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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마틴]「검은양」웹공개본
2년 전 마른쪽 배포전에서 냈던 회지 「검은양」을 웹공개합니다!
시간이 꽤 지났고 재판도 없을 예정이라 전부터 공개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늦어졌네요.
첫 회지였던 만큼 여러모로 허둥대기도 했고 즐거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회지의 내용은 곰쮸쀼님이 주최해주신 크리스마스 합작에 참여했던 글과 그 이어지는 내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잔잔하고 달달...아마 달달한 분위기입니다.
관련 링크는 여기↓
당시 회지 관련으로 많은 걸 도와주신 상실님, 표지를 그려주신 름구님과 응원해주신 분들, 그리고 회지를 구매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_ _)
ⅰ-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
ⅱ- 꿈을 꾸는 것과 현실을 산다는 것.
ⅲ- 이루고 싶은 것.
ⅰ-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
티엔 정은 신성한 종류의 경건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벽돌로 높이 쌓아 올린 건물에서 새어 나오는 풍부한 화음의 찬송가도 그저 듣기에 거슬리지 않는다는 점이 기꺼울 뿐, 그에게 이렇다 할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낯선 땅에는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적지 않았으므로 이 또한 그런 수많은 항목 중 하나일 따름이다.
동지와 소한 사이, 주위가 약간 소란스러워지는 날. 그에게는 그 정도의 의미인 하루였지만, 올해로 티엔은 영국에서 두 번째의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될 예정이었다.
그의 손목의 시곗바늘은 갓 9시를 넘긴 시간을 가리키고 있지만 주위는 한밤처럼 어두웠다. 가로등이 드물어지는 골목 사이로 발걸음을 옮기는 티엔의 뒤로 새하얀 입김이 꼬리를 끌며 따라붙는다. 드물게 찾아온 한기로 길가의 물웅덩이 위로 살얼음이 두께를 더해가는 날씨였다. 한적한 길가에는 오직 적막과 얼음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교차하며 그와 동행하고 있었다.
한 꺼풀 냉기가 익숙함 위에 드리운 귀갓길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다. 곳곳이 새하얗게 얼어붙은 한적하고 좁은 길은 차가운 느낌을 더하고, 어딘가에 존재할 따스함의 흔적은 양쪽에 늘어선 작은 창에서 드문드문 새어 나오는 불빛뿐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희미한 웃음소리가 불빛과 함께 티엔의 발치로 내려앉았다. 자신도 모르게 발을 멈춘 티엔에게 그 웃음은 다시 들려오지 않는다. 저 벽에 둘러싸인 공간은 누군가의, 또 어떤 가정의 보금자리일 것이다. 낯선 땅의 가정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는 티엔은 창 너머에 흐릿한 상상을 덧씌워보았다. 따듯한 음식을 준비하는 어머니, 그 어머니의 곁을 지키는 아이, 그리고 막 일터에서 돌아와 사랑하는 아이를 안아 올리는 아버지까지─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니.’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티엔의 머릿속에 이제는 거의 잊었다 생각해온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이제는 그리움마저 지워져버린 목소리. 그 낮은 음성은 아직도 티엔을 원망하고, 또 질책한다.
‘내가 어찌 살아왔는지 아는 네가 어떻게.’
그렇군요.
목소리가 원하는 대로 티엔은 무의미한 상상을 접고 어두운 길을 나아갔다. 일부러 불빛을 외면하며 골목의 어두운 구석들에 눈을 돌리자 주위의 공기가 더 싸늘해진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오랫동안 떠올리지 않았던 기억들이 낡은 추억들과 함께 차례로 그에게 의문을 속삭여 왔다. 왜 이곳에 있는지, 이게 정말 그가 원하던 삶인지. 그러나 어떤 대답도 무의미함을 알기에 그는 다만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돌아가야 했다. 드리운 어둠과 쓸모없는 생각들이 현실감을 앗아가기 전에.
그렇게 걸음을 옮기던 도중, 티엔은 누군가가 바라보고 있는 듯한 묘한 느낌을 받았다. 착각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마치 무수한 소음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들었을 때와 같은, 가볍지만 지나쳐버릴 수 없는 종류의 끌림이었다.
티엔이 가만히 바라본 ‘시선’의 방향은 어둡고 조용했다. 누구? 혹은 무언가? 설령 그 너머에 어떤 존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반적인 시선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그는 그것에 대해 어떤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티엔은 그 기척을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렇게만 하면 그는 몸을 녹이고, 무사히 잠들어 편안한 내일을 준비할 수 있다. 그것은 유혹이라기보다는 당연한 그의 일과였으며 티엔 정은 굳이 모험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시선의 방향으로 걸음을 돌린 것은 방금 떠올린 목소리에서부터 자신의 주의를 돌리고자 하는, 그런 이유에서였다. 괜한 감상으로 어지럽혀진 머리가 좀처럼 맑아지지 않는 것이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마나 나아갔을까, 어두운 공간 한구석에 도드라지는 밝은 빛으로 티엔은 누군가의 존재를 찾아낼 수 있었다. 골목 구석에 쌓여있는 잡동사니 사이에서, 아마도 금빛일 듯한 머리카락 색을 가진 누군가가 웅크려 무릎 사이에 고개를 푹 파묻고 있었다. 티엔이 발을 옮길 때마다 살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선명했음에도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잠시간 티엔은 그 사람의 윤곽이 눈의 착각은 아니었는지 의심해야만 했다.
“이봐.”
짧은 머리와 딱딱한 어깨의 선. 웅크린 남자는 티엔의 말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혹시나, 싶어 다가가 짚어본 그의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살아있는 건 확실하지만 이대로는 위험할 것이 분명했다. 이미 영하의 날씨로 제법 매서운 냉기가 파고들고 있고, 밤이 깊어질수록 기온은 더욱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이러고 있다가 죽는다.”
티엔은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고 재차 말을 걸었다. 역시나 답은 없었다. 어깨를 흔들어 보고서야 움찔 움직이는 몸은 이내 더 강하게 움츠러들었다. 한참을 더 부른 후에야 겨우 고개를 든 남자는 아직 앳되어 보이는, 이제 갓 성인이 되었을까 싶은 청년이었다. 옅은 색의 긴 속눈썹 위로는 반짝이는 서리가 내려있다.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 주저앉아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흐릿한 눈으로 티엔을 올려다보았다. 날씨에 비해 지나치게 얇은 옷 너머로는 제대로 된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고, 짧게 끊어지는 입김은 색색거리는 호흡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고개를 파묻고 원래의 자세로 돌아갔다. 추위 탓에 정신이 들지 않는지 혹은 단순히 갈 곳이 없기 때문인지 티엔으로서는 알 수 없다. 다시 원점이었다.
난감해진 티엔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조용한 골목은 도움을 청하기에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추운 날씨 탓인지 티엔이 지나오는 동안 근처에는 사람 그림자조차 보인 적이 없다. 뜻밖에 낯선 이를 도울 유일한 사람이 되어버린 티엔은 이런 상황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알지 못했다. 지금껏 이런 일에 신경 쓸 만큼의 여유가 그에게는 없었으므로.
결국 검은 머리의 동양인은 길게 입김을 뿜어내며 자신의 외투를 벗어들었고, 외투를 청년에게 덮어씌운 뒤 그를 둘러업었다. 스며드는 한기와 청년에게서 느껴지는 낮은 체온으로 온몸에 소름이 일어났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발견해버린 대가라는 것일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얼어 죽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티엔이 두 사람분의 무게를 감당하며 집으로 향하는 사이, 떨리는 팔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온기를 찾아 목을 조여들었고 얕은 숨은 계속해서 그의 뒷머리를 간질였다.
답답하군.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면서도 티엔은 업힌 이를 고쳐 매고 걸음을 재촉했다. 어차피 그의 집은 멀지 않았다.
사람이 없던 집안에는 냉기가 감돌았다. 이 동양인이 영국에 도달한 이래 지내고 있는 작은 공간은 언제나 조용했고, 그 외의 사람을 들인 적은 손에 꼽는다. 게다가 이런 형태의 ‘초대’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티엔이 청년을 내려두고 난로를 켜자 그 주위로 선명한 온기가 퍼졌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괜찮을지 그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차가운 몸을 녹일 수 있는 것은- 두툼한 담요, 따듯한 음식, 그리고 또 하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티엔은 역시나 냉기가 가득 차있는 욕실로 향했다. 작고 불편해 거의 쓰지 않던 욕조에 냉수와 온수를 섞어 담으며 청년을 뒤돌아보니 그는 난로 앞에서 몸을 웅크리고 떨고 있었다.
적당히 되었다 싶을 때 다시 그에게로 다가간 티엔은 조금 난감해졌다. 그대로 물에 담가버리면 되는지, 옷을 벗겨내야 하는지. 물의 온도를 가늠하느라 따끈하게 데워진 티엔의 손이 차가운 뺨에 닿자, 청년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얗게 일어나있던 그의 볼은 물기를 머금자 붉은빛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먼저 몸부터 녹이지.”
티엔은 일단 떨고 있는 그를 부축해 욕실까지 다가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곁에서 그를 밀어내는 손이 느껴졌다. 그의 어깨를 빌린 이가 방금까지는 정신도 제대로 못 차리고 있던 사람임 생각하면 꽤나 단호한 몸짓이었다.
“제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의도와 관계없는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 그런 거절을 마주한 티엔에게는 불쾌함이랄 것보다는 힘들게 업어온 보람은 있었나, 같은 태평한 생각이 앞섰다. 처음처럼 주저앉아있기만 한다면 곤란할 뿐이니까. 아마 업혀오는 사이 나눈 체온으로 기운을 조금은 차릴 수 있었던 모양이다.
이쪽이 뜨거운 물. 수건은 여기에 놓아두마.
그 외에 별로 중요할 것 같지 않은 설명은 제쳐놓고 티엔은 청년에게 입혀뒀던 자신의 외투를 챙겨 욕실을 나섰다. 그리고 잠시간 문 너머의 소리를 유심히 듣고 있던 티엔은,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들리고서야 청년이 입을만한 옷가지를 찾으러 자리를 떠났다.
슬슬 청년이 나올 즈음이라 생각되었을 때 티엔은 여분의 작은 의자를 내놓고 재료가 부족해 묽게 만들어진 콘수프와 작은 빵, 그리고 따듯한 물을 탁자에 올렸다. 혼자 사는 집에 마침 식재료가 떨어져 있던 탓이었다.
이윽고 약간 젖어있는 금발과, 이번에는 열기로 붉어진 얼굴이 문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욕실에서 느꼈던 경계의 기색은 그대로다. 티엔은 그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눈에 띄게 차려져 있는 식사는 명확한 뜻을 전달했고, 청년은 머뭇거리면서도 티엔의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걱정하지 마라. 더러운 손은 아니니까.”
청년의 시선이 자신의 검은 손을 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티엔이 담담히 말했다. 그의 특이한 반점에 관해서는 거의 평생에 걸쳐 받아온 오해인지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청년은 그런 뜻은 아니었다는 듯 고개를 저었고, 빈약하지만 따듯한 수프를 바라보다 작게 한 스푼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티엔은 방에서 담요를 한 장 꺼내와 청년의 어깨에 걸치곤 다시 맞은편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스푼이 접시와 부딪히는 소리,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 그리고 난로가 열을 내며 타닥거리는 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부드러운 침묵처럼 내려앉았다.
마침내 식사가 끝나고, 티엔은 읽던 책을 조용히 덮었다. 슬슬 그들에게 이야기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름이 뭐지?”
대답이 없었다. 단지 편의를 위한 물음이었기 때문에 티엔은 그를 더 추궁하지는 않았다.
“......범죄 같은 데에 연루됐나?”
티엔은 역시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는 물음을 던졌다. 단지 이렇다 할 외상도 없고, 오래 바깥을 떠돈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 청년이 왜 그런 곳에서 떨고 있었는지 그 외에 짚이는 구석이 없을 뿐이었다.
“그렇다면요?”
대답과 함께 조금 누그러져 있던 청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신고라도 해야겠지.”
티엔의 대답에 그는 겨우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그런 반응을 지켜보던 티엔은 맞은편에 앉은 청년 자신이 신고를 받을 입장이라 해석했지만, 그 생각을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어차피 그와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모른 채 이제는 드러내놓고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청년에게서 또다시 그 ‘시선’이 느껴졌다. 역시. 틀린 사람을 주워온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티엔은 가만히 그를 마주 보았다. 밝은 곳에서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밝은 갈색을 띠고 있다. 묘한 느낌은 저 눈에서부터 오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청년은 고개를 푹 숙여버렸고 ‘시선’도 그와 비슷하게 사라져버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청년을 바라보며 티엔은 이후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그로서는 드물게, 티엔은 눈앞의 청년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에게 그리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갈 곳이 없는 거라면.”
마치 혼잣말을 하듯 낮게 읊조리자, 청년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티엔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별로…… 돌봐줄 생각은 없지만. 당분간은 있어도 좋다.”
당분간. 티엔은 더 명확한 선을 긋는 쪽을 선호했다.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
티엔이 기한을 굳이 성탄절로 잡은 데엔 별 이유가 없었다. 크리스마스는 그저 가까운 시일 내에 다가올, 그가 기억하고 있는 날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보름이 약간 덜 되는 시간이 너무 길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가벼운 후회도 있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바꿀 생각은 없었기에 그는 앞으로의 일정으로 생각을 옮겼다.
다음날 새벽, 티엔은 안락의자에서 불편하게 잠들어있던 청년을 침대로 옮겼고, 평소보다 더 이른 시간에 집을 나와 일찍 문을 연 가게를 찾았다. 그리고 다소의 먹을 것을 찬장에 채워 넣고서야 그는 다시 직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피로가 쌓여있던 것인지 티엔이 문을 나설 때까지 청년은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물론 그로서도 낯선 이를 홀로 두고 나서는 것이 마음 편치는 않았지만, 그의 집이라는 공간이 빼내 갈 것도 없는, 단지 숙박만을 해결하고 있는 곳이어서 다행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티엔은 미세하게 달라진 물건의 배치로 구석구석에 타인의 손이 닿아있음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꽤 신기한 일이다. 그는 여태껏 누군가가 자신의 생활을 어지럽히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는 종류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마음 편한 청년에게 편하게 지내라는 말은 따로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인기척을 들었는지 청년은 티엔이 다가오는 방향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고, 무심코 마주친 눈길에 티엔은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식사는?”
어색하게 마주 보고 있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쪽은 티엔이었다.
“했어요.”
“그런가.”
티엔은 결코 붙임성 있는 성격이 아니었고, 그들은 굳이 살가워야 할 사이가 아니니 대화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 여겼다. 그렇게 짧은 문답을 끝마치고 욕실로 향하려는 티엔에게 청년은 또렷한 한마디를 던졌다.
“마틴이에요. 제 이름.”
어제의 질문에 드디어 답할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에 티엔은 잠시 망설였고,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한 마디로 그에 호응했다.
“나는 티엔, 티엔 정이다.”
이국의 낯선 발음을 들은 청년은 갸웃거리며 그의 이름을 작게 입에 담아본다.
그렇게 이튿날 째에서야, 두 사람을 서로를 부를 이름을 알게 되었다.
돌봐줄 생각이 없다는 말은 했지만, 누군가와 함께 생활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분의 공간과 스푼 하나보다는 더 많은 것이 필요했다. 당장 티엔에게 있는 여벌의 옷은 마틴에게 잘 맞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 외에도 티엔의 집에는 딱 한 사람을 위한 여건밖에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잘 짜인 공간은 예정에 없는 변화에 취약한 법이었다.
마틴이 들어온 지 사흘째, 마침 주말이었던 그 날 티엔은 금발 청년과 함께 물건을 사러 나섰다. 무언가를 마련해주는 것이 ‘돌본다’는 표현과는 다르다며 합리화를 거치긴 했지만, 처음 자신이 했던 말에 현실성이 없었던 것만큼은 인정한 참이었다.
함께 외출하자는 말에 마틴은 또다시 의심의 눈길을 보내왔다. 하지만 일단 집을 나서고 가게에 들어서자, 이 뻔뻔한 청년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물건을 골라 계산대로 가져갔다. 물론 그는 맨몸으로 집에 얹혀 들어온 입장이었기에 그 대금은 온전히 티엔의 몫이다. 누군가의 호의나, 부양 같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태도. 티엔에게는 그런 그의 모습이 꽤 신기하게 느껴졌다. 어쨌거나, 이런 행동으로 특별히 마틴에게 감사를 듣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티엔의 마음은 오히려 더 편할 수 있었다.
옷가지와 담요, 입에 맞는 먹을거리. 그 정도의 장보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티엔은 마틴이 물건을 고르는 사이 만들어두었던 여분의 열쇠를 건넸다. 그리고 마틴은 그런 티엔과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것을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오래 있을 것도 아닌데요.”
“이 편이 편리할 테니까.”
보통은 이렇게 하지 않는 건가. 자신의 집을 가족 외의 사람과 공유해본 적이 없는 그는 일반적인 동거 방법 따위를 알지 못했다. 게다가 근거 없는 믿음일지 몰라도, 티엔은 이제 와서 마틴이 허튼짓을 하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문득, 마틴이 말없이 떠나는 상황에 대해 떠올린 티엔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틴이 그 열쇠를 지니고서 어디론가 사라진다면- 그는 언제라도 다시 그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자신 외의 누군가가 있거나, 돌아올 수 있는 집. 그런 생각을 하자 드는 감정은 전혀 타인인 마틴에게서 느끼기엔 어색한 종류의 것이었다.
그렇게 티엔이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마틴은 사탕을 입에 까 넣던 손을 멈추고 티엔을 돌아보았다.
“먹을래요?”
“아니. 단 것은 입에 안 맞는다.”
아하. 감흥 없는 반응을 보이며 마틴은 하던 대로 사탕을 입안에 던져 넣었다. 딱딱한 것을 입 안에서 굴리는 소리, 나란히 걷는 발소리. 청년의 숨이 차가운 공기와 섞여들자 옅은 박하향이 티엔의 코끝을 간질였다.
티엔이 귀가했을 때 마틴은 늘 있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난로 옆, 안락의자 위, 약간 웅크린 자세로.
“이게 당신 이름이에요?”
그렇게 묻는 마틴의 손에 들린 것은 그가 책장에서 찾아낸 수첩이었는데, 그 위에는 반듯한 글씨로 마틴이 읽을 수 없는 두 글자가 적혀있었다.
“그래. 앞쪽이 정, 뒤의 것이 티엔.”
서양에서는 성씨가 아닌 이름이 앞에 오겠지만, 그가 한자로 적은 성명은 그 반대의 순서로 쓰여 있다. 그리고 검지로 용케 올바른 획순을 찾아 그어보고 있는 마틴에게 중국인은 또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늘이라는 뜻이다. 티엔은.”
물론 동양의 문자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마틴은 도무지 그 네 획짜리 문자가 어떻게 하늘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설명을 듣고 나자 글자가 주는 단정한 느낌도, 그리고 그 뜻도 티엔과 꽤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이름은…… 로마의 신이 유래라던가요.”
전혀 안 닮았지만. 그렇게 중얼거리던 마틴은 손에 들고 있던 수첩을 열고 내용을 훑었다. 어차피 그 안에는 마틴이 알아볼 수 없는 언어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첫날부터 낯선 공간을 탐색하던 이 청년은 집안의 물건을 건드리는 걸 더는 숨기지 않고 있다. 그러나 티엔이 주의를 준다면 마틴은 그 물건에 다시 손대지 않고, 티엔도 미리 말해두지 않은 건에 대해서는 추궁을 삼갔다. 이제 둘의 관계는 그런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외에도 둘 사이에는 몇 가지 규칙이 생겨나 있다. 그중 하나로는, 상대가 질문이나 다른 이유로 인해 자신에 관한 것을 밝히면 다른 한쪽도 그에 상응하는 이야기를 한다. 약속도, 이런 규칙도 누가 먼저 정했던 것은 아니지만, 또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들은 나름대로 착실한 효력을 가졌기에 둘은 서로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아갈 수 있었다.
