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글에 해당되는 글 48건
- 2016.07.16 | [티엔마틴] 엇갈림
- 2016.07.07 | [티엔마틴] (케이크버스AU) Custard [19]
- 2016.06.15 | [하랑마틴] 선잠
- 2016.06.12 | [티엔마틴] 티마 동양고전AU 합작글
- 2016.06.08 | [벨져릭] 만남
- 2016.05.29 | [티엔마틴] (케이크버스AU) Afternoon tea
- 2016.04.02 | [티엔마틴] 남은 것이 없기를 바라며
- 2016.03.28 | [티엔마틴] 금목서
- 2016.03.22 | [티엔마틴] (케이크버스AU) Main Dish
- 2016.03.07 | [티엔마틴] 평범한 이야기
글
[티엔마틴] 엇갈림
름구님과의 연성교환입니다*'ㅅ')
각자 '이제 우리 그만 비참해지기로 해요'를 연성의 첫머리/가장 끝에 놓기.
저는 앞을 맡았습니다!
기한을 넘겨.... 매우.... 죄송합니다.......
름구님의 멋진 연성은 여기↓
http://andrprnfma.postype.com/post/240690/
“이제 우리 그만 비참해지기로 해요.”
그 말이 떨어진 직후 마틴은 그의 의문이 옆얼굴에 닿아오는 것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오래 전부터 예견된 일이라고 생각해 미소 지으며 꺼낼 수 있던 말이었다. 역시 이 사람에게는 더 확실한 언어가 나았을 거라는 짧은 감상. 마틴은 그렇게 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는 곧장 이어져야 할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꽤 길었던 관계를 끝낼 때가 왔노라고, 하지만 앞으로도 좋은 인연이 될 수는 있을 거라고.
방 안의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시계 초침이 똑딱이는 소리와 느릿한 자신의 숨소리만이 마틴의 귓가를 맴돌고, 우중충하게 내려앉은 구름 사이로 드리우는 빛은 크게 나있는 유리창을 통해 작은 공간을 시리게 비춘다. 책상 위에 약간 어지럽게 놓여있는 서류며 필기구들은 마틴이 앉은 책상 위로 제멋대로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언제라도 누군가 찾아와 그들을 방해할 수 있는 마틴의 사무실. 어트랙티브는 계산적인 자신의 모습을 좋아할 수 없으면서도 그것들을 끝까지 활용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게 당신이 정말 원했던 건가?”
과연, 티엔은 마틴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묻지는 않았다.
“숨이 막히잖아요. 당신도, 저도.”
“……그래. 그랬었지.”
숨이 막힌다는 표현을 먼저 사용한 건 티엔이었다. 그때 그는 조용히 화를 내고 있었고 다소 격한 표현이었을지언정 그 말에 거짓은 없었을 터였다.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 별로 달라질 것도 없겠군.”
무표정과 검은 눈동자의 시선이 마틴에게로 공허하게 내려앉았다. 그 시선을 피해 의미 없이 책상 위를 훑던 마틴의 눈길은 어느 서류철의 제목 위에서 멈춰 선다. ‘그랑플람 재단 아시아 지부: 동양 능력자 발굴의 진척 상황 보고. ─티엔 정.’
“이건 돌려주는 게 낫겠나?”
착잡해졌던 표정을 수습한 마틴이 올려다 본 티엔의 손 안에는 그들의 감정을 물질로 표현한 몇 안 되는 물건이 들어있었다. 그건 마틴이 수십 번 상상했던 지금 이 순간 중에서도 미처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었다.
“……당신이 원한다면요.”
마틴은 탐탁지 않았던 대답을 그에게 고스란히 되돌려주었고, 티엔은 말없이 다가와 매끈하게 빛나는 반지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정작 그의 손에 끼워진 일이 드물었던 작은 상징물은 마틴이 그걸 그에게 건넸던 날과 다를 바 없이 보였다.
영원할 거라느니, 변하지 않겠다는 둥의 의미 없는 맹세를 해본 기억은 없었다. 그럼에도 일종의 약속이었던 무언가가 자신의 손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마틴을 묘한 기분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감상에 빠질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별을 고한 이는 그를 떠나려 방을 나서는 이를 불러 세워야했던 것이다.
“이걸로 끝이에요?”
이렇게 남은 걸 되돌려주는 것 외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말이 없느냐는 질문에 마틴을 돌아보는 티엔의 눈은 여전히 예의 그 공허한 빛을 띠고 있었다.
“가볼 시간이다.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하지.”
도피는 티엔 정이라는 사람답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지금껏 해왔던 일들의 전부는 그들을 헝클어뜨리는 과정의 일부였으므로 이제는 무엇이 일어나도 놀랄 것은 없었다.
앞으로도 좋은 인연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런 말을 꺼내려던 시도에 무색하게도, 마틴은 티엔이 뒤돌아 떠나기 직전의 굳은 표정을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힘겹게 느껴졌다.
신화 속 네메아의 사자는 어떤 무기에도 상처 입지 않았으나 결국 영웅의 손에 목 졸려 죽어버렸다.
우리는 서로 다른 종류의 사자였다. 그는 칼날이 들지 못할 거칠고 뻣뻣한 털가죽을, 나는 칼날을 능히 빗겨낼 교활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없으리라 여겼다. 그가 나의, 내가 그의 목을 조르기 전까지는.
