심해요."
간단한 무전을 마친 마틴은 주변의 상황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총 다섯의 적 중 둘의 위치가 파악되지 않았다. 그중 누군가가 기습해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통로, 이상 없어…」
약간 맥빠지는 목소리의 통신이 전해져왔다. 다행히도 주변을 경계하는 건 마틴 한 사람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군의 타워 철거는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그건 적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중 연합의 캐논 도일이 섞여 있는 걸 확인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타워 부근에 결집한 적은 이제 네 명. 마지막 하나의 소재와 정체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모습이 드러나 있는 적들의 움직임에 주의하며 마틴은 곁에 있는 동료들의 후방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이동했다.
"가시가~ 쑥쑥… 아야! 이씨, 타워 주제에!"
투덜거림조차 경쾌한 아군의 목소리에 마틴은 하마터면 자신이 전장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뻔했다. 물론 그건 단순한 착각이며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다음 순간. 높게 쌓인 상자 위로 사뿐한 발소리가 내려앉았다. 역시, 라는 확신에 뿌듯할 시간은 없었다. 상대가 누구든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든다면 그게 뜻하는 바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모두 위험…!!"
"스파이럴!"
날카로운 목소리는 마틴의 경고를 가리고, 섬뜩하게 빛나는 형체가 그를 덮쳤다. 다급하게 시도한 공격이 허공으로 흩어진 순간 마틴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감각을 절실히 체험할 수 있었다.
공학도가 쏘아 보낸 제피는 간발의 차로 적의 움직임을 막지 못했다. 섬광으로 그려진 원은 마틴과 그 곁에 있던 드루이드 미아를 빨아들이고, 살이 깊게 베이는 고통으로 그들은 적이 빠르게 회전하며 공격을 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자신들에게 반격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도.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적의 공격은 그 시작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멎었다. 언덕 위에서 타워 너머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태도의 검사가 후방의 위험을 감지하고 무거운 일격을 가한 것이다. 그의 예리한 눈은 튕겨 나간 적의 윤곽을 주시하며 곧장 검풍을 연계해 적을 몰아붙였다.
쓰라린 감각을 무시하고 자세를 추스른 마틴은 그제야 습격자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새하얀 머리칼, 가녀리게 보이는 체구, 어딘가 이국적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 복장. 마틴의 뇌리에 희미한 기시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상대를 살필 여유는 길지 않았다. 그자는 큰 타격을 입지 않은 듯 몸을 일으킨 그 즉시 재빠른 움직임으로 다이무스와 멜빈의 공격을 회피하며 아군의 시야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그와 거의 동시에, 아군의 타워가 파괴되었다는 경고음이 울렸다.
"무사한가?"
"으아, 죽는 줄 알았어─!"
검사의 물음에 마틴 역시 빈말로도 그렇다는 대답을 꺼낼 수 없었다.
"진심으로 사과드려요. 다음부터 저 닌자…는 제가 견제하죠."
떠올랐다. 다이무스와 같은 헬리오스 소속의 호타루 이나바, 그녀와 닮은 독특한 전투술을 사용하는 '저것'에 대한 소문은 재단의 인재도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저건 안드로이드인데. 그 능력이 통할까?"
부서져 쓸 수 없게 된 바이퍼를 다시 설치하고 있던 멜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역시 적의 정체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네, 어떻게든. 사람과 꽤 흡사하게 만들어진 모양이네요."
짧은 대치의 순간에 마틴은 그것의 소리를 들었다. 미처 타격을 줄 만큼의 능력을 쓰지는 못했지만 그의 힘이 통용된다는 점만은 확인한 셈이었다.
사람의 생각과는 달리 끊임없이 이어지는 불규칙한 노이즈. 그 사이사이에는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단어들이 섞여 있었다.
"읽어볼까요."
적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한 마틴은 문득 그 기계가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단어, 또는 문장을 떠올렸다. '나는, 왜'.
