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탁? 하. 저희가 언제부터 부탁을 주고받을만한 사이였습니까. 이건 당신이 해야 할 뒤처리를 내게 떠맡기는 것밖에 안 돼.”
긴 혼잣말과도 같은 논쟁을 벌인 뒤, 마틴은 대답 없는 이에게 분개하며 병실을 떠났다.
우측 안구 파열, 왼 팔은 기능을 상실했으며 다수의 골절, 개방성 골절에 의한 세균 감염, 기도 손상, 자상으로 인한 척수 손상, 전신 곳곳에 화상, 그리고 역시 심한 염증과 내상. 병원은 그를 가망 없는 환자로 분류했다. 티엔 정에게는 남은 시간이 길지 않았다.
마틴이 홀로 그의 병실을 찾은 것은 들릴 리 없는 소리를 들어서였다. 몇 시간 전 재단의 몇몇 인사와 함께 형식적인 문병을 왔던 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침대 위의 ‘그것’을 응시했다. 여기저기 손상되고 망가져 붕대에 싸인 몸뚱아리에 그 오만하던 무술가의 모습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의식조차 제대로 찾지 못하는 자를 앞에 두고 이런 문병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말일까. 이들은 단지 그를 사지로 밀어 넣은 것에 대한 죄책감을 지우고 싶어할 뿐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마틴 자신도 그들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환자의 안정을 위해 그만 돌아가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마틴은 티엔에 대한 것 외에도 병원이라는 장소 특유의 음울한 소음으로 지쳐 있었다. 그렇기에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때 마틴은 단순히 피곤함으로 인한 착각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묘하게 낯설게 느껴지는 목소리는 정확히 마틴을 부르고 있었고, 그에게 다른 이들과 떨어져 다시 찾아와달라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간절함에 다시 찾은 병실에서 마틴은 분노를 느끼며 뛰쳐나오게 되었다. 그 몰골이 되고서도 오만하고,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먹으려는 수많은 존재들 중 하나. 혼자 외롭게 죽어 마땅한 자. 미처 퍼붓지 못한 악담이 마틴의 혀 끝을 맴돌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 마틴은 어느새 이름 없는 환자의 보호자가 되어있었다.
환자의 신원이 바뀌기는 했지만 병원의 진단은 이전과 동일했다. 그들은 다시금 어두운 전망을 마틴에게 알리며 그에게 형식적인 위로의 말을 남겼다. 더군다나 지금 마틴은 가엾은 무연고자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쏟는 선량한 시민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칭찬인지 연민인지 모를 한 마디를 더하곤 했다.
“당신은 할 수 있는 걸 다 했어요.”
마틴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자신이 실제로 행한 수고에 대해 떠올렸다.
목이 망가져있는 티엔은 마틴이 자신의 생각을 읽을 수 있도록 능력을 조절해 대화를 진행했다. 그는 마틴에게 자신의 현재 상황에 대한 기억을 재단에서 지워주기를 요청했다. 스스로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자신의 실패를 그들에게 지워주고 싶지는 않노라고. 언제나 완벽을 추구하던 그의 마지막으로써는 허무할 정도의 소원이었다. 애초부터 무리한 임무였음에도 스스로 수락한 시점에서 실패를 용납할 수 없었던 걸까.
하지만 그저 티엔이 중상을 입었다, 는 사실을 지우는 것만으로 모든 걸 덮을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다행이라고 할지, 티엔의 상황을 알고 있는 이는 재단 내에서도 소수였지만 갑작스러운 티엔의 부재를 자연스럽게 처리하기 위해서는 마틴에게도 번거로운 작업이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티엔이 원하는 대로 재단에 어떤 동요도 남기지 않고자 한다면 한 사람의 존재를 지우는 정도의 결단이 요구된다. 영영 돌아오지 않는 스승을 제자에게 어떤 식으로 완곡하게 설명할 것인가.
그의 요청에 대해 마틴이 내놓은 대답은 확고했다. 그래야 했을 터였다. 그의 요청은 이유가 어찌 되었든 사사로운 목적에 의한 것이었고 마틴은 그런 부탁을 수락한 역사가 없었다.
그럼에도 마틴은 결국 이를 악물고 티엔의 요청대로 그의 존재를 재단에서 지워나갔다. 이번 일이 가져올 동요를 없애기 위해서, 그리고 그 이기적인 존재로 인해 가까운 이들이 슬퍼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며 스스로를 달래며 능력을 사용한 끝에 티엔 정이라는 인물은 재단에서 과거의 흔적으로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마틴이 다시 병실로 찾아갔을 때 티엔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담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 소원대로 이제 당신을 찾아올 사람은 없어요. 이제 만족해요?”
마틴의 말에 티엔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도 마틴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딱 한 사람 정도는 남아있었나 보군.’
감사의 인사 대신에 나온 그의 말에 마틴은 기가 막혀 미처 하지 못한 악담을 퍼부어줄까 생각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티엔의 시선에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이후로 마틴은 티엔의 병실-본래는 무연고자가 들어갈 수 있을 리 없는 개인실-로 찾아가 하루를 보냈다. 책을 읽을 때도 있었지만 보통은 작은 탁자에서 재단의 서류작업을 처리하곤 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소음과 어지러운 약품 냄새, 염증에 의한 악취 등 병원은 마틴에게 편안한 환경이 아니었지만 누군가의 부재로 인한 재단에서의 위화감은 마틴을 더 크게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틴이 옳은 일을 했는가에 대해 답해줄 유일한 사람은 긍정조차 하지 않고 말없이 그를 응시하곤 했다.