다음날 그들은 짧은 통화를 나눴다. 티엔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는 서로의 거처에 남은 물건을 어떻게 처분할지에 대한 논의, 또는 통보였고 그걸로 끝이었다. 연인들 사이에 으레 있다고 하는 미련의 흐느낌도, 인상적인 작별인사조차도 없었다.
잘 지내요. 억지로 짜낸 마틴의 인사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말로 간만에 보내는 혼자만의 밤. 같은 침대를 쓰지 않는 밤에도 두 사람은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야만 했던 이유를 떠올릴 때면 마틴은 어디론가 고개를 파묻고 가라앉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비참함. 내가 나의 비참에 대해 그에게 말한 적이 있던가?
간혹 찾아오던 우울은 언제부터인가 그와 함께 있을 때 더욱 심해지곤 했다. 정신계 능력을 가진 사이퍼에게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하던가. 마음껏 남의 속을 들여다보곤 비웃고 동정한 뒤에야 가라앉곤 하던 우울. 하지만 이 안개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나는 그렇게 해낼 수 없었다.
나를 안심시키던 무지(無知)가 나를 괴롭히는 순간에, 상대의 잘못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불안이 차올라 작은 말과 행동에 상처받았다. 그 상처가 썩고 곪은 뒤에는 또다시 새로운 상처가 새겨지고, 다시, 또다시, 사랑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여겨질 정도로.
당시에는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지만 아마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나의 상처는 나만의 것으로 끝나지 못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상처를 내보이는 데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웃는 얼굴을, 그리고 적당히 감싸 안아줄 수 있는 정도의 슬픔을 사랑했고 나는 언제나 사랑받고자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견딜 수 없을 때면 혼자 틀어박히거나, 일에 집중하거나, 타인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걸로 자신을 위로하곤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티엔에게 나의 괴로움을 털어놓았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관계는 더 일찍 끝나게 되었을 테지만, 어쨌거나 결과를 바꾸지는 못했으니 우스운 일이다.
“미안하다. 위로 같은 건 익숙하지 못하군.”
잠자코 듣고 있던 그는 뜻밖의 사과를 건넸다. 그러나 무뚝뚝한 그에게서 받는 서툰 위안의 말은 기대 이상의 것이어서─ 심지어 그는 나를 이해하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때의 나는 어쩌면 앞으로 다시는 불행하지 않으리라는 기대마저 가지게 되었다. 글쎄. 수많은 감정들과 그 끝을 읽어온 마인드리더에게도 희망 정도는 있을 수 있는 법이다.
이어진 긴 시간은 최악과 안도의 반복이었다.
나 자신을 담보로 쥐고서 누군가를 흔들어대는 건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기복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 감정과 주워 담을 수 없는 말들은 그로 하여금 필요 이상으로 나의 기분을 살피며 입을 다물게 했다. ‘가끔은 죽어버리고 싶어요.’ 나는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다.
우리 둘 중 누군가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건 분명 나의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런 식의 동정은 필요 없다고, 그의 시선이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고 외칠 수 없었다.
그날의 나는 그와의 관계에 유달리 집중할 수가 없었다. 반사적으로 내뱉는 신음과 본능적인 몸의 반응, 그게 전부였다. 바닥끝까지 가라앉아있던 내게는 모든 것이 우스웠다. 잘도 이런 내게 욕정하는 남성이나 그 아래에서 쾌락을 연기하는 나의 모습까지.
비웃음을 알았던 걸까, 늘 있던 진득한 후희 따위가 이날 밤의 우리에게는 없었다. 하긴. 마음은 몰라도 몸에 관해서만은 정통한 그가 나의 성의 없는 반응을 모를 리가 없다.
“의사표현은 확실히 해라.”
말없이 뒤처리를 끝낸 그가 처음으로 뱉은 말이었다. 네, 그렇게 하죠. 미안해요. 대답은 내 머릿속에서밖에 들려오지 않았다.
그 뒤로 우리는 양측의 확실한 동의 없이는 육체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날 이후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사실, 그 이전부터 우리는 낮은 속삭임으로 끊임없이 서로를 상기시켰다. 곧 죽더라도 너를 사랑하겠다는 달콤한 고백이 아니라 서로의 길이 갈린다면 가차 없이 떠날 수밖에 없다는 말들. 우리는 그런 식의 연애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만큼이나 자신의 시간, 자신의 공간, 자신의 결정 같은 것들을 어그러뜨릴 생각이 없는 사람들의 만남이란 꽤나 한정적이다. 그럼에도 이런 관계가 지속될 수 있었던 건 우리의 삶 속에 아주 약간의 부드러운 이음매가 필요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그의 입장을 완전히는 이해할 수 없고, 또 앞으로도 영영 알 수 없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존재가 짐으로 느껴지는 순간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 티엔이 점점 초조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나를 떠나지 못했던 건,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가볍게 여겼던 애착이라는 감정이나, 동정, 또는 어떤 종류의 관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함께 비참해지느니 차라리 혼자 견디겠다고. 그게 나의 결론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다시 이틀이, 그리고 또 사흘이.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뜻밖에도 마틴은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어려운 업무와 협상들을 훌륭하게 수행했고, 옛 후원자의 신뢰를 얻어냄으로써 재단의 영광을 되찾는 데에 이바지했다. 심지어 그는 전보다 더 밝은 얼굴로 웃을 수 있었다.
누구 머릿속이라도 엿보고 있는 거 아냐? 기분 나쁘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미소를 보낼 수 있는 여유가 이전의 그에게는 있을 수 없었다. 답답함과 죄책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뒤의 세계는, 이전보다 훨씬 더 밝은 색채로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기시감에 의해 마틴은 과거의 우울이 고스란히 자신의 발자국을 따라붙고 있음을 알았다. 평화가 지속되리라는 믿음은 이번으로 처음이 아니었기에.
