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른쪽 교류회에 냈던 회지를 웹공개합니다.

웹상에서의 가독성을 위해 문단 간격을 수정했고, 수위 부분과 축전을 제외했습니다.

축전을 주셨던 하히님, 그리고 교류회 주최님과 참가해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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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이야기

 

 

 

 

 

 

 

 

 

 

 

 

 

울지 않는 짐승과

웃음 짓는 얼굴

 

 

 

펜을 내려놓는 소리가 약간 크게 들린다. 종이를 넘기는 동작이, 그걸 내려다보는 표정이 평소 그의 것보다 조금 더 과장되어 있었다. 펜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도 시계침이 똑딱거리는 소리와 거의 비슷한 간격으로 이전보다 템포가 느린 편이다. 그리고 약간 당겨진 입꼬리까지.

 

그런 작은 징후로부터 마틴은 티엔의 심기가 편치 않음을 추측해냈다. 추측은 마인드리더의 평소 방식이 아니다. 그러나 몇몇 이들에게 한정하자면 그리 나쁘지 않은 방법으로, 마치 잃은 감각을 대체하는 것 마냥 마틴의 오감은 읽지 못하는 자를 기민하게 살피곤 했다. 이제 저 사람은 언제쯤 입을 열까, 혹은 아예 입을 열지 않을지도. 그 뒤는 추리가 아닌 기대의 영역이었다.

 

최근 마틴이 깨달은 바에 따르면 티엔은 의외로 뭔가를 홀로 고민하는 때가 많았다. ‘혼자서’라는 건 놀랄 일이 못되지만 고민이란 거의 기계 같은 그 남자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확한 기계일수록 예상치 못한 외부의 변화에는 취약한 법인지라.

 

그 대부분의 고민은 마틴이 모르는 새 지극히 티엔다운 결론과 함께 끝나곤 하지만 몇몇 상황에선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마틴이 어떤 기대를 품게 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곧 마틴은 꽤 드문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미련할 만큼이나 모든 일을 스스로 하기로 유명한 티엔 정이 도움을 요청하는 광경을.

 

실제로는 단지 그가 알아서 할 수 있는 일에 타인을 끌어들이지 않는 것뿐이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다를 수밖에 없다. 언젠가 마틴은 티엔에게 모종의 부탁을 받았던 일을 동료들에게 고백하는 후원자를 목격한 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동료들의 반응을 요약하자면 놀라움의 탄성이었다.

 

당시의 마틴은 그런 그녀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또는 티엔에 대한 악감정에 의해 이해하기를 거부했지만─지금은 그 마음을 십분 체감할 수 있다. 그에게 인정받았다는 묘한 즐거움과 뿌듯함, 그리고 그에게서 감사인사를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결의.

 

“마틴.”

 

어느새 자료를 정리하던 티엔의 손이 멈춰있었다. 아직 돌아보지는 않았으면서도 마틴은 그의 표정을 아주 정확하게 짐작해낼 수 있다. 천천히,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단어 하나를 더 메모하고 나서야 그는 태연한 얼굴로 티엔을 향했다. 그리고 마틴의 시선에 들어온 예상 그대로의 모습에 청년은 속으로 웃어버리고 말았다.

 

“네, 네. 듣고 있어요.”

“욕을 듣는다고 꼭 화가 나야 하는 건가?”

 

진지한 얼굴로 던져진 물음은 그것만으론 도저히 맥락을 읽어낼 수가 없다. 하지만 그걸 알아내려 마틴이 긴 수수께끼를 풀어낼 필요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저런, 하랑에게 욕이라도 했어요?”

 

티엔은 자신의 질문을 태연하게 제자와 연결시키는 마틴에게 눈썹을 치켜 올렸다. 분명 그는 자신을 읽을 수 없을 터인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틴의 추측이 완전히 옳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니.”

“음. 다행이네요. 어쨌거나 하랑 관련 얘기겠죠.”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마틴에게 다시 한 번 전해지는 의심의 눈초리. 어쩌면 그 사내아이가 먼저 달려와 이야기를 전달했을 수도 있지만 시간상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를 마틴은 재미있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뻔하죠. 티엔 당신이 고민할 일은 그 애 아니면…….”