‥‥
언제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티엔은 대개 일정한 시간에 눈을 뜬다. 어쨌거나, 그가 이런 한밤중에 깨어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를 깨운 것은 방문 밖에서 찬장이 닫히는 소리였다.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낯선 기척에 티엔은 경계심이 앞섰지만 곧 이 공간에 있는 것은 그 혼자가 아니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느릿한 발걸음은 아마 소리를 죽이려는 노력이었겠지만, 삐걱이는 마룻바닥 위에서는 별 소용이 없는 듯 마틴의 걸음걸이는 또렷이 그의 귀로 들어왔다. 잠을 방해받은 원인은 명확했지만 그리 거슬리지는 않았다. 여전히 신기한 일이었다.
밤중에 같은 공간에 있는 타인의 소리를 들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하지만 과거를 되짚으며 떠오르는 기억들에는 침울한 감정들이 얽혀있다. 기억 자체의 감정은 오래전에 무뎌졌음을 생각하면 꽤나 불합리한 일이었다. 깊게 내쉬는 숨만으로는 머릿속을 비워낼 수 없었기에 티엔의 그런 생각들을 지우려는 노력은 자연스럽게 마틴에 관한 생각으로 옮겨갔다. 이런 시간에 그 아이가 무얼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비슷한 시간에 잠자리에 드는 마틴이 어째서 늘 늦잠을 자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익숙지 않은 기상으로 티엔의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머그잔과 스푼이 부딪혀 나는 듯한 잘그락 소리와, 창 밖 멀리서 간간이 들려오는 작은 소리들이 티엔의 꿈결로 스며들었다.
다음날 아침, 티엔은 평소와 같은 시간에 약간 피곤한 채로 기상했다. 전날 늦게까지 깨어있던 마틴은 역시나 소파 위에 웅크리고 있었는데, 전과 달리 깊이 잠들어 있진 않았는지 티엔이 잠깐 씻고 나오는 사이에 부스스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 있었다. 마틴은 연신 하품을 하며 이불을 둘둘 두른 채 방으로 향했다. 아직 며칠 지나지는 않았지만 이 집에서의 생활에 나름대로 적응한 것 같았다.
“마틴.”
“네?”
아침 시간에 대화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다. 게다가 잠이 덜 깨어있던 마틴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마틴은 졸린 눈을 비비며 티엔에게 눈길을 향했다.
“잠자리가 불편한가?”
“……아무래도요?”
솔직한 감상을 남겼던 마틴은 잠시 생각하더니 조금 다른 해명을 덧붙였다.
“그냥…… 괜찮아요, 지낼 만은 하니까…….”
사실, 이곳을 떠날 생각이 아니라면 마틴은 불평할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티엔은 더 깊이 묻지는 않았다. 더 볼일이 없다는 걸 확인한 마틴은 다시 하품을 하며 침대로 향했고, 티엔을 집에서 나설 준비를 서둘렀다.
‥‥
“당신은 대체 무슨 낙으로 사는 거예요?”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명상을 하지. 책을 읽거나.”
담담한 대답에 마틴은 맥 빠진다는 반응을 보였다. 둘은 식탁 겸 탁자에 마주 앉아 각자 자기 일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티엔은 가계나 앞으로의 일정을 정리하고 있었고, 마틴은 그런 티엔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걸 낙이 없는 거라고 하는데요.”
티엔은 그 말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라도 자신이 무미건조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고 있다. 그리고 별로 궁금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마틴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는 너는 무얼로 살지?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티엔은 마틴이 대답을 원하지 않는다면 강요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릴 정도의 배려가 그에게는 없어서, 그저 펜촉이 종이 위를 스치는 소리가 그들의 사이를 메웠다.
“사람을 좋아했다가 실망하는 거요.”
돌아온 것은 일부러, 라고 생각되는 밝은 목소리의 대답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티엔의 시점에서조차 낙이라 말하기엔 어려운 취미였다.
“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마틴의 입가에서는 여전히 지어낸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 시선으로부터 티엔은 어딘가 자신을 떠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별로 다를 것도 없는 것 같구나.”
그렇게 평하고 티엔은 다시 가계부 정리로 손을 옮겼다. 마틴이 들어와 살게 된 이후로 지출이 크게 늘었다. 그는 평소 검소한 사람이어서 이 정도 변화로 재정적인 문제가 생기진 않지만, 만일 번잡한 사이에 기록이 어긋난다면 티엔은 그것을 더 참을 수 없을 터이다.
그때, 또 예의 그 ‘시선’이 느껴졌다.
티엔은 마틴이 자신에게 무언가 의문을 느낄 때면 ‘시선’을 보내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모른 척했고 마틴도 이제까지 특별한 언급을 한 적은 없다. 티엔은 그저, 이 금발의 청년도 자신과 닮아있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었다.
“저는 잠깐이라도 즐거워요. 그런데 당신은 그것조차 없잖아요.”
항의인지 변명인지 모를 것이 마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아마 그는 자신을 이 메마른 동양인과 동일시하는 티엔의 평가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글쎄. 그래서 그것들은 좋은 기억이 되었나?”
“……어떤 때는요.”
“흠.”
그렇든 아니든 티엔에게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다. 마틴의 ‘취미’가 자신의 것보다 낫다고 한다면 그걸 부정할 생각도 없었다. 그렇지만 실망이라는 단어는 그의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다.
“너는 내게도 실망하게 되겠구나.”
뜻밖의 말에 마틴은 좀처럼 대답을 내뱉지 못했다. 티엔이 이 작은 동물 같은 청년을 잘 이해하지 못하듯이, 청년도 그 무뚝뚝한 남자의 의도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직 당신이 좋다고 한 적도 없어요.”
“아니라면 다행이군.”
기대가 없다면 실망도 없을 것이다. 티엔의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깔렸다.
“당신은 이상한 사람이에요.”
티엔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마틴이 중얼거린다. 턱을 괴고, 정말로 신기하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같이 있는 게 싫지는 않아요.”
“……그것도 다행인 것 같구나.”
그날 밤은 꽤 쌀쌀했다. 티엔의 제의로 둘은 좁은 침대를 함께 사용했고, 얕은 잠 사이사이 느껴지는 등 뒤의 체온은 그리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뒤로도 그들은 그 비좁은 공간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다음날 아침, 티엔이 집을 나서기 전에 돌아보았을 때 마틴은 곁에 있던 체온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여전히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그래도 전보다 편안해 보이는 얼굴은 안심이 된다. 조금 흥미를 느낀 상대라곤 해도, 티엔은 타인에게 이런 관심을 보이는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함께 지내는 동안 마틴은 집 밖으로 나갈 의지를 그리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티엔 정의 집은 영국인 사내아이가 시간을 보내기에 그리 좋은 장소라고 할 수 없다. 티엔은 자신이 일을 나간 사이 마틴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잠들기 전의 시간 동안에는 티엔의 곁에서 얼쩡거리거나 읽지도 못하는 책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밖에 보지 못했다. 그러니 마틴의 무료함은 아무리 그라도 눈에 밟힐 수밖에 없다. 그가 이날 퇴근 후 서점에 발을 들인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다.
물어본 적은 없지만 마틴은 책을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나마 손에 잡을 것이 그것뿐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여기 있는 책들은 한자가 빼곡한 서적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에세이, 소설, 역사서, 실용서적에 시집까지. 서점에는 티엔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책들이 줄지어 꽂혀있었다. 독서, 정확히는 영문으로 쓰인 책을 읽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빽빽한 책장 사이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둘러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낯선 땅의 문학에 별 조예가 없는 티엔은 어느 것이 흥미롭거나 유익할지 알 도리가 없었다. 점원에게 추천을 부탁할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마틴의 취향을 알지 못하니 그것도 그리 내키지가 않았다. 그는 잠깐의 망설임 끝에 가까이에 비치되어있던 책 중의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티엔은 손에 들린 책의 앞장을 훑어보았다. 겉으로는 미처 몰랐지만 이 책은 하나의 장편이 아니라 여러 단편을 묶은 형식인 것 같았다. 그는 가로등의 불빛에 의지해 첫 번째 이야기를 읽어나갔다.
-어느 추운 날 밤, 귀가 중이던 남자는 얼어 죽어가고 있는 금발의 청년을 발견한다.
흠. 티엔은 이야기 속의 풍경이 어딘가 낯익게 느껴졌다. 간략하게 그려져 있는 삽화 속에는 웅크려 떨고 있는 남자와 그를 보고 있는 또 다른 남자가 있다.
-남자는 그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말이 없지만 총명하고 성실했으며, 간혹 신비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 총명하고 성실한지까지는 모르지만. 미소가 보기 좋기는 하다.
-청년은 사실 죄를 짓고 땅에 떨어진 천사였다. 깨달음을 얻고 죄를 용서받은 그는 은인에게 사실을 밝히고 결국 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흠.
티엔은 조용히 책을 덮었다. 슬슬 주위가 어두워져 책을 읽기 어려운 탓도 있지만,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는 명백하다. 내용은 그런대로 흥미로웠지만, 그는 이 책을 마틴에게 건네줄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무리 그라도 이런 이야기를 읽으며 낯간지럽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천사라…….”
금발에 반짝이는 눈, 사람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차가웠던 희고 붉은 피부. 이 이야기를 미리 알고 있었다면 티엔은 그에게서 천사를 연상했을지도 모른다. 마틴은 이야기 속의 그보다 좀 더 많이 웃고, 많은 이야기를 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결국 떠나게 될 거란 사실마저 닮아있었다.
그러나 마틴의 마중을 받으며 집에 도착한 티엔은 너무도 쉽게 책의 존재를 들키고 말았다. 그가 잠깐 씻고 나오는 사이 마틴은 이미 능청스러운 얼굴로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맹랑한 청년이 종종 집안을 뒤지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새 소지품을 들켰을 거라곤 예상치 못했던 티엔은 조금 난처한 기분이 되었다.
“……경험담이에요?”
보란 듯이 책을 덮으며 묻는 마틴은 분명히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선물 받은 물건이다.”
사실대로 말하기엔 멋쩍어 티엔이 적당히 둘러대자, 마틴은 당신이 선물 같은 것을 받기도 하느냐는 듯 미심쩍은 눈빛을 보냈고 이내 그 눈매는 고운 호선을 그렸다.
“당신이 이런 얘기를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마틴이 굳이 입에 담지 않은 뒷말은 이럴 것이다. 집에는 이미 천사 같은 젊은이가 하나 있노라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시 책을 펼쳐 보는 모습을 보면, 티엔이 일부러 책을 구해온 보람 정도는 있는 모양이었다.
“어릴 적에 천사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긴 해요.”
빠르게 뒷장을 훑던 마틴이 문득 생각난 듯 말을 던졌다. 아마 그에게도 천사 이야기는 꽤나 인상 깊었던 것 같았다.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티엔은 그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은?”
“15살도 넘었는데 천사 같다는 말이 나오면 글쎄요, 그건 누굴 꼬시는 말 아니에요?”
절대 입 밖에 내면 안 되겠군. 티엔은 귀갓길에서 떠올렸던 생각에 자물쇠를 채우기로 했다. 하지만 그런 물음을 던졌을 때부터 그런 생각은 이미 들켜버렸을 것이 뻔하다. 티엔은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마틴은 잠들기 전까지 책 한 권을 전부 읽어버렸고, 내용에 대한 감상을 한참 조잘거리고서야 겨우 졸린 기색을 보였다. 덕분에 티엔은 ‘선물 받은’ 책을 읽지도 않은 채로 그 상징이며 교훈까지를 착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다음날이 되어 아직 잠들어 있는 마틴을 들여다보던 티엔은 이날도 다른 책을 구해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곧 그런 마음을 접어버렸다. 어차피 마틴에게 이 집에서의 여흥거리가 필요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더 이상의 호의는 불필요한 독이었다. 그건 분명, 마틴에게뿐만 아니라 티엔 자신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
그들이 함께한 지 열흘이 넘었을 무렵, 마틴은 웃는 모습이 늘었다. 티엔은 아마 그가 본래부터 그런 성격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그가 처음에 보였던 경계심과 싸늘한 태도도 여전히 ‘마틴답다’고 여겼다. 마틴의 웃는 얼굴은 어여쁠지언정 진심이 아닌 때가 적지 않았으므로.
그때도 마틴은 웃으며 티엔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던 도중이었다.
“티엔, 내일은 함께 보낼 수 있어요? 당신이 쉬는 날이기도 하고─”
크리스마스이브지. 그리고 그 다음 날은 티엔이 정한 마지막 기한이었다.
지금껏 둘은 약속의 기한에 대해 다시 언급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티엔은 마틴이 달력을 자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티엔 자신도 그 날이 다가오는 것을 신경 쓰고 있음을 깨닫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티엔은 지금까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일을 떠안고 있었다. 마틴이 오고 나서 그 빈도가 조금 줄었을 뿐, 본래 그는 귀가 이후에까지 업무를 들고 와 처리하곤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의 동료들은 그를 별난 사람이라 여겼지만 만류를 듣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막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젊은 나이에 몸을 혹사한다며 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 티엔이었기에 보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두 사람이 깨어있는 채 긴 시간을 함께 보낸 적은 없었다. 마틴이 굳이 쉬는 날의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느냐고 물었던 것도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약간의 고민 끝에, 티엔은 마틴의 제안을 수락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오후, 비록 얼음이 얼 정도는 아니지만 공기는 그들이 처음 만났던 날만큼이나 차가운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날과 달리 거리는 즐겁게 떠드는 사람들, 눈에 띄는 장식들, 그리고 노랫소리와 종소리로 전에 없던 활기를 뽐내고 있다.
붐비는 가게에서 함께 장을 본 두 사람은 양손 가득 먹을거리를 들고서 문을 나섰다. 이날은 자신이 요리를 해보겠다는 마틴의 호언에 의한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마틴은 간식 가게에 들러 눈을 빛내며 달콤한 것들을 구경했고, 너무 많지 않으냐는 티엔의 물음에도 그저 웃으며 군것질거리 한 봉지를 짐 위에 얹을 뿐이었다.
그렇게 즐거워 보이는 마틴을 지켜보며, 티엔은 곳곳에 장식된 반짝이는 선물꾸러미들이 눈에 밟혔다. 지금까지 성탄절 선물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그에게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티엔은 아직 과자를 구경하고 있던 마틴에게 양해를 구하곤 어딘가로 사라졌고, 마틴은 값을 치르고 가게를 나선 뒤에도 행방을 알 수 없는 그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 손에는 종이로 포장된 작은 꾸러미가 들려있었다.
마틴은 그것이 그저 티엔 자신의 물건이라 생각했지만, 티엔의 검은 손은 그가 들고 있던 꾸러미를 청년에게 건넸다.
“어…… 이게 뭐예요?”
마틴은 의아해하며 그것을 풀어헤쳤고, 그 안에는 붉은 털실로 짜인, 퍽 따듯해 보이는 목도리가 들어있었다. 그때까지도 어리둥절해 있던 마틴은 서툰 손길로 자신의 목에 그것이 둘리고 나서야 이 목도리가 티엔의 선물이었음을 깨달았다.
티엔의 집에 조금씩 늘어가고 있는 마틴의 물건은 거의 그 스스로 고른 것들이었는데, 몸에 걸치는 것들은 특히나 그랬다. 때문에 티엔은 자신의 선물이 마틴에게 어울리는지는 확신하지 못했고, 마틴 본인은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에 당황을 표하고 있었다.
“이런 거, 별로 필요 없는데요…….”
“날이 춥다.”
그러니 군말 말고 받기나 하라는 소리다. 이미 값을 치른 물건에, 선물을 주는 쪽인 티엔이 그렇게 고집한다면 마틴에게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쁘지 않은 것 같구나.”
자신의 안목을 긍정하며 작게 미소 지은 티엔에게, 마틴은 목에 둘린 목도리를 콧잔등까지 끌어올리곤 고맙다는 말을 웅얼거렸다.
앞서서 집으로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마틴은 전보다 한층 따듯해 보였다. 티엔은 만일, 만약 마틴이 이곳을 떠난 후에 또다시 밖을 떠돌게 되더라도. 조금은 나을 거라는 그런 생각을 했다.
“크리스마스가 어떤 날인지는 알고 있어요?”
집에 도착해 좁은 부엌에서 함께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책장엔 재미없는 책들만 가득하고 주위에 관심이라곤 없어 보이는 사람이, 이런 명절에 대해 알고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선물을 건넬 정도의 지식이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지만. 티엔이 간단히 자신이 아는 바에 대해 말하자 마틴은 조금 즐거운 듯한 얼굴로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덧붙였다. 사실 그런 이야기에 별 흥미를 느끼지 않았지만, 티엔은 묵묵히 마틴의 목소리로 재구성되는 성탄절을 귀에 담았다.
“그리고서는, 천사가 내려와서 목자들에게 아기가 태어난 사실을 알렸어요. 그 천사의 첫 마디는, ‘두려워 말라’ 였다나요…….”
생기 있는 얼굴로 성경의 이야기를 읊던 금발의 청년은 이 대목에서 이야기를 멈췄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는 이야기꾼이라도 되는 양 능숙하게 말을 풀어내고 있었다. 때문에 내용을 잊거나 한 것은 아닌 것 같았고, 약간 고심하는 듯한 그의 모습은 마치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했다.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티엔이 그 뒤를 묻자, 생각에 빠져있던 마틴은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하더니 즐겁게 이어가고 있던 이야기를 간단한 서술로 마무리해버렸다. 티엔은 그런 마틴에게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
잠시 숨을 돌릴 겸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게 되었을 때, 마틴은 티엔을 앉혀두곤 향긋한 밀크티를 우리고 진저브레드를 내어왔다. 많이 달지 않으니까 먹을 만하죠, 어때요? 그렇게 묻는 말에 티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그의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다른 때라면 티엔은 잡담 시간 같은 것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까부터, 그리고 오늘 내내, 마틴은 티엔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다. 웃을 때도, 다른 말을 하고 있을 때도, 그리고 바로 지금도.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마틴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맛 좋은 차나 생강 향이 물씬 한 과자 같은 것은 그의 주의를 눈앞의 청년에게서 돌리지 못했다.
“그, 천사를 주웠다는 이야기 말이에요.”
시답잖은 이야기들이 오가고, 긴 시간 뜸을 들이던 마틴이 드디어 입안의 말을 끄집어냈을 때 그는 전에 티엔이 가져온 책에 관해 이야기했다. 마틴을 연상시키는 천사가 나왔던 짧은 이야기. 물론 티엔은 그 이야기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틴이 꺼낸 말은 그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당신은 뭐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말이죠. 사실 당신이 천사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절 불렀을 때요.”
그 책을 읽었을 때부터, 어쩌면 그 전부터 마틴은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었다. 그는 당연히 새까만 색으로 몸을 두르고 동양인의 얼굴을 한 천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마음이 읽히지 않는 데다, 소리 없는 비명을 들은 듯 자신에게 똑바로 다가온 그 사람은, 마틴에게 그만큼 비현실적이었다.
“그날 밤에도 그냥, 누군가에게 실망했었어요. 그게 제 취미잖아요.”
마틴이 자조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 알면서도 장단에 맞춰준 거였는데. 그런데도 그날은 기분이 정말 나빠져서…… 그 집을 나오고선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당신이 저를 찾았어요. 그래서 당신을 원망하기도 했어요. 다 끝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어쨌거나 그건…… 제게 구원이었어요.”
마틴이 털어놓은 진심은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다. 한껏 그를 경계하면서도 얼마나 그에 대해 알고 싶었는지를, 그의 사소한 행동으로부터 얼마나 큰 위안을 받았는지를. 그것들을 대체 어떻게 표현해낼 수 있을까, 마틴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망설이고 있었다.
“알고 있어요? 그때 당신이 했던 말들이 저한테는, 죽지 말라고, 아직 살아도 괜찮다고 하는 말로 들렸어요. ……티엔, 전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드디어 고개를 들어 바라본 앞에는, 짙은 색의 두 눈이 마틴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그 눈빛에 마틴은 조바심이 났다.
“계속 지금처럼 있겠다는 얘길 하는 게 아니에요. 이제는 일도 구하고, 할 수 있는 만큼 당신을 도울 거고, 절대 귀찮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 말은 진심이었다. 마틴은 그의 은인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마틴.”
“티엔, 제가 좋은 거죠? 그래서 절 돌봐줬잖아요. 그러지 않겠다고 했으면서요. 저는…… 저도 당신이 좋아요. 진심이에요.”
그 말을 들은 티엔의 표정은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마틴은 그런 그의 반응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대가 없는 보살핌은 분명 책임감 이상의 것이었고, 티엔은 분명 타인에게 그렇게 살가울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분명 마틴을 좋아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마틴의 호감을 거부하려 하고 있었다.