“챌피씨, 이번 회의에 티엔 정씨가 불참했는데 혹시 왜인지 아세요?”
당연하게도 마인드리더의 평온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전혀 관련이 없어야 할 이에게 티엔의 행방을 넌지시 묻는 그녀는 어렴풋하게나마 그들의 사이를 눈치 채고 있던 사람 중 하나였다. 문제가 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해 내버려두었던 씨앗이 자라나 발목을 잡는 순간 마틴은 약간의 짜증과 낭패, 그리고 옅은 의문을 느꼈다.
“글쎄요. 저도 별로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아니라서요.”
“그런가요……?”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여성의 의혹은 매력적인 능력자의 작은 암시에 의해 그게 존재했다는 기억조차 깨끗이 지워졌으나 마틴의 의문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였다. 그토록 가라앉았던 날들 속에서도 자신의 일을 그르치는 적이 없던 이었던 것이다.
“그게 전달할 사항인 거죠? 제가 맡아서 전해드릴게요.”
“네? 아,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지만……”
“마침 저도 볼일이 있어서요. 제가 할 수 있게 해주세요.”
뜻밖의 용기는 마틴 스스로를 놀라게 했다. 설령 그 용기의 또다른 이름이 비열함일지라도.
스스로의 판단에 의하면, 티엔 정은 누군가의 연인으로 적합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와 마틴 챌피에 대해 논하자면 그들 사이에는 티엔이 끔찍이 미워하는 부조화가 자리 잡고 있다. 그렇게 시작부터 잘못되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선을 긋지 못한 것이 화근으로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패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첫 울음이 터져 나왔을 때 티엔이 느꼈던 감정은 배신감이었다. 아마 잘못은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사랑받고 사랑을 주는 방법을 아는 마틴과 달리 티엔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서툴렀고 그 사실을 굳이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뜻하는 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때부터 그는 끝을 생각했다. 어긋난 톱니바퀴가 맞물려야 하는 이유를 그는 생각해낼 수 없었으므로. 상대가 소중해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그의 고장 난 감정조차도 마틴을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그를 설득하고 있었다.
견딜 수가 없어요. 미안해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연인이 털어놓은 괴로움에 티엔의 결심은 무너졌다. 마틴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와 닮아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능력에 먹힐 것만 같은 두려움. 자신의 잘못만이 아니었다는 깨달음과 예전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은 기시감에 티엔은 그를 두고 떠나갈 수 없었다.
적어도, 아주 적어도 그가 상대를 보듬을 수 있을 만큼 강인한 동안에는.
“안녕하세요.”
뜻밖의 방문자는 너무도 평범한 노크와 함께 찾아왔다. 가능하면 다시 보기를 원치 않았던 금발, 단정한 옷차림, 옅은 주근깨의 사내. 그의 눈빛은 여전히 티엔의 시선과 비껴나간 곳을 향해 있었다.
“음.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마틴이 꺼낸 말은 티엔에게 아직 살아있는지, 혹은 미치지 않았는지를 묻는 뜻으로 들렸고 그는 그 물음에 긍정을 표했다.
“그래. 아직은 그렇지.”
상대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쥐었다 펴보는 검은 손에서는 아직 떨림이 제대로 멎지 않았다. 매슥거리던 속은 많이 나아진 편이지만 몸의 구석구석이 제 상태를 되찾는 데에는 아직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무슨 일이지?”
굳은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한 티엔의 노력은 그로 하여금 불쾌함을 가장하게 했다. 가시 돋친 물음에 마틴의 입에서는 더욱 사무적인 태도의 말들이 흘러나왔다.
“회의 불참 건으로 부탁을 받아서요. 그리고 그때 논의된 사항으로……”
짧은 점멸. 불길한 회색빛과 부스러지는 환상이 티엔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이런 자리를 골라서. 거의 분노를 느끼는 그는 아프도록 주먹을 쥔 채로 시야가 되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티엔? ……티엔씨.”
“그 일에 대해서는 이미 해명을 했다. 볼일은 그게 다인가?”
이를 악물고 되묻는 기공사의 싸늘한 태도에 마틴은 그 이상의 대화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네. 그런 것 같네요.”
마틴은 짧은 시간 동안 작별의 인사에 대해 고민했다. 어떻게 봐도 자신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는 이에게 다시 보자는 말은 너무도 무책임하게 들렸고 긴 작별을 이야기하기엔 그들은 너무나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고마웠어요.”
이전에 티엔은 때로 마틴을 초대한 자리에서 이국의 요리를 만들곤 했다. 본인이 고향에서 먹던 음식이나, 하랑의 고향인 조선 땅의 음식까지. 사실 마틴은 그 둘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지만 어느 쪽도 맛은 썩 나쁘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언젠가부터인가 그는 동양을 방문해본 적이 없는 마틴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음식의 유래나, 맛을 내는 과정, 그걸 먹는 지방의 사람들의 이야기 따위를 알려주곤 했다. 그건 정말로 티엔 정이라는 사람답지 않은 일이어서, 마틴은 그의 말을 흥미롭게 듣는 한편 이런 식의 특별한 쓸모가 없는 이야기들을 쏟아내는 그의 머릿속을 상상해보곤 했다.
사실 그에게는 전하고 싶은 말이 훨씬 더 많은 게 아닐까, 하는. 하지만 그것들을 전부 들려줄 만큼 자신이 그에게 가까운 존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마틴은 때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했다.
