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창작에 해당되는 글 3건
- 2016.07.16 | [창작] 마녀의 집
- 2016.05.25 | [창작] 꺾꽂이
- 2016.04.03 | 의식의 흐름
글
[창작] 마녀의 집
쓰려는 게 안 써져서 끄적끄적.
동화풍의 글은 여러모로 재밌어요:3
나는 사악한 마녀를 처치하기 위해 찾아온 16번째 방문자였다.
“좋은 아침, 마리나.”
“전혀 아니야. 나쁜 아침이라고. 또 악몽을 꿨거든.”
부스스 몸을 일으켜 눈을 비비는 아이에게 건넸던 다정한 인사는 짜증 섞인 대답에 묻혀버렸다. 그러고 보면 마리나는 어젯밤 잠들기 전 악몽을 자주 꾼다고 말했던 것 같다. 가엾은 아이. 깨어 있을 때나 잠들어 있을 때나 이 애는 마음 놓고 쉴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거 유감이네.”
“이건 다 네 탓인데?”
“그것까지 포함해서 말이야.”
내 차분한 말씨가 문제였던 걸까,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표정을 한껏 구긴 마리나는 달랑달랑한 털방울이 달린 수면모자를 벗어들곤 내가 앉아 있는 횃대를 향해 있는 힘껏 던져왔다. 아직 날갯짓이 익숙하지 않은 나는 고개를 한껏 움츠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고 모자는 그런 내 머리깃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침실 한 구석에 처량하게 놓여있던 커다란 곰인형은 나보다 운이 좋지 못했다. 털방울과 뒤얽혀 픽 쓰러져버리는 그 덩치를 지켜보고 있던 나는 자신도 모르게 온 몸의 깃털을 세워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안 돼, 마리나! 사람에게 모자를 던지는 건 나쁜 짓이야.”
새된 소리로 비명을 지르는 내게 마리나는 더 큰 목소리로 악을 쓴다.
“시끄러워, 넌 사람도 아니잖아!”
“오, 그렇네. 내 말은, 그러니까 살아있는 것들한테 말이야! 방금은 정말로 위험했다고.”
내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은 채, 아이는 던질만한 다른 물건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커다란 침대 위에서 마리나의 작은 손에 잡히는 거라곤 무겁고 푹신한 베개와 솜이불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아, 정말 짜증나.”
투덜거리며 이불 사이를 빠져나온 마리나는 부스스하게 일어나있는 초콜릿 빛깔 머리칼을 탁자에 놓여있던 노란 끈으로 아무렇게나 붙잡아 매었다. 제멋대로 뒤엉키는 곱슬머리가 안타깝지만 내 날개로 머리를 빗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발터, 내 톱이 어디 있지?”
꼬마 마녀의 질문은 내게 어제의 일을 상기시켰다. 마리나는 작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톱을 다루는 솜씨가 놀라울 만큼 좋은 아이였다.
“아마 1층 계단 앞에 있을 거야. 밟지 않게 조심하라고 말하려고 했지. 그런데 톱은 왜?”
“네 머리를 바깥 울타리에 걸어둘 거야. 그렇게 하면 나를 방해하는 멍청이가 조금은 줄어들겠지.”
아하. 하긴 그런 장식이 있다면 나라도 이곳에 발을 들이기 전에 한 번쯤 망설였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일이다.
“마리나, 내게 쓰기엔 그 톱이 너무 크지 않겠어?”
방을 나서려던 작은 숙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내가 작은 머리통을 갸웃하며 던진 질문은 어떤 이유에선지 가라앉았던 마리나의 심기를 다시 한 번 건드린 것 같았다.
“아니, 바보야. 네가 어제까지 쓰던 인간 머리 말이야!”
“아, 저런. 그걸 잊고 있었지 뭐야.”
아이는 현관문 앞, 아마도 곰가죽 카펫 위에 그대로 쓰러져 있을 나의 옛 몸뚱이를 말하고 있었다.
글
2차 외의 글을 쓰면 어떤 느낌일까~ 하다가 정말로 써본 글.
동화 같은 느낌을 보고 싶었어요(?