“……너는 이전에도 그래 왔다고 했지. 나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고, 너는 결국 실망하게 될 거다.”
“상관없어요. 저는 당신에게는 그런 식으로 실망하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당신은─”
“챌피.”
티엔은 그 뒤에 어떤 말이 나올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마틴이 자신에게 보이는 호감이 어떤 점에서 기인하는지를 깨달았고, 또 실제로 그에 대해 많은 걸 알아내고야 말았다.
“마음을 읽지 못하는 정도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네 부모님께서 걱정하고 계신다.”
그의 말에 마틴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는 티엔에게 자신의 성을 알려준 적도, 능력에 대해 말한 적도, 하물며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도 없었다.
“……언제부터. 어떻게 알았어요? 부모님께 저에 대해서 말했어요?”
망연한 물음에 티엔은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다.
“왜 저한테 먼저 묻지 않았는데요? 절 믿었던 게 아니에요? 그동안 묻지 않았던 건 이미 알고 있어서……? 그래서였어요? ……티엔, 당신은 제가 남아있길 바라지 않아요?”
그의 마지막 질문에는 배신감 사이에서 그러모은 희망이 담겨있었다. 단지 그렇다고, 그가 남기를 바라지만 어떤 이유 탓에 그럴 수 없다는 답이 돌아온다면 마틴은 전부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 설득해낼 것이다. 하지만 낮은 목소리는 그 또렷한 희망마저도 외면해버렸다.
“마틴…. 마틴 챌피. 내가 했던 약속은 오늘까지고, 돌아갈 곳이 있다면 나는 너를 여기 둘 이유가 없다. 내가 할 말은 그것뿐이다.”
티엔이 알지 못하는 이름이 몇 번인가 언급되고, 마틴의 높아진 목소리는 그도 그들과 똑같다며 매도했다. 화가 깃든 마틴의 눈빛은 그들이 만났던 첫날보다도 싸늘했고, 뒤이어 밖을 향하는 이를 불러 세웠을 때 돌아온 것은 어차피 내보낼 사람을 상관하지 말라는 거친 언행뿐이었다.
티엔은 한참 동안 제대로 닫히지 않은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틈으로 싸늘한 공기가 새어 들어와 그의 살갗을, 머리칼을 간질였다.
자신의 배경에 대해서는 제대로 언급하지 않던 금발 청년에 대해 조사하게 되었을 때, 마틴이라는 이름이 본명이라는 사실이 조금 기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를 찾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행동이 옳은지에 대해 수없이 고민했다. 그런 생각들과 함께 티엔의 머릿속에는 마틴의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
─앞으로는 그 목소리도 자신을 괴롭히게 될까.
떠나가길 원한다면 호의 같은 것을 건네서는 안 되었다. 그런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티엔은 잠시간이라는, 그리고 마지막이라는 명목으로 그에게 잘못된 확신을 주었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티엔의 잘못이었다. 그리고 가장 그의 큰 잘못은 그 확신이 완전한 거짓이 아니게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마틴이 떠난 지는 시간이 조금 흘렀다. 만약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라면 그 애는 또 그 날처럼 위험한 짓을 할지도 모른다. 추위를 피할 곳 따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을 텐데도 혼자 떨고 있던 그때처럼.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티엔은 생각에 앞서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됐다. 그건 결코,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혹여나 마틴이 다시 돌아올지 몰라 티엔은 문도 잠그지 못한 채 길을 나섰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주변의 지리를 잘 모를 마틴이 길을 잃지는 않았을지. 티엔은 이대로 그를 찾지 못한다면 이날 밤 어떤 마음으로 잠들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마틴은 괜찮을 거라고, 충분히 그 능력으로 있을 곳을 찾아냈을 것이라 스스로를 다독여야 할까. 그리고 이제는 상관없는 사이가 되었음에 안도해야 할까. 그는 적어도 마틴을 이런 식으로 떠나보내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티엔은 결코 그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설령 그것이 이기적이며 오만한 생각이라 할지라도.
티엔은 그들이 함께 걸었던 익숙한 길을 따라가며 어둠이 드리운 골목 사이를 살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는 어디에서도 마틴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어디론가 날아가 숨어버리면 다시는 찾지 못할 작은 새 같은 존재를 그는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결국, 그것이 티엔이 원하는 결말이었음에도.
무의미한 탐색을 멈춘 티엔은 이성적인 생각을 하려 노력했다. 마틴에게는 능력이 있다. 티엔의 도움 따위가 없어도 그 아이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단지 생존만을 생각한다면. 다음 순간 티엔은 집을 나가기 직전 마틴이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또 한 번의 실망.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런 말을 듣고도 마틴을 모질게 대한 자신에게 신물이 난다. 그는 결코 그런 식으로 마틴을 대해서는 안 됐다.
얼마나 거리를 뛰었을까. 한기로 가득한 날씨에도 티엔의 몸은 땀으로 젖어있었다. 거칠어진 숨이 입김이 되어 그의 주위를 메웠다. 한편으로 자신의 행동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느끼면서도, 그는 마틴을 찾는 것을 그만둘 수 없었다. 숨이 턱에 차오른 티엔이 멈춰 섰을 때 그가 위치한 곳은 다시 그의 집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담벼락에 기대어 숨을 고르며, 그는 지금의 자신이 그저 죄책감을 지우고자 할 뿐은 아닌지를 자조했다. 그는 과거의, 그리고 바로 현재의 자신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바로 그때, 정말로 희미하게. 티엔은 마틴을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또 지금까지 몇 번이나 받아온 ‘시선’을 느꼈다. 오직 그 아이에게서만 느꼈던 감각을 착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시선이 강해지는 방향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며 그는 안도했고, 또 두려움을 느꼈다. 마틴이 그가 찾아오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에, 그리고 지금의 자신이 떠나려는 마틴을 붙잡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
시선은 곧 끊겼지만 티엔은 작은 골목을 지나쳐 마틴과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처음 만났던 때와 같이 벽 한구석에 웅크린 채였고, 한눈에도 지쳐 보이는 티엔에게 놀란 것 같았다. 티엔이 다가가자 마틴은 고개를 돌려 그의 눈길을 피해버렸다.
티엔은 떨고 있는 마틴에게 그가 챙겨 나왔던 외투와 목도리를 건넸다. 그러나 티엔과 그 물건들을 번갈아 보던 마틴은 노기를 띤 웃음을 지었다.
“챙길 건 챙기고서 나가버리라고요? 겨우 이것 때문에 찾아온 거예요? 이럴 거면 대체 왜 오늘 저한테 이런 걸 줬던 거예요……?”
차마 아니라는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티엔은 그런 마틴을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물건을 받으려 하지 않는 마틴에게, 그는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마주했다. 그가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그 호박색의 눈동자에는, 이제껏 본 적 없는 원망과 괴로움이 고여 있었다.
“당신이 얼마나 아는지는 몰라도…… 그런 것들은 저한테 물어봤어도 알려줄 수 있었어요. 전 지금까지 거짓말을 한 적은 없어요.”
“미안하다.”
티엔이 뒷조사를 했다는 점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티엔은 마틴이 이곳을 떠나 달리 갈 곳이 있는지를 확인해야만 했다. 그는 이 아이가 떠나지 않고 싶어 한다는 걸 알 수 있었고, 만일 마틴에게 돌아갈 곳이 없었다면 티엔은 마틴의 부탁을 마지못해 수락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시는 내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위험부담을 안고서라도.
“마음이 안 들린다고 제가 바보는 아니에요. 당신한테 제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지금까지처럼 함께 있어 줄 수 있는 거잖아요…….”
아무것도 아니지 않게 되었기 때문, 이라는 말은 둘 중 누구도 굳이 꺼내지 않았다.
한참을 그 자리에 있었던 두 사람은, 다시 한참을 함께 걸었다. 어둠이나 추위에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간혹 눈에 띄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생소하게 보일 정도로, 함께 웃으며 이브의 저녁을 준비하던 것이 한참 전의 일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그때 반쯤은 일부러 지어 보였던 웃음과 그것을 대신하고 있는 침묵은 모두 그들이 꺼내지 못하는 말들의 껍질이었다.
“저는 열두 살에 능력이 생겼어요.”
숨을 고르고 난 마틴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던 능력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때부터 전 제 능력이 싫었어요. 너무 많은 게 들렸으니까…… 그 나이에는 몰라야 할 것들까지 전부 들어버린 거예요. 평범하게 보이던 사람들이 무서워질 정도로. 그땐 소리를 지우는 방법을 몰랐거든요.
……부모님은 모두 능력자셨는데 저와는 달랐어요. 능력을 가지는 게 이렇게 괴로울 수 있다거나, 그런 말씀은 하신 적이 없었죠. 제 능력이나, 그걸 통제할 수 없던 게 그분들의 잘못이 아닌데도, 전 견딜 수가 없어서…… 모두가 괴로웠는데. 그게 전부 들렸는데도 저는 가족들을 더 힘들게 해버렸어요.”
그렇게 말하는 마틴은 언제나와 같이 웃고 있었지만 그것은 티엔이 처음 보는 종류의 씁쓸한 웃음이었다. 지나간 일을 여전히 후회한다는 말을 마틴은 웃음으로 꺼내고 있었다.
“나중에는 능력을 통제할 수 있게 됐는데도 더는 예전처럼 돌아갈 수가 없었어요. 이미 금이 가버린 거죠……. 그래서, 저는 집을 나왔어요. 제가 어떤 식으로 살아가든 그분들은 저를 믿지 못할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저도 저를 믿을 수가 없었어요. 제 마지막 양심은 저에 대한 관심을 가족들이나 다른 주변 사람들에게서 지웠던 거예요. 그렇게 하면 아무도 괴롭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혼자 있는 건 싫어서. 보통은 능력을 써서 누군가와 같이 지냈어요. 전 누구한테도 사랑받을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점점 괴로워져서, 능력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때도 있었어요. 그러다가 다시 실망하고, 실망시키고, 그게 끝나지를 않아서……”
이야기의 중간부터 마틴이 몸을 떨기 시작하자 티엔은 그의 차가운 손을 붙잡았다. 그 떨림은 분명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음을 읽는 능력이란 것으로 한 사람에게 어디까지 실망할 수 있을지. 티엔은 그런 마틴의 삶에 대해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가족들을 볼 자신이 없어요. 전 부모님까지 능력으로 속였고, 앞으로 또 그렇게 될지도 몰라요.”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마틴이 민감하게 반응했던 건 그 탓이었다. 대략적인 마틴의 가족사를 알았을 때 티엔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게 얼마만큼의 상처인지에 대해서는 미처 알 수 없었다.
“네 부모님을 직접 뵌 건 아니다. 너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고. 돌아갈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이 내 곁보다는 나을 거라 여겼다. 그리고…… 그분들을 더 기다리게 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티엔은 그 스스로도 변명이라 생각되는 자신의 입장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마틴이 가족에게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그의 진심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려운 이야기를 꺼낸 마틴 앞에서, 티엔은 그들 사이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무거운 입을 뗐다. 멈춰 선 그들은 여전히 손을 맞잡은 채였다.
“……나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얼굴은 알지 못해. 내가 그분을 닮았고, 강한 무인이셨다는 것이 내가 아는 전부였지.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말씀을 아끼셨다.”
그는 알지도 못하는 아버지를 동경하고, 어머니를 따르며 자라났다. 빈말로도 넉넉하다고 할 수는 없는 생활이었지만 그때까지 그는 자신들 모자가 불행하다고 여긴 적은 없었다.
“어머니는 홀몸으로 어린 나를 키울 정도로 강한 분이셨지만…… 그 무리가 화가 되어 독한 병을 앓으셨지. 그러면서도 몸을 챙기지 못하신 건 분명, 내가 있는 탓이었다. 그 뒤에 병이 깊어지고 쇠약해지셨을 때, 어머니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말을 꺼내셨다. 그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때의 일을 티엔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지쳐 계셨다. 어렸던 그 자신도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런 시기의 일이었다.
“나는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이제껏 그분을 존경했고, 또 닮고 싶었노라고. 철없던 나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어머니가 홀로 괴로우셨던 것은 그분이 없었기 때문인데도. 나는 사실을 고해서는 안 됐다.
……어머니께서는, 너만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아버지를 미워하라 하셨지. 그래서 그리하였다.”
그전까지 존경하고 또 닮고자 했던 아버지였다. 그 뒤로 티엔은 아버지가 걷지 않았을 길을 걷고,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지금 이 먼 타국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도 결국은 어머니가 남기신 그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께서는 떠나신 지 오래고, 나는 아버지의 얼굴조차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분처럼 누군가를 괴롭게 만드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 내 미숙함으로 누군가에게 어머니와 같은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너와 함께할 수 없다. 티엔은 그런 뜻을 비치며 이야기를 끝냈다. 그러나 그가 다시 마틴을 마주 보았을 때, 마틴은 티엔을 와락 껴안았다. 가만히 그의 등을 도닥이는 마틴의 손길은 마치 우는 아이를 어르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전 당신이 누구를 닮았는지 같은 건 몰라요. ……그리고 상처를 받은 건 당신이잖아요.”
뜻밖의 말에 티엔은 굳어버렸다. 타인에게 처음으로 꺼낸 이야기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약하다거나 여리다는 평가를 받아본 적이 없는 그의 상처를 지적하는 마틴의 말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별개로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떠올릴 때마다 그를 아프게 하는 그것을, 그는 미처 상처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전 당신이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무엇을?”
“행복하게 사는 걸요.”
귓가의 목소리는 그에게 생소한 낱말을 속삭였다. 오랫동안 잊고 살아온 단어였다. 스스로 그걸 생각하지도, 또 그럴 필요도 없었으니까.
“제가 포기했을 때 당신이 절 구했으니까. 전 당신도 저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구나.”
그것은 그가 일생동안 해온 그 어떤 일보다도 어렵고, 또 무겁게 느껴졌다. 마틴과 함께했던 시간은 그에게 있어서 잠시간의 낙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그조차 옳지 않을 정도로 과분하게 느껴졌고, 티엔은 그 이상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마틴은 몸을 떼고 티엔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너머의 흔들리는 마음을 알아챈 마틴은 작게 미소 지었고, 이번에는 발끝을 세우며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이내 그의 이마에 가볍게 닿는 따스한 감촉에 티엔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마 그때의 마틴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는 결코 아프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또 혼자여야만 할 필요가 없다고. 티엔에게 마틴의 말과 몸짓은 그렇게 느껴졌다.
차갑고 어두운 크리스마스이브의 저녁, 흑발의 남자는 검고 흰 손으로 자신을 껴안은 이를 마주 안았고, 금발의 청년은 읽지 못하는 그 마음을 그려보며 얼굴에 미소를 번졌다.
ⅱ- 꿈을 꾸는 것과,
현실을 산다는 것
그는 한참이나 낯선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 발걸음에는 확신이, 입가에는 기대가 서려 있다. 약간의 경사를 넘자 서서히 눈에 익은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이제서야. 금발의 청년은 그의 목적지를 향해 가벼운 걸음을 옮겼다.
약간 낡은 인상을 주는 공동주택의 한구석에 위치한 어느 현관은 아무런 표식도 없는 것이 도리어 표식이었다. 호수가 표기된 문패가 떨어진 것을 지금 살고 있는 이를 포함한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하던가. 얼마 전까지는 이곳에 찾아오는 사람도 극히 드물었으니 아무래도 좋았을 만도 했다.
쓰이지도 않으면서 언제나 마틴의 주머니에 담겨있던 자그마한 열쇠가 드디어 제 용도를 되찾았다. 그것은 현관문 위 자물쇠의 틈새로 부드럽게 밀려들었고, 마틴이 열쇠를 가볍게 비틀자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그런 당연한 일의 연속이, 마틴에게는 마치 이 집이 그를 환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금발 청년은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래된 책 냄새나 부드러운 겨울 햇살의 내음이 은은히 깔린 그 안은, 생활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방문자 마틴 챌피는 낯익은 풍경을 바라보며 그리운 기분에 휩싸였다. 타인의 등을 빌려 이곳에 발을 들인지는 두 달, 그리고 이곳을 떠난 지는 그보다 약간 적은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짧은 시간을 이 공간과 함께했던 마틴이 그리움을 느꼈다는 것은 우스운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마틴은 몇 번이고 이곳으로 돌아오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눈앞의 풍경이나 냄새, 문의 감촉 등 상상 그대로의 재현에 청년은 작게 미소 지었다.
근방에서 보기 드문 동양인인 티엔 정의 집은 그러니까, 마틴이 남몰래 내렸던 평가에 따르면 어느 날 아무런 준비 없이 타인을 들이더라도 남부끄러울 것이 없을 거처였다. 그 어떤 서먹한 인연이 이곳에 찾아오더라도 아마 딱 티엔씨 같은 집이로군요, 라는 건조한 감상을 남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마틴이 바라본 집안은 떠났을 때와 달라진 것이 그리 없어 보였다. 장식이라는 개념이 희박한 실용적인 물건들과 역시나 효율을 중시한 배치들. 무채색의 물건들이 깔끔하게 놓인 가운데 간간이 보이는 낯선 문자들이 조금 기묘한 느낌을 더하고 있다. 그렇게 마틴이 그대로인 것과 아닌 것을 열심히 눈동자에 새기고 있었을 때에, 그의 눈에 신경 쓰이는 작은 변화가 들어왔다. 식탁으로 곧잘 쓰이는 부엌 근처의 탁자는 평소 깨끗하게 비어 있었는데, 지금 그 위에는 작은 찻잎통과 함께 하얀 천이 쓰인 그릇이 놓여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에 마틴은 잠깐 망설이다가, 곧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 천을 들춰 보았다. 일렁이고 있던 마음속에 기분 좋은 파문이, 그리고 고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쩌면, 좀 더 기대하고 왔어도 좋았을 걸 그랬어요.
마틴은 주전자에 물을 채워 스토브 위에 올렸다. 그리고 끓는 소리가 시끄럽게 날 때까지, 그는 탁자 앞에 앉아 티엔에 관한 생각을 했다. 좋아하는 장소에서, 좋아하는 먹을거리들. 이제 부족한 것은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마틴은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는 것에 익숙했지만, 자신이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기다리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언제 돌아올까. 그는 마틴을 보고서 무슨 표정을 짓고, 무슨 말을 할까.
문제아였던 금발 청년이 티엔을 떠나있던 동안에도 그들은 이따금 연락을 주고받았다. 마틴은 사정상 한동안 어딘가에 정착해있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다이얼을 돌리는 쪽은 언제나 그였다. 그들이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하고 질문을 던지던 그 시간은 보통 티엔이 취침하기 직전이었다. 보통이라면 꽤 실례가 되었을 일이지만 그건 티엔의 일정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마틴의 의도였기에 티엔도 그 점에 대해 책망하지 않았다.
며칠 전의 통화는 꽤 간만이었다. 익숙한 시간에 울리는 벨소리와 짧은 신호음 뒤의 침묵. 둘은 서로를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저, 슬슬 돌아가고 싶어요.”
“……그런가.”
짧은 대답 뒤, 티엔은 단어 선택에 대해 고심했다. 이곳이 정말 ‘돌아올’ 곳이 맞는지, 일들은 잘 마무리되었는지, 이곳에서 무얼 하고 싶은지. 그가 꺼낼 수 있는 말이나 물음은 수십 가지였다. 하지만 결국 그는 짤막한 한 마디로 그런 것들을 대신했다.
“기다리고 있으마.”
티엔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마틴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의 마중이며, 함께하는 식사, 등 뒤로 닿는 체온 따위의. 너무나 당연했던 그의 혼자만의 시간은, 어느새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일상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좀 더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날 그들은 서로에게 가장 깊숙한 상처를 내보였다. 단지 털어놓는 것만으로 기억에서는 아픔이 되살아났지만, 그건 피하고 있던 과거를 마주보는 일이기도 했다. 그는 마틴의 위로에 한없이 가라앉으면서도 비어있던 무언가가 채워지는 감각을 느꼈다. 결국, 그는 스스로도 잊고 있었던 자신의 외로움을 인정했다.
그는 마틴을, 또 그 온기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현관문 앞에 멈춰 섰을 때, 티엔은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혹은, 그보다는 어떤 예감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달라진 것에 대해 언어로 표현해낼 수 없으면서도, 이 너머에 무언가 바뀌어 있을 것이라는, 그런 예감. 티엔은 그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을 해보며 굳게 닫혀있는 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마음의 준비가 있고서야, 그는 마치 숨을 고르듯, 조금 느린 동작으로 문을 열었다. 안으로부터 따듯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곧이어 의자가 끌리는 소리와, 다가오는 발소리. 낯설고도 그리운 인기척이 그 안에 있었다.