오래 전에 타인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린 티엔은 그의 말을 통해 세상을 보았다. 사람들의 감정이 얼마나 다양한가를 알게 되는 건 때로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티엔 자신이 놓쳐버린 것들을 상기시켜주는 말들. 때로 마틴은 짓궂게도 티엔을 향하는 다른 이들의 감정을 알리기도 했다.
그것도, ‘숨이 막히게’ 된 후로는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목숨을 위협하는 불안에 사로잡힌 이가 다른 누군가를 위로하기란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 괴로워하고 있는 연인에게 자신의 짐까지 지울 수 없다는 핑계와 자신의 실패를 드러낸다는 부담감.
연인에게는 자신 외에도 많은 인연과 그를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 티엔은 제대로 된 버팀목이 될 수 없는 자신을 그의 곁에 두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함께 비참해지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선택은 옳은 일이었다.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엔마틴] 거리감(隔閡) [19] (0) | 2016.09.10 |
---|---|
[티엔마틴] 실언 (0) | 2016.09.04 |
[티엔마틴] (케이크버스AU) Custard [19] (0) | 2016.07.07 |
[하랑마틴] 선잠 (0) | 2016.06.15 |
[티엔마틴] 티마 동양고전AU 합작글 (0) | 2016.06.12 |
글
키워드 연성으로 받았던 게 생각보다 길어졌네요:3
마틴의 독백인 듯한 의식의 흐름.
꿈은 무의식의 영역이다. 따라서 아무리 마인드리더라도 남의 꿈을 들여다보는 일은 쉽지 않은데, 굳이 그렇게 하고 싶을 때의 편법은 다음과 같다. 잠들어있는 사람을 강제로 깨운 뒤 마음을 읽거나(물론 이 경우 꿈의 내용은 상당수 유실되어버린다), 혹은 반쯤 깨어있는 사람의 꿈을 엿듣거나. 이런 시도에서 나는 간혹 흥미로운 결과를 보기도 했지만, 여기저기 뒤틀려있는 얕은 꿈은 대부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의미한 기억의 나열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독심술사의 자서전에서.
미지근하고 습기 찬 공기가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날이었다. 피로 탓인지 무엇 때문인지 모를 미열에 마틴의 하루는 다른 이들보다 더 느리고 힘겹게 흘러가고 있었고, 그게 딱 견딜 수 있을 만큼의 불편이라는 점은 그의 심기를 교묘하게 건드리고 있다.
이것만 하고 쉬면 될 것 같은데. 아니, 이것만. 이것만. 또 이것만. 이런 식으로 미루기를 거의 세 시간 째, 마틴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편하게 둘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나섰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 푹신한 침대에 파묻히고 싶은 욕망이 그를 부추기지만, 아쉽게도 청년은 잠깐의 휴식 후 자신이 남은 몇 시간을 버텨낼 수 있으리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거의 맹목적인 그 믿음은 워커홀릭의 오만한 자가진단이다.
반쯤 열려있는 문 안으로 발을 들이기 전, 마틴은 내부의 동향을 확인하기 위해 아주 약간의 능력을 사용했다. 그는 잠깐의 쉬는 시간을 평온하게 보내고 싶었을 뿐 다른 의도가 없었음을 이름을 걸고 맹세라도 할 수 있었다. 휴게실이 조용하다면 능력을 더 쓰게 될 일도 없을 테고, 그렇지 않다면 마틴 본인이 다른 곳을 찾아 떠나면 되는 문제일 뿐이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기에 가졌던 기대와 달리 그곳엔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딱 한 사람. 어쩌지? 도리어 피곤해지는 건 정말이지 사양이지만 발걸음을 돌리기에는 애매한 숫자였다. 마인드리더가 가벼운 고민에 빠지려던 바로 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뜻밖의 단어가 흘러들어왔다. 마틴. 그건 바로 그 자신의 이름이었다.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생각의 음색이 누구의 것인지를 깨달은 마틴 챌피는 더 큰 고민에 빠졌다. 이제 와 새삼 누구의 마음을 읽는 데에 거부감을 가지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 아이는─ 특히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지금껏 그 애를 피해온 이유가 무엇이었는데.
무겁던 머리가 이제는 거의 지끈거리고 있다. 하느냐, 하지 않느냐.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선택의 갈래에서 그는 결국 자신의 능력의 힘에 굴복하고 만다. 들을 수 있는 것을 듣지 않기로 선택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신중히 둘러본 주위에는 눈에 띄는 사람이 없었고, 마틴은 복도에 기대어 문 너머의 생각에게로 정신을 집중했다.
혼자임에도 대화의 형식을 가진 소리들. 묘하게 섞이는 잡음. 그제서 마틴은 아이가 생각에 잠긴 것이 아니라 꿈을 꾸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건 아주 약간의 방해만 있어도 깨어져버릴 얕은 꿈이었지만 아이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깨어나기 직전의 혼란이 더해져서인지 들려오는 생각의 맥락은 여기저기가 빠지거나 군더더기가 붙어 매끄럽지 못하다. 그러나 확실한 건 아이가 악몽을 꾸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마틴이 등장하는, 그리고 떠나간다는 내용의. 그 한결같음에 마틴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그 아이는 보호자를 찾아 울먹이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마틴보다 예닐곱 살은 어리지만 영국에서 제대로 교과과정을 밟았다면 슬슬 A-level을 공부할 나이고, 동양 특유의 앳된 얼굴을 가지고도 신체는 꽤나 성숙하다는 느낌이 있다. 이하랑, 17세, 영을 다루는 독특한 능력자. 그리고 또 다른 특이사항으로는─ 같은 재단 소속의 마틴 챌피를 사모하고 있다.