기승전결도 없는 평탄함에... 불친절함에.... 여러모로 자기만족입니다.
나는 많은 일에 무덤덤한 사람이다. 특히 사람에 관한 일이라면 더더욱. 세상은 원래부터 넓고, 사람은 다양하며, 나는 여러 방면에서 무지하니까. 물론 이런 말은 그저 매사에 진지하지 못한 내 태도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내 자신에게도 남들에 비해 약간 특이한 점은 있다. 그 재능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특징은 내게 별 도움이 되지 않지만, 그 덕분에 처음 만난 누군가의 비밀을 엿듣게 되거나 지금은 절친한 악우가 된 누군가를 끌어당기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유달리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내가 사람의 무한한 가능성을 신뢰하게 된 건 아마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
“와, 다 젖었어!”
“그러게 제대로 묶어두라니까?”
꽤 길게 깔려있는 물길을 돌던 어트랙션은 깔깔거리는 경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끝이 났다. 흠뻑 젖은 비닐 시트를 벗겨내고 출렁이는 놀이기구에서 내려섰지만 여전히 바닥이 요동치는 느낌은 남아있다. 겨우 이 정도로 후유증이 남는다면 긴 항해에 뱃멀미는 분명 끔찍하리라. 천호는 그런 시답잖은 감상을 떠올리며 입구 부근에 맡겨두었던 소지품을 찾으러 발걸음을 옮겼다.
운이 좋았는지 부산을 떨던 두 소녀와 달리 옷을 적시지는 않았지만 말끔하던 그의 머리칼은 마치 고양이세수라도 끝마친 모양새가 되어 있다. 아직 날이 꽤 쌀쌀한 참이고 천호는 뛰노는 게 마냥 즐거운 어린아이도 못 되니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었다. 그에게는 아무래도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고도 즐거운 비명을 지를 자신이 없다.
그의 소지품은 약간 무기력해 보이는 직원의 비호 아래 무사했고, 슬슬 느긋한 여정의 다음 목적지를 정하려 가방에서 공원 지도를 꺼내는 참이었다. 그가 미처 눈치 채지 못한 사이 여전히 웃음을 참지 못하던 소녀 중 한 명이 바로 곁에서 뒤늦게 비닐옷을 벗으려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 직후에는 가벼운 접촉사고. 그 와중에 천호의 옷 위로 물방울이 옮겨와 점점이 자국이 남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미 떠들썩한 소리를 내고 있으면서도 둘은 남의 주의를 끈 것이 부끄러웠는지 방금과는 달리 꽤나 얌전한 목소리로 낯선 청년에게 사과를 건넸다. 천호보다 대여섯 살은 어려 보이는 아이들이 어떻게 이 시간에 이런 곳에 있는지는 약간 의문이 생긴다.
“아뇨, 괜찮습니다.”
천호는 직전에도 소녀들과 같은 좌석, 그러니까 바로 맞은편에 앉아있어 언뜻 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때부터 생각했지만 이 소녀들은 상당히 특이한 일행이다. 바로 눈앞에서 바라보는 그들은 완전히 같은 음색의 목소리, 같은 생김새, 그리고 똑같은 옷차림까지. 심지어 어깨 부근에서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는 머리카락이 살짝 젖어있는 모양새까지 완전히 일치하는 착각이 든다. 그러니까, 둘은 실로 거울처럼 똑 닮은 쌍둥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둘은 서로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도 했다.
“어? 아……”
발을 헛딛었던 쪽의 소녀가 갑자기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상을 느낀 천호가 반 발자국 물러서자 그제서 그의 시야에 밝은 빛깔의 무언가가 들어온다. 축축한 발자국이 남은 작은 사탕 상자가 천호의 발밑이었던 장소에 얌전히 자리 잡고 있던 것이다. 그 정도 두께의 물건이라면 제대로 눈치를 챘어야 맞지만 그것이 마침 움푹 팬 구석으로 굴러들어가 있어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천호는 다급히 허리를 숙여 그걸 주워들고서도 차마 흙탕물이 엉겨 붙은 물건을 주인에게 선뜻 돌려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아뇨, 제가 떨어트린 거니까.”