“티엔?”
기대에 찬 귀에 익은 목소리는 곧 하나의 인영이 되어 그의 앞에 드리웠다. 실망은 없었다. 상상 그대로의 재현에 그는 오히려 당황하고 말았다. 어쩌면, 충분히 기뻐할 수 없을까 하는 걱정마저 있었는데. 그런 걱정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 같았다.
“어서 와요.”
금발과 주근깨, 둥글게 휜 눈을 가진 변함없는 얼굴이 따스한 미소를 띠었다. 벌써부터 집주인 행세를 하는 그 뻔뻔하고 사랑스러운 태도에는, 아무리 그라도 작게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그가 속마음과 좀 더 비슷한 얼굴로 반가운 이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고 할까.
“잘 왔다, 마틴.”
덩달아 더 큰 미소를 짓는 마틴을 바라보며, 티엔은 그의 키가 약간 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그건 전보다 어른스러워진 그의 분위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마틴은 굳이 티엔의 얼마 되지 않는 짐을 받아들고 짧은 복도를 나란히 걸어 들어갔다.
“제가 좋아하는 걸 용케 알고 있었네요.”
그렇게 말하며 청년이 고갯짓으로 가리키는 것은 탁자 위에 놓인, 양이 조금 줄어있는 간식더미와 홍차가 담긴 찻잔이 있었다. 마틴은 티엔이 그런 걸 신경써주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티엔은 중국인답게 차를 즐겨 마셨지만 그가 입에 대는 것은 주로 흑차나 청차 종류였다. 그런데도 일부러 잘 보이는 곳에 홍차를 꺼내둔 것은 언제 올지도 확실치 않은 마틴을 위한 것임이 분명했다. 게다가 접시에 놓인 간식들은 마틴이 좋아하는 것들만으로 가득했다. 마치 기다린다는 말을 그대로 옮겨둔 듯한 그의 행동은 작지 않은 감동이었고 또 설렘이었다.
“그걸 모를 리가 없지 않나.”
티엔은 전에 가게에 들렀을 때 마틴이 조용히 눈을 빛내던 것이며, 좋아하는 과자를 아껴가며 신중히 입에 넣던 것을 꽤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다. 군것질에는 전혀 취미가 없는 자신과 정반대인 마틴을 신기하게 느낀 덕분이었다.
“간만이겠다, 나이트 티 한 잔 할래요?”
또 늦게까지 잠 못들 생각이냐는 가벼운 타박을 던지면서도 티엔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그들에게는 할 말이 잔뜩 남아있었다. 물론 티엔의 생활은 전과 다를 것이 별로 없기에, 전부터 이어진 통화에서도 이야기를 하는 쪽은 주로 마틴이었다.
청년이 다시금 차를 우리는 사이 그들은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마틴은 약간 망설이다 가족의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밤, 마틴은 몇 년간 떨어져 있던 가족에게 처음으로 연락을 했다. 그가 떠나기 전에 걸었던 자신을 잊어달라는 암시는 오래전부터 흐려져 있던 것 같았다. 능력이 좀 더 미숙하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당시 마틴에게는 망설임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차마 밝히지 못했던 마틴의 이름을 먼저 입에 담은 것은 그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마틴은, 자신에게 울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 오랫동안, 정말 긴 시간을 고민했다.
사실 이전에도 여러 번의 고민이나 시도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마틴은 자신에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가족의 목소리를 마주하고서야, 적절한 마음의 준비 따위는 영영 불가능했음을 청년은 깨달았다. 당시 티엔은 마틴에게 자신의 집을 내어주곤 어디론가 자리를 피해 있었는데, 그건 마틴에게 있어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잘 지내고 계세요. 여기 오기 전에도 잠시 들렸었고…… 아, 당신에 대해서 말했을 땐 좋은 사람일 거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요즘 같은 때 보기 드문 사람일 것 같다고.”
마틴은 그의 부모님 앞에서 지었던 수줍은 웃음을 그대로 지어 보였다. 정작 칭찬을 들은 사람은 그 말에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몰라 조용히 차를 홀짝였다. 그런 말에 무어라 평할 붙임성이 그에게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제 여동생도 정말 많이 자랐어요.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키가 훨씬 컸고……. 성적도 좋고, 친구도 많고. 그야말로 집안의 자랑이에요.”
그 말에 티엔은 마틴과 비슷한 인상의, 그러나 평범하게 자라났을 여자아이를 상상해보았다. 어린 나이부터 집을 떠나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마틴은 집을 떠난 이후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았다. 그런 사정 탓에 여동생에 대해 자랑스럽게 말하면서도 마틴에게는 어딘가 씁쓸한 기색이 비쳤다. 티엔은 그것이 자신의 착각인지 어떤지를 알 수 없었기에, 그저 조용히 축하의 말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마틴이 모든 이야기를 입에 올린 것은 아니었다. 감동의 재회나 용서, 화해 같은 것들이 있었지만 결국 마틴은 자신이 그곳에 남을 수 없음을 알았다. 그곳에는 이미 마틴의 자리가 남아있지 않았고, 마틴은 그들이 느끼는 부담과 죄책감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티엔에게 알려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음, 그리고 얼마 전까진 예전 일들을 마무리하러 다녔고요. 대부분은 잘 끝났다고 생각해요.”
마틴이 말하는 ‘예전 일’이란 그가 이전에 몸을 의탁했던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다. 마틴은 그동안 능력을 남용해왔지만 눈에 띄는 일을 벌인 적이 없고, 필요 이상의 것을 받은 일도 드물었으므로 마틴이 이용해왔던 사람들은 단지 자발적으로 가엾은 아이를 돕는 친절한 이들로 비치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마틴은 지금껏 타인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인식이 희미했다. 어쩌면 일부러 그런 식으로 죄의식을 지우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마틴은 고민 끝에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고자 결심했다. 다시 찾아갈 수 없는 이들도 있었고, 대부분이 마틴을 기억하지 못하게 됐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행동은 철저한 자기만족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제 마음은 조금 편해진… 것 같지만. 사실 좋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정작 제가 잘못했던 걸 잊어버리면 안 되잖아요.”
그렇게 말하고 마틴은 쓰게 웃었다. 티엔은 그런 마틴을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적어도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죄책감을 가진 채로 사는 게 어떤 일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마워요.”
그에게 알리지 못한 것들에 관한 복잡한 감정과, 자신을 생각해주는 그에 대한 고마움으로 마틴은 작게 웃었다. 한편으로, 마틴은 자신이 지나온 자리들을 더듬어가며 지금껏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음을 되새겼다. 그건 티엔이 그에게 있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를 자각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 뒤로 마틴은 티엔의 생활에 관해 물으며, 그가 여전히 재미없는 사람이라며 웃었다. 바로 그의 그런 점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티엔이 무미건조한 사람이라는 건 차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정말 간혹, 그렇지 않을 때가 있었지만.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아마…… 네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
예전에 받았던 뜻밖의 선물도 그렇지만, 티엔의 이런 불시의 기습에 마틴은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다.
“음……. 좋아요. 다 좋네요. 저도 당신 생각을 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의아한 눈빛을 보이는 티엔에게 마틴은 당황의 이유를 알리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행동을 자각하고 나면, 이런 무심코 던지는 말들을 듣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슬슬 일터에서 막 돌아온 사람을 길게 잡아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틴은 그만 씻으라며 티엔을 일으켜 세웠다.
“티엔, 잠시만요.”
아직 남은 말이 있는가 하여 티엔이 멈춰 섰을 때에, 금발 청년은 다가가 미소 짓더니 그를 자신의 품 안에 폭 안았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뒤따르는 건 여전히, 그리고 어쩌면 전보다 더 어색한 반응.
“다녀왔어요.”
귓가에 속삭여오는 말을 들으며, 망설이던 티엔의 양손은 그제야 마틴을 마주 껴안았다.
티엔이 자리를 비운 사이 마틴은 다시 집안을 둘러보았다. 한 사람의 존재만으로 어떤 공간 전체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은 언제나 신기한 일이다. 그저 같은 등불로 밝혀져 있는데도, 좀 더 밝고 따스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홀로 침대에 드러누워도 보고, 찬장을 열어보기도 하며 까닭 없이 곳곳을 서성이던 마틴은 이번에는 낯선 언어로 가득한 책장을 살펴보았다. 예전에 달리 할 일이 없던 마틴은 고심해서 그려놓은 낙서 같던 한자책들을 주워보곤 했다. 뜻을 전혀 알 수 없어도 ‘티엔 같다’는 편견을 가지고서 그것들을 보고 있자면, 하나같이 무겁고 지루한 내용을 다루고 있을 것만 같다. 그래도 그건 마치 그와 암호를 공유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마음이 조금 즐거워지곤 했던 것이다.
문득, 마틴은 그 사이 전에 보지 못했던 책이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낯선 책들을 제대로 구별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책은 다른 것들보다 훨씬 낡은데다 특이한 제본 방식을 따르고 있어 존재가 확연히 드러났다. 그는 습관적으로 그것을 꺼내 들춰보았다. 그 안에는 여전히 그림 같은 문자가 가득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실려 있는 삽화를 통해 마틴은 그 책의 내용을 어느 정도 짐작해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의아함, 그리고 이어지는 깨달음. 책장을 넘기던 마틴은 티엔의 아버지가 무인이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마도 그는, 자신과는 다른 형태로 과거를 마주했던 것이다.
곧 티엔이 욕실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틴은 보고 있던 책을 있던 자리에 그대로 돌려놓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방을 나섰다.
마틴은 티엔이 명상을 하는 걸 지켜보았다. 전부터 보아왔던 그 모습에 마틴은 그가 기도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던 적도 있지만 그는 마틴의 물음을 부정했다. 이어지는 그의 설명에는 동양 특유의 개념이 등장하는지라 마틴이 이해하기에 조금 난해했지만, 어쨌거나 무언가에 대한 의존이 아니라는 점에서 명상은 기도보다 티엔에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집중해 있는 그를 보고 있는 시간은, 마틴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어 아쉬워지는 순간 중 하나였다.
몇 번인가, 마틴도 그를 따라 눈을 감고 마음을 비우거나 어떤 생각에 집중해보려 한 적이 있지만 별 수확은 없었다. 간혹 마틴은 자신이 티엔을 완전히 이해하기가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곤 했지만 그건 꼭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필요 이상의 이해는 마틴에게 이미 충분하고도 넘쳤으니까.
“티엔, 당신은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예요?”
티엔의 명상이 끝나고, 마틴은 미처 꺼내지 못했던 미래의 이야기를 했다.
“글쎄. 생각해본 적이 없군.”
티엔은 어디까지나 외지인이고, 사정이 생기면 언제라도 이곳을 떠날 수 있다. 그는 어딘가에 정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단지 어딘가 멀리로 떠나길 바랐을 뿐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그에게는 함께 결정을 내릴 동반자조차 없었다.
“어쨌든 지금 여길 떠날 생각은 없는 거죠?”
“그럴 거다.”
마틴의 의향에 대해 알지 못하는 티엔은 조금 애매한 대답을 남겼다.
“음, 저는 말이죠. 앞으로에 대해서 생각해봤는데……. 숭고한 길 재단이라는 곳을 알아요?”
“그랑플람 재단을 말하는 거라면.”
재단에 대해서는 티엔도 어느 정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꽤 알려진 능력자 단체면서, 무역회사의 성질도 가지고 있기에 티엔은 업무상에서도 간혹 그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맞아요, 장 바티스트 플람이 만들었다는 능력자 단체요. 어릴 적에 그의 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전 그러니까…… 그곳의 후원자가 되고 싶어요.”
“흠.”
영국, 특히 이곳 런던에는 능력 관련의 단체가 적지 않다. 일단 가장 이름이 알려진 헬리오스나 지하 연합을 중심으로, 능력자 탄압을 반대하는 인권 단체에서부터 능력자 우월론을 펼치는 과격한 집단까지. 심지어는 다양한 범죄나 인체 실험을 벌이는 수상한 단체도 있다고 하던가. 물론 그 정도로 반사회적인 조직이 드러내놓고 활동하는 일은 적지만, 간혹 일어나는 사건으로 그 존재만은 일반에까지 알려져 있었다.
“사실 그곳에서 절 받아 줄지는 모르겠지만요. 재단은 위험한 능력에는 까다롭다나요. 제 능력도 그런 부류거든요. 그래도 저야 흔쾌히 받아주지 않는 편이 더 좋고……. 그래야 다른 속셈도 없을 테니까요.”
자신의 능력이 차별받는다는 이야기를 태연하게 꺼내는 이를 바라보던 티엔에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이런 말을 하기까지, 능력만을 가지고 방황하던 소년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꼈을지 티엔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어쨌거나 그런 곳에서 능력자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어졌어요. 법안이나, 이런저런 활동이나, 어려운 건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건 꽤 의미 있는 일이잖아요?”
“네가 원해서 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남을 위하는 삶이라. 티엔에게는 한겨울에 얼어 죽어가는 사람을 주워올 정도의 연민이 있었지만 그런 식의 삶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는 마틴을 봤을 때 들었던, 어른스러워졌다는 느낌을 새삼 다시 떠올렸다.
“고마워요. 아, 그리고 다른 능력자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궁금해요. 그런 곳에서는 다른 능력자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겠죠.”
거기까지 말한 뒤, 마틴은 표정을 약간 장난스럽게 바꿨다.
“일단 지금은 근처에 일할 곳을 찾아뒀어요. 저, 당분간 여기서 지내도 되죠?”
“안 될 건 없다만, 그런 건 처음부터 말을 해라.”
여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되어 있다면 거절하는 것이 무리였다. 물론 티엔도 마틴이 ‘돌아온다’는 표현을 썼던 시점에서 여기 머물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정작 집주인의 의사는 빠져있는 일련의 계획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제멋대로 집안을 뒤지곤 하던 그에겐 아이 같은 점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았다.
“안 될 게 없으면 문제될 것도 없죠.”
웃으며 말하던 마틴은 조금 망설이다, 쭉 생각하고 있던 거 먼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그 이후에도 전 같이 있고 싶어요. 더 나중에도 계속.”
그러나 티엔은, 그런 마틴의 말에 대답을 주지 못했다.
아무리 특별한 날이라도 티엔의 생활은 규칙적이었다. 늦은 취침을 하는 마틴이 소파 위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이, 티엔은 먼저 침실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문 틈새로 옅은 불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다. 드문드문 들려오는 자세를 고쳐 앉는 소리나, 물건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정말로 간만에 느끼는 자신 외의 인기척에 티엔은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 혼자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티엔은 팔을 뻗어 자신의 검은 손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녹아들어 거의 보이지 않는 그것이, 티엔은 자신의 미래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누군가와 함께 설계하는 미래가 생소했고, 또 그것에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단순한 룸메이트 사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 이상을 생각하면 곤혹이 앞섰기에, 그는 더 앞을 내다보고 있는 마틴에게 어떤 식으로 응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에게는 마틴이 하는 말들이 너무도 무겁게 느껴졌다.
티엔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서, 그가 방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마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틴의 생각은 틀린 것 같았다. 티엔은 분명 마틴의 말을 부담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타인이 다가오는 걸 거부하고 있던 사람이 한순간에 바뀌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청년은 그를 바꿔가고 싶었으나, 이 마인드컨트롤러에게 있어 타인을 바꾼다는 건 정신에 직접 손을 대거나, 읽은 마음에 통해 계산된 행동을 한다는 의미였다. 자신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중 어느 쪽도 유효하지 못하다. 그리고 설령 가능했더라도, 마틴은 특별한 존재가 된 그에게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마틴은 그에게 자신이 내린 가장 큰 결심을 말하지 못했다. 과연 그 결심이 유효할지는 시간과 의지만이 알겠지만.
마틴은 늦은 밤까지 티엔이 선물했던 책을 읽었다. 그는 이 책을 여러모로 좋아했지만, 추궁 끝에 티엔이 그걸 마틴에게의 선물이었음을 인정한 것이, 그 어떤 이유보다도 마음에 들었다.
‥‥
바깥에서 들려오는 잘그락 소리와 집 안 가득히 퍼져있는 음식 냄새. 그리고 지금 다가오는 발소리가 무얼 뜻하는지 알기에, 희미하게 잠이 깨어있던 마틴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마틴, 일어나라.”
아침식사의 준비가 끝난 티엔이 그를 깨우러 왔다. 전부터 그의 생활을 따라잡지 못하던 마틴이 이 시간에 일어나는 데엔 굉장히 큰 노력을 요한다. 사실 마틴은 티엔보다 한참 늦은 시간에 외출하기에 굳이 지금 기상할 필요가 없지만, 티엔의 기준에서 마틴이 직접 해결하는, 잼 바른 빵이나 간식으로 대체하는 식사가 좀처럼 마음에 차지 않는 탓에 반쯤 억지로 이른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
“끙…… 일 나가기 싫어요─.”
한동안 혼자 차지하고 있던 침대 위에서 꿈지럭거리던 마틴이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꽤나 오랜 시간을 자유롭게 살고 있던 청년이 규칙적인 생활을, 그것도 티엔 같은 사람과 맞추어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알겠으니 아침이나 먹어라. 식는다.”
마틴에게 돌아오는 건 그저, 배려가 넘치는 매정한 말 뿐이었다.
해야 할 일을 하기 싫다거나, 게으름을 피운다는 개념은 티엔에게 생소한 종류였다. 심지어 그런 모습을 눈앞에서 목격하는 건 꽤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그 마음에 공감하지는 못하기에 그는 마틴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냥…… 나중에 데워서 먹으면 안 될까요……?”
“또 먹지 않고 나가려 그러나.”
잘 차려져 있는 음식을 두고 허둥지둥 빵을 문 채 나갔던 어제의 이야기다. 여기에 마틴은 뭐라 반박할 말이 없었고, 일어나기를 격렬히 거부하는 몸을 이끌고 겨우 침대를 벗어났다. 그리고 몇 걸음 내딛지도 못한 채 몸이 쑤시다며 끙끙대는 마틴을 티엔은 딱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일이 그렇게 힘든가?”
“으…… 그래도 첫날보다는 할 만 한데……. 그게 같이 일하는 사람 때문에 더 피곤해요. 속으로 생각만 하면 몰라도 대놓고 말하는 건 진짜……”
동료에 관한 건은 티엔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뭐라고 했기에?”
“에, 뭐……. 멀쩡하게 생겨선 비실비실하다고……. 그래도 옮길 건 다 옮기고 했는데, 겨우 사흘 일한 사람한테 대고 그러는 건 너무하잖아요.”
사실 그것만은 아니었지만. 날이 선 티엔의 목소리를 들은 마틴은 정말로 심기를 건드린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아침부터 그의 기분까지 잡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틴이 불평을 꺼내게 된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남을 조종하는 능력을 쓰지 않겠다는 마틴 자신의 결심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틴에게 사람에 관한 문제는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마틴은 아직 티엔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그 결심을 깨게 되었을 때 그에게 실망을 안겨주게 될 것 같았던 탓이었다.
티엔은 마틴이 이전에 함께하던 사람과는 달랐다. 말썽을 회피할 수 없고, 거리를 가늠해야 하고, 진정한 쌍방의 관계라는 점에서 전과는 다른 의미로 감정 소모가 생긴다. 마틴은 아직 그가 어떤 일을 중시하고 어떤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는 탐색해야만 했다. 다시 보지 않을 사람이라 생각해 온갖 감정을 전부 털어놓았던 때가 마음은 더 편했겠지만, 더 가까워지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이런 일들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마틴이 겨우 식탁 앞에 앉자 고소한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오랫동안 혼자 지내왔기 때문인지 티엔의 요리 솜씨는 썩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함께 사는 입장에서 그건 꽤 반가운 일이다. 간혹 상 위에 올라오는 생소한 음식을 보며 마틴은 그가 먼 곳에서 왔음을 새삼스레 자각하기도 했다.
친애하는 동양인과 마주앉아 바삭하게 구워진 토스트를 씹으며, 마틴은 다소 우중충한 창밖을 내다보았다.
“오늘도 비가 오면 좋겠네요. 그러면 손님이 조금 적을 텐데.”