아마 노이즈에 의한 착각이거나 우연의 일치일 것이다. 독심술사는 대수롭지 않은 잡생각을 떨쳐버리며 기세 좋게 중앙을 향하는 적들을 능숙한 솜씨로 포착했다. 아군의 타워 철거도 때마침 경쾌한 나무 도장의 소리와 함께 끝이 난 참이었다.
잭은 그의 발치를 굴러다니는 고깃덩어리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몇 시간 전까지는 웃는 법을 알았고, 몇 십 분 전까지는 비명을 지를 법을 알았던 인간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장면은 몇 번을 보아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설령 그 숨을 앗아간 것이 잭 자신이라고 해도 말이다.
차갑게 가라앉았는지, 혹은 열에 들떴는지 스스로도 종잡을 수 없던 마음을 다잡으며 그는 사람이었던 그것에게 '정리하고' '다듬을' 부분이 있는가를 꼼꼼히 살폈다. 물론 그의 작업은 이미 완벽했다. 한 명의 사람을 한 자루의 날붙이로 갈아낸 이들조차 지금의 광경을 본다면 구역질을 참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금속의 냄새로 가득한 방을 빠져나오는 잭에게서 흐느끼듯 긴 웃음이 흘러나왔다.
길었던 여정에도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세상은 결코 그와 그녀들의 이름을 잊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진실을 보지 못할 것이다.
“자네는 명예롭게 눈 감게 될 걸세.”
그가 아직 '잭'이 아니던 시절, 그 한 마디는 그가 들어 본 가장 엄숙하고도 우스운 말이었다.
능력자로서 정부가 편성한 교육 커리큘럼의 수료를 마친 그는 그가 능력자 사회에 속해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정말로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아침 식사는 대개 샌드위치와 사과 한 알, 낮 시간 동안은 자신과 같은 능력자 아이들을 지도했으며 저녁이 되면 가벼운 산책과 정원 손질을 즐겼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그는 평탄한 삶의 소소한 행복을 즐길 줄 아는, 정말로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랬던 그가 옛 스승과 그 동료들에게 불려가게 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그가 아직 독신이었기 때문일지도, 혹은 어릴 적에 유독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아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그는 지독히도 운이 나쁜 인간이었다.
“여왕께서 내리신 비밀스러운 임무야. 자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시작은 달콤한 사탕발림이었다. 어차피 거절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온갖 좋은 말로 그를 치켜세웠다. 그러나 의미 없는 문장들은 어째서 이런 짓을 해야 하냐고, 내보내 달라며 부르짖는 남자를 구원하지 못했다.
타인의 살을 찢고 가를 때마다 잭은 발가벗겨져 조각나고 다시 꿰맞춰 진 자기 내면의 무언가를 연상했다. 그건 양심이었나? 아니면 인격 그 자체? 처음으로 그런 상상을 했던 날부터 많은 것이 수월해졌다. 잭은 그가 받은 만큼을 돌려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대상은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좋았다. 그가 고통을 쏟아낸 자리에는 파괴밖에 남지 않았고 세상은 그런 그의 흔적을 혐오하며 두려워했다.
“이봐, 칼잡이. 돌아갈 시간이다.”
좁은 골목에 기대어 숨을 고르는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잭은 선명하게 떠오르는 불쾌한 기억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으나 깨어난 곳은 여전히 역겨움으로 가득했다. 잭 자신에게서 감도는 피 냄새와 주변의 악취, 그리고 위선자들의 존재 그 자체.
자신을 향하는 사무적인 눈빛을 멍하니 바라보던 잭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밤의 거리에 섬뜩하게 파고드는 발작적인 웃음은 좀처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뭘 꾸물거리는 거야?”
밤늦은 시간에 살인마를 관리해야 하는 임무를 맡은 요원은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그에게는 돌봐야 할 가족이 있다. 이런 미치광이와 엮이는 건 아무리 일이라도 껄끄럽다며 그는 종종 잭의 면전에서 투덜거리곤 했다.
그러나 잭은 웃음을 멈추고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어깨를 늘어뜨린 채 숨을 몰아쉬는 그의 모습은 마치 기괴한 짐승처럼 보였다.