하지만 30g이라고 쓰여 있는 본래의 무게에서 그리 줄어들지 않은 듯한 작은 곽을 쌍둥이 소녀는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겉포장이라도 남의 흙발에 밟혔던 물건은 찝찝할 게 뻔하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이대로 그걸 건네기엔 천호의 양심이 도무지 편치 않았다.
“매점에서 제가 다시 사드릴게요.”
“네? 그럴 필요 없는데……”
“맞아요, 별 거 아닌데.”
천호가 덤덤하게 선언하자, 사과라면 몰라도 배상에 관한 건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는지 두 소녀에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여기서 돈이라도 쥐어줬다간 모양새가 웃기고. 게다가 사소한 일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행동은 도리어 기분을 상하게 만들 것 같아 그럴 수가 없었다.
쌍둥이는 난처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보다 머리가 하나 반은 높은 청년이다. 경계하게 되는 건 자연스럽지만 청년은 좀 특이하다 싶을 정도로 예의발랐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접점은 모두 소녀들이 자처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마냥 이상한 사람이라고 치부하기도 어려운 게 사실이다.
“아, 그러면 같은 거 말고 음료수도 괜찮아요?”
“어우, 야!”
먼저 경계를 풀고 제안을 한 쪽은 천호와 부딪히지 않았던 소녀였다. 다른 쪽의 쌍둥이는 실례가 될 거라며 기겁했지만 천호로서는 빨리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전개다.
“네, 뭐. 상관없어요.”
“저쪽에 자판기 있었거든요.”
그 말대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진한 파란색의 네모 박스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합의되지 않은 결론에 불만을 가진 한쪽 소녀가 약간 인상을 쓰고 다른 쪽을 노려보았지만 결국 둘은 사이좋게 손을 잡고 천호와 나란히 한산한 놀이공원 거리를 걸어 나갔다. 곁에서 그 둘을 지켜보고 있자면 마치 약간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거울상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여기 혼자 오셨어요?”
“네.”
천호를 두고서 둘만의 대화를 하기에는 어색했는지 소녀는 쭉 궁금했던 점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들 주변의 모두는 둘이나 그 이상의 짝을 짓고 있는데 이 청년은 쭉 혼자인데다 일행을 기다리거나 연락을 하려는 시도조차 보이지 않는다.
“와.”
쌍둥이는 서로 마주보았다가 동시에 다시 천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텔레파시라도 나누고 있는 걸까. 어쨌거나 겉으로 보이는 둘의 반응이 비웃음이 아니라 감탄이라는 점에서 천호는 꽤 감동을 느꼈다. 이런 면에서 남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진 않지만 한심하게 여겨져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던 참이다.
“놀이공원 엄청 좋아하시나 봐요.”
“그냥 오랜만에요.”
천호의 오늘은 힘겨운 취업활동 끝에 드디어 마지막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얼마 안 되는 날 중 하나다. 그런 때에 하필이면 놀이공원에 갈 생각이 떠오른 건, 드디어 사회를 나간다는 실감과 더불어 아마 앞으로 이런 곳에 올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다만 이 갑작스러운 외출계획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천호가 불러낼만한 친구들은 역시 직장이나 취업준비로 바쁜 참이고 따로 날을 잡자니 인파에 치여 제대로 즐기지도 못할 게 뻔해보였다. 사실 친구들이 이런 제안에 관심이 있을지에 대해서도 의문이었고. 그렇게 훌쩍 홀로 들린 평일의 놀이공원은 기대대로 굉장히 한산해 그는 조용히 상쾌한 기분을 만끽하고 있는 참이다.
사실 천호가 보기에 특이하기로는 이 자매도 덜하진 않았다. 어린 쌍둥이가 같은 차림을 하는 건 꽤 흔한 일 같지만 십대 중반이 되어서도 이런 형제를 본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쌍둥이면서 이렇게 명확한 차이가 있는 것도.
“언니, 다음에 저거 어때?”
호칭에 따르면 동생, 그러니까 붙임성이 더 좋은 듯한 소녀의 손끝은 범퍼카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질문의 제3자인 천호는 속으로 그 항목을 기각한다. 제대로 즐길 수 있다면 모를까, 혼자서 저런 걸 즐기기엔 무표정으로 남의 차를 들이박는 무법 운전자가 된 기분일 게 뻔했다.