비가 이렇게 잦은 곳에서 그런 차이로 유의미한 변화가 있다는 것이 티엔에게는 조금 이상하게 느껴진다. 어쨌거나 그는 힘겨워하는 마틴이 조금이나마 편하기를 바라며 그 말에 선선히 동의를 표했다.
“잘 다녀와요.”
“너도 조심히 다녀와라.”
식사를 마친 티엔이 먼저 집을 떠나고, 마틴은 그런 그를 가벼운 포옹으로 배웅했다. 그가 떠난 뒤 홀로 일어나곤 했던 전에 비하면 크나큰 발전이다. 그러나 피곤함을 몰아낼 길은 없어 마틴은 다시 침대 위로 드러누웠다. 집안일을 그에게만 떠넘기는 것 같아 아침식사의 뒷정리는 마틴이 자처해 맡았지만, 일을 나가기까진 아직 시간이 있으니 급할 것은 없다. 물론 티엔이 안다면 정색할 일이겠지만. 마틴은 잠깐 동안 예전과 같은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다시 돌아온 이곳은 마음이 편하다. 호의를 담보로 누군가를 휘두를 필요도 없고, 묵은 상처를 떠올리며 또 다른 상처를 줄까 조바심 낼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마음 편한 곳에서 잠을 자고, 식사를 하고, 배웅을 하는 지금의 모습은 마치─ 가족놀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왜 ‘놀이’냐고 한다면, 지금 이런 형태는 마틴이 정말로 원하는 것과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처음에 마틴은 그들이 서로 간에 원하는 것이 가족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그들은 가정과 동떨어져 있었고, 그건 결코 그들이 원했던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하지만 가족을 직접 만나보고 온 뒤로 마틴은 자신이 티엔에게 느끼는 것이 그런 감정은 아니라는 확신이 생겼다.
티엔 측에서도 아마 비슷한 감정일 것이라 추측하고 있지만, 표현이 서투른 그가 명확한 표시를 보여주기를 바라기엔 아직 무리가 있다. 게다가 아직도 자신을 어려워하는 듯한 그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도 마틴에게는 큰 과제로 남아있었다.
마틴은 사랑스럽게 구는 방법을 알지만 티엔은 그런 감정이나 행동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모른다. 물론 반대의 입장은 더더욱. 예를 들어 친밀한 사이의 신체접촉에 대해서 그는 그렇게 해도 된다거나, 그래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그가 그런 것들을 자신과 관련짓기에는 혼자 지내온 시간이 길었다.
나가야 할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마틴은 이불 속에 고개를 파묻으며 이 문제에 대해 고민했지만 결국 또다시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타인의 마음을 알지 못해 조바심을 내는 날이 올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한편으로 그 사실이 설레면서, 다른 한편으론 딱딱한 그에게 조금 불만이 쌓여간다.
그 날 오후, 런던 거리에는 마틴이 바라던 대로 비가 내렸다. 차가운 공기와 섞인 습기며 물방울은 집요하게 사람들의 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익숙함이 꼭 그것을 즐길 수 있게 하지는 않는지라, 거리의 행인들은 모두 옷깃을 여민 채 빠른 걸음으로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마틴이 일하는 서점은 적당히 비를 피하러 들어온 사람 몇몇을 제외하면 꽤나 한가했다. 게다가 마틴이 탐탁지 않아 하던 직원은 마침 몸이 불편해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덕분에 해야 할 일은 늘어났지만 마틴은 마음이 한결 편했다. 그는 아직 결심을 깨고 싶지 않았고, 결심이 깨지는 이유가 그런 인간 탓이기는 더더욱 바라지 않았다.
서점에서의 일은,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일종의 중노동에 가까웠다. 무거운 책 더미를 옮기고, 정리를 해도 해도 다시 흐트러지곤 하는 책들을 제자리에 꽂아 넣는 과정을 마틴은 그 외에 무어라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느긋하게 책을 읽을 여유를 바랐던 건 아니지만, 몸을 쓰는 일에 별로 익숙하지 않은 마틴에게 이 일은 꽤나 고역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하필 이런 일을 골랐냐고 묻는다면─ 일자리를 알아보던 도중 티엔의 그 책선물이 시기 좋게 떠올라버린 탓이다. 그리고 마침 눈에 띈 이 가게에서는 새 직원을 구하고 있었다. 만약 티엔의 선물이 그게 꽃이나 다른 작은 물건이었다면, 지금의 마틴은 적어도 몸만은 약간 편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도 약간의 짬이 날 때면 마틴은 티엔의 고국에 관한 것이나, 능력자에 대한 서적을 찾아보곤 했다. 전자는 순전히 흥미에 의한 것이고, 후자는 재단 후원자가 되기 위한 배경지식을 쌓기 위해서였는데, 읽었던 내용을 전날 티엔에게 말했을 때 그가 의문스러운 반응을 보인 걸 생각하면 전자에 속하는 책들은 그리 신뢰도가 높지는 않은 것 같았다. 혹은 티엔이 고국의 물정에마저 어두운지도 몰랐지만.
“아, 능력자라. 같이 일하던 직원 중에도 하나 있었지.”
뜻밖에, 마틴이 들고 있던 책의 제목을 발견한 서점 주인이 전에 함께 일했던 능력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 이름은 마틴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는 2차 능력자 전쟁에서 활약했다는 연합의 ‘영웅’이자 뛰어난 결정사였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의외의 인물이 언급된 것에 호기심을 가진 마틴은 그에게 더 자세한 이야기를 물었고, 정말 대단하다며 눈을 빛내는 마틴에게 그는 흔쾌히 자신이 아는 이야기들을 꺼냈다.
“그 애가 일을 시작한 게 아마, 딱 너 만한 나이였을 거야. 싹싹하고, 예의바르고. 같이 일하기 편한 직원이었지. 가게를 여기로 옮기기 전에 일을 그만뒀지만. 그 애의 능력을 본 적은 거의 없었는데, 서점에서 그런 걸 쓸 일은 흔치가 않아서 말이야.”
윌리암은 영웅이 되기 이전의 루이스를 회상하며 말했다.
“싸움이니, 전쟁이니……. 그렇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지. 여기서 일할 때는 그저 진지하고 상냥한 청년이었거든.”
따로 알아보기라도 했던 것인지, 윌리암은 그의 전쟁 당시나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야말로 영웅의 일대기 같은 그 활약에는 마틴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 그는 지금의 마틴과 나이차조차 크게 나지 않았다.
“멋지네요. 저도 그런 기분을 한 번 느껴보고 싶어요.”
“글쎄다, 나는 그런 건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말이지.”
그의 말에는 마틴도 어느 정도 동의를 표했지만, 한 단체를 위해 헌신하고, 그 노력을 인정받았다는 이야기는 마틴에게 보통보다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마틴은 재단의 후원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그걸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회의감을 가지고 있다. 지금의 마틴이 내세울 수 있는 건 능력자라는 사실 하나 뿐인데, 그 능력마저 위험이라는 딱지가 붙어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게다가 어째서 그런 평가를 받는지를 스스로 증명했다는 사실이 마틴은 가장 우습게 느껴졌다.
문득, 마틴은 윌리암이 훗날 자신에 대해 말하는 상상을 했다. 그래, 재단의 영웅이 여기서 일했네. 나는 그 애가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 친절하고 상냥한데다 강단이 있는 아이였다.
실없는 생각이었다. 마틴은 고개를 흔들어 그런 생각을 떨쳐냈다. 실제로 그가 재단에 들어가길 성공한다고 해도, 결코 ‘영웅’ 같은 것은 될 수 없다. 재단은 능력자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그건 마틴이 재단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데도 그런 상상 통해 기분이 나아지는 걸 느끼며, 마틴은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저기, 앤소니 워튼의 작품집은 어디 있나요?”
생각에 잠긴 채 기계적으로 책을 정리하고 있던 마틴에게 어느 여성 손님이 말을 걸어왔다. 아직 책들이 놓인 곳을 다 외우지 못했지만 그 작가의 이름이라면 다행히 기억이 있었다.
“미국 출신 작가의 책이라면 이쪽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마틴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 서가로 그녀를 안내한 마틴은 약간의 편법을 통해 그녀가 찾는 정확한 서적의 이름을 알아냈고, 재빨리 그것을 빽빽한 책들 사이에서 찾아 손으로 짚어냈다.
“감사합니다, 또 들려주세요.”
매력적인 독심술사 청년은 계산을 마친 그녀가 약간 들뜬 마음으로 가게를 떠나는 것을 느꼈다. 조금 과한 건 아니었나 싶었던 친절은 결과적으로 좋은 작용을 남긴 것 같았다. 자신에 의해 타인의 마음이 밝아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그건 마틴이 그의 능력에 보람을 느끼는 몇 안 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사람을 대하는 일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설령 능력을 쓰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보통 어떤 표정과 말을 원하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까지 그는 타인을 조종하지 않고도 잘 해내고 있었다. 마틴은 한편으로 위안을 느끼면서도, 과연 재단이 이런 그를 인정해줄까 하는 생각이 들자 다시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 저녁 티엔을 맞이한 마틴은 그날 서점에서 들었던 연합의 영웅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일을 하며 그에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늘어나는 것은 뿌듯하다. 세상 물정에 어둡다고 할까, 별 관심조차 없는 그에게 마틴은 알려주고 싶은 것이 많았다. 마틴의 일방적인 말을 들을 때 그는 대부분 다른 일을 병행하고 있었는데, 이후의 대화 도중 자신이 했던 이야기를 꺼내는 그를 보면 마틴은 마치 그를 가르치는 선생이 된 것 같은 보람을 느꼈다.
“그 사람처럼 능력이 단기간에 성장한 건 대단한 일이에요. 저도 이 능력을 제대로 쓰는 데에 몇 년이 걸렸는데.”
티엔에게 말을 건네던 마틴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떠올리며 약간 억울한 기분조차 들었다. 능력의 존재 자체를 불공평한 일이라고 한다면 마틴의 능력은 그 중에서도 꽤나 시기를 받을 만 하지만, 제대로 쓰지 못하던 시절에 이 능력은 없느니만 못했다.
마틴의 좋지 않은 기억이 연관되며 티엔이 말을 꺼내기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이자, 마틴은 곧 화제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직전의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며 떠올렸던 다른 일이었다.
“티엔, 당신은 좋아하는 게 뭐예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티엔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보통은 좋아하는 음식이나 계절, 색깔 같이 좀 더 확실한 질문을 할 테니까. 어쨌거나, 그는 일단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을 대답으로 삼았다.
“……잘 개인 이불?”
“저기, 그거 지금 저한테 뭐라고 하는 거죠?”
마틴이 나름대로 정리를 해둔 이부자리를 처음부터 다시 건드릴 때부터 눈치는 챘지만, 그는 자신의 성에 차지 않는 마틴의 정돈 습관을 꽤나 마음에 담아둔 모양이었다. 물론 그런 건 마틴이 원하는 종류의 대답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불은 더 노력해볼게요. 그보다는 좋아한다고 할까, 저한테 바라는 거요. 제가 당신한테 해줬으면 하는 거. 당신은 저한테 부탁 같은 걸 안 하잖아요.”
티엔은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마틴이 먼저 말을 꺼내는 게 아니면 일을 맡기지 않았고, 마틴에게 무언가를 하라는 말들도 부탁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챙기라는 잔소리에 가까웠다.
“제가 무슨, 당신이 돌봐줘야 하는 애 같은 것도 아니고.”
“글쎄……. 그럴 만한 일이 없었을 뿐이다.”
“정말요? 그럼 바라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렇게 말해도, 티엔은 자신이 이 청년에게 부탁할만한 마땅한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다른 사람에게 맡길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마틴만이 할 수 있어서 그에게 청해야만 할 일이 지금껏 무엇이 있었단 말인가.
“예를 들어서 말이죠……. 티엔, 제가 안아주는 거 좋아하죠?”
티엔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그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나오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들킨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마틴은 조금 웃음이 났다. 가끔 간지러운 말을 스스럼없이 꺼내긴 해도, 몸으로 표현하는 데엔 서툰 사람이었다.
마틴이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엔 굳이 그의 마음을 읽을 필요조차 없었다. 좋고 싫다는 내색은 적은 편이지만 티엔을 껴안을 때면 표정이 훨씬 부드러워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잠시 굳었다가도 몸의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지기 때문에, 불시의 가벼운 포옹은 마틴에게도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그런 걸 좋아하는 건 네 쪽인 줄 알았다만.”
“그래서 당신은 싫어요?”
그의 머릿속에 있는 대답은 물론 명백했지만, 차마 그게 입으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 간단한 대답은 마틴도 그 자신도 알고 있는 결론이었음에도.
“그게 아니라면 뭐…… 어쩔 수 없죠. 앞으로 얘기 안 하면 제가 먼저 안 할 거예요.”
동양인은 맹랑한 영국 청년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티엔은 그의 포옹이 싫지 않았지만─ 그러니까, 꽤 좋아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굳이 그에게 부탁을 해야 할 거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티엔의 잘못도 있지만 이런 식의 접근은 그로서 꽤 당황스러웠다.
“그게 싫으면 당신이 먼저 안아주면 되죠. 아니면 부끄러워서 그래요? 이걸 어쩌나. 티엔씨가 수줍음쟁이라 정말 안 됐네요─.”
빙글대며 웃는 양을 보면, 마틴은 그를 놀리고 있는 게 확실했다. 사실 지금 한 번이라면 그는 상관하지 않겠지만, 그냥 넘어갔다간 마틴은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았다. 차마 포옹이 있을 때마다 그걸 받아줄 자신이 없는 티엔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에 앉아있던 마틴에게 다가갔다.
“일어서봐라.”
“어……. 뭘 하려고요?”
“네 쪽에서 원하지 않았나.”
예상치 못했던 그의 태도에 미심쩍은 얼굴로 몸을 일으킨 마틴을, 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안아 올렸다. 갑작스럽게 변한 눈높이에 놀란 마틴은 그에게 거의 매달리듯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허리를 펴면 머리가 천장에 닿을 지경이었다.
“이러면 됐겠지?”
“아, 뭐예요!”
질겁한 마틴을 티엔은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올려다본다. 마틴은 전부터 그의 체격이 좋다고는 생각했지만, 키 차이도 크지 않은 자신을 가볍게 들어 올리는 모습은 꽤 놀라웠다. 전에 잠들어 있던 그를 알아채지도 못한 사이 옮겨놨던 걸 생각하면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얼른 내려줘요? 저기요?”
“대답은?”
놓아달라며 버둥거려도 듣지를 않는 탓에, 마틴은 결국 그를 어깨를 다시 붙잡고 말았다. 자신도 짓궂긴 했지만, 그가 이런 심술을 부릴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마틴은 진심으로 당황하는 한편 티엔에 대한 생각을 여러모로 수정해야 했다.
“으아…… 됐어요, 부끄러워하는 거 아니네요! 제가 틀렸네요, 네!”
웃음이 섞였다는 게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대답을 들은 티엔은 그를 적당히 높이가 맞는 부엌의 작업대 위에 올라 앉혔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틴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마틴은 즐겁게 웃고 있었다.
“진짜, 이 말은 진짜 안 하려고 했는데.”
참아보려 해도 웃음이 새어나온다. 겨우 고개를 든 마틴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티엔, 당신 너무 귀여워요.”
“……하?”
그는 키득거리는 마틴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건 그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에도 들어본 적이 드문 형용사였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 그런 말이 튀어나오는 건 그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잖아요, 그 얼굴을 하고서 이러는 건 진짜……”
대체 어느 부분을 말하는지 난감하다. 티엔은 여전히 이 청년을 이해하기에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너야말로 무슨 개나 고양이 같군.”
그는 자신을 붙잡고 부비적거리는, 다 큰 청년의 모습을 보며 평했다.
“아, 그 얘기는 가끔 들어요.”
“대단한 자랑이구나.”
티엔은 어이없다는 눈빛을 하고서도 그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마틴을 보고 있자면 그는 언젠가 길가에서 보았던 잘 구운 파이 색의 복실거리는 고양이가 떠올랐다. 사람에게 특히나 살가워 지나가는 사람의 발치에 몸을 비비던 모습까지도.
“당신은 뭘 닮았다는 말 들어본 적 없어요?”
마틴의 물음에 티엔에게는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얼굴에 띄운 것은 예의 그 난감한 표정이었다.
“뭐예요, 무슨 말을 들었길래 그래요?”
그냥 두었다간 온갖 상상을 할 생각을 하니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티엔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이전에 들었던 평가를 털어놓았다.
“……동물 같은 건 아니다만……. ……목석 같다거나.”
마틴은 전보다 더 심하게 웃어버렸다. 티엔은 물론 착잡한 표정이었다.
“아, 정말…… 그러니까…… 나쁜 뜻은 아니었을 거예요…… 당신이 워낙…… 네……. 아, 혹시 그거, 여성분께 들은 말이에요……?”
티엔은 역시나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마틴은 다시 웃어버렸으나,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마틴은 더욱 확실히, 그의 이런 모습을 본 첫 번째 사람일 테니까.
“휴……. 당신 진짜 귀엽다니까요. 진심이에요.”
“‘부탁’할 테니 그 말은 그만둬라, 마틴.”
그 듣기 어려운 티엔의 부탁마저 나왔다. 마틴은 그런 생각만을 하기로 했지만, 계속해서 웃음이 나오는 것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
또다시 티엔을 배웅하고 조금 늦은 시간 서점으로 향하던 길, 마틴이 가판대에서 집어든 신문에는 어느 능력자의 범죄가 크게 실려 있었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읽어 내린 내용은, 대담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결국 붙잡히고 말았다는 흔한 이야기다. 잡히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걸까. 아무리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능력을 사용한 범죄가 있는 이상 그걸 막기 위한 억제력 또한 만만치는 않다. 어설프게 저지르는 범죄는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분기점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 비율로 볼 때, 능력자는 범죄자가 될 확률이 비능력자보다 월등히 높았다. 마틴의 부모님이 그랬듯 평범한 삶을 사는 능력자도 적지 않지만, 차별받거나 소외당한, 그리고 그럴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능력자들은 범법의 길로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 들어 더 많은 능력자 범죄가 들려오는 것은 아마 경기가 나빠진 여파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은 능력자를 향한 시선을 거칠게 만들어 더 많은 차별과 소외의 시선을 만들어냈다.
이런 사건에서 가해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건 무의미하지만─ 마틴은 어쩌면 자신도 이들 중 하나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입맛이 썼다. 사실, 마틴은 자신이 능력의 남용에 대해 의견을 표시할 자격을 오래 전에 잃어버렸다고 느낀다.
어쩌면 마틴은 자신의 능력을 훌륭한 일에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과연 어떤 형태로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오랜 시간 고민해 왔음에도 아직도 떠올리지 못했다.
‘멋지다, 형사나 탐정을 하면 되겠네!’
어릴 적, 마틴이 능력을 막 발현했을 때 종종 듣고는 하던, 일종의 위로의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여러 사건을 거치고서 정부는 정신계열 능력자들을 끔찍이 싫어한다. 사설탐정이라면 그나마 가능성이 있겠지만, 과연 그의 능력이 알려졌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대체 어떤 의뢰를 해올 것인가.
능력을 가진 범죄자들이 그렇듯, 마틴에게는 옳지 못한 일을 저지를 충분한 힘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그는 자신이 능력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곳에 속하기를 바랐다. 애초에 능력이 통하지 않는 티엔의 곁은 편안하지만, 그것만으로 마틴은 자신에게 안심할 수 없었다.
마틴은 먼저 서면으로 재단에게 지원의사를 밝힐 생각이었지만, 아직까지 무엇을 어떻게 쓰면 좋을지 결정하지 못했다. 자신의 능력 탓에 이렇게까지 주눅이 들게 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능력에 대해 밝힐 필요조차 없었기 때문에.
‥‥
“일이 길어지는 날이었으면 어쩌려고 했나.”
“좀 기다리면 되죠. 요즘은 안 그랬잖아요?”
서점이 쉬는 날, 마틴은 티엔이 일하는 곳까지 마중을 나왔다. 티엔의 동료인 누군가가 금발 청년과 마주 선 그를 의아한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아는 사람은커녕 친족의 얘기도 없던, 더 정확히는 사생활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던 사람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
마틴의 대책 없는 발언에 티엔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까딱해서 그를 오래 세워둬야 했다면 영문도 모른 채 마음이 불편해져야 하는 건 티엔 쪽이었다.