 

그 뒤는 ‘나 정도일까’, 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마틴은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희망 사항일 뿐인데다 지금 당장 궁금한 건 그런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던 말을 멈추곤 어딘가 애매한 표정이 되어버린 마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서 다른 말로 본심을 감춰버렸다.

 

“……단련이나 뭐 그런 거겠죠.”

 

다행이라고 할지, 되는대로 주워섬긴 추측도 사실과 그리 동떨어지지는 않았다. 과하게 건실한 이 사람은 누군가에게 단순하다고 칭해져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뭐, 어디 본론이나 말해보시죠, 손님. 한 잔 정도는 제가 살 테니.”

 

자리에서 일어나 티엔에게로 다가간 마틴은 되도 않는 바텐더의 흉내를 내며 종이 뭉치가 그득한 책상에 기대어 섰다. 물론 티엔이 그런 행동을 알아보리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마틴 자신의 기분 전환에는 썩 나쁘지 않은 익살이다.

 

티엔은 어딘가 과하게 흔쾌한 그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천천히 입을 뗐다. 중요할 것 없는 서론이 길어지는 건 그로서도 원치 않는 일이었다.

 

“……. 방금 전 야외 수련 후의 일이었다만.”

 

티엔은 이날 오전 제자와 함께 있던 시간에 이름 모를 한량들과 마주친 이야기를 짤막하게 서술했다. 소년은 그들에게 벌컥 화를 냈으나 티엔은 그런 소년을 막았다. 그러자 제자의 화는 무례한 자들이 아닌 스승에게로 옮겨갔고, 두 사람이 재단 근처로 돌아왔을 무렵에는 티엔의 언성도 높아져 있었다는 것이다.

 

자세한 설명이 없었음에도 마틴의 귀에는 그 자들이 과연 어떤 소리를 지껄였는지가 훤했다. 능력자 차별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종류. 남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마틴은 그들이 어떤 혐오감을 가졌는가를 잘 알고 있다. 마인드리더가 지켜보기로, 그런 식의 아무 의미도 당위성도 없는데다 심지어는 위협조차 되지 못하는 멸시가 우습기 짝이 없었다. 물론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헛웃음이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하랑이 화낼 만도 하네요.”

 

깔끔한 대답을 티엔은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거기서 녀석이 소동이라도 벌이게 내버려두는 게 나았다는 건가?”

“아뇨, 그건 아니죠. 그 뒤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당신만이 아니라 하랑도 모욕당했는데 참으라고만 했던 거니까.”

 

그건 다름 아닌 공감의 문제였다. 마틴 자신이었다면 피해 당사자에게의 위로나 동조를 빠트리는 경솔한 짓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에 제가 얘기해볼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이것만 다 끝내면 금방─”

“그래서는 변하는 게 없잖나.”

 

이 완벽주의자는 개선을 원했다. 그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자체를 끔찍하게 여기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와 마틴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어떤 식으로든 타협할 수 없는 문제가 남아있는 한 그들 사이의 마찰이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그때 당신은 그 사람들에게 별 생각이 안 들었던 거죠? 당신은 어떨 때 화가 나는데요?”

 

짧은 고민. 그의 심경을 더 복잡하게 만들 생각이 없던 마틴은 약간의 부가설명을 덧붙였다.

 

“제게 말할 필요는 없고, 그 애가 어떤 기분이었을 지를 상상해보라는 거예요.”

 

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티엔의 표정은 이해와 거리가 멀었다. 아마 당시의 하랑만큼이나 격하게 반응할 수 있는 화를 잘 떠올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사실 마틴으로서도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는 그의 모습은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웠다.

 

문득, 마틴은 그에게 궁금한 점이 생겼다.

 

“지금까지 제게 화가 난 적은 없었어요?”

“……모르겠군. 그걸 화라고 할 수 있는지.”

 

마틴은 그가 어느 때의 기억을 떠올렸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답지 않게도 몇 번이나 그때의 일을 언급하곤 했으니까. 따라서 청년은 그의 애매한 대답을 더 캐묻지 않았다.

 

이전에 마틴은 그가 좀처럼 감정을 보이지 않는 것이 타인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아는 이상 거기엔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하다.

 

……아하, 그건가.

 

자신이 무슨 잘못을 어떻게 저질렀는지조차 깨닫지 못해 고심하는 그를 지켜보던 마틴은 무언가를 연상해냈다. 커다란 덩치에 위협적인 생김새를 가지고도 짖지 않는 개.