티엔은 진통제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잠과 기절 사이의 무언가로 보냈는데, 가끔은 깨어난 것이 분명함에도 오랜 시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럴 때면 마틴은 그런 그를 모른 척 자신의 할 일에 집중했다.
때로는 약으로도 막을 수 없는 발작이 찾아와 그를 괴롭히기도 했다. 그럴 때면 마틴은 손상된 근육이 떨리고 망가진 목이 쇳소리를 내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다. 그런 고통을 눈앞에 두고서 태연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그를 외면하기엔 마음 속 무언가가 마틴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 건가요?”
한창 서류작업에 집중하던 도중 티엔의 시선을 느낀 마틴은 서류에 눈을 고정한 채로 지금껏 생각하던 한 마디를 던졌다.
티엔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한 시선 속에서 '무엇을?'이라는 질문을 읽은 마틴은 약간의 설명을 덧붙였다.
“이번 일이 아니라, 지금까지 절 싫어했던 것.”
“처음부터, 당신은 절 싫어했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였지만.”
마틴이 먼저 그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밝혔지만, 티엔은 침묵을 유지했다. 마틴이 그의 대답을 포기하고 다시 서류에 집중하려고 했을 즈음, 나직한 생각이 마틴의 머리로 흘러 들어왔다.
‘그러고 보면 마틴 당신의 첫인상은 최악이었지.’
싸우자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마틴의 잘못이었기 때문에 사과할 생각은 없다는 걸까. 마틴이 그를 쏘아보려 눈을 돌렸을 때 티엔은 무언가를 떠올리듯 시선을 위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당신을 싫어했던 기억은 없군.’
비꼬는 것으로 들리지 않는 뜻밖의 말에 마틴은 한층 더 당황했다. 무어라 반박을 던져보아도,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하는 티엔은 자신의 말에 해명을 더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또다시 발작이 찾아왔다. 마틴은 그의 고통을 담담히 대할 각오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번은 무언가가 달랐다. 무언가 거슬리는 소리가 들린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마치 고장 난 라디오처럼 노이즈가 섞이고 불분명한 비명이 병실을 메웠다. 그 누구보다도 사람의 소음에 익숙한 마틴조차도 그 소리에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충격에 굳어있던 마틴은 그 비명이 자신에게만 들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병실을 뛰쳐나가 환자가 위급함을 알렸다. 티엔의 발작에 병원은 이전부터 난색을 표했지만 그렇다고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끔찍한 비명이 겹쳐 마틴은 차마 병실을 지킬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티엔은 마틴의 능력을 차단하는 데에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었다. 이전에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조금 전의 비명은 그가 숨쉬듯 자연스러운 능력조차 의식해서 써야 할 정도로 쇠약해져 있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티엔은 이미 병원의 예상보다 더 오래 생존해 있었다. 지금까지 그의 능력이 그를 지탱하고 있던 거라고 한다면, 능력조차 남지 않은 그는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끝은 올 수 밖에 없었지만 악화되는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았기에 방심하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 그의 끝을 받아들일지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로 마틴이 병실로 돌아갔을 때 비명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병상 위의 티엔은 정신을 잃은 채 식은 땀을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그 날 마틴은 귀가하지 않고 계속해서 티엔의 곁을 지켰다. 이름없는 환자의 곁을 지키는 낯선 이는 구설수에 오르기에 충분했지만 병원의 그 누구도 마틴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았다. 마틴은 티엔과 관련되면서 여러 번 자신과의 약속을 깨고 있었다.
늦은 밤, 티엔의 호흡이 불안정해졌다. 아마 고통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마틴은 티엔이 아마 이 밤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여기 있는다고 무엇이 달라지는지에 대한 의문이 깊어가고, 마틴은 이 병실과 관련된 모든 것이 꿈 같이 느껴졌다. 자신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 왜 지금까지 이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어째서일까. 마틴은 명확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때, 가빴던 티엔의 숨이 누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힘없게 뜬 눈은 잠시 초점 없이 흔들리다 마틴을 발견하고는 그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티엔, 당신 괜찮……”
마틴은 의미 없는 말을 던지려다 숨을 삼켰다. 실내는 작은 전등 하나로 어두웠지만 마틴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가 웃었다.
붕대로 대부분의 표정이 가려져 있었지만 그의 눈은 분명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미처 가리지 못한 마음이 흘러 들어왔다. 하지만 마틴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티엔은 다시 눈을 감았고, 그의 생각도 끊겨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마틴은 그 밤 내내 졸음과 싸우며 그가 단 한 번만이라도 다시 깨어나주길 바랐다. 그에게 어째서 자신이 옆에 있다는 사실이 기뻤는지를 묻고 싶었다. 또 그게 다른 누가 아닌 마틴이었기 때문에 기뻤던 것이 맞는지를 묻고 싶었다.
하지만 티엔은 그대로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마지막 숨을 내뱉을 때까지 그의 곁을 지키던 마틴은, 침대가 비워진 후에도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