하랑이 처음으로 호감을 표시했을 때만 해도 마틴은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 알지 못했다. 나이가 예닐곱은 차이 나는 선배를, 그리고 무엇보다 남자를? 마음을 읽었으니 그게 마틴의 착각일리는 없다. 이제 아이는 꿈에서까지 마틴을 그리고 있었다.
하랑은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적이 없지만 설령 그랬더라도 마틴이 그걸 받아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가 하랑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제쳐두고서라도, 과연 주변에서 그들을 어떤 눈으로 볼지. 특히 하랑의 보호자인 브루스나 티엔은 마틴이 아이의 마음을 가지고 놀고 있다 여길 게 뻔했다.
만약 그들이 이 일을 알게 되면. 하랑, 그건 네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란다. 저 독심술사가 네게 손을 쓴 게야. ……아니라는 변명조차 우스워지는 상황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손을 써야 할까.
마틴은 손쉽게 남의 호감을 살 수 있는 만큼 그 반대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함께했던 몇 가지 추억이나, 밤새도록 누군가를 그리며 설레던 기억을 지워버릴 수도 있다. 감정의 무게를 서서히 덜어내고 최종적으로는 그게 존재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도록.
그렇게 하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더라. 마틴은 등에 닿는 서늘한 콘크리트 벽을 느끼며 생각에 빠졌다. 처음부터 자신을 꽤 마음에 들어 하기에 이 동양 소년에게는 굳이 능력을 쓸 필요조차 거의 없었다. 그랬던 마음이 이렇게까지 자라난 건 글쎄, 꽤 기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며 또 그때마다 적절한 조치를 취해왔다는 점을 제외하기만 한다면 썩 괜찮은 설명이다.
결론을 내리지 못한 마틴은 아직 하랑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자신을 보고 웃는 얼굴이며 태연한 척 노력하는 말투까지. 그게 안타까워 견딜 수 없어졌을 때 무언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지, 마틴은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었다.
여전히 몸은 좋지 않고 하랑의 악몽은 이어지고 있다. 마지막 이기심으로 그의 마음에 관여한 동시에 들려오는,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나는 소리.
선잠에서 깨어난 소년이 꿈의 내용을 다시 떠올리기 전, 청년은 발소리를 죽인 채 그 자리를 황급히 떠나버렸다.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엔마틴] 엇갈림 (0) | 2016.07.16 |
---|---|
[티엔마틴] (케이크버스AU) Custard [19] (0) | 2016.07.07 |
[티엔마틴] 티마 동양고전AU 합작글 (0) | 2016.06.12 |
[벨져릭] 만남 (0) | 2016.06.08 |
[티엔마틴] (케이크버스AU) Afternoon tea (0) | 2016.05.29 |
글
[티엔마틴] 티마 동양고전AU 합작글
곰쮸뿌님이 주최해주신 티엔마틴 동양고전AU 통합 합작에 참여했습니다(_ _)
멋진 합작 페이지는 여기↓
http://sauvez214.namoweb.net/orient/index.htm
비인간 둘의 얘기입니다'///')>
天涯
약간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날이었다. 싱그럽던 이파리들은 어느새 반짝이던 윤기를 잃었고 덤불 사이에 붙잡혀있던 장마의 습기는 점차 말라가고 있다. 여름의 결실로 피어나 자라난 풍요는, 곧 멀리서 메마른 북풍이 불어올 때에 빠르게 스러지고 말리라.
인기척이 있기 전에 온갖 미물들은 먹이를 찾거나 위험을 피해 분주하게 움직이며 낮은 웅성임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한순간 그것들은 일제히 모습을 감추어버리고, 작은 소란 뒤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하늘이라는 이름의 사내. 어두운 빛깔의 가벼운 차림을 한 그는 잘 단련된 신체와 단단한 인상의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길조차 나지 않은 나무와 수풀 사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헤치는 그는 숲의 고요를 깨고는 다시 정적을 내려앉게 만들곤 한다.
산의 짐승들은 이미 그를 여러 번 보고 겪어왔음에도 이상스러울 만치 그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쉬이 놀라 굴속에 몸을 숨기는 털뭉치들은 물론, 날개 달린 것들이나 발톱이 날카로운 영리한 것들도 그에게는 호기심의 눈빛마저 보내지 않는다. 오랜 시간 이곳에 자리 잡고 있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산의 일부가 아닌 존재였다.
티엔에게는 왕래가 있는 친지도, 단 몇 마디를 나눌 말벗조차 없었다. 사실 그의 곁에 풀이나 나무가 아니라 수십 수백 명의 사람이 있었다 해도 그는 지금과 똑같은 삶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거처이자 무덤인 곳에서 달이 이지러지고 차오르기를 반복하며 티엔은 날을 헤아리길 그만두었고, 정말로 긴, 오직 혼자만의 시간이 흘러갔다.