 

어릴 적부터 능력자였고, 일찍부터 수행이니 단련 같은 것들을 해왔다고 들었다. 이곳처럼 능력자가 밀집되지도 않은 땅에서 그에게는 주변의 모든 게 얼마나 연약하게 보였을지. 마치 무해한 병아리나 토끼처럼 말이다. 이빨과 발톱을 가진 존재가 그런 것들을 향해 짖거나 으르렁거리는 건 꽤나 부끄러운 짓이었을 것이다.

 

마틴이 간혹 그에게서 느낀 오만함 비슷한 무언가도 그런 마음가짐 때문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식의 해석은 추측일 뿐이며 사실은 인간관계에 둔한 그의 본래 성격이 문제인지도 모르지만.

 

“이러니까 당신이 친구가 없었죠.”

 

이런 뜻밖의 인신공격에도 별 생각이 없는 지금처럼 말이다. 쿡쿡 웃음을 터트린 마틴은 그에 대해 알아갈수록 대체 어떻게 이런 사람과 사귈 수 있었는지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예의상의 기다림이 짧게 있은 후 마틴은 티엔의 고민이 해결하지 못하리라는 처방을 내렸고, 이번 고민은 심통이 난 아이를 달래야 할 그의 몫이 되었다. 정말이지 불공평하고도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혼자가 아닐 이유

 

 

 

아직 두 사람이 가깝지 않은 시기였다.

 

그 스터우터의 자리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마틴은 그가 오기 전부터 관련된 일을 다수 처리하고 있었다. 때문에 업무상의 이유로 그들이 자주 마주치게 되는 건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마틴으로서는 속이 끓는 일이었지만 그는 하던 일을 그만두거나 남에게 미루지 않았다. 재단의 이방인인 티엔에게 자신의 일을 맡겨두기는 찜찜했고, 또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파악할 파악한 필요가 있었다. 능력이 통하지 않더라도 관찰이라는 수단은 여전히 유효할 터였다.

 

그런 와중 티엔 측에서는 오히려 그를 나쁘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대개 그렇듯 마틴이 잘생긴 얼굴을 가졌다거나, 그 생김새에 어울릴 만큼의 고운 말을 쓸 줄 안다는 이유는 아니었다. 티엔은 처음에 마틴의 생김새조차 흐릿하게 기억했으며 그들은 인상적일 만큼의 긴 대화를 나눌 일이 거의 없었다.

 

티엔의 눈에는 그의 외견이나 성격보다도 서류를 처음 읽는 사람도 알기 쉽도록 정리된 메모, 손이 두 번 가지 않는 깔끔한 일처리 같은 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함께 일을 한다면 이런 사람이 이상적일 거라는, 그가 던질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마틴을 향했지만 물론 마틴은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또 다른 이유라면 마틴은 그에게 말을 많이 걸지 않았다. 티엔은 안녕하세요, 에 이어지는 안부 인사나 날씨가 좋다는 둥의 사족을 좋아하지 않는다. 때문에 깔끔한 서론, 본론, 그리고 결론으로 이어지는 마틴의 화법은 그에게 썩 달가운 존재였다. 공교롭게도 이 점은 그 마인드리더가 티엔을 껄끄럽게 생각한 탓이었지만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마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거 알아요? 당신의 뒷얘기를 옮기는 후원자가 있다는 거.”

 

별다른 특별한 일이 있던 날이 아니었다. 그날에 관해 티엔의 기억에 남아있는 건 바로 이 대화뿐일 정도였다.

 

뜻밖의 이야기였지만 그가 듣기에 마틴의 말에 걱정의 기색은 없었다. 사실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마틴은 여전히 티엔을 좋게 보지 못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이유가 많지만. 단순히 출신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고요. 유감으로 생각해요. 제게 대놓고 하는 소리는 아니어서 손을 쓰기는 어렵군요.”

“중국에서는 그런 걸 ‘閑話’라고 하지. 쓸데없는 소리라는 뜻이다.”

 

티엔은 그의 말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직접적으로 받은 불이익은 없었고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낸다면 그들도 무어라 할 수 없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 마음가짐에 나쁠 것은 없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걸 전하는 티엔의 태도는 그리 바람직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담담하게 말을 전했던 마틴도 그의 짤막한 대답에는 굳은 얼굴이 되었다.