“미안해요, 다음부터는 미리 말하고 올게요. 그럼 되죠?”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티엔은 결국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차가워져 있는 마틴의 손을 잡았다.
봄이 다가오지만 아직은 조금 싸늘한 날씨다. 첫 만남 때의 영향인지 티엔은 마틴이 찬 공기를 오래 쐬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마틴의 손이 쉽게 차가워진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로 그는 그런 낌새가 있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마틴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마틴은 거의 유일하게 그가 먼저 살을 맞대는 그 순간 느껴지는 온도의 차이가 좋았다.
“뭐가 그리 좋다고.”
그가 보기에는 까닭 없이 웃고 있는 마틴의 모습에 티엔이 이유를 물었다.
“그냥, 이렇게 걸으니까 기분이 좋잖아요.”
“실없기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고쳐 쥐는 그의 감각이 마음에 들어 마틴은 다시 웃었다. 내려다보지 않아도 그게 검은 쪽의 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독특한 색을 지닌 그의 손은 분명 빛깔을 제외하곤 남들과 다를 것이 없지만, 왠지 모르게 그 손에 닿을 때면 유독 신기한 느낌이 들곤 했다.
손을 잡고 함께 한적한 거리를 걸으며, 마틴은 얼핏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있었던 일들.
“그때, 당신이 말이죠. 마음이 들리지 않더라도 달라질 건 없을 거라고 했잖아요.”
티엔의 방향을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마틴은 그가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저한텐 정말 많은 게 달라요. 그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 누구에게도 상냥해질 수 있는 그 능력은 여러 형태로 마틴의 인간관계를 비틀어 놓았다.
간혹 마틴은 마음의 상처를 가진 이들에게 동정심을 품었다. 그리고 그들이 먼저 원치 않더라도 다가가 그들에게 부족한 것을,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아내 그것들을 채워주기도 했다. 그러나 동정심은 지속되는 애정과는 다른 문제였으므로, 마틴은 자신에게 의존하는 상대를 더 이상 감내하지 않기로 하거나, 책임을 다했다고 여긴 후에는 그 이상 그들에게 남아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들이 마틴을 좋아할 때도, 자괴감에 빠져 혐오를 나타낼 때도, 소유욕을 드러낼 때도, 부담감에 밀어내려 할 때도, 마틴은 그저 그 옆에서 미소 지었다. 때로는 그들의 감정을 부추길 때도 있었다.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마인드리더는 그들 사이에서 우월을 느끼고 있었다.
“티엔, 스스로가 불쌍하다고 생각해요?”
금발의 청년이, 자신이 읽을 수 없는 유일한 이에게 물었다.
“아니. 그렇게 보이는 건가.”
아마 티엔은 일생동안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꼭 그렇게 보이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니까요.”
티엔은 반문의 눈빛으로 마틴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물음에는 스스로의 대답도 꺼내는 것이 그들의 관례였기에, 마틴은 선선히 그의 질문에 응했다.
“저야, 조금은요. 꼭 이런 능력일 필요는 없었잖아요.”
어머니처럼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는 능력이나, 아버지처럼 없는 듯 가장하고 살 수 있는 능력이라면 좋았을 것을. 사실 그의 능력도 쓰기에 따라 양쪽의 가능성은 모두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어린 마틴은 능력을 그만큼 능숙하게 능력을 통제할 수 없었다.
“당신은 능력이 싫지 않았어요? 그건 불안정하다면서요. 잘못하면 다칠 수도 있다고.”
마틴이 그의 능력에 자세히 대해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가 남는 시간을 쪼개 하던 명상은, 사실 능력을 통제하기 위한 과정 중 하나였다는 것이라거나.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다. 그저,”
티엔은 마틴과 잡지 않은 쪽의 손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이걸 보며 내가 아버지와 닮았다 말했기에. 그분이 능력을 통제할 수 있었다면 나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런가요.”
당신은 강한 사람이네요. 마틴은 그런 생각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차마 말로 꺼내지는 못했다.
마틴은 그가 강한 사람이라는 것이 좋았고, 자신에게 그를 불쌍히 여길 자격이 없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가 행복하길 바라는 것은, 마틴이 그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티엔.”
마틴은 그를 멈춰 세우고, 그 흑옥 같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와 가볍게 입술을 맞댔다.
“그냥, 당신이 좋다고요.”
말이 없는 그에게, 마틴은 그렇게 전한 뒤 그의 손을 이끌고 귀갓길을 서둘렀다.
‥‥
마틴이 눈을 떴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 조금 일찍 눈을 붙였는데 그 탓인 것 같았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지금은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그는 여러 생각을 하며 몸을 뒤척였다. 고른 숨소리. 타인의 온기. 마틴은 등을 돌린 채 잠들어있는 티엔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곤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요.”
대답은 있을 리가 없었고, 마틴은 그런 자신이 머쓱해져 등을 돌렸다. 이럴 때만 말할 수 있다는 건 비겁하지만, 과연 이런 말을 한다고 그는 진지하게 받아들여 줄까.
가까이에서, 더 많은 걸 알아가면서 그를 생각하는 마음은 커지고 있지만 마틴은 자신들이 서로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다. 티엔은 전의 일에 대한 언급조차 없었다. 전에도 그랬다고는 하지만, 그건 포옹과는 조금 다를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게나 반응이 미지근한 그에게, 마틴은 먼저 다가가는 것이 망설여지고 있었다.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생각에 빠져있던 마틴에게 말을 건 사람은 근처에 살며 가정교사를 하고 있다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마틴이 일하는 서점에 자주 들렸고, 지금은 간혹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친근해져 있다. 그 친밀함이라는 것은, 때로 흑발의 얌전한 아가씨로 포장된 티엔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정도였다.
“이런, 아리따운 숙녀분을 눈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해버렸네요.”
마틴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그녀는 기분 좋게 웃으며 대꾸했다.
“이러는 걸 애인이 알면 어쩌려고 그래요?”
“글쎄요, 그녀가 그럴지는 잘 모르겠네요.”
청년이 한숨처럼 느껴지는 말을 내뱉자, 그녀는 마틴의 고민이 애인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왜요, 여전히 진전이 없는 거예요?”
“아무래도 그렇네요. 이제는 제게 마음이 없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예요.”
애를 닳는 마틴을 지켜보고 있는 여성은, 대체 이런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혹시 모르죠. 수줍어서 표현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어요. 그분은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투르다고 했잖아요?”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아이들도 그렇잖아요. 뭔가를 표현하는 말을 배우고 나서야 그것들을 써서 말하니까요.”
아이에 대한 비유. 마틴은 그 말이 티엔에게 꽤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분명 잘 될 거예요, 챌피씨. 혹시 주제넘은 말이었다면 미안해요.”
“아뇨, 고마워요. 꼭 그녀에게 이야기해볼게요.”
아무리 고민을 해봤자 결국 해결을 위해서는 부딪쳐 볼 수밖에 없었다. 설령 티엔의 대답이 부정이더라도, 마틴은 그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다.
‥‥
“티엔, 절 좋아해요?”
평소와 같이 귀가한 이를 맞이한 마틴은, 그를 앉혀두고, 다른 일을 하지 못하게 막으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날 저녁 보았던 것과 같이 새카만 두 눈은, 이번에는 의문이 아닌 감정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라……”
“널 사랑하느냐는 말이겠지.”
티엔은 마틴이 미처 꺼내지도 못한 말을 입에 담았다. 그는 어딘가 체념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전에 하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했던 게 언제였는지는 마틴도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티엔은 깨어있지 않았다. 적어도 청년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아니…… 저기…… 그걸 듣고만 있던 거예요?”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원망이 서린 말에 티엔은 정말로 그다운 대답으로 응수했다.
“……그랬죠. 그건 맞아요. 정말이지……. 그래서 당신은 어떤데요? ……절 사랑해요?”
“그래서, 그렇다고 한다면. 뭐가 달라지고, 뭘 해야 한다는 거지?”
거의 화를 내는 듯한 그의 태도에, 마틴은 당황했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러면 저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겠죠. 티엔, 대체 그 외에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데요?”
“……아무것도. 나는 네가 무얼 바라는지 모른다.”
이해할 수 없었던 그의 방어적인 태도가 드디어 윤곽을 보였다. 정말로. 그는 어린아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게 부담스럽기라도 했던 거예요? 제가…… 거창한 걸 바라는 게 아니에요. 당장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라고요.”
티엔은 대답이 없었다. 마틴이 이해한 바로, 티엔은 그들의 사이가 이전과는 또 다르게 변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미 같은 집을 쓰고, 손을 잡고, 서로를 안아주고 있으면서도.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해줘요. 티엔, 절 사랑해요?”
“……. 아마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의 대답에 마틴은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비록 그들의 생각은 어긋나 있었지만, 감정까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이렇게 해요. 제가 당신한테 바라는 걸 말할 테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까지만 따라주는 거예요. 그런 건 괜찮죠?”
티엔의 눈빛에는 여전히 확신이 없었지만, 그는 마틴의 제안을 승낙했다.
“자, 잘 들어봐요.”
사뭇 진지하게 말을 꺼내며, 마틴은 서점에서 들었던 조언처럼 자신이 어린아이를 가르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제가 안을 땐 같이 안아줘요. 그건 익숙해진 것 같지만……. 가끔은 안 그러잖아요.”
“알겠다.”
“음, 그리고……”
첫 ‘가르침’은 티엔도 전부터 들었던 말이었고, 그도 어느 정도는 실천하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마틴이 말을 멈추고 다가가 그의 눈을 가리자, 티엔은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그리고, 입술에 닿는 낯익은 감촉.
“이럴 땐 눈을 감아주고요.”
손이 떨어진 후, 그의 앞에는 배시시 웃는 얼굴이 있었다. 전에 입을 맞췄을 때 티엔이 눈을 그대로 뜬 채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것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 능청스러운 모습에, 티엔은 그의 안에서 심술이라고 분류될 마음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는 반대 방향에서 시작된 갑작스런 입맞춤에, 티엔이 입을 떼고 제대로 시선을 마주칠 때까지 마틴은 놀라움에 눈을 크게 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태연하게 눈썹을 치켜 올리는 티엔을 본 마틴은, 이럴 거라면 대체 왜 자신이 지금까지 속을 썩여야 했는지 억울할 지경이었다. 뒤이어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어쩌면 이건 좋은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도 분명,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뭐……. 미안하게 됐네요. 그러면 이것도 맞춰 볼래요?”
마틴은 이번에 굳이 그의 눈을 가리지 않았고, 양팔로 티엔의 목을 껴안은 채로 다시 그와 입을 맞췄다. 하지만 이번의 행위는 전과 달랐다. 티엔은 자신의 입 안으로 침입하는 타인의 혀, 타액. 체온을 고스란히 느꼈다. 가장 먼저 그의 뇌리를 스친 것은 생리적인 거부감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인지를 상기하자 그런 느낌은 곧 가라앉았고, 그 뒤로는 겁내지 말라는 듯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티엔은 긴장을 풀고자 노력하며 금발 청년을 마주 안고 눈을 감았다. 처음으로 느끼는, 타인의 혀가 얽히는 감각이 생소했다. 그는 그 덩어리가 마치 살아있는 생물 같다고 느꼈는데─ 물론 완전히 틀리지는 않지만, 마틴이 그 생각을 알았다면 낭만이 없다며 그를 힐난했을 것이다. 자신의 입술을 부드럽게 훑는 느낌이며, 혀끝에 닿는 타인의 치아, 그런 것들을 통해 티엔은 그 어느 때보다 마틴을 가깝게 느꼈다.
짧지 않은 시간 뒤에 입술이 떨어지고 나자,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는 시선은 전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처음이죠?”
마틴은 아직도 얼떨떨해 보이는 티엔의 얼굴을 마주보곤 키득거렸다. 정확히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도 처음에 여기까지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사람이 이렇게 뻣뻣해서……. 미안해요. 놀라게 한 것 같은데……”
“……다음엔 노력하마.”
다음. 티엔이 입에 담은 말에 마틴의 가슴이 입을 맞추던 순간보다도 더 세게 뛰었다.
“어……. 그거 잘 됐네요……. 저는 이제 저녁 준비할게요. 이번엔 제 차례니까. 미안해요, 오래 붙잡아둬서.”
마틴이 다소 부산스럽게 자리를 떠나고, 티엔은 축축해진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아직도 남아있는 낯선 감각을 그는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돌아서며 무의식적으로 만져본 얼굴은 생각보다 훨씬 더 화끈거려, 마틴은 자기도 모르게 뺨을 두드렸다. 어쩌면 잠시 미쳐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런 자신의 행동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을 때, 티엔은 이미 그 자리를 떠나 있었다.
ⅲ- 이루고 싶은 것
조용한 가운데, 한 직원이 연신 기침을 한다. 잔기침 외에는 아픈 곳은 없다는 것 같지만 계속 저렇게 콜록이고 있으니 그의 목도 그리 편치는 않을 것이다. 들어가 쉬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몇몇의 만류는 결국 밀려있는 서류 처리에 이길 수 없었고 적어도 이날 그 소리는 퇴근 때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가까운 곳에서 이어지는 기침소리를 듣고 있던 티엔은 문득 그것이 자신의 모습일 때를 상상해 보았다. 이곳에서는 아마 똑같은 만류와 고집을 볼 수 있었을 테고, 그런 것보다도 그의 곁에 마틴이 있다면─ 그 살가운 아이는 아마 따듯한 차를 한 잔 타오고, 감기에 좋은 먹을거리에 대해 재잘대거나 그와 관련되어 떠오른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려주지 않았을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까지 그들에게 그럴 만한 일은 아직 없었다. 게다가 둘 중 몸이 아플 가능성이 높은 쪽은 마틴 쪽이었는데,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마틴이 앓아눕지 않았던 것이 천운일 따름이다.
티엔의 생각이 다시 사무실 한구석의 자신에게로 돌아오자 예의 그 기침소리가 다시 그의 귓가를 간질였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그 소리는 그의 신경을 조금 거스르는 것이 사실이지만, 평소대로였다면 티엔은 무탈하게 자신의 일에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틴의 생각을 하며 그에게 떠오른 어떤 발상은 좀처럼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그런 생각에 의문을 품는 그의 뇌리를 맴돌며 그 실천을 부추겼다. 정말 끈질긴 바람이었다. 결국, 티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평소 그가 갈 일은 좀처럼 없던 직원 휴게실을 향했다.
기침을 하던 이가 인기척에 고개를 올려다보았을 때, 그곳에는 김이 나는 머그잔을 건네는 티엔이 있었다.
“고맙습니다.”
이 딱딱한 동양인과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나눠보지 못했던 그는 얼떨떨한 얼굴로 티엔의 호의를 받아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잠깐 동안 그것이 시끄러우니 입을 다물라는 완곡한 표현인가, 하는 의혹이 스쳤지만, 그런 생각을 모르는 티엔은 뻔한 걱정의 말도 없이 음료만을 건네고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티엔이 그런 행동은, 단지 그럴만한 상황이 눈에 띄었기 때문에 그에 마땅한 일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에 전에 없던 행동이 되곤 하는 이유는, 그가 전에는 보지 못했던, 혹은 보려 하지 않았던 것들을 자각하고 있는 탓이다. 묘한 기분이었다. 애초에 그가 어째서 타인과 관여되기를 피하고 있었는지를 떠올리면 복잡한 기분이 들면서도 그는 마틴을 떠올리며 이 편이 ‘옳다’고 느꼈다.
자신의 수많은 변화가 과연 좋은 일인가에 대해서는 긴긴 고민이 필요했지만, 마틴이라는 존재는 티엔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반대로 마틴에게도 티엔에 의해 많은 변화가 있었다. 티엔의 직장에서의 태도가 변하고 있는 것도, 마틴이 자신의 가족과 화해를 했던 것도. 그건 모두 서로에게 영향을 받은 탓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작 지금 이 시각 그 둘의 사이는 그리 순탄치 않은 상태였다.
여러 일이 있고서 그들의 관계는 꽤 많은 발전이 있었다. 서로의 감정에 대해 확인했던 그날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약간 어색한 기운이 감돌기도 했지만 마틴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말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던 티엔은 그게 어떤 거창한 변화를 요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사실 그들은 이미 굉장히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니까. 조금 다른 말로써 감정을 나타내고, 약간 더 특별한 표현을 한다는 것. 그걸 받아들인 이후, 빈도는 낮지만 그는 가끔 마틴이 놀랄 정도로 자신의 애정을 표현했다.
그렇게 가까워진 그들의 사이는 순조로워 보였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고, 상대에게 배려의 마음을 가졌으며, 서로와 함께하는 생활을 기꺼이 여겼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온전히 두 사람간의 문제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마틴은 자신의 꿈을 이루는 데에 여러 문제를 겪었다. 그는 그랑플람 재단의 후원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마틴이 고심 끝에 보냈던 편지들에는 부정적인 내용의 답신만이 돌아왔다. 그리고 거듭된 간청에도 불구하고 마틴은 재단의 인물과 대면하는 것조차 거절당했다.
그는 정말로 많은 노력을 해왔지만, 거절의 이유는 언제나 마틴의 능력인 마인드리딩과 컨트롤이 재단에 위협적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건 마틴의 노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어릴 적 영문도 모른 채 괴로워해야 했던 과정의 재현과도 같았다. 예상치 못한 바가 아니었음에도 마틴은 그 일로 큰 충격을 받아야 했다.
그때까지 마틴은 티엔에게 그런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있었다. 좋은 소식이라고는 무엇 하나 없었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탓이었다. 그러나 낙담한 자신을 완전히 추스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때, 그는 티엔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털어놓았다. 그때 이미 마틴은 상당한 우울을 겪고 있었다.
인간관계에 관한 대부분의 일에 그가 그래왔듯, 티엔은 타인을 위로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했다. 잘 될 거라는 말을 하기에는 마틴의 상황이 결코 낙관적이지 못했고, 힘내라는 말을 꺼내기에는 그가 무엇을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 티엔 자신도 의문이었다. 그리고 괜찮다고 하기에는, 마틴 본인의 낙담이 너무 커보였다. 그건 단지 지원을 거절당한 것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에 대한 회의감까지 겹친 탓이었다. 마틴은 그제야 자신이 능력을 쓰는 것을 자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함께 알렸는데, 언제나 손쉽게 해결할 수 있던 상황을 멀리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그에게는 큰 스트레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티엔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이전에 자신이 위로받았던 기억을 되살리며 마틴을 도닥여보기도 하고, 최대한 말을 고르며 그를 위로했다. 실제로 마틴은 그의 행동에 큰 위안을 받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둘은 결국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타인의 위로를 필요로 해본 적이 거의 없던 티엔은, 몇 번의 시도 끝에 자신의 위로가 무력하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마틴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고자 했지만, 그건 결코 마틴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낙심한 마인드리더에게는 사랑하는 이의 위로가 정말로 절실했다.
마틴이 그의 의도를 곡해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이 서툰 사람이 자신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았고, 차마 그 이상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이 마틴의 감정이 나아지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날 마틴은 아주 늦게, 티엔의 기억하는 바로 정확히는 새벽 3시 28분에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건 일종의 충동적인 일탈이었고, 오래도록 거리를 걸었던 그의 다리는 부어올라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 탓에 티엔은 늦은 시간까지 잠들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몇 번이나 마틴의 동선을 따라 밤중의 거리를 헤매며 그의 흔적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마틴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티엔은 예전의 일을 떠올리며 안도했지만, 이번에는 그때와 상황이 전혀 달랐다.
티엔은 그에게 무심했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더라도 무책임한 그의 태도를 용납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마틴의 입장에서는, 그런 일탈조차 없었다면 터져버리고 말았을 자신에게 화를 내는 티엔을 마주하며 더욱 우울함에 빠지고 말았다.
그날 일에 대해 형식적인 화해는 있었지만, 둘 중 누구도 다른 한 발을 내딛으려 하지는 않아 서먹한 사이가 지속되고 있었다. 마틴은 전혀 나아지지 않는 자신의 상황에 그와 다시 가까워지는 걸 망설이고 있었고, 티엔은 마틴을 이해하려 노력하면서도 부당한 그의 태도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마틴은 사실, 티엔에게 밝힌 것보다 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와 연락을 유지하고 있는 그의 가족들은 그가 후원자가 되는 것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마틴이 능력을 잊고 살 수 있는 삶을 원하고 있었다.