“이 자식이.”
“아, 또 발작이라도 하나 보죠.”
키가 더 작은 쪽의 요원은 진압봉을 빼 드는 상관을 가볍게 말렸다. 그는 잭에게 일말의 동정심을 안고 있다. 그리고 괜한 소동이라도 일어난다면 그걸 수습할 사람은 그 본인이 될 게 뻔한 상황이었다.
“어이! 여기서 꾸물거려서 좋을 거 없다고……”
관리대상의 상태를 살피고자 다가간 남자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순간 무너지는 듯 보였던 잭의 인영은 어느새 그의 품을 파고들었고, 복부에 가해진 둔한 고통은 곧 믿기 힘들 만큼 날카롭게 남자의 정신을 난도질했다.
“아아……. 분부대로, 나으리들.”
귓가의 낮은 음성은 외마디 비명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능력을 쓰려던 시도는 이어진 공격으로 무산되고 만다. 처음은 신장, 그다음은 폐 부근을 당했다. 요원의 말끔하던 양복에는 질척거리던 액체와 피거품이 스며들었다.
부하의 이상을 깨달은 상관이 반응했을 때 남자는 이미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다.
이대로 대상을 놓치기라도 한다면 어떤 문책이 있을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중년의 요원은 많은 걸 생각할 겨를이 없이 잭에게로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는 강력한 능력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잭은 그의 예상과 달리 등을 돌려 도주하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 살인마는 추격자가 다가오기를 기다렸고, 괴로워하는 남자를 거칠게 붙잡아 세우곤 자신을 덮치려는 이를 향해 발로 차버렸다. 알아듣기 힘든 비명과 함께 두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삶에 대한 절박과 고통, 그리고 당혹감.
잭은 당황한 요원의 짧은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몸을 어떻게 가장 고통스럽게 무력화시킬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잘 훈련된 능력자였으나 방심은 화를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잭은 늘 불안정한 감정 상태를 보였지만 지금껏 명령을 위반한 적은 없었다. 그렇게 훈련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세간의 인식과 달리 그들에게 잭은 약자를 사냥할 뿐인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명령 외의 난도질을 수행하고 있던 잭은 이상을 감지하고 현장에 도착한 지원 병력에 의해 간단히 제압당했다.
“어때, 이것도 명예로운 죽음인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광기로 번뜩이는 눈이 가려지고 입에는 재갈이 물렸다.현장은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인간성을 잃은 괴물은 또다시 철창에 갇혀 끝을 기다렸다. 조롱과 비난의 가운데서, 그는 마지막까지 단 한 번의 저항도 보이지 않았다.
그와 나 사이에는 타오르는 모닥불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현실의 무게에 짓눌린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파묻었고, 진한 어둠에 싸여 나는 위태로운 안정을 되찾았다. 절 버려요. 내 이성과 관련이 없는 어느 부분이 속삭였다.
그게 훨씬 나은 선택이에요. 그는 깊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깊은 절망에 휩싸였다. 그의 선택은 정해져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티엔은 단지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도 똑같이 그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는 현명하지 못하시네요. 내 비꼬는 말투에도 관계없이 그는 그저 남아있던 장작을 불 안으로 던져넣었다. 내가 그에 대한 생각을 바꾼 건 아마 그쯤이었을 것이다.
·취중진담
사랑한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아요?
대답은 아주 오랫동안 없었다. 그의 발언이 그 정도의 감정이라 확신해버릴 무렵, 대답은 드디어 돌아왔다.
당신을 생각하고,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을 정도로. 그 정도로는 모자란가?
나는 잠깐동안 생각했다. 그러나 내 안에서 고민은 길지 못했다.
충분할 것 같네요.
이 다음에는 뭐가 있지? 나는 많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내 자신에게 닥쳐올 날을 상상한 적은 없었다.
·늦은 밤의 커피
그는 많은 걸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그것들은 그를 불편하게 만들 수 없었다. 적어도 그가 그와는 전혀 다른 누군가와 인연이란 걸 맺기 전까지는.