 

“글쎄요. 당신은 고립되는 게 두렵지 않나 보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외면 받는다거나.”

“그럴 일을 만들지 않으면 되는 게 아닌가.”

“글쎄요. 완벽하다는 건 모든 상황을 대비한다는 것 아닌가요? 완벽이라는 게 당신의 목표라고 들었는데요.”

“완벽에 대한 견해가 서로 다른가 보군.”

 

마틴은 불편한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의 대화는 어쩐지 티엔의 기억에 남아 오랫동안 이어졌다. 마지막의, 완벽에 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티엔은 혼자라는 것이 고립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한때는 절박하게 타인의 도움을 갈구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들은 티엔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였다. 그 때문에 그는 그 뒤로 생겨났을지 모를 인연들을 쉽게 떨쳐낼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 혹여라도 그에게 타인이 필요해지는 날이 온다면 그는 그 순간 불완전해지는가. 혹은 눈치 채지 못했을 뿐 본래부터 불완전했는가.

 

이런 생각은 그를 바꾸는 계기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의 삶에 나타난 인연을 떨쳐내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늦었군.”

 

신사된 도리로 약속시간에 늦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틴에게는 피치 못하게 시간을 놓쳤을 때 건물 사이를 빠르게 뛰어 넘거나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따름이었다.

 

“미안해요.”

 

잠깐 동안 목적지까지 달려와야 했던 마틴은 먼저 숨을 골랐다. 오래 기다렸어요? 같은 뻔한 물음은 나오지 않았다. 티엔이 그를 기다린 시간은 약속 시간부터 지금까지, 그러니까 약 15분 정도였다.

 

“전차가 도중에 멈췄어요. 케이블에 문제가 생겼다는지…….”

 

마틴은 하다못해 전기를 다루는 능력자가 아닌 것을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따져보자면 이번 일은 그리 심각할 것이 못된다. 이전에 티엔은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그를 기다린 적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성미에 멍하니 기다림만으로 시간을 보낸 건 아니다. 티엔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몸 안의 기운을 점검했다. 양의 기운, 음의 기운, 그 둘의 조화. 그가 약간의 수고를 들여 그 기운들을 형상화했다면 주변의 사람들은 꽤 신비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고국에서 기를 수련하는 이들은 숨을 통해 들이마신 천기를 단전에 쌓고, 그것을 정으로 화해 기력을 강하게 만들며, 몸 곳곳에 퍼진 경락을 통해…… 운운. 그러나 티엔은 달랐다. 적어도 티엔 자신의 감각에 따르면 외부에서 받아들인 것들은 어디까지나 평범하게 신체를 유지시킬 뿐 그의 힘은 온전히 그의 몸 안에서 피어올랐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릴 적 주체할 수 없는 기운으로 스스로를 해치게 되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그렇게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는 힘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충분한 제어 아래서 몸 안을 요동쳤다. 지극히 당연한 결과에 티엔은 여전히 안도를 느끼고, 또 약간은 뜻밖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의 일상에 변화가 생겼음에도 극적인 퇴보 같은 건 없었다는 것이.

 

당시에 마틴이 모습을 나타낸 건 2시간 후의 일이다. 그렇게 긴 시간동안 기의 흐름을 다스리는 건 간만의 일이었고 티엔은 나쁘지 않은 수확을 얻었지만, 약속상대가 아직 그 자리에 있을 걸 기대하지 못한 마틴은 놀라고 또 미안해했다.

“뭐에요, 화났어요?”

 

티엔이 생각에 빠져있는 걸 알아챈 마틴의 물음이다. 기공사는 자신을 찬찬히 살피는 눈길을 느끼곤 흘끗 돌아보며 대답했다.

 

“어차피 더 늦은 적도 있었지 않나.”

“허, 그 얘긴 대체 언제까지 할 거예요? 그때도 화난 건 아니라면서요.”

 

당연하게도 티엔에게 연인을 골려먹으려는 의도는 없었다. 단지 그만큼 인상 깊었기 때문에 자주 언급할 뿐이지만, 그런 이유를 밝히지 않았으니 마틴으로서는 그의 생각을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이번 식사비는 당신 몫이군.”