자판기 앞에 도착한 천호는 적당히 지폐 한 장을 밀어 넣었다. 아직도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민트사탕 한 통이 얼마였는지는 몰라도 음료 두 캔이면 충분하리라는 계산이다.
“뭐 드실래요?”
“전 포카리!”
“전 왼쪽 끝에 미란다요.”
요청에 따라 버튼을 연달아 누른 천호는 남은 금액을 보고서 자신의 몫으로 식혜를 골랐다. 묵직한 알루미늄 캔이 배출구로 떨어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여기요.”
천호가 뒤돌아 두 사람에게 각각의 음료를 건네자, 단지 그것뿐이었는데도 동시에 까르륵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의뭉스러운 눈빛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둘은 또다시 텔레파시라도 나누는 양 서로를 흘끗 바라보기만 했다. 하긴, 저 나이 대 아이들의 생각이란 도저히 알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는 법이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소녀들은 목이 말랐는지 바로 캔을 따 음료를 들이키곤 한 마디씩 감탄의 말을 내뱉었다. 가벼운 바람이 불어오고, 꽤 단아한 분위기에 구김살 없는 둘이 햇살 아래서 웃음 짓는 모습은 마치 어떤 광고의 한 장면 같았다.
“후아!”
“살 것 같애.”
발단이야 어쨌든 결과는 그리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당초의 목적을 달성한 천호가 이만 헤어질 뜻을 비치자 쌍둥이는 다시 감사의 인사를 보내곤 약간 과장된 동작으로 작별인사를 건넸다.
“고마웠어요-!”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정말이지 둘이 한 세트 같은 자매다.
잠시간의 폭풍 같던 시간을 지나친 천호는 본래 계획대로 가방에서 지도를 꺼내들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구역은 많았고 그에겐 느긋한 탐험을 즐길 충분한 시간이 있다. 사실 천호에게 이런 곳은 어렸을 적 학교에서 단체로 방문했던 이후로 처음이다. 집안 분위기나 천호 본인의 성격 상 그리 어울리지 않는 장소였다고 할까.
그렇게 찾아온 간만의 장소에서, 드문드문 좌석이 비어있는 놀이기구를 동행도 없이 올라탄 채 바람을 맞는 건 상쾌하면서도 약간 바보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꽤 즐거웠다는 뜻이다. 그리고 공원 곳곳에 알록달록하게 꾸며진 조경을 바라보는 것도 그 나름의 소소한 재미가 있다.
천호는 유아들을 위해 준비된 구역-온갖 놀이기구의 축소판들이 구비되어 있었다-을 느긋하게 산책한 뒤 스릴 있는 놀이기구가 몰려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가장 먼저 눈이 띈 어트랙션에서 한참의 회전을 즐기다 땅에 내려섰을 때였다. 마침 출구와 가까운 곳에 붙어있는 입장 대기줄에서 방금의 그 쌍둥이가 들뜬 얼굴로 재잘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평소의 습관대로 천호는 그들을 모른 척 지나가려 했으나 쌍둥이 중 하나가 그를 알아보곤 먼저 말을 걸어왔다.
“와!”
“또 보네요!”
생각보다도 밝은 인사에 천호는 약간의 당황을 느낀다.
“그러네요.”
다소 무뚝뚝한 대답이지만 그 외에는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에게는 이 둘만큼의 붙임성이 없는 탓이다.
“이거 재밌어요?”
“그럭저럭이요.”
순간 작은 외침과 둔탁한 타격음이 대화를 가로막았다. 쌍둥이 중 하나의 손에서 스마트폰이 미끄러진 것이다. 천호는 자신의 발치까지 굴러온 물건을 주워들어 주인에게 건네주었다. 다행히 케이스가 있어 별 이상은 없는 것 같아 보였다.
“오늘 일진이 별론가 보네요. 또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요”
“고맙습니다……. 아깐 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는데.”
소녀는 생판 모르는 남에게 두 번이나 실수하는 모습을 보인 게 부끄러웠는지 작게 항변한다.