그 향만이라면 티엔도 그리 나쁘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다.
식물에서 난 것 특유의 고소함이며 꽃송이와는 다른 그 어떤 내음이라거나. 다만 언젠가 그 진한 음료의 맛을 보았을 때 그게 어떤 식으로 정신을 맑게 하는지를 알고서는 어느 정도의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견딜 수 있는 피로라면 인위적인 힘을 빌리지 않아도 좋을 테고 견딜 수 없는 피로라면 억지로 버티지 않는 편이 나을 터인데.
간만에 보내는 둘만의 시간에서 그가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겨우 그 요망한 음료 탓이다. 물론 보란 듯이 커피향을 음미하는 마틴 본인도 이유라면 이유 중 하나일 게 틀림없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아니."
"네…… 그럼 뭐."
슬슬 그런 그를 모른 척 하기도 어려워지지만, 마틴은 자신의 입맛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좀처럼 볼 수 없는-뭔가가 신경 쓰이면서도 그걸 인정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이 사람의 모습을 보는 건 꽤 나쁘지 않은 구경이었으니까. 게다가 잠이 오지 않는 다는 건, 글쎄,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터였다.
·잉크
울컥 터져 나온 잉크가 종이를 적시고, 멍하니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청년의 손가락 마디도 함께 물들어갔다. 아아, 드디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중요한 문서가 아니라 다행인걸.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서 불의의 사고에 의한 흔적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누군가에게 선물로 받았던 물건을 버리기 아까워한 대가가 이런 것이다.
얼마 쓰지 않은 메모는 새것을 꺼내면 되지만 손가락 마디에 남은 얼룩은 완전히 지워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마틴은 찌푸린 얼굴로 그 검은 자국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이 이상 그 사람의 생각을 하는 건 정말로 이상해진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이런 핑계가 생겨 다행인 게 아닐까, 라고.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괴롭힘에 마틴은 긴 신음을 흘렸다.
·오후 카페에서의 티타임
신경이 다른 곳에 쏠려있다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더 정확히는, 그래,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없으리라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런 사실을 지적하지 않은 이유는.
"오늘은 날씨가 참 좋네요."
"그런가."
하루 종일 질척거리는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무심함에는 익숙해진지 오래지만 일말의 부정도 없는 그에게는 헛웃음이 날 수 밖에 없었다.
"네. 당신만큼이나 좋은 날씨죠…… 조금만 더 여유를 가져보는 게 어때요?"
그제야 의문의 표정을 보이는 그에게 비스킷 한 조각을 건넸다. 가끔은 이런 시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피자
그런 게 있고, 맛있다더라. 어깨 너머로 주워들은 정보를 가지고서 제안한 저녁은 뜻밖의 호응을 받았다.
당신이 그런 걸 다 알고 의외네요.
그 말에는 여러 함의가 담겨있었다. 비록 티엔 본인은 그 뜻을 알아채지 못했지만.
이런 걸 좋아했어요?
그의 물음에 티엔은 제대로 된 대답을 주지 못했다. 별 뜻 없는 행동이나 결정에서도 그는 의미를 찾곤 했고, 그런 태도는 곧 티엔의 고심을 낳았다. 자신의 기호가 무엇인지. 또 지금 자신이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주제에 그는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다. 특히나 미식에 관한 것들.
큰 의미가 없어야 했을 말들에 놀라움을 보이는 마틴 챌피의 모습이 즐겁게 느껴졌다. 단지 그뿐이었다.
[벨져릭]
·흡연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런 생각이 잘못된 거라고, 빠르게 마음을 추스렸지만 내가 가진 위화감은 가시지 않았다. 우리는 오래도록 고요함을, 그리고 어색함을 즐겼다.
내 뜻을 다르게 해석한 그는 한 개피의 담배를 건넸다. 거절한다면 이 침묵을 긍정하고, 받아들인다면 나에 대한 그의 해석을 바꾼다. 어느 쪽도 달갑지 않은 채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옅은 연기는 썩 나쁘지 않은 맛으로 피어올랐다.