 

티엔의 지적에 마틴은 배신당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늦었을 땐 밥을 사겠다고, 직접 말한 적이 있던 것은 사실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 알았으니까 얼른 가기나 하죠. 다 저 때문이지만 늦겠어요.”

 

멀지 않은 영화관에서 능력자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흔치 않은 데이트 기회인 셈이었다.

티엔은 앞서 가는 연인의 뒤를 따르며 그의 등 뒤를 쫓는 불안감을 떨쳐냈다.

 

이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시간들. 이런 감정과 인연에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는 먼 미래에 알게 될 터였다.

 

 

 

 

 

 

웃지 않는 주말

 

 

자명종이 울린다. 제기랄. 탁자를 더듬어 그 소리를 죽여 버린 뒤에도 시끄러운 종소리는 여전히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다른 날보다 훨씬 늦은 시각이지만 마틴은 곧바로 전날의 어리석음을 후회했다. 그는 아직 눈을 떠서는 안 됐다. 오늘이 그에게 어떤 하루가 될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 챌 수 있는 시기가 있다. 그게 지나고 나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숨이 막히며, 온건하게 표현하자면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로 감정적인 피로가 마틴의 머리끝까지 쌓인 후에, 혹은 아무런 계기도 없을 때도 있었다.

 

이번 케이스는 전자에 가까웠다. 청년은 스스로가 아직 멀쩡하다고 진단했지만 그의 판단이 보기 좋게 빗나가버린 모양이었다. 혹은 그게 단지 자신의 머리를 속이고 싶었던 무의식의 시도였을 수도 있겠다.

 

때로 요청을 받을 때면 마틴은 감정에 관한 조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상이 자기 자신일 때에 그런 뻔한 조언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마틴에게 마음에 대한 충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도 없었다. 정말이지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세계가 그에게 상냥했던 적은 능력을 가진 그날 이후 단 하루도 없었다. 적어도 지금만은 그런 생각이 들어버린다.

 

이전에 마틴은 지금의 이런 기분을 타인에게 의지하는 것으로 풀고자 했다. 서툴거나 능숙한 위로, 그리고 걱정 섞인 그들의 속마음을 들으며 위안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는 이어지는 자조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능력이 아니었다면 과연 이런 식으로 대해질 수 있었겠느냐고, 지금도 능력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안다면 무어라 할 것 같으냐고. 실제로 몇몇 이들은 진심이 담긴 위로를 건네지 못했고 그런 마음을 들키게 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위해주려는 그들에게서 마틴은 위안과 함께 비참함을 얻었다.

 

언젠가는 능력도 당신의 일부라며 상냥하게 말해준 사람이 있었다. 그랬던 그 사람의 속마음은……. 마틴은 이야기를 나눈 기억을 그에게서 지워버렸다. 그런 말을 했던 사람이라면 분명 이해해주리라 믿는다고, 마틴은 멍하니 생각했다.

 

그 뒤로 마틴은 자신의 기분과 상관없이 더욱 상냥하고 친절하게 웃었고, 태연한 얼굴로 의미 없는 말들에 맞장구를 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마틴 안에 가득 찬 비아냥거림이며 템스 강에라도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럴 때면 감정의 피로는 더욱 쌓일지언정 마인드리더의 기분은 시계침 마냥 한 바퀴를 돌아 조금 나아진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럴 필요가 없는 주말인 오늘은, 이대로 누워 영영 일어나지 않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마틴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불 속에 파묻혀 다시 눈을 감았다.

 

그 사람은 새벽에 떠났을 테고, 늦은 저녁에 다시 들릴 예정이다. 마틴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뭐가 문제냐는 질문을 하고, 눈을 마주치고, 결국 이유를 알아내지 못한 그는 가만히 마틴의 머리를 쓰다듬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전처럼 눈물을 참으려 더욱 괴로워질 뿐이다. 이번에는 정말로 울어버릴 지도 모르고, 그렇게 하면 기분이 훨씬 나아질 것도 사실이었지만.

 

점차 뒤엉키던 마틴의 생각은 몇 번인가의 점멸 후 조용한 흑백의 꿈이 되었다. 그리고 그 짤막한 필름마저 끊긴 뒤에는 편안한 어둠이 그를 감싸 안았다.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마틴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낯선 정오의 햇살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침울한 기분도 약간은 나아져 이제는 창피하게 울음을 터트릴 일도 없을 것 같았다.