“그래도 같은 분이었잖아요?”
천호의 그 말이 끝났을 때, 소녀의 얼굴에 떠오른 건 더 이상 부끄러움이 아닌 의문의 표정이었다.
“저희 둘 구분을 하시는 거예요?”
“어떻게 알아보세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닮았다지만 확연히 다른 이 둘을 알아보지 못하는 편이 더 황당하지 않은가.
“그야 색이 달라서요?”
뻔한 사실을 지적했을 뿐이었다. 쌍둥이는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천호를 빤히 바라보았고, 순간 그는 그게 실례가 되는 말이었나 싶어 필사적으로 자신이 했던 말을 되짚어 봤지만 천호는 단지 보이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었다.
“색이요?”
“네, 머리색이나 피부색이……?”
서늘한 침묵이 지났다. 둘은 천호를 빤히 쳐다보다 동시에 서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천호는 마치 거울의 단면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저기, 혹시 이거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실 수 있어요?”
“두 번이나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정말로 텔레파시라도 나누고 있는지 쌍둥이는 같은 타이밍에 천호에게 고개를 돌려 뜻밖의 제안을 건넸다. 절대 말 그대로의 이유일 리는 없다. 천호는 시간에 쫓기는 입장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의 제안을 선선히 수락했지만 석연치 않은 점은 한둘이 아니었다.
천호는 근처 벤치에 앉아 두 사람이 빙글빙글 회전하는 기구 위에서 즐거운 비명을 내지르는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둘을 구분할 수 없고 자신에게만 특별하게 보인다면, 역시 그거겠지. 이전에도 가끔 있던 일이다. 단지 그런 당사자들과 엮일 일이 거의 없었을 뿐.
얼마나 생각에 잠겨있었을까, 쌍둥이는 어느새 천호의 앞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어지간히 즐거웠는지 둘의 얼굴은 꽤 상기되어 있는 채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두 사람에게는 전에 없던 진지한 기색이 서려있었다.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저건 꼭 타고 싶었거든요.”
“저기, 그러니까.”
“저희가 어떻게 보여요?”
천호는 사실을 말해도 괜찮은가 고민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굳이 거짓을 전할 이유는 없다. 그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두 사람에게 털어놓았다.
“이쪽 분은 검은 머리에 저랑 비슷한 살색이고, 이쪽 분은 밝은 갈색 머리에 피부도 훨씬 하얘요. 눈 색도 더 옅은 것 같고.”
쌍둥이 중 하나는 평범한 여중생, 또는 여고생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계속 실수를 했던, 그리고 스포츠드링크를 부탁했던 쪽은 이국적으로 옅은 색을 가지고 있다. 처음부터 이상하게 여겼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천호는 그 둘이 쌍둥이면서 한쪽만이 색소결핍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그건 그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천호의 설명에 쌍둥이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둘은 이 낯선 남자의 말을 확인하려는 것도 같았고, 또 새로운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도 보였다.
“말해도 돼?”
“괜찮지 않을까?”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의 침묵이 지나고, 드디어 입을 연 둘은 서로의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를 천호가 알아채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니, 전 아무래도……”
상관없다. 천호는 그런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둘은 이미 결심을 굳힌 것 같았다.
“사실, 우린 쌍둥이가 아니거든요.”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의 주파수는 20헤르츠에서 20,000헤르츠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모든 인간이 그 이하나 이상을 들을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말했듯이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나이가 들면 들을 수 있는 음역대가 줄어들어 십대 아이들에게만 들린다는 벨소리도 어떤 어른의 귀에는 똑똑히 들리고 있지 않을까.
때때로 천호가 남들과 조금 다른 것을 보는 건 아마 그것과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원리를 정확히 모르는데다 알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말했듯이 세상에는, 당연하게도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법이니까. 게다가 그의 눈에 보이는 다름은 지금까지 굉장히 사소한 것들뿐이었다.
둘은 처음으로 자신들을 구분해낸 천호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긴 얘기를 시작하기 전 슬슬 배가 고프다는 옅은 쪽의 의견에 따라 마침 근처에 있는 푸드코트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둘은 따로 싸온 도시락이 있어 앉을 자리만을 찾으면 되지만 천호는 그렇지가 못하다. 이런 곳에서의 물가를 감안하면 그는 그럴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 아쉬워졌다.