·향수
─그에게선 어렴풋이 값싼 향수의 냄새가 났다.
사실 저가품이란 것들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는 벨져가 그렇게 확신한 데에는 그게 맡아본 적 없는 향이라든가, 상대가 '일반적인' 향수와는 어울리지 않는 인상이었다는 이유가 있다.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향이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런 걸 신경 쓸 만큼의 관심이 없었고, 그 다음은 서서히 익숙해져 그게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말았다. 벨져가 향의 존재를 다시 깨닫게 된 것은 오랜 시간 모습을 감췄던 릭이 태연한 얼굴로 나타났던 날. 이번에 벨져는 그 익숙함에 안도를 느끼곤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감정에 놀라워했다.
"너, 무슨 향수를 쓰지?"
다시 또 언젠가, 긴 시간이 흐른 후에. 지나가듯 던진 물음에 릭은 어디둥절한 표정을 보였다.
"향수? 별다른 건 쓰지 않는데……. 아, 혹시 장미향을 말하는 건가? 그거라면 오늘 아침에 들렸던 로마에서 말이오, ……"
전혀 상관 없을 이야기를 즐거이 꺼내는 릭을 내버려둔 채 벨져는 홀로 생각에 잠겼다.
아아, 그런 건가.
그는 이내 무언가를 깨달았다.
[하랑마틴]
·첫사랑
하랑은 어렴풋이 제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래의 사내아이들이 으레 가지는 호기심이나 더 진중하게는 연심이란 것들을 좀처럼 상상할 수 없었던 탓인데, 그리도 곱다는 조씨네 둘째 딸을 보고서도 이렇다 싶게 마음이 동한 적이 없었다. 그러면 또 어떠하랴 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뿐이었지마는, 글쎄, 그게 이런 식으로 돌아와 자신을 농락할 줄 아이는 꿈에도 모르는 채였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뭔가가 범상치 않았다. 고향에서도, 바다 건너 낯선 여자들을 잔뜩 보았을 때도 몰랐던 '어여쁘다'는 감상이 무엇인지를 그 청년을 만나고서 알았으니까.
"왜 그래요, 하랑?"
"그냥."
한참 남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사람의 대답 치곤 싱겁기 그지없다.
"형은 뭘 먹고 그리 잘생겼어?"
"뭐예요, 저한테 잘못한 거라도 있어요?"
고운 눈을 휘며 웃음을 터트리는 그를 하랑은 차마 똑바로 마주볼 수 없었다.
아이씨. 나보고 어쩌라고.
그 첫사랑은 유달리 씁쓸하고 달콤한 맛이 났다.
·서랍
그럴 의도는 없었다. 단지, 정말로 우연히 들여다보게 되었을 뿐. 하지만 세상에 호기심을 막을 수 있는 게 어디 있으랴. 그것도 17살 사내아이가 사모하는 사람에게 품은 감정이라면야. 그리고 따지자면 괜히 호기심을 부채질한 쪽에도 잘못이 없지 않았다.
운 좋게도 그 친절한 형의 집까지 초대되었던 그날, 지겹게 따라붙는 일거리와 방문자를 현관에서 맞이하던 마틴은 하랑에게 뭔가를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했다. 어디어디에 있는 서랍의 몇 번째 칸. 한시라도 빨리 방문객을 쳐내길 바라마지 않던 하랑이다. 그래서 흔쾌히 달려간 곳의 서랍장 안에는- 있어야 할 물건 대신 얇은 종이봉투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하랑."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소년은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것만 같았다.
"미안해요, 장소를 잘못 알려줬네요. 서류는 제가 찾을 테니 먼저 가서 앉아있어요."
"어- 응."
마틴은 웃는 낯으로 다가와 반쯤 열렸던 서랍을 다시 밀어 넣었다. 그 안에 든 것은 분명 수많은 편지들. 빛바랜 것부터 아직 새하얀 것까지, 크기가 유난히 크거나 작은 것들도 섞여있었다.