“우리는 네가 좀 더…… 평범하게 살았으면 한다. 넌 우리가 너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지 않니.”
타인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이 자신의 뜻을 굽혀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음에도. 마틴은 처음으로 가진 제대로 된 목표를 꺾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마틴이 그런 목표를 가진 이유 중에는, 가족들에게 떳떳하고 싶다는 점도 적지 않게 섞여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꿈이 정작 그들에게 부정당하는 건, 그리고 의지하고자 했던 혈연에게 배신감을 느낀다는 건 정말이지 괴로운 일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마틴의 가장 큰 위안은 티엔의 존재였으나,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지속되며 날카로워진 태도는 그마저 마틴에게서 떼어놓고 말았다. 그 외에 단 한 가지 위로가 되는 일은 이름조차 모르는 재단의 후원자에게서 받은 익명의 편지 정도일까. 그리 낙관적이지 못한 답신들 사이에 끼어있던, 짧은 격려의 말을 담은 편지. 그걸 받아본 마틴은 의아해 하면서도, 그 개인적인 호의에 고마움을 느꼈다. 물론 재단의 입장도 그 편지와 같다면 좋겠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마틴은 거의 체념하고 있었고, 지금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반쯤 오기였다. 그는 지금의 행동에 정말 의미가 있는지를 고민했다. 소중한 사람들과의 사이마저 틀어져 가면서, 정말 이런 식으로 괴로워야 하는지. 지금까지의 일들이 전부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 탓에 더욱 그랬다. ─능력이 미워지고, 자기 자신이 싫어지게 되는, 그런 날들이었다.
‥‥
이날 마틴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확실한 예고가 있었고, 그렇기에 그 말이 번복될 기대도 적었지만 막상 사실을 마주하게 되니 티엔의 마음은 착잡했다. 그와 이대로의 사이가 지속되는 걸 티엔은 결코 원치 않았다.
티엔은, 만일 자신이 마틴과 비슷한 문제를 안게 된다면 그도 마틴과 비슷하게 행동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문제를 털어놓지 않다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그런 자신에게도 화가 나 상황을 악화시키거나. 지금까지 그는 운 좋게 그런 상황을 마주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는 마틴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마음을 준 상대에게 느끼는 배신감은 특히나 컸기에 그런 시도는 쉽지 않았다. 타인에게의 애정만큼이나, 그런 부정적인 감정 또한 그는 생소하게 느꼈고 또 그 감정을 더욱 크게 느껴야만 했다. 그건 결국 티엔 자신의 문제로 마틴과의 사이에 연관되어서는 안 되는 문제였다.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주변이 약간 소란스러운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고, 곧 자신을 부르는 동료의 목소리에 현실로 깨어나야만 했다.
“정, 여기 이건 조금 잘못되지 않았나?”
눈앞에 건네진 자료를 받아든 그는 말문이 막혔다. 정말 말도 안 되게 단순한 실수가, 자신의 필체로 그 위에 또렷이 적혀있었다. 게다가 시기 좋게도 그의 실수는 다른 부서에 고스란히 전달되어 몇 가지 혼선을 일으켰다는 것 같았다. 그건 그런 식으로 커질 문제가 전혀 아니었지만, 평소 티엔의 꼼꼼한 일처리를 알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그 사실에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연신 사과를 하는 그를 보는 주변 사람들의 눈길에는, 책망 외에도 무언가 신기한 것을 보는 듯한 호기심이 섞여있었지만 한껏 당황한데다 심기가 불편해져 있던 티엔 본인은 그걸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적인 일로 집중이 흐트러진 데다, 심지어 남에게 보일 실수까지 저지르고 만 자기 자신이, 그는 굉장히,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날 어느 여인숙에서 밤을 보냈던 마틴은 티엔이 집에 없을 시간이 되어서야 집을 향했다. 그에게는 아직 티엔을 마주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고 있었다.
놀랍게도, 별 기대 없이 살펴보았던 편지함에 또 다시 익명의 편지가 와있었다. 약간 들뜬 기분으로 열어본 그 편지에 담긴 말은, 전보다 좀 더 진지했다. 능력자가 능력의 종류에 의해 차별받는다면, 그건 능력자의 차별을 막고자 하는 재단의 이념과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라는 글귀. 마틴은 그에게 답신을 보내며 격려에 대한 감사와 함께 재단의 결정을 이해한다는 말을 덧붙였는데, 그 익명의 사람이 말뿐이라도 그렇게 생각해준다는 것은 굉장히 고맙게 느껴졌다. 그리고 편지에는, 가능하다면 후원자가 되기를 포기하지 말아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누군가는 마틴의 시도가 무의미하지 않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마틴은 편지의 말들을 곱씹으며, 자신에게 비슷한 말들을 해주었던 티엔을 떠올렸다. 그는 아직 화가 나있을까. 아마도, 당연히, 그럴 것이다.
“저도 이러려던 게 아니란 말이에요…….”
마틴은 한숨과도 같은 말을 내뱉었다. 티엔은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툰데, 자신도 그걸 모르지 않는데. 지금의 상황은 전부 자신의 탓이었다. 만일 지금 그에게서 위로의 말 한 마디와 몇 번의 애정표현을 받을 수만 있다면 기분이 훨씬 나아질 것 같았다. 마틴은 그에게 사과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와 얼굴을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혹여 그가 자신을 이 이상 책망한다면 마틴은 자신이 그걸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마인드리더로서 살아오며, 마틴은 지금까지는 이런 복잡한 일들을 회피해 왔다. 다르게 살기로 결심한 이상 그는 앞으로도 이런 일들을 마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이렇게까지 힘들 것이라곤, 이전의 그는 미처 알지 못했었다.
‥‥
티엔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집안은 조용했지만 그의 침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발걸음을 죽이며 다가가 살펴본 그 안에는 마틴이 잠들어 있었다. 근 하루 만에 보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여러 감정이 들면서도, 티엔은 피곤해 보이는 그를 깨우고 싶지 않아 조용히 문을 닫고 방을 나섰다.
“왔어요? 티엔…….”
깜빡 잠들고 말았던 마틴이 깨어난 것은 거의 밤 10시가 가까울 무렵이었다. 굳은 각오를 하고 열었던 문 너머로 보인 티엔의 모습은 그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대로 넘어갔다간 또 서먹한 사이가 지속되고 말 것이다. 마틴은 곧장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바를 말로 전하기로 했다.
“저, 미안해요. 제멋대로 굴어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제가 너무 제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의 사과를 듣는 티엔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왜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제가 잘못을 해서요?”
망연히 대답하는 마틴에게, 티엔은 착잡하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때의 일이라면 너는 사과했었다.”
“……그래도 아직 저한테 화 나있잖아요.”
“아니……. 그런 게 아니다. 내 실수였다.”
뜻밖의 이야기에 마틴은 그에게 무어라 답하면 좋을지를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았다. 잘못했다는 걸 알면서 미처 사과하지 못했고, 또 지금까지 그 일로 마음이 불편했노라고. 마틴은 약간 억울한 기분을 맛보면서도, 그가 자신을 탓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뻤고 또 다시 한 번 그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용기를 가진 마틴은, 그에게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야기했다. 재단이며, 가족, 그리고 자신의 능력에 대해 괴로운 일들까지.
“부모님께선 제가 하려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세요.”
“어째서지?”
마틴이 하려는 일들에 약간의 존경심 비슷한 것마저 가지고 있던 티엔은 그의 부모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위험한 일에 휘말릴지도 모르니까요. 전에 그랬던 것처럼 전쟁이 일어난다거나……. 그런 확률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죠.”
지금까지 재단은 전쟁에 관여한 적이 없지만, 재단과 밀접한 회사가 능력자 전쟁에 주축이었던 만큼 그럴 가능성만큼은 마틴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마틴은 당연히 손을 떼고자 하겠지만, 상황이 그렇게 좋게 풀릴 거란 장담도 그는 물론 할 수 없었다.
“사실 제가 재단을 떠올린 건 부모님 덕분이었는데 말이에요. 어릴 때 자주 그랑플람에 대해서 말씀해주셨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분들은…… 능력자로서가 아니라,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온 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래서 제가 이 길을 가는 걸 좋아하지 않으시는 거죠. 지금까지 제가 해왔던 일들도 있고요.”
그러나 마틴에게 오히려, 그런 단체에 속하는 것이 자신의 능력을 잊을 수 있는 더 확실한 방법이라고 여겼다.
“……당신도 제가 이걸 포기했으면 좋겠어요?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티엔은 지금까지 마틴의 결정을 지지했지만, 그것이 과연 그의 진심인지를 마틴은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네가 힘들어지는 것이 싫다.”
그건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그의 희망이었다.
“그러니 그걸 포기하는 게 너를 더 힘들게 만든다면, 네가 계속 꿈을 좇기를 바란다. 그뿐이다.”
마틴은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모처럼 두 사람이 함께 잠자리에 들었을 때, 티엔은 마틴의 부드러운 금발을 쓰다듬고, 곧은 콧대를 더듬고는, 이어서 그의 말랑한 볼을 만지작거렸다. 마치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날 안에 전부 해결하겠다는 기세였다.
“저기, 제가 진짜 개나 고양이는 아니거든요.”
마틴이 드디어 항의의 표시를 보였을 때, 그는 역시나 금빛인 속눈썹으로 자신의 손끝을 간질이고 있었다.
“그랬다면 너보단 귀여웠을 것 같구나.”
사뭇 진지하게 말하는 그의 태도를 보아하니 그는 마틴에게 남은 앙금이 아주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런 장난으로 풀릴 정도의 감정이라면 아마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의 그런 행동은 마틴의 장난기를 함께 부추겼다.
“설마요. 그랬다간 이런 걸 못할 텐데요?”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일들이 있는 건 물론, 티엔뿐만이 아니었다.
‥‥
제대로 된 화해가 있은 후로 티엔의 기분은 훨씬 나아졌지만, 전에 있던 실수가 마음에 걸렸기에 그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한껏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는 공과 사가 섞이는 걸 끔찍이 싫어했다. 이전까지는 사적인 부분이 없다시피 했으니 그런 걸 신경 쓸 필요조차 없었지만, 그는 주변에서 사적인 이유로 일을 그르치는 모습들을 보며 그렇게 생각해왔었다.
“이봐, 정.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점심시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도 일에 몰두하고 있는 그에게, 지나치던 이가 말을 걸어왔다.
“이 정도로 무리랄 것은 없습니다.”
“뭐…… 그래, 전에는 아주 무서울 정도였지. 그래도 제대로 쉬어가면서 하라고.”
티엔은 그의 걱정에 짧은 감사의 말을 남겼지만, 예전의 그가 얼마나 더 많은 업무를 맡았는지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상대에게 의아함을 느꼈다. 사실, 얼마 전까지라면 티엔에게는 이런 짤막한 대화조차 없었을 테지만, 그런 점까지를 눈치 채기에는 그의 일상이 너무도 크게 바뀌어 있었다.
재단이 가망이 없다면 다른 단체를 알아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마틴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편지에 돌아온 답장은, 놀랍게도 드디어 마틴을 면담한 후에 그의 가입을 고려해보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칼 같은 거절을 생각하면 놀라울 일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이게 마지막 기회가 될 거라는 큰 부담감이 있었다.
소식을 받은 마틴은 가장 먼저 티엔을 떠올렸지만 전에 있던 일들을 생각하면 그에게 이 일을 말하기가 망설여졌다. 기대를 걸었다가 또 낙심해서 그를 괴롭히게 되지는 않을지. 하지만 결국 숨기는 것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 청년은 깨닫고 있었다.
“재단에서 절 보고 싶다는 연락이 왔어요.”
재단에서 보내온 편지를 보이며 긴장된 표정으로 말하는 그에게, 티엔은 어떤 말을 꺼내면 좋을지를 고민했다. 축하를 하기엔 이를 것 같고, 격려를 하기에는 그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지가 망설여졌다.
“아직 정해진 건 없으니까……. 그냥, 잘 하라고 말해주세요. 그거면 충분할 것 같아요.”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 마틴은, 티엔에게서 듣고 싶은 말을 직접 알리기로 했다.
“너는 분명 잘 해낼 거다.”
“……고마워요.”
진지한 눈빛이며, 껴안는 손길. 마틴은 자신뿐만 아니라 이 사람을 위해서라도, 이 일에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랐다.
‥‥
“손님이신가? 기운이 없어 보이는구먼.”
면담을 끝낸 마틴이 약간 멍하게 로비에 서있었을 때, 재단의 후원자인 것으로 보이는 낯선 이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꽤 나이가 있는지 그의 덥수룩한 수염이며 머리칼은 모두 하얗게 새어있었지만, 그는 마틴이 놀랄 정도의 거구인 데다 뱃사람 특유의 구릿빛 피부와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어 단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감상을 곱씹다 그가 악수를 청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한 마틴은 사과와 함께 그의 손을 맞잡았다.
“반갑습니다, 저는 마틴 챌피입니다.”
마틴의 이름을 들은 그에게는 뭔가 짚이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브루스 보이틀러일세. 이번에 후원자가 되고 싶다는 청년이 분명 자네였지.”
역시 그는 마틴에 대해 알고 있었다. 마틴은, 이곳에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게 퍼져 있는 것인지를 생각하자 조금 아찔한 기분이었다.
“오늘은 면담을 왔던 게지? 그들이 뭐라고 하던가?”
“어……. 그분들은 아직 고려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그건 마틴이 듣기에 결코 낙관적인 대답이 아니었다. 그리고 브루스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건 재단의 사람이 듣기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능력자의 권리를 지켜야 하지만, 동시에 결코 사회에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그게 재단의 방침이지. 그래서…… 잘 알 거라고 생각하지만, 재단이 마인드컨트롤러를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야.”
“알고 있어요. 저 같은 능력자들은 언제나 골칫거리였으니까요.”
체념 섞인 말에 브루스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마틴의 말은 여러 선례가 있는 탓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자네는, 평상시에 능력을 쓰고 있는 겐가?”
그 물음에 마틴은 조금 망설였지만 고개를 끄덕여 그의 물음에 긍정을 표했고, 노인에게는 어두운 기색이 비쳤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네만, 후원자가 되고 싶다면,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남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건 자네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일세.”
“……알고 있어요. 저는, 바로 그 점 때문에 후원자가 되려고 결심했습니다. 능력도, 지금은 쓰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고……, 저는 여기서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옳은 일을 하고 싶어요.”
옳은 일, 에 힘을 주어 말하는 마틴에게, 브루스는 탐탁지 않던 표정을 거두고 잘 정돈되어 있는 그의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훌륭한 마음가짐이네. 그런데 능력 탓에 재단이 자네를 거부한다면 그랑플람의 뜻과 어긋나는 일일 게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그랑플람의 뜻. 마틴은 그가 꺼낸 말이 신경 쓰였다.
“보이틀러씨, 혹시…… 제게 편지를 주셨던 분이 당신이신가요?”
브루스의 표정에 의아한 기색이 비쳤다. 그건 그가 편지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조금 다른 이유 때문이었고, 그의 표정을 알아챈 마틴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능력을 쓴 게 아니에요, 전에 받았던 편지에 같은 말이 쓰여 있어서…… 혹시 그런 게 아니었다면 죄송합니다.”
그런 마틴을 바라보던 브루스는, 의심을 걷어내고는 큰 소리로 껄껄 웃었다.
“그래, 이거 눈치가 빠른 젊은이였구먼.”
능력이 없어도. 브루스의 웃음에는 그런 만족의 의사가 섞여있었다. 거구의 노인은 마틴을 똑바로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자네가 재단의 후원자로 들어오길 바라네. 다음 회의에서도 그런 의견을 낼 생각이야.”
그런 말을 꺼내는 브루스는, 분명 재단 내에서 어느 정도의 발언권을 가진 존재인 것 같았다. 너무나 흔쾌한 그의 태도에 마틴은 그의 속내를 들여다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능력을 알아채는 티엔 같은 경우를 생각하니 그렇게 하기가 망설여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틴은 자신을 믿어준 사람의 호의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보이틀러씨, 왜 저를 도와주시려는 거죠? 제 능력이 위험하다는 건 사실이고, 저를 안지는 얼마 되지도 않으셨는데…….”
“말했듯이, 그런 식의 생각이 재단의 방침과 맞지 않기 때문이야. 그리고 나는 챌피 자네에게서 의지를 보았어. 후원자가 되기에 그보다 좋은 자질은 없지.”
“하지만 챌피, 정말로 재단에서 옳은 일을 하려는 거라면, 자네는 앞으로 능력에 의존해서는 안 돼. 그 점만은 자네가 스스로 노력해야 하는 일일세.”
“……네, 알고 있어요.”
“그래, 재단에는 자네 같은 청년이 필요하지.”
커다란 손이 마틴의 어깨를 두드렸고, 마틴은 편지를 보내오던 이 인물에게 더 큰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
“제가 드디어 해냈어요.”
“축하한다. 그동안 정말 고생했다, 마틴.”
정말 다행이라고 그의 목소리가, 그의 손길이 말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덕분이에요, 여러 가지로.”
티엔이 아니었다면 마틴은 이런 결심이나 노력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전에, 어쩌면 제대로 살아서 숨을 쉬고 있지도 못했을지 모른다.
마인드리더인 그가 후원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나중에야 이사회의 임원이었다고 알게 된 브루스의 지지가 무엇보다 컸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만나기까지의 노력이나, 그의 마음에 들 수 있었던 자신의 의지를 마틴은 뿌듯하게 여겼다.
드디어 찾아온 기쁨의 시간을, 마틴은 그동안 함께 고생해온 티엔과 함께 만끽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마틴이 가진 소식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조금 다른 얘기도 있어요.”
티엔의 품에서 떨어진 마틴이 조금 착잡하게 입을 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비보에 가까운 소식을 그는 연인에게 전했다.
“당분간은 저는 재단의 숙소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요.”
마틴의 어두운 표정에 긴장했던 티엔은 그 말에 조금은 안도했지만, 그게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조금씩 실감하게 될수록 점점 표정을 굳혔다. 이전에 마틴이 떠나있던 시간에도 그는 외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의 둘은 그때보다 훨씬 더 가까워져 있었기에. 이제 티엔이 돌아갈 곳은 다시 어둡고 조용할 것이다.
“그게…… 저도 이런 식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런 조건이 붙었거든요.”
그의 편의를 위해서, 라고는 하지만 그건 사실상의 감시 명목일지도 모른다. 브루스의 보증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임원들은 마틴을 탐탁지 않게 여겼을 게 분명했으니까.
“……그런가.”
티엔은 가라앉은 표정으로 금발 머리칼을 가만히 쓰다듬었고, 마틴은 평소와 달리 그의 아이 취급에 발끈하지 않고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걱정하는 거예요?”
걱정이 안 될 리가 없었다. 늦잠이며, 식사를 제대로 챙길지, 게다가 마틴은 능력자들 사이에서조차 기피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틴이라면 충분히, 누구와도 가까워질 수 있겠지만. 그동안 마틴이 거절당하며 낙심하던 걸 생각하면 티엔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힘들면 언제라도 말해라. 바로 마중 갈 테니.”
“당신이야말로 저 없다고 외로워 할까봐 걱정인데요……. 이 참에 친구라도 좀 만들어 보는 게 어때요?”
“……노력해보마.”
다른 때라면 흘려들었을 말이지만, 실제로 외로움에 대한 생각이 스쳤기 때문에 티엔은 마틴의 걱정을 완전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속을 모르는 마틴은 그의 뜻밖의 반응에 의아함을 보였다.
“웬 일이에요, 티엔. 철이 든 것 같아요.”
그는 대답 대신에, 잘 정돈되어 있던 마틴의 머리칼을 한껏 흐트러뜨려 버렸다.
‥‥
마틴이 떠날 때 가지고 가는 짐은 많지 않았다. 티엔의 집을 아주 떠나는 건 아니었는 데다, 마틴이 가진 짐 자체가 적은 편이었던 탓이다. 자신보다 먼저 집을 나서는 티엔을 배웅하며, 마틴은 손에 들려있던 무언가를 그에게 건넸다.
“이거, 당신이 가지고 있었으면 해요.”
마틴이 건넨 물건은 평소 그가 지니고 다니던 회중시계였다. 그건 마틴이 본가에 들렸을 때 가지고 왔던 물건으로, 티엔은 언뜻 그것이 할아버지의 유품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중요한 물건이 아니었나. 시계는 그곳에서도 쓸 일이 있을 텐데.”