쌍둥이가 직접 만들었다는 주먹밥은 경단처럼 동그랗게 뭉친 밥알 위로 시금치나 다진 고기, 계란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보기 좋게 둘러져 있어 꽤 먹음직스러웠다. 그에 반해 천호가 고른 유원지의 음식은 유달리 비싸고 지극히 평범하게 맛이 없다. 금방 받아왔음에도 튀김은 기름에 절어 약간 눅눅하게 느껴졌고, 맛이라곤 소스의 자극적인 풍미 외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배를 채우며 쌍둥이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찬찬히 풀어나갔다.
“그래도 유전자? DNA? 그런 건 똑같고.”
“그러니까 아예 쌍둥이가 아닌 건 아니긴 한데,”
많은 일에 담담한 천호에게도 꽤 놀라운 이야기다. 둘은 완전히 같은 음색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 눈을 감으면 마치 한 사람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으로 들릴 것 같았다.
“한 마디로 우린 좀 이상하게 태어난 거죠.”
둘이 돌아가며 설명한 내용을 정리하자면 이랬다. 후대가 매우 귀한 집안에서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난 아기가 있었다. 사랑받았으며, 사랑받아야 했던 아이였다. 하지만 어린 생명이란 생각보다 위태로운 존재여서, 불의의 사고, 혹은 병이나 어떤 이유로든 아이는 목숨을 위협받게 되었다. 그건 어디에서나 흔하게 일어나는 비극 중 하나였다.
“그때까진 제가 없었어요.”
옅은 쪽이 웃으며 덧붙였다.
아이의 부모는 당연히 그 불행을 슬퍼했지만, 그 슬픔을 더하는 사실은 그들이 다음 아이를 기약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죽어가는 아이와 더불어 가정 전체가 무너져 갔고 그들은 필사적으로 구원의 지푸라기를 찾아 헤맸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를 살릴 수는 없지만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다는 달콤한 이야기가 그들의 귀로 전해진다.
“그 방법이 어떤 거였냐 하면요─”
그렇게 말하며 짙은 쪽이 왼손을 들어보였다. 이런 날씨라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는 털실 장갑. 그런데 묘하게도 소녀가 주먹을 쥐었다 펴는 동작을 하는 동안 새끼손가락만은 움직임이 없었다. 둘에게는 천호에게 보이는 색깔 외에도 다른 점이 있던 것이다.
마치 꺾꽂이 같은 방식.
도저히 믿기 힘든 제안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새로운 아이는 뿌리를 내리고 잎을 맺듯 천천히 자라나 죽어가던 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이 시도에 회의감을 가졌던 아이의 어머니도 그때쯤엔 이 마법 같은 이야기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단지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부부가 포기할 수밖에 없던 아이가 기적적인 확률을 뚫고 삶을 붙잡았던 것이다.
생명을 낳는 건 죄가 아니지만 그 반대는 전혀 다른 문제다. 부부는 망설였다고 한다. 새로 태어날 아이에 대해 여러 경고를 들었던 그들은 아이의 존재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부부는 자신들의 아이를 두 번이나 포기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 아이를 여전히 원한다 말했고, 그렇게 쌍둥이가 아닌 쌍둥이는 탄생했다.
“완전 아담과 이브지, 응?”
“아, 그건 오글거린다니까!”
쌍둥이는 출생의 비밀에 관해서도 의견차가 있는지 설명을 하는 와중 가볍게 투닥거렸다.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말을 던지고 받으면서도 의견 차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본래의 아이가 생사의 기로에 섰던 기간 동안 성장할 수 없었던 탓인지 둘은 완전히 같은 얼굴, 같은 체격을 가지고 성장했다. 부부가 아이들에게 가진 죄책감과 그에 따른 몇 가지 감정을 제외한다면, 둘은 매우 평범하게 자라나 평범한 삶을 살아오고 있었다.
“신기한 얘기네요.”