치열함에서 튕겨져 나와 무료 속에 던져진 티엔은 매일같이 정처 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계절을 좇아 느릿하게 변하는 풍경. 그 사이에서 오직 그만이 변하지 않은 채 멈춰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새로운 것이 그를 맞이하는 일은 드물다. 마치 지금 이 순간 그의 시선을 빼앗은 누군가의 존재처럼. 이곳에서 볼 수 없을 빛깔에 티엔은 잠시 눈을 의심하고야 말았다. 금실로 엮은 듯 밝게 빛나는 머리칼. 뿐만 아니라 나무그늘 아래서 유난히 희게 보이는 피부를 더해 그 사내는 마치 수풀 사이에 던져진 백옥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
이질적인 풍경에 티엔은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기척을 눈치 챈 사내가 티엔에게로 눈길을 돌리고, 위화감은 더욱 커져간다. 이 부근에서 사람을 만나본 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아주 심각하게 길을 잃었거나, 희귀한 약초라도 찾고 있거나, 결론적으로 그런 이들에게는 어떤 종류인가의 절박함이 있었다. 그러나 이 사내는 달랐다. 절박은커녕, 그에게서는 일말의 곤란함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이거, 그 집 건 아니죠?”
산간에 어울리지 않는 멀끔한 차림을 한 사내의 손에는 모가지를 붙잡힌 검은 수탉 한 마리가 축 늘어져 있다. 번질거리는 깃털로 뒤덮인 커다란 몸체는 분명 숨이 붙어있을 적 분명 닭장에서 가장 높은 횃대를 차지했으리라. 기이하지 않은 부분이라곤 없어 보이는 그는 약간 섬뜩한 느낌마저 드는 옅은 색의 눈으로 티엔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니.”
짧은 대답. 애초에 티엔은 가축을 키우지 않는다. 안심의 표현인지 사내는 눈꼬리를 휘며 웃음을 짓는데, 어쩐지 그 표정만은 어딘가 기시감이 있어 그는 더욱 더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잘 됐네요. 혼자서는 좀 많은데 같이 먹을래요?”
“……사양하지.”
티엔의 눈살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대체 무얼 권하는 걸까. 사내의 모습을 좀 더 찬찬히 뜯어보니 그의 복장은 그리 화려하지는 않아도 부드럽게 몸을 감싸는 모양새가 질 좋은 비단으로 되어 있는 게 확실하다. 적어도 이런 곳에서 낯선 이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새고기를 나눠먹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사실 그가 누구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티엔은 이런 자와 엮일 필요가 없다고 여겨 예의상의 작별인사조차 없이 가던 길을 그대로 향하는데, 묘한 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그 사내가 태연한 얼굴을 하고서 그를 뒤따르고 있었다. 그 자는 보기와는 달리 가볍게 산을 탈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왜 따라오지?”
“우연히 가는 길이 같나 보네요.”
빙글 웃는 얼굴은 특이한 용모와는 별개로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상이지만, 지금의 상황이며 티엔의 성격 같은 것들은 사내의 행동을 웃어넘길 수 없게 만들었다.
“이 앞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럼 당신은요?”
아무것도 없는 곳을 향하는 남자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험한 곳이다. 길을 잃은 게 아니라면 당장 돌아가는 게 좋아.”
“음─.”
반응은 석연치 않지만 그의 경고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사내가 꺼낸 첫 마디가 그렇게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었다면 티엔이 가장 먼저 던졌을 말은 이것이 되었을 것이다.
“산속에 이상한 사람이 있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네요.”
가볍게 웃으며 뱉는 그 말에 티엔은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굳이 이상(異常)에 대해 논하자면 지금 이 시점에서는 그보다 금발 사내 쪽이 훨씬 더 어울릴 게 틀림없었다.
“걱정해주는 거라면 고마워요. 그런데, 전 제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거든요.”
사내는 제법 자신에 찬 태도였다. 글쎄. 과연 어떨까. 몸을 지킬 무기라도 숨기고 있는지는 몰라도 산에는 제법 위험한 짐승들이 있고, 심각한 예외이긴 하지만 만일 티엔에게 그럴 의향이 있었다면 사내는 이미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훔친 물건은 혼자 조용히 처리하는 게 좋을 텐데.”
슬슬 짜증이 동한 티엔의 대꾸에 그는 짐짓 속상한 채 항변한다.
“산에 있는 걸 잡았으니 훔친 건 아니죠. 어차피 그냥 두면 산짐승한테 먹힐 테고.”
그 말을 짜 맞춰 보자면, 어느 집에선가 자유를 찾아 떠난 용감한 수탉이 결국 이 사내의 손아귀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게 과연 떳떳한 사유일지는 제쳐두고서라도 티엔은 그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이상 무슨 말을 하더라도 능청스럽게 넘겨버릴 것이라는 예감에 의하여. 그는 좀처럼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시도를 달갑게 여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더 대화를 잇기를 그만 둔 티엔은 그 자의 존재를 무시하기로 했다. 그런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한 건지 냉정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등 뒤로는 더 이상 인기척이 들려오지 않는다.
“뭐, 오늘이 때가 아니면 다음에 제대로 선물이라도 들고 찾아갈게요.”