 

허기를 느낀 그가 느릿하게 부엌을 향했을 때 찬장에 있던 빵은 이미 대부분이 사라진 뒤였다. 이제는 굳이 놀라기도 새삼스러울지도. 이른 아침 꿈결에 요리의 소음을 들었던가, 육류와 치즈, 이런저런 야채들도 함께 모습을 감춰버렸다. 남아있는 것들을 그러모으면 간신히 1~2인분이 될 분량. 사려 깊기도 한 애인을 떠올리며 마틴은 그 중에서 적당히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덜어 다시 침실로 향했다.

 

마틴이 재료들을 뭉쳐 만든 모양새는 햄치즈 샌드위치에 가까웠다. 예전이라면 이것만으로 식사를 끝냈을 테지만 지금은 곁에 놓아둔 사과 반조각도 함께 그의 위장 속으로 사라질 예정이다. 티엔은 대식가일 뿐만 아니라 균형 잡힌 식단을 중시했는데, 따라서 빵과 고기가 있더라도 야채가 들어가지 않는 식사를 죄악으로 여겼다. 그의 잔소리에 질려버린 마틴은 이제 습관처럼 식물에게서 나온 뭔가를 끼니에 곁들이곤 했다.

 

배를 채우는데 의의를 둔 식사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지만 멍한 시간동안 너무 오래 우려내버린 차에서는 떫은맛이 났다. 괜한 기운을 돋우려 애쓰는 것처럼 느껴지는 기름기와 녹말의 단맛을 몰아내기에는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식사의 더부룩함은 마틴을 다시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그에게는 몸을 추슬러 밖을 거닐만한 기력이 없었다. 이 날만큼 디킨스의 소설을 읽기에 좋은 날이 다시 찾아올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책장까지 손을 뻗는 것조차 하지 못했으니 단순히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는 핑계거리는 아니었다.

 

 

또다시 눈을 떴을 때 창가의 흰 커튼은 어느새 햇살의 붉은 기운을 띠고 있었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을 지경이다. 혹은 그의 기분이 그만큼 무감각해져 있는지도 몰랐다.

 

아직일까, 라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을 무렵, 굳게 닫혀있는 방문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저 문을 지나왔을 때 마틴은 양손이 부자유스러웠기에 자연히 혼자 남은 집에서 일일이 문을 닫는 거추장스러운 행동을 생략했었다. 그랬었는데.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로 마틴은 안도를 느꼈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연인의 얼굴, 그의 곁을 지키고 있던 그의 모습, 따위를 바라기는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기 때문에 마틴은 아직 불안정한 마음이 제시하는 의문을 떨쳐낼 수 있었다. 이런 날이 언제까지 이어지고, 그는 언제까지 곧장 찾아갈 수 있을 거리에 남아있을지.

 

청년은 천천히 땅을 딛었고,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내린 뒤 큰 심호흡을 하고서 그 문의 밖을 향했다. 그는 자신이 평범한 얼굴로 티엔을 맞이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베일 뒤에 있는 것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가벼운 탄성과 흐뭇한 미소, 축하의 박수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 서약을 끝으로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음을 정식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축복 보다는 관찰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티엔 또한 이번에는 예의상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그 두 사람은 재단의 후원자였지만 티엔은 그들을 잘 알지 못한다. 때문에 그는 상대적으로 식의 당사자들보다는 혼례 그 자체에 관심을 가졌다. 꽃과 레이스의 장식, 교회라는 장소, 그리고 하얀 베일. 그 중 티엔이 가장 흥미를 보일 수 있던 것은 신부의 드레스에 은은하게 수놓인 무늬들이었다.

 

티엔이 아직 중국 땅에 있었을 때에도 서양식 혼례에 대해서는 얼핏 들어본 적이 있었다. 신식 문물을 즐기는 이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행이 되어 있다고 하던가. 그로부터 몇 년 뒤인 드디어 직접 눈으로 보게 된 하얀 신부는 그가 어릴 적 보았던 붉은 천을 쓴 신부와 어딘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서약을 마친 두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다. 티엔이 문득 바라본 하객들의 장소에는 그가 특별하게 여긴 첫 사람이 있었고, 그는 옅은 미소로 그런 신랑신부의 방향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아마 마틴이라면 그 두 사람과 어느 정도의 친분이 있을 터였다.