처음에는 '무엇?'으로 시작된 의문은 곧 '누구?'라는 의혹으로 번져갔다. 그렇게 많은 편지를 버리지도 않고 보관하고 있다면, 가족, 친구, 혹은… 그런 생각을 떠올린 순간 하랑의 머리에는 위기감이 스쳐지나갔다. 지금껏 참을 수 있던 건 그 형의 곁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만일 그게 아니라면.
한 번 떠오른 조바심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결국 소년은 얼토당토않은 계획을 짜내기에 이르렀다.
[릭마틴]
·도넛과 스콘
그의 입가에 웃음이 퍼진다. 그 이유라고 한다면 마틴이 차에 곁들여 내놓은 버터밀크스콘으로,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면 그가 아직 다과를 입에 들이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다른 걸 꺼낼까요? 전에 릭씨가 가져온 도넛이 아직-"
"아니, 아니오. 잠시 다른 생각이 나서."
웃으며 스콘을 내려다보고만 있던 릭은 그제야 삼각의 작은 덩어리를 베어물었다. 입 안에서 부스러지는 영국 특유의 달지 않은 맛. 릭은 바로 그 맛을 상상하며 웃고 있었다.
아, 역시 영국인답구나, 하지만 블론디 본인은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한데. 마치 잼을 가득 채워 넣고 슈가파우더를 뿌린 도넛처럼. 그래, 결국은 마틴에 관한 생각이었다.
예의상이나마 그의 생각을 물어야 했을 마틴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한 채 릭에게 마주 웃음 지었다. 사랑스럽다거나 달콤한 건 오히려 그쪽이라는 반박도 속에 남겨둔 채로.
[루드릭]
·연락두절
죽었을까?
가장 먼저 그의 뇌리를 스친 발상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생사의 벽을 여러 번 넘어온 그에겐 더할 나위 없도록 타당한 추측이었다. 어디선가, 연락을 취할 도리도 없이 급사해 이대로 영영 다시 얼굴을 마주할 수 없을 거라고.
빛만큼이나 빠른 그도 멀리 떨어져있는 타키온의 생사를 확인할 도리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릭이 죽었다는 가정 하에 행동하기로 했다. 그의 생각이 틀렸다면 더할 나위 없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라면, 그를 해한 모든 것을 흔적도 없게 만들겠노라고.
[벨져데샹]
·짐
오만은 그로 하여금 주변의 모든 것을 짐이라 생각하게 했다. 약하고, 미숙하고, 그의 발목을 잡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지켜야 할 것들. 그리고 간혹 그 중에는 특별히 더 신경 써야만 하는 존재가 있었다. 예를 들어, 팀원의 생존에 벨져 자신만큼이나 중요한 치유능력자라든가. 바로 이날 그와 전투를 함께할 까미유 데샹도 그런 부류 중 하나였다.
그를 만나기 전 벨져는 벌레 능력이라는 설명에 약간 눈살을 찌푸린 적이 있다. 벌레와 치유라, 가히 품위 있다 생각하기엔 어려운 조합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그런 막연한 인상은 그 능력을 직접 목격한 이후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눈이 시리도록 공간을 메워가는 빛의 알갱이들과, 그 앞에서 당당히 웃음 짓는 새하얀 남자의 모습.
"적들은 널 먼저 노린다. 절대 앞으로 나서지 말도록."
"물론 잘 알고 있지. 그래도 홀든가의 도련님께서 지켜주신다면 무서울 게 없겠어."
전투가 시작되기 전. 비아냥거림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에 벨져는 대꾸하지 않았다.
전략적인 특수성, 단지 그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벨져는 전장으로 발을 내딛었다. 또 다른 승리를 거머쥘 시간이었다.