멀찍이서 작지만 또렷한 외침이 들려오고, 흘끗 돌아본 곳에 어디에서도 눈에 띌 듯 밝았던 그 빛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묘한 이였다. ─찾아온다고. 되새겨본 그 말은 꼭 상대가 어디에 사는지를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티엔은 그 일을 잊어버렸다. 물론 주위에 무심한 그로서도 종종 그런 일이 있었지, 라고 떠올릴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몰개성 사이에 끼어든 특별함은 신기하리만치 아득해지는 법이라, 언젠가 티엔이 그 만남을 꿈이라 의심하게 되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가 꿈을 꾸지 않은지 꽤 오래 되었다는 점을 제외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티엔은 또 하루의 길고 무의미한 여정을 끝마치고 그의 거처인 낡은 암자로 돌아온 참이었다. 단, 이날 그만의 공간이었던 이곳은 뜻밖의 침입을 허용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수년 간 알고 지냈던 사이 마냥 태연스럽게 암자에 자리 잡고 있던 금발의 사내는 여전히 헛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예상치 못한 방문이었지만 티엔은 그 자를 무심한 눈으로 비껴보았을 뿐 그를 쫓아 보내지는 않았다. 어쩌면 찾아오겠다는 것을 확실히 물리지 않은 게 잘못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때 그의 심정은 아마도, 기가 막히다, 라는 표현이 가장 알맞았다.
사내는 예고했던 대로 이번에는 죽은 닭 같은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음식을 펴놓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왔는지, 왜 굳이 원치도 않을 방문을 했는지 따져 물을만한 점은 적지 않다. 하지만 너무나도 당당한 그의 태도에 티엔은 말을 꺼낼 의욕 자체를 잃고 말았다.
마지못해 그와 마주보고 앉았을 때, 끊임없이 말을 하는 것 치고 사내는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다. 티엔 측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런 연유로 둘 사이의 대화는 바람처럼 가볍고, 도랑처럼 굽이쳤다. 그 중 티엔의 대답은 대부분 매우 짧거나 혹은 존재조차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바로 어제는 말이죠……”
그 자는 신기할 정도로 일대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산중에 어느 늙은 나무가 쓰러졌다느니, 서쪽 마을의 어느 집 여식이 혼례를 올렸다느니. 그 중 몇 가지, 특히 산에 관한 이야기들은 티엔도 알고 있는 바였기에 그 기묘한 사내는 과하게 수상할지언정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허풍쟁이는 아닌 것 같았다.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 있던 티엔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즈음 선물이라던 간식거리들은 결국 전부가 원 주인의 뱃속으로 떨어져 있다. 손님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서는 집주인이 마지막으로 돌아봤을 때, 서늘함이 서렸다 여겼던 옅은 눈은 이번엔 약간의 서운함을 담고 있었다.
슬슬 때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에는 어긋남이 없었다. 받지도 않을 선물을 핑계로 찾아오는 사내는, 슬슬 티엔도 그가 범인(凡人)이라 여길 수 없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뭔가 특별한 모습을 보이는 건 아니었다. 외모나 온갖 특이한 점들이 무색하게도 그 자는 단지 티엔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달빛이 고스란히 방 안에 고여 연못을 이루고 있던 밤이었다. 창밖의 나무그림자가 수초 마냥 흐늘거리며 티엔의 팔을 살며시 간질였지만 그의 심기는 여느 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익숙해진 방문도 이 날만은 때가 좋지 않아, 티엔은 평소보다도 과묵했고 사내는 간간히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며 홀로 호박색의 액체를 홀짝였다.
언제나와 같이 잔은 둘이었다. 이제껏 티엔은 그가 권하는 것들을 받아먹은 적이 없었고, 상대는 그저 마음이 동한다면 언제든지, 라며 그의 무관심을 웃어넘겼다. 그런 사정이 있었기에 티엔이 잔에 손을 뻗었을 때 사내는 약간의 놀라움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첫 찻물을 씻어내듯 입에 대지도 않은 술을 반상 위로 흘려버렸다. 맑게 빛나는 작은 웅덩이가 금발 사내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비추었지만 티엔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왜요, 이런 건 입에 안 맞나요?”
그는 보이는 기색에 비해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뱀 그림자가 비치기에.”
그 말의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티엔이 지금까지 보였던 것 중 가장 무례한 행동에도 사내는 예의 그 낯익은 웃음을 입에 올렸다.
“달이 이렇게 좋은데 아쉽네요.”
그 말대로 이 날은 달무리를 두른 보름달이 휘황하게 떠있다. 단지 그 점이 티엔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점을 사내는 알지 못할 뿐이다. 흘려버린 술이 아쉽다는 듯 그는 자신의 잔을 다시 한가득 채워 넣었다.
“당신은 혼자인데 쓸쓸하지 않아요?”
“전혀.”
단호한 대답에 금발의 앳된 청년은 약간 씁쓸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간 외롭게 죽을 거예요.”
티엔의 입장에서,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잘도 악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어차피 죽는다면 차이가 있나?”
“글쎄요. 아마…… 조금은 덜 비참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나는 이미 비참하게 죽었다는 뜻이로군. 티엔으로서는 드문 차가운 비아냥거림이 그의 머리를 채웠다. 바로 이런 달이 떴던 날에 그의 숨은 한 번 멎었던 적이 있다. 그날 이후 티엔은 나아갈 길을 잃었다.
“당신은 뭐에 그렇게 화난 거예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티엔은 자신의 생각이 그렇게나 쉽게 드러났는지 의아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 의문은 지금 그가 보였던 반응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무슨 말이지?”
“언제나 화나 있잖아요. 아니에요?”
말문이 막힌다. 이제까지 아무도 그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 긴 시간 동안 그의 곁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오랜 날이 지나고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고. 그는 자신이 단지 이전의 치열했던 날들을 그리워하고 있다고만 여겼다.
“너는 내게 뭘 원하지?”
“아무것도요.”
“그렇다면 왜 여기에 있나.”
“당신이 저와 닮은 건 아닐까 싶었죠. 그런 사람이 외롭게 죽을까봐 걱정했다는 건 어때요?”