“이 얘길 다른 사람한테 한 건 처음이에요.”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건네는 두 소녀는 약간 침통하면서도 묘하게 기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둘의 부모는 이런 이야기를 딸들에게 직접 들려줬던 걸까? 천호는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그런 물음을 던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런 걸 말해줘도 괜찮아요?”
“어차피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안 믿을 걸요.”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물론 천호에겐 이런 이야기를 남들에게 퍼트리는 취미 따위가 없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새로 태어난 아이는 일찍 죽기도 한다나봐요.”
옅은 쪽의 아이의 발언에, 이번에는 쌍둥이 특유의 말 주고받기가 없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짙은 쪽 쌍둥이는 결국 입을 다물어버린다. 여전히 미소 짓고 있는 한 사람과 침울해진 또 한 사람. 아마 이 한 마디는 두 사람 사이의 금기였을 것이다.
“어차피 수명까지 살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을걸요. 사고나, 병이나.”
“요즘 시대에요?”
천호의 위로 아닌 위로에 옅은 색의 소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통계적인 사실이 어떨지는 몰라도 동정이 아닌 그런 발언에 기분이 약간 나아지긴 한 모양이었다.
“그것도 좋겠다. 그런 말도 있잖아. 왜, 한날한시에 태어나진 못했어도……”
“야, 재수 없게!”
옅은 쪽의 손이 올라가는데도 짙은 쪽은 킬킬거리며 이리저리 몸을 피한다. 역시 둘은 사이가 좋은 자매였다.
“저도 동생이 있어요.”
천호가 마지막 감자튀김을 입안에 밀어 넣은 뒤였다. 먼저 물어본 적은 없지만 꽤 민감할 가족사를 알려준 답례라고 할까, 그는 좀처럼 남들에게 하지 않는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쌍둥이에게 꺼냈다.
“저보다 8살 어린데, 저도 그 애의 친형은 아니고요.”
그 이상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그는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언제나 어려워했다.
“그래도 그 애가 잘 자랐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짧게 끝마친 얘기에도 쌍둥이는 눈을 빛내며 흥미를 보낸다.
“와, 부러워요. 나이차가 그만큼 나는 동생.”
“너무 응석 받아주지 마세요. 얘처럼 될 거예요.”
다시 한 번 작은 폭력 사태가 있고, 그들은 그 뒤로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어쩌면 특별할지도, 어쩌면 소소할지도 모르는 이야기들을.
‥‥
그날 나는 쌍둥이에게 간단한 인사를 남기고 헤어졌다. 물론 우리는 끝까지 서로의 이름이나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 아마도 딱 거기까지가 그 낯선 만남의 해피엔딩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어쩌면. 나는 눈을 감고서 좀 더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똑 닮은 얼굴로 즐겁게 웃음 짓는 둘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라는 후일담. 나쁠 건 없을 것이다. 그것도 분명 하나의 가능성이니까.
'창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작] 마녀의 집 (0) | 2016.07.16 |
---|---|
의식의 흐름 (0) | 2016.04.03 |
글
이야기를 만들진 못할 것 같은 끄적끄적들.
생각 없이 뭔가를 쓰면 사건이 일어나질 않아요_(:3」ㄴ)_
좀 가라앉아 있습니다.
Lycoris
차라리 날 죽여.
잔잔한 마음 위에 아로새긴 이유 없는 생각에 남자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물론 이유가 없다는 말은 그 자신이 그렇게 정했다는 뜻일 뿐, 어디서도 가져다 붙일 수 있는 명목 하나를 끌어오지 않은 건 조금이나마 비참함을 덜고자 하는 그의 발버둥에 불과했다.
만일 무기력할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바람을 스스로 쟁취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추락, 실혈, 질식, 중독, 그 외의 다른 모든 방법들. 그러나 잠시 몸을 뉘일 시간도 아깝게 느껴지는 그에게 필요성이 부족한 고민은 일종의 사치다. 지금도 그는 머리는 기계적으로 앞으로의 일정을 정리하며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남은 시간을 초조하게 재어보는 중이었다.
그에게는 죽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죽고 싶지 않을 이유에 대해 말해보자면, 글쎄. 안타깝게도 남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을 만큼의 상상력을 가지지 못했다. 그가 알고 있는 이유라면 물론 다양하다. 자신의 목숨은 소중하니까. 앞으로의 삶이 좀 더 행복해질 수도 있는 거니까. 그를 아는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게 될 테니까. 운운.