[멜빈릭시]
·발렌타인
멜빈은 제피L의 카메라가 생중계하는 문 밖의 풍경을 믿을 수 없었다. 실물을 보았던 적은 단 한 번. 그러나 바로 전날에도 그는 ‘저것’에 관한 고민으로 밤을 지새운 참이었다. 눈부신 은발. 붉고 푸른 눈동자. 그리고 사람을 닮았지만 결국 숨길 수 없는 무기질의 분위기.
공학도의 높은 지능도 이런 상황의 대처에는 그리 알맞지 않았다. 상대가 리첼이라면 귀찮아하며 문을 열었을 테고, 이것저것 캐내려 드는 기자라면 집에 없는 척 무시했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가 자신과 할아버지에 의해 만들어진 살인로봇이라면?
그러나 무엇보다도, 왜 저 로봇은 방문자라도 되는 것처럼 문 앞에 서있는 거지?
“집주인은 부재중입니다. 용건을 말씀해주세요!”
“멜빈 리히터와의 대화를 요청합니다.”
기계음이 섞인 대화는 어딘가 어긋나있다.
송신 받은 영상에 의하면 트릭시의 눈- 그러니까 옵틱이 제피가 아닌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보여지는 환경으로 그 각도를 유추해보면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문과 벽을 넘어 멜빈이 있는 장소가 틀림 없다. 설계와 관련된 것 외에는 깊은 생각을 하기를 거부하는 그조차 등줄기에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청년은 그리 침착하지 않은 상태로 보수 중이던 제피R의 전원을 켰다. 다행히도 즉시 작동하기에 문제 없는 가벼운 점검일 뿐이었지만, 상대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이상 어느 정도의 준비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는지는 천재인 그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 정도의 거리를 허용한 이상 도주의 가능성은 불분명했다.
“환영합니다, 용건을 마치고 일찍 돌아가주세요!”
가벼운 스위치 조작으로 현관문은 쉽게 열렸다. 지나치게 솔직하다며 타박을 들었던 제피의 인사말을 뒤로 한 채 안드로이드는 열린 문을 통해 곧장 멜빈이 있는 작업실을 향했다. 역시 그가 집안에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던 것이다.
긴장과 경계로 몸을 웅크린 그. 그리고 완벽하게 당당한 걸음걸이로 다가온 그녀.
“이것이 환자에게 필수적인 성분이라는 주장의 검증을 요청합니다.”
흔한 인사치레조차 없었다. 평소의 멜빈이라면 꽤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그게 자신의 업보로 만들어진 무기라면 달랐다. 게다가 잠시 동안 멜빈은 그것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내민 물건은…… 금박 포장으로 예쁘게 포장되어있는 초콜릿이었다. 살인병기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가 타인에게 건넬 법한 물건의 목록에서 최하단에도 들어있지 않을 먹을 거리. 물론 그 안에 독이 들어있거나 폭탄이 장치되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암수는 최첨단 살인 장비를 갖춘 이 금속 조형물에게 지나치게 번거로운 짓이었다.
이 상황에 대해 판단하기 위해 미간을 찌푸린 멜빈을, 색이 다른 두 눈이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모든 것이 인간과 유사했으나 유독 무기질적으로 보이는 그 눈. 언뜻 본 것만으로도 멜빈은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모브마틴](수위x, 그냥 누구인지를 모름)
·포스트아포칼립스
-살아나갈 수 있다면 뭘 하고 싶어요?
너무나 단순한 질문이었다.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또 모두가 갈망해 마지않는.
-여자를 잔뜩 만날 거야. 그리고 언젠가 내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내 자식들한테 알려줘야지…….
그는 이틀 뒤에 동료의 오발탄에 쓰러져버렸다.
-여행을 하고 싶어. 평화로운 곳에서, 호화로운 호텔을 잡아다 하루 종일 잠을 자는 거야.
그게 무슨 여행이냐며 비웃음을 샀던 그녀는 며칠 전부터 행방불명. 나는 거리를 돌아다니는 그것들의 차림새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글쎄.
대답이 없던 그는 여전히 내 곁에 남아있었다.