 

티엔이 이 행사에 참석하겠다고 했을 때 가장 놀란 건 정작 제안을 했던 마틴이었다. 그는 곧장 이유를 밝히려는 티엔의 입을 다물게 하고서 그 놀랍고도 대담한 꿍꿍이를 알아내려 노력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결국 티엔이 자신의 입으로 말하게 된 연유란 이미 참석의사를 밝힌 제자 녀석을 보다 빠르게 수련으로 데리고 돌아가겠다는, 특히 하랑에게 있어 삭막하기 그지없는 이유였다.

 

언제나 그렇듯 예쁘게 웃을 줄 아는 연인을 바라보던 그는 순간 머리를 스친 상상에 스스로를 의심했다. 예복을 입은 그들과 축복하는 사람들.

 

평소 티엔의 생각을 빌리자면 정말이지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지금 당장 불가능의 이유를 꼽아보자면 그들이 공교롭게도 같은 성별을 가졌다거나, 그런 걸 서로가 원하지 않으리라는 것들이 있다. 그러니 잠깐의 생각일지라도 그게 무용하다는 건 너무도 자명한 일이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해 대화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언젠가 말하기를, 마틴은 그게 존재하는지 확신하지조차 못한다.

 

‘당신이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들에게는 꽤 뚜렷한 데드라인이 있었다. 티엔이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사라졌을 때. 마틴은 자신이 그 이유를 대신할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틴 자신의 감정에 관해서는, 그게 완전히 사라지더라도 아닌 척 할 수 있을 거라는 찜찜한 대답이 돌아왔다.

티엔이 여러 생각을 거치는 동안 식이 끝나고 간단한 피로연이 준비되었다. 그는 주변이 대화의 소음으로 메워지기 시작할 즈음 자리를 피했다. 역시 이런 곳에 들르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 짓이었다.

 

 

금발의 어트랙티브가 먼 구석에서 홀로 레이스의 패턴을 살펴보고 있던 티엔에게로 다가갔을 때,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흰 손을 뻗어 마틴의 얼굴을 시야에서 가려 보았다. 그러고서 내뱉는 흠, 이라는 깨달음의 소리에 마틴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이 되고 말았다.

 

“왜요, 뭐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회피의 뜻이 절반, 실제로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는 생각이 절반. 옆에서 그의 행동을 보기에는 퍽 웃기기도 했을 것이다.

 

“답지도 않네요.”

 

마틴은 약간의 먹을거리를 담아온 접시를 그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청년이 골라온 가장 달지 않은 스위츠도 그의 입맛에는 맞지 않아 결국 그것들은 마틴 자신의 몫이 되고 말았다.

 

“저 둘은 꽤 오래 전부터 서로를 좋아했어요.”

 

본래부터 자신의 것으로 집어온 커스타드 푸딩 한 스푼을 입 안에 넣은 마틴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밝히지 않는 마인드리딩의 이야기. 티엔은 타인의 관계에 신경 쓰지 않는 만큼 그런 이야기에 거부감이 적었다. 게다가 인간관계랄 것도 없다시피 한 그였으니 괜한 말이 흘러나갈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내색을 안 해서 서로 눈치 채지도 못했을 때부터요. 꽤 대단한 확률이죠, 안 그래요?”

 

그들의 미래를 조심스럽게 점쳐보던 마인드리더는 드디어 찾아온 이 날에 꽤 새로운 감회를 가지고 있었다.

 

기공사는 그런 그를 조용히 지켜보다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그에게 그대로 전했다.

 

“당신은 저런 걸 원하나?”

 

티엔이 뜻하는 바는 저들과 같은 결혼식이었고, 그건 그들에게 있어서 꽤나 복잡한 질문이 될 수밖에 없다. 마틴은 입 안에 든 푸딩을 삼키고는 쓰게 웃었다.

 

“그렇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데요?”

“당신의 선택을 존중하지.”

 

이 사람은 이런 말도 할 줄 아는구나, 라고. 마틴은 그리 마음이 편치 않은 상황에서 알게 되었다.

 

“글쎄요, 그럴 땐 붙잡겠다고 말해요. 진심이 아니더라도요.”

