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빈의 작업대 위에 놓여 있는 무언가는, 평소 공학도의 곁을 지키는 두 구체와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멜빈, 오랜만! 집에 있지-? 이번에도 마이크가 말썽인데~」
현관과 연결된 스피커에서 리첼의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물론 곱고 여린 멜로디가 아닌 리첼의 특기인 파워풀하고 시원시원한 노래와 닮았다는 뜻이다.
이른 아침 즈음에야 작업대를 벗어난 멜빈은 오후가 다 된 지금까지 눈을 붙이고 있던 참이었다. 초인종 소리에 한참이나 눈을 꿈벅이고 있던 그는 스피커를 작동하고 나서야 지난날 받았던 예고를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내일, 오후의 언젠가, 고칠 물건과 함께 찾아오겠다.
그때 멜빈은 한창 설계에 몰입하고 있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유쾌한 뮤지션의 방문이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자세한 내용을 마음에 담아 놓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봐요, 리히터 씨~! ……휴, 아직도 자고 있었지? 기다리고 있을게!」
리첼이 무어라 하든 멜빈의 기민한 머리는 아직도 맹렬하게 휴식을 원하고 있었다. 이대로 다시 잠들어버릴까, 어차피 물건만 놔두고 가면 그만일 텐데. 그런 생각이 그의 눈꺼풀을 감기고, 반쯤 깨어났던 정신은 다시 포근한 이불 너머로……
“제피L.”
탁자 위에서 휴면모드를 빠져있던 노란색의 제피가 멜빈의 음성에 반응해 마치 작은 새처럼 날아왔다. 다음 명령을 기다리며 공중을 작게 선회하는 녀석을 졸린 눈으로 바라보던 멜빈은 여전히 베개에 머리를 반쯤 파묻은 채로 웅얼거리는 말을 건넸다.
“문 좀 열어줘……. ……한 5분 뒤에.”
충실한 제피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뒤, 공학도는 느릿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반쯤 일방적인 데다 잊고 있기까지 했더라도 약속은 약속이었다.
“멜빈, 밤 좀 새지 말라니깐-? 그러다 키 안 큰다?”
부스스한 채로 미지근한 커피를 들이키는 멜빈의 모습에 잔소리를 꺼내는 리첼은 한 손에 먹을 것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또 다른 한 팔에는 큼직한 숄더백을 매고 있다.
“아니…. 키가 클 나이는 지났고…….”
“맞다, 재뉴어리가 안부 전해달라더라. 연락 좀 자주 하라던데?”
“하고 있어……. 필요할 때는.”
어딘가 어긋나있는 대화를 나누는 리첼은 무기력한 대답을 들으면서도 꿋꿋하게 짐을 풀어놓았다. 전에 우연히 알게 된 멜빈의 식단, 그러니까 에너지바와 간편식의 나열에 경악한 그녀는 가끔 이렇게 먹을거리를 싸 들고 찾아올 때가 있었다.
“점심… 아니, 아침인가? 식사 아직이지? 샌드위치 먹을래? 계란에, 오이, 또 뭐더라? 아무튼 건강한 거야. 크랜베리 주스도 있어!”
뒤를 돌아보았을 때 슬금슬금 멀어지고 있는 멜빈을 발견한 리첼은 아주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살다가 이 소년, 사실은 리첼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이 공학도가 요절이라도 하는 게 아닐지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편식도 좋지 않다고 몇 번이나 얘기를……?”
가벼운 설교를 늘어놓으려던 리첼은 문득 곁에 있는 작업대 위에서 낯선 물건을 발견했다. 둥근 모양, 작은 날개 같은 구조물. 리첼은 그게 수리 중인 제피라고 생각했지만 그 두 녀석은 멜빈의 주위를 평온하게 맴돌고 있었다.
“아, 이건 뭐야? 새 제피?”
리첼은 음식을 꺼내 놓던 손을 멈추고 그 ‘제피 같은 것’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도색되지 않아 금속 그대로의 빛깔을 드러낸 그것은 무광으로 마감된 작은 공 모양의 장치로, 제피와 다른 점을 꼽자면 얼굴이나 표정을 나타내는 부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때로는 살아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제피와 달리 정말로 도구에 가깝다고 할까.
“음~ 아닌가……? 멜빈, 이거 혹시─”
언제나와 같이 밝은 얼굴로 멜빈을 돌아본 그녀는, 뜻밖에도 전혀 예상치 못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마주했다. 낭패와 당혹, 그리고, 스스로도 의도치 않은 분노.
처음으로 접하는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리첼은 그게 무얼 뜻하는가를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만지지 마.”
평소의 그라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멜빈은 소녀의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리첼의 시야에서 사라진 금속 물체는 어느새 멜빈의 두 손안에 소중히 쥐어져 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노려보던 시선을 떨군 멜빈은 이제 화를 내고 있지 않았다. 리첼은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절박할 만큼 소중한 물건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녀와 아주 가까운 곳에도 있었으니까. 설령 서운함을 느낄지라도 그건 존중과 또 다른 문제여야만 했다.
“어… 걱정하지 마, 절대 건드리진 않았어! 그러니까, 음, 미안. 내가 멋대로 훔쳐본 거고.”
“……응.”
한편 멜빈은 자신을 배려하려는 리첼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그의 공간에 비집고 들어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공간을 허락 없이 헤집는 일은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멜빈은 화를 냈다. 설령 그게 공포에 가까운 조바심에 기인했을지라도 그는 자신의 행동을 탓했다.
종종, 그리고 매우 자주 귀찮다는 생각을 하곤 했지만 그는 리첼이 싫지 않다. 그는 이전에도 그녀와 비슷한 상냥함을 가진 사람을 알고 있었다.
“……마이크…….”
어렵게 입을 연 멜빈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리첼이 들고 있는 가방으로 옮겼다. 이런저런 배지로 장식되어 반짝이는 가방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경쾌한 잘그락 소리를 내고 있었다.
“또 무리하게 쓴 거지…? 두고 가면 고쳐 둘게. 지금은, 좀 피곤해서…….”
“아- 그게, 하하.”
애초의 목적이 언급되자 리첼은 머쓱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공연용 도구일 뿐만 아니라 소리 능력자인 그녀의 무기이기도 한 마이크는, 멜빈의 수리와 개조를 여러 번 거치고서도 또다시 말썽을 일으킨 것이다. 저번 방문에서도 그는 할 말이 없다는 눈으로 리첼을 올려다본 바 있었다.
“고마워. 그럼, 어. 일찍 쉬고! 또 늦게 잠들진 말고! 내일 다시 오면 될까? ”
“응…….”
“그럼 잘 부탁해! 이거- 맛있는 거로 잔뜩 사 왔으니까 식사 꼭 챙기기다?”
그렇게 부산스럽게 꺼내 두었던 물건들을 다시 정리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멜빈은, 몇 번인가의 망설임 끝에 결심의 한 마디를 털어놓았다.
“……리첼. 고마워.”
“어?”
리첼은 자신이 무언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귀를 의심했다. 그건 멜빈이 좀처럼 스스로 입 밖에 내지 않는 말이었다. 고맙다거나, 미안하다거나. 심지어 작별의 인사까지. 설령 직접 말하더라도 이렇게 또렷한 목소리를 듣게 된 것은 리첼로서는 거의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