남자는 간혹 얼마 없는 전 재산을 긁어모아 어딘가 멀리로 떠나는 생각을 했다. 좋은 걸 보고, 듣고, 먹고, 느끼고, 그러고서 영영 눈을 감아 버린다면. 그건 분명 하나의 해피엔딩으로, 그의 깔끔한 마지막에 고통의 유무 따위는 중요치 않을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할 때면 그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번진다. 마치 소중한 기억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마냥.
다만 최악의 시나리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을 알기에 그의 일상에는 상대적 평온함이 이어져 갔다. ‘삶은 꽤 아름다운 것 같아. 조금 더 살아봐도 괜찮지 않을까?’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 ‘사실 난 죽고 싶지 않았어. 고통스러울 거야. 괴로울 거야.’ 의지도 없는 겁쟁이. ‘일탈은 충분해. 슬슬 돌아갈 때야.’ 그리고 그 자신. 그는 스스로 일생에 걸친 관성을 무시할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다.
생각의 끝은 요란한 자명종 소리와 함께 찾아왔다. 삶을 살아가야 할 시간이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그는 또 한 걸음, 그렇게 좀 더 느릿한 방식으로 언젠가 다가올 죽음에게 발을 옮겼다.
H2CO3
손을 붙잡고, 입을 맞추고, 그의 빈틈에 내 일부를 끼워 맞춰 보아도 결국 나는 그와 단절되어 있다. 간혹 느끼던 충족감이 단지 착각일 뿐인지, 아니면 붙잡아 두지 못할 흘러가는 감정일 뿐인지는 아마도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그와 있을 때는 즐겁고, 마음이 따스해지고, 그러니까, 행복했다. 그가 나와의 시간을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걸 깨달았던 그때가 바로 나의 시작이었다. 당시에는 타인의 마음에 의지하는 감정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점차 서로가 당연해지고 감사의 말이 죽어가기 시작하며 나는 처음의 불안감이 오히려 달콤한 설렘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타인과 다르다는 감각을 느낀 지는 정말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어쩌면 나는 그런 점까지도 다른 모두와 같을 수도 있겠다. 모든 사람은 특별하다고 하던가. 불공평 속에서 듣는 그 말은 공허할 뿐이었다. 단지, 간혹 세상의 모두가 나와 같이, 혹은 나와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살아갈 것을 생각하면 견딜 수 없이 두려워졌다. 내 작은 머리통에 들어찬 것만큼 많은 것들이 너의, 그의, 그들의 안에 뒤엉켜 있다는 공포. 하지만 도무지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어서, 나는 곧 내가 그들과 다르다는 결론을 내려버린다.
그렇다면 그는?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나와 달랐다. 그래야만 했다. 그는 늘 나보다 나은 인간이었으니까. 그는 완벽하지 않지만 나보다 조금 더 선량했고, 꽤 많이 성실했으며, 내게 분수에 넘치는 감정을 주었다.
그토록 사랑스러운 그에게 나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더 이상 다가갈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가 응당 지켜야 할 선이잖아, 안 그래? 비겁한 변명은 양심의 얼굴을 하고서 내게 속삭인다. 예의야. 당연한 거야. 소중하니까.
그랬다. 그는 내게 분명 소중한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들은 가슴 속에 고여 썩어가거나 말라붙어 버렸다.
사실 나는 내가 말하는 만큼 널 좋아하진 않아. 네가 기쁘길 바랐을 뿐이지.
이 이상 널 알고 싶지도 않고. 어차피 난 절대 진심을 말할 수 없을 테니까.
그에게 솔직할 수 있을 만큼 그를 사랑하지 못한다는 죄책감. 그가 나와 다를 것이라는 괴로움. 그가 나와 같을 것이라는 두려움. 그 전부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나의 존재가 바로 그와 내 사이의 틈이었다.
'창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작] 마녀의 집 (0) | 2016.07.16 |
---|---|
[창작] 꺾꽂이 (0) | 2016.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