“그냥 맡겨두는 거라고 생각해줘요. 혹시 가져갔다가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하잖아요.”
사실, 마틴이 굳이 그것을 맡아달라고 말한 것은 티엔이 시계를 볼 때 자신을 떠올려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럴 땐 사진이라도 주는 것이 더 일반적이겠지만, 마틴에겐 마땅한 사진이 없기도 했거니와 티엔에게는 그런 것보다 좀 더 실용적인 물건이 어울릴 것 같았다.
“가끔 전화할게요. 당분간은 안 될 것 같지만…… 주말에 시간이 나게 되면 올 수 있을 거예요.”
“정 안 된다면 내가 찾아가마.”
생각지도 못했던 그의 말에는 조금 감동해서, 마틴은 잠시간 아쉬운 마음을 잊고 즐거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그가 일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집은 다시 조용해져 있었다. 티엔은 마틴을 알기 전의 시간들을 떠올렸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른 점이 있었다. 집안 곳곳에 남아있는 마틴의 흔적 같은 것들.
생소할 정도로 넓게 느껴지는 집안을 정리하며, 티엔은 마틴이 남겨둔 것들을 하나하나 눈에 새겼다. 계절에 맞지 않는 옷가지며, 티엔은 입에 대지 않을 식재료, 마틴이 조금씩 모아둔 책이나 필기구들. 마지막으로 티엔은 마틴이 그에게 건넸던 회중시계를 꺼내보았다. 시계는 태엽이 느슨해졌는지 시간이 조금 느리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시곗줄에 걸려있는 열쇠로 조심스럽게 태엽을 감았고, 그 손끝에는 톱니바퀴가 맞물리며 돌아가는 감각이 선명했다. 하지만 그는 그 시계의 시간을 다시 맞추지는 않았다.
홀로 집에서의 시간을 보낼 때에, 그는 시간이 맞지 않는 시계를 곁에 두고 바라보곤 했다. 그렇게 어긋난 것을 굳이 바로잡지 않는 것은, 정확함을 중시하는 그로서 이례적인 일이었다. 물론 마틴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는 언제나 그래 왔었다.
마틴이 떠난 사이, 티엔의 자신의 직장생활에도 변화가 생겼음을 차차 깨닫고 있었다. 특히 그가 몇 번인가 행했던 뜻밖의 친절은 그의 동료들에게 꽤 깊은 인상을 남긴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날 티엔은 굉장히 간만의 제안을 받았다. 그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각종 사교 모임에 퇴짜를 놓았고, 그 이후로는 누구도 티엔을 붙잡지 않고 있었다.
“이봐, 정씨. 한 잔 하고 가지 않겠어?”
동료들과의 사이가 좀 더 부드러워진 건 사실이지만, 얼마 전이었다면 그는 이 이야기도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찍 귀가해봐야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는 것과, 마틴이 떠나기 전에 나눴던 대화가 그의 머리를 스쳤기에, 티엔은 고심 끝에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마틴은 자신의 방에서 멍하니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마틴에는 이런 습관이 없었지만, 전에 있던 사람이 두고 떠났다는 낡은 물건이 남아있어 그걸 시험 삼아 틀어보았던 것이 계기였다. 일과를 끝낸 뒤 홀로 들려오는 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다 보면 안정이 됐다. 지직거리는 잡음과 진행자들의 깔끔한 발음을 제외한다면, 그건 누군가의 마음을 읽을 때와 약간 비슷한 기분이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능력을 그렇게도 미워하던 마틴은 능력을 쓰지 않게 되자 자신이 이전의 감각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있을 때는 이런 기분이 들지 않았는데.
티엔이 보고 싶었다. 이상하게도 이날 그는 마틴의 전화를 받지 않았고, 지금은 약간 늦은 시간이어서 다시 연락하기가 망설여졌다. 하지만 결국 마틴은 비어있는 마음을 채울 다른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고, 그라면 설령 잠을 방해하더라도 자신을 탓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틴은 그런 자신의 뻔뻔함에 감탄하며 익숙한 번호로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음이 조금 길게 이어진 끝에,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하던 마틴은 드디어 수화기 건너편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여보세요? 늦게 미안해요……. 자고 있었어요?”
“……마틴.”
마틴의 말에 응하여 반가운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정말로 자고 있었는지 조금 잠겨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티엔에게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던 느낌이 전해져 왔다.
“사랑한다.”
‥‥
티엔이 눈을 떴을 때, 그는 몸 상태가 이렇게 안 좋기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가장 최근으로는 아마, 일 년도 더 전에 병으로 앓아누웠을 때 정도일까. 못할 짓을 했다며 그의 속이며 머리가 격렬한 항의를 보내오는 탓에, 그는 이례적으로 침대 위에서 그대로 다시 잠을 청했다. 금욕적인 생활을 해오던 사람에게 어제의 일은 조금 과한 일탈이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그는 개수대 안에서 금이 간 물잔을 발견했다.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나마 다른 섬세한 물건에 손을 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그가 기억하는 건 약간 어색하면서도 들뜬 분위기. 동료들은 한 번도 이런 자리에 온 적이 없었던 그가 신기했던지 짓궂다 싶을 정도로 그의 잔을 채웠다. 술의 맛은 티엔의 마음에 썩 들지 않아서, 그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람들이 이런 걸 들이키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기억을 더듬던 티엔은 두통에 눈을 가려버렸다. 그는 지금껏 술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던 게 잘한 짓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취기로 과하게 들뜨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다는 점일까. 손발에 기이한 감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즈음, 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귀가의 뜻을 밝혔다. 그가 썩 즐거워 보이진 않았기 때문인지 동료들은 떠나는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티엔은 자신이 꽤 멀쩡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외에도, 티엔은 무언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었던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게 무엇이었는지 도무지 기억해낼 수 없었다.
“몸은 좀 괜찮아요?”
조금 이른 시간에 걸려온 주말의 전화는, 첫마디부터 그의 건강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건 마치 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어조여서, 티엔은 아연하고 말았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거예요. 술은 하지도 않던 사람이.”
“어제 전화를 했었나? …….”
“그것도 기억 못하고 있던 거예요?”
티엔은 마틴의 전화가 전혀 기억에 없었다. 그렇다는 말을 듣고 나니 어렴풋이 그랬던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정확히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에 대해서는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티엔……. 아무래도 당신은 술은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대체 무슨 소리를 했기에.”
“그냥 평소 같았어요. 귀여웠거든요.”
“……마틴.”
그렇게 말하긴 해도, 그가 부끄러워할 게 뻔한 것을 알려주기는 마틴도 미안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이런 비밀 하나쯤은 가지도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래도 사람들하고 친해진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그런 곳엘 다 가고.”
“글쎄. 잘 모르겠구나.”
골치 아픈 한숨을 내쉬는 걸 보면, 티엔은 어제의 자리가 결코 편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마틴은 그런 그가 조금은 걱정스러웠다. 평범한 입장에서의 조언을 하지 못하는 자신의 말은 서툰 그에게 현실감이 떨어질 것 같아, 마틴은 차마 그의 인간관계에 대해 무어라 말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어쨌거나 전과는 달라지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면, 마틴은 조금 흐뭇하고도 섭섭한 감정이 들었다.
“다음에 그럴 일이 또 있으면 알려줘요. 꼭 다시 전화하게요.”
“됐다. 다시는 그럴 일 없을 테니.”
마틴은 웃으며 티엔의 기분을 달랬고, 한동안 그가 왜 귀여운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티엔의 기분은 그 전보다 훨씬 복잡해지고 말았다.
그렇게 티엔을 걱정하고 있던 마틴의 인간관계도 아주 순탄하다곤 할 수 없었다. 마틴은 다른 후원자들과 어울리는 것이 약간 껄끄럽게 느껴졌다. 마틴 자신은 그들을 똑같이 대할 수 있지만 상대에게는 그러리란 보장이 없었으므로. 그간 뼈저리도록 타인이 생각하는 자신의 능력의 위험성을 알게 된 마틴은 그들이 자신을 껄끄러워할까 조심스러운 마음을 가졌다. 그런 이유로 그는 늘 친절했으나 굳이 먼저 타인에게 다가가지 않았고, 마음을 읽지 않으며 진행하는 관계에 위화감을 느끼기도 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때면, 마틴은 서점에서 일하던 때와 같이 능력자 연구를 취미로 삼았다. 재단에 갖춰져 있는 능력 관련 자료가 눈에 띈 것이 그 계기로 재단 내에서는 일반 서적보다 더 자세한 내용을 접할 수 있었기에 연구는 전보다 더욱 흥미로웠다. 게다가 업무와도 관련이 없지 않으니 일거양득인 셈이다.
그 중에서도 동양의 능력자에 대해 알아봤을 때엔, 아직 현지의 능력 관련 인식이 부족한 만큼 관련 자료도 적은 편이었다. 동양의 많은 지역에서는 아직 능력을 미신이나 다른 여러 가지 형태로 해석하여, 능력자가 숭배되거나 반대로 터부시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마틴은 그런 글들을 읽고 나자, 어쩌면 그가 이런 곳까지 오게 된 데에는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
그날은 유독 피곤한 날이었다. 전에 나빠졌던 몸 상태는 완전히 회복했다고 여겼지만, 생각보다 그 여운이 오래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은 마틴의 전화가 없다. 어느새 기대하고 있었던가. 티엔은 마틴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혹시 그가 잠들어 있을지 몰라 다음날을 기다리기로 했다.
작은 집, 행복한 장소. 어머니는 그곳에서 울고 계셨다. 아톈(阿天), 가서 아버지를 모셔오렴. 티엔은 어머니를 혼자 두기 불안했지만 그 말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어디에 계신지 모를 아버지를 찾아서, 작은 티엔은 집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분명 작았던 그들의 집은 어느새 복잡하게 얽혀있었고, 문 뒤에는 다시 문이, 계단이, 복도가, 그리고 군데군데 보이는 구석진 방들은 마치 폐가처럼 먼지와 거미줄이 가득 쌓여있었다. 티엔의 불안감이 커지기 시작했을 무렵, 아이는 드디어 어느 방에서인가 하나의 인영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건, 정말로 검은 형체일 뿐이어서─
자연스럽게, 그래야 할 것처럼 티엔은 눈을 떴다. 주변은 아직 어두웠으나 악몽 탓에 일찍 잠에서 깨고 만 것 같았다. 기분이 좋지 않다. 그건 단지 꿈의 여운 탓만이 아니었다. 그저 악몽뿐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기분이 더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티엔은 자신이 침울해졌다는 사실도, 아무 의미 없는 꿈을 꾸었던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 눈을 떴을 때 곁에 있기를 바랐던 사람이 없다는 것까지,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슨 일 있어요?”
마틴은 모처럼 먼저 전화를 걸고서 말이 없는 티엔을 답답하게 생각하고 있는 참이었다. 이럴 때야말로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편할 텐데. 설령 가까이 있더라도 그럴 수는 없었겠지만, 가라앉은 분위기며 평소보다 적어진 말수로 그에게 뭔가 고민이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괜찮을 거예요, 그게 뭐든 간에.”
“……무엇 때문인 줄 알고.”
“그러니까 뭐든 간에요. 당신이 말을 안 해주잖아요.”
그는 또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침묵에는 어느 정도 익숙했기에, 마틴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딱 1분만, 그 이상은 다른 화제를 꺼내기로 했다.
“지금이 옳은지 모르겠다.”
“어떤 게 말이에요?”
그가 겨우 꺼낸 말은 수수께끼 같았다. 그러나 마틴에게는 짚이는 구석이 있어, 망설이면서도 자신이 추측하는 바에 대해 털어놓았다.
“음……. 혹시 그거 제 얘기예요?”
그렇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일상에 있어 가장 큰 변화는 다른 무엇도 아닌 마틴 자신이었으니까.
“계속 찾아가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어쩌면 다음 주에는 아마─”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다.”
즉답으로 마틴의 말을 부정하는 그는, 서로 떨어져 있다는 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그에게 마틴은 슬슬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러면 차근차근 말해 봐요. 뭐가 옳지 않은 것 같은데요……?”
“너를 놓아주지 못할 것 같다.”
마틴은 말문이 막혔다. 분명 차근차근, 이라고 말했는데도. 마틴의 추측대로라면 이건 감동해도 괜찮은 타이밍일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확신을 위해서 그에게는 좀 더 자세한 이야기가 필요했다.
“어…… 저는, 당신이 그래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티엔은 다시 한참 동안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마틴은 그런 그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생각하는 바를 말로 조합하기는 때로 쉽지 않은 일이다. 마틴 자신도, 전에 티엔의 앞에서 같은 심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
“네가 떠나길 원할 때 너를 놓아주지 못할 것 같다.”
티엔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까지 표출하기를 꺼리고 있던 감정이었다. 소유욕. 마틴이 그의 집에서 떠나야 한다고 말했을 때도, 그게 아쉽다는 표현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는 마틴이 떠나기를 원한다면 보내주어야 한다고 스스로 되뇌고 있었다. 마틴이 남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그러나 그는 자신이 더 이상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니까…… 절 많이 좋아하는 거네요.”
단지 그것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지만, 아마 티엔도 그 이상의 표현을 찾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티엔, 전 그렇게 쉽게 당신을 떠나지 않아요.”
“……그것만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아직 미숙한 그는, 마치 고해하듯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털어놓았다.
“너를 붙잡고 있다가 이런 감정이 사라지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게 잘못은 아니에요. 그렇다고 제가 그렇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도 잘못은 아니고요. 당신은 지금 절 좋아하는 거고, 저도 당신이 좋은 거니까.”
마틴은 또다시 그가 얼마나 서툰지를 되새겨야 했다. 그 사실을 간과하는 건 이미 여러 번 했던 실수인데도 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는 남들이 이미 지나왔을, 또 하지 않을 고민에 괴로워하곤 했다.
“티엔, 제 말을 듣고서 어떤 기분인지 알려줄래요?”
그에게 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마틴은, 숨을 고르고, 할 수 있는 한, 가장 감미로운 목소리로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사랑해요, 티엔.”
티엔에게 대답은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는,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어때요?”
“……. ……괴롭구나.”
가슴을 쥐어 짜이는 느낌을 그는 괴로움이라고 표현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를 모르지는 않았음에도.
“어쩌죠, 앞으로도 계속 그럴지도 몰라요…….”
마틴은 쓰게 웃었지만, 티엔은 침묵했다.
“절 만난 게 후회돼요?”
“모르겠군.”
“그러면 아니라고 해줘요. 제가 기쁠 테니까.”
마틴은 마치, 처음으로 불에 덴 아이를 달래는 기분이었다.
“그냥, 좋을 땐 좋아한다고 말해주세요. 전 당신의 마음은 못 듣잖아요.”
“……좋아한다.”
그렇게나 어설프면서도, 이해하고 받아들인 일에 관해서는 정말 배우는 게 빠른 사람이다. 그래서 더 사랑스러웠다.
“다행이에요.”
“이번엔 제가 걱정 들을 만한 소리를 해도 될까요?”
이날의 통화는 꽤 길어질 것 같았다. 그렇게 양해를 구하며, 마틴은 가볍게 이마를 문질렀다. 그에게 자신의 고민을 어디서부터 얼마나 말하면 좋을까.
“제가 재단에 들어온 데엔, 능력을 쓰지 않겠다는 조건이 걸려 있어요. 예전이라면 그런 약속은 절대 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걸 쓰지 않고서 사는 걸 상상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처음엔 그렇게 싫어했으면서요…….”
마틴은 티엔과 만나고, 가족과 재회하면서 능력에 쓰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강해졌다. 게다가 능력 그 자체에 대해서는, 마틴은 언제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전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어요. 그리고 그걸 위해선 능력을 쓰지 않는 게 옳다는 걸 알아요. 저는 충분히 올곧지 못해서 능력에 휘둘리고 있었으니까요.”
능력으로 타인을 이용하는 것이 그릇되었다는 자각은 있지만 죄책감은 옅었다.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고, 차마 다시 돌아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며 떠돌아다녔다. 그는 정말 능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가끔은, 모르겠어요. 제가 정말 이대로 계속할 수 있을지. 앞으로 능력을 써야만 한다는, 그런 생각이 드는 상황이 왔을 때도 제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저는 제 결심도, 브루스씨와의 약속도 깨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정말 모르겠어요.”
티엔은 마틴에게 생각하는 바가 있을 거라 여겨 능력의 사용 같은 것에 참견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마틴이 능력을 완전히 포기할 생각마저 하고 있는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마틴에게 이런 고민이 있을 거란 사실도 전혀 알 수 없었다.
“……능력은 네 일부다. 그게 없는 척 하며 살아갈 수는 있겠지. 하지만 너는 실제로 그걸 가지고 있고, 네가 가진 것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티엔은 마틴의 고충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었다. 티엔도 능력을 억누르고 있기는 마찬가지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것은 평범하게 타인에게 행사할 수 있는 종류의 능력이 아니었다. 편리하고, 그만큼 오랫동안 의존해왔던 능력을 포기한다는 게 얼마만큼의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 그로서는 알기 힘들었다.
“그들이 네게 요구한 건 단지 그릇될 가능성을 없애는 것뿐이지, 네가 원하던 올바름이 아닐 수도 있다. 네 선택이 잘못될 수 있는 만큼 그들의 선택이 옳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 나는 네가 능력을 써야만 하는 상황이 왔을 때 그걸 썼거나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책하는 건 바라지 않는다.”
“……그걸 제가 어떻게 판단하면 좋죠?”
“네가 원하는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를 알고서 그걸 따라야겠지. 다른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않고 옳은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마틴은 웃음이 나왔다. 스스로가 그럴 수 있다고 믿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의 자신이 있었다.
“그런 걸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글쎄. 내 바람일 뿐이니.”
그럴 수 있을 거라는 격려의 말은 없다. 그들은 모두 낙관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통제하는 건 모두에게 힘든 일이다. 자신을 몰아붙일 필요는 없어. 능력을 원해서 가진 것도, 마음대로 그걸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너무 서두르지 마라.”
“고마워요.”
브루스가 전에 능력을 제외한 마틴이라는 청년을 바라봐주었다면, 티엔의 말은 마틴 그 자체를 긍정했다. 마틴은 그가 겉치레의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 더 기뻤다.
“정말…… 저는 이래서 당신이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마틴은 안심이 됐다.
“그런데 당신은 제 어떤 점이 좋았던 거예요? 지금까지 말했던 적이 없잖아요.”
“……꼭 지금 이야기해야 하나?”
떠오른 생각을, 마틴은 미뤄두지 않기로 했다. 연인의 난감한 목소리를 듣는 것조차, 청년에게는 즐거운 일이었다.
“네. 뭐라도 이유는 있을 거 아니에요. 그걸 들으면 힘이 날 것 같은데요.”
티엔은 분명 고뇌하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아직 멀었냐며 능청스레 묻는 말에는, 숨을 고르고 있는지 한숨인지 분간이 모를 잡음이 전해져 왔다. 꽤 좋은 징조다. 마틴은 즐거운 얼굴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웃는 얼굴이 보기 좋았고.”
“네.”
“목소리가, 네가 하는 이야기들이 듣기 좋았다.”
티엔은 수화기 너머로 키득거리는 마틴의 웃음을 들었다. 굳이 지금 시인하지는 않겠지만, 사실 그것도 티엔이 듣기 좋아하는 마틴의 소리들 중 하나다.
“그리고요?”
“음…….”
“그게 다예요? 뭐예요. 아주 향기가 좋고 맛도 좋았다고 하지 그래요?”
마틴이 비꼬며 던진 말은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처음 만났을 때의 마틴은, 티엔에게 마치 경계심이 가득한 들고양이처럼 느껴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런 모습이 꽤 귀엽다고 느꼈던 것 같지만. 마틴은 아마 그런 대답을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 외에 마음이 끌렸던 이유라고 한다면.
“그리고 네가 닿을 때마다, 따듯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당연하잖아요.”
그런 대답에 마틴은 서운함이나 애잔함, 어느 쪽을 느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당신도 마찬가지였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쩌면 첫 만남 때부터 그들은 서로가 특별한 인연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때문에 이유 같은 것이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만약에, 당신 쪽에서 절 놓아주려고 하더라도요. 그때는 제가 당신을 다시 잡을 거예요.”
“그래……. 기대하고 있으마.”
그때부터 정말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들 자신 외에는 모든 것이 그대로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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