 

같은 입에서 얼마 전에는 배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던가. 티엔이 연인의 진담인지 농담인지를 알기 힘든 만류에 불평을 꺼내기 직전, 마틴은 더 긴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는 지금 그러니까, 열정적인 연인이잖아요. 우리 같은 사람치고는 그렇죠. 그런 상황에서 떠나겠다는 사람을 배려할 필요는 없어요.”

 

무어라 반박하기 힘들만큼 총체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다. 티엔은 그 뜻을 파악하기 위해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슬슬 가봐야겠네요. 나중에 봐요.”

 

작별인사와 함께 몇 걸음을 옮겼던 마틴은 방금 전 티엔이 보였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해 보았다. 잠깐 동안 가려졌다가 다시 보이는 연인의 얼굴.

 

아, 그래. 잘생기긴 했지.

 

그에게 떠오른 생각은 결국 티엔의 것과 닮아 있었다.

 

베일 뒤에 있는 게 그의 연인이라면, 그 얼굴을 첫 번째로 볼 권리는 빼앗기고 싶지 않을 거라고.

 

 

 

 

 

 

 

더 작은 이야기

 

 

 

“그리고, 그녀가 말을 할 때마다 고운 입술에서 반짝이는 금화가 떨어져 내렸습니다……”

 

그날 재단 건물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었다.

 

티엔의 제자가 아직 영어로 된 대화에 서투르던 시절. 그 나이대의 아이들은 빨리 배우기 마련이지만 친절한 마틴 챌피는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고자 했다.

 

소년과 자주 대화를 나누는 것 외에도 그에게 읽어줄 수 있을만한 이야기를 고민하던 마틴은 동화책을 빌려왔다. 처음에는 무슨 애 취급이냐며 가볍게 성을 내던 하랑은 어느새 조선에는 없던 사악한 용이며, 마녀, 왕자와 공주 따위의 이야기를 꽤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이제는 그것도 오래 전의 일이 되었다. 꽤 듣기 좋은 목소리라고, 그들의 수업을 언뜻 엿들은 티엔은 생각했다. 아마 그날의 그 생각이 바로 티엔이 자각한 첫 호감이었을 것이다.

 

 

 

마틴은 여러 지표를 번갈아 보며 재단의 재정상황을 걱정스럽게 살펴보고 있었다. 제때 팔리지 않은 물건들을 손해를 봐가며 빠르게 자금으로 바꾸어야 할지. 혹은 시간을 들여서라도 물건의 가치를 지켜야 할지.

 

시대가 빠르게 변하는 만큼 새로운 물건을 들여오는 데엔 위험이 따르고, 가끔은 재단이 그리 좋은 판단을 내리지 못할 때가 있었다.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 지금은 그런 작은 실수들이 모여 꽤나 뼈아픈 결과로 돌아오곤 한다.

 

“어쩌면 돈을 만들어내는 능력자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화폐 가치에 타격이 가겠군.”

 

탄식을 내뱉었던 마틴은 그의 화를 부추기는 목소리의 방향으로 눈을 흘겼다. 그러나 이쪽을 돌아보지 않는 티엔에게 그의 감정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데이트란 대부분이 이런 식이다. 각자의 일을 하고, 그 사이에 끼워지는 드문 대화는 그들의 사이가 멀어지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때로는 그 반대의 작용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티엔은 종종 도시의 주변에 산이 없음을 아쉬워했다. 그 대신이라고 할까, 그는 산을 오르는 대신 도시의 외곽을 달리곤 했다.

 

마틴은 매일같이 달리는 중국인을 보며 다른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해 했지만 지금껏 그를 따라 나선 적은 없다. 그가 마틴의 비즈니스적 사교활동에 관여하지 않듯 괜한 동행으로 방해가 되는 건 사양일 따름이었다.

 

곧 돌아올 티엔을 기다리는 마틴의 입에서 하얗게 입김이 났다. 기온은 그리 낮지 않지만 습도가 높은 탓이었다. 청년은 그 뽀얀 김이 티엔이 쓰는 기와 아주 약간 닮았다는 아이 같은 생각을 했고, 뱉어낸 숨을 손 안에 가둬두며 허공에 손짓 하던 청년은 멀리서 다가오는 티엔의 모습을 보고서야 아무 일 없는 척 짐짓 점잖은 태도로 그를 맞이했다.

 

보폭을 맞춘 그들은 나란히 귀갓길에 올랐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의 얼굴에는 그들 나름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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