운이 나빴던 거라고, 어쩔 수 없다고. 내가 살아오며 수도 없이 생각해왔을 그런 것들은 이제 생존의 문제가 되어 있었다. 운이 나빴기 때문에 버려지고 어쩔 수 없기에 살해당한다. 그게 최선의 선택이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왜 남았어요?
내 물음에 그는 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인 모양이었다.
-전 원망하지 않았을 테고. 당신도 분명 하고 싶은 일이 있었을 텐데.
내가 이성이 죽어버리기 전에 전부 전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는 남았고, 나는 서서히 죽어버렸다. 그게 끝이었다. 그 뒤가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금속에 의한 관통상을 처치하는 동안 릭은 꽤나 속 편한 소리를 뱉었다. 일그러지는 표정이나 떨리는 손까지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모양이지만, 그가 말하는 내용은 그들이 처한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위협적인 강화인간, 다시 열린 인식의 문, 괴멸했다고 알려진 안타리우스의 재부흥.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대는…… 그러니까 홀든 가는 오스트리아 출신이지, 그렇지 않소?”
그러나 릭의 어투는 평온한 내용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낮게 가라앉아 있다. 돌아가야 할 일상과 점점 멀어지고 있는 그에게 이런 식의 대화는 현실 감각을 되찾기 위한 수단이나 다름 없었다.
“그래.”
벨져는 짧은 대답과 함께 붕대의 대용인 셔츠 조각을 단단히 눌러 묶었다.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검사는 다시 주변의 상황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종교집단의 잔당은 모두 물러간 것으로 보이나 부상자까지 있는 상황에선 더욱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지금 릭은 적의 기습으로 부상을 입어 능력을 쓰는 것을 힘겨워 하고 있었다. 벨져는 그런 상황에서 퇴각하는 적까지 쫓으려 들던 그를 막았고, 다행히도 상처는 중요한 근육이나 혈관을 건드리지 않은 듯 했다. 냉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전투의 문외한 치고 운이 좋았다고 할까. 하지만 벨져는 홀로 그 시바 포를 쫓던 그의 행동을 만용이라 보았다.
물론 벨져는 처음부터 루사노로 이동하는 것 외에 릭의 도움을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먼저 동행을 요구한 이상 그는 벨져가 책임져야 할 짐이었고, 그의 부상은 자신의 불찰과 같았다.
“릭.”
부름에 고개를 드는 남자는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네 힘이 필요할 거다.”
“아.”
그의 피로감 위로 쓴웃음이 번졌으나 벨져는 아직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 네게서 눈을 떼지 않을 테니.”
“……고, 고맙소.”
지금 상황에서 부탁을 하는 건 벨져 측이었음에도 릭은 얼떨결에 감사의 말을 내뱉었다. 이 귀족 출신 검사에게는 태도의 일관성으로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놀라운 재주가 있는 게 분명했다.
“이제 능력을 쓰는데 문제는 없겠나? 좌표를 하나 알려줄 테니 기억해 두도록.”
“아픈 건 여전하지만 어떻게든. 이번에는 어떤 곳이지?”
벌써부터 부려먹는 건가- 라며 릭은 속으로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그러나 곧 밝혀지기로 다음 여행지에 용건을 가진 사람은 벨져가 아니었다.
“쓸만한 치유능력자가 있지. 그 정도 부상에 완치는 문제 없을 거다.”
그 말을 마친 벨져가 주변을 살피던 눈길을 다시 공간능력자에게로 돌렸을 때, 그 미국인은 뜻밖에도 웃음을 짓고 있었다. 물론 아픔은 별로 가시지 않은 기색이었다.
“무슨 일이지?”
“아니, 뭐라고 할까. 이 일도 그리 나쁘기만 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소.”
의혹에 찬 시선과 마주친 릭은 짐짓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쓸데없는 소리로군.”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거나 달갑게 여기지 않으리라는 생각 자체를 한 적이 없는 사람의 감상이다.
릭은 미처 다 짓지 못했던 쓴웃음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평소보다 더욱 신중히 벨져가 지목한 장소로 연결되는 게이트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