불확실한 대답은 티엔을 거슬리게 했다. 그는 아직 손에 쥐어져있는 잔 바닥에 찰랑이는 액체를 들여다보았다. 그를 배신했던 자들은 이미 없고, 이제는 자신이 가진 노기가 누구를 향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적어도 그게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든 호의를 가진 이를 향해서는 안 된다는 걸, 그는 머리로 이해하고 있었다.
“뱀은 갔나요?”
화를 누그러뜨린 티엔이 작게 숨을 내쉬자 사내는 언제나와 같이 빙긋이 웃었다. 여전히 뻔뻔한 그 모습에, 방황하는 선인은 지금껏 성가시게만 여겼던 그 존재에게 약간의 미움을 가져보기로 했다.
非人
어느 곳인가, 본성과 어긋나는 일들을 해내는 기이한 것들이 있었다. 닿지 못할 곳에 능히 닿으며 다른 존재의 모습을 빌릴 줄 아는 그것들은 실로 선(仙)의 영역에 닿아있었다. 그러나 그것들 사이에서 난 작은 것은 낑낑대며 울 줄만을 알 뿐이라, 두 짐승은 젖을 뗀 자식아이에게 풀을 먹는 것들을 사냥하고 사람을 피하는 방법을 가르쳐 세상에 내보냈다. 홀로 땅 위에 선 그것은 부드러운 금빛 털가죽을 가진 유려한 몸체의 여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작은 포식동물로서 넘치도록 영특했던 여우는 남들보다 눈에 띄는 털빛을 가지고도 살아가는 데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털북숭이들과 날개 달린 것들을 사냥했고, 한 번 사람이 길러낸 것들의 단맛을 알고서는 종종 마을로 내려가 그들의 수확물을 눈에 띄지 않을 만큼 훔쳐내기도 했다.
어쩌면 여우는 어디선가 다른 영리한 암여우를 만나 유대를 맺고, 이전에 제 부모가 그랬듯 후대를 길러 내보내는 그야말로 여우다운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뒤늦게 보이지 않던 것이, 들리지 않던 것이 그것에게 흘러들며 근심 없던 짐승의 삶은 멀어지고 말았다.
본래 하던 대로 사람을 피하며 살다가도, 원치 않게 이해하게 되어버린 그들의 말에는 호기심이 동하고 만다. 자신이 사람의 모습을 취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여우는 망설임 없이 그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처음 보고, 듣고, 먹고, 입는 것들. 한 차례의 혼란이 지난 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여우는 누군가를 속였고 한편으로는 그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렇게 하면 그들이 기뻐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놀라워했고 또 사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결국은 싫증이 났다. 점차 말뿐만이 아니라 사람의 속내까지 알게 되어버린 탓이 컸을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영특한 요물이라 하여도 이전까진 아무도 그에게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여우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몇 번의 실패와 실망 끝에 이질적인 존재는 정착하지 못한 채 긴 시간을 떠돌았다.
처음 그의 소문을 듣고서, 여우는 그가 혹시 자신과 비슷한 것인가 싶어 반쯤 억지로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나 여우의 기대와 달리 그들의 공통점은 사람을 닮았다는 것뿐이었다. 평범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인지 여우는 그의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늘 화나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 몸을 가지고도 무엇이 그리도 억울한지. 뜻밖에도, 그 점을 지적했을 때 그는 전에 없이 동요한 모습을 보였다. 그건 반쯤은 여우가 그에게 부리는 심술이었음에도.
“네 머리색과 닮았군.”
그가 무심하게 던진 한 마디가 계기였다. 여우는 잠깐 동안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여우가 그에게 보인 건 어느 개울가에서 주운 황옥 요패(腰佩)였다. 여우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사람 남자의 모습을 취했으니 본래라면 그의 말은 터무니없는 소리다. 하지만 여우의 털빛이라면 분명 그 빛깔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렇게나 이질적인 모습으로 보였음에도 별 말이 없던 그는 무심한 걸까, 아니면 단순히 관심이 없는 걸까. 다른 이들과 달리 자신을 길가의 돌멩이 보듯 하는 그의 태도가 시원섭섭하면서도, 여우는 그가 드물게 보인 뜻밖의 관심에 자신의 마음이 들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 이름을 말한 적이 있던가.”
어느 날인가 그가 던졌던 질문도 그 드문 관심 중 하나였다. 과연 이름을 안다고 그걸 부르기나 할 생각이었을까.
“글쎄요. 그러는 당신은요?”
웃으며 답해 넘겨버렸지만 대답이 궁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까지 여우가 써왔던 이름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빌린 것들뿐이라, 새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는 않지만 만일 그가 정말로 그런 가칭을 불러준다면 기분이 썩 좋지 못할 것 같았다.
다행인지 그는 다시 여우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일도 없었다. 언제나 둘뿐인 그들 사이에는 너, 당신. 그 정도의 호칭만으로 충분했던 탓이다.
한동안 못 올 거예요.
작별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을 때 그는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끝까지 무어라 말을 꺼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오히려 죄책감을 느꼈던 건 여우가 아는 한 그는 그런 표정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그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기에 꿈속의 사람에게 그런 얼굴을 하게 만들었는가. 여우는 깊이 생각해보았지만 전에 없던 애매한 관계에 요물은 이렇다 할 결론을 낼 수 없었다.
꿈과 함께 찾아온 구체적이고 불길한 예감에 먼 길을 떠나며, 여우는 꿈의 내용과 달리 그에게 인사를 남기지 않았다. 어차피 기다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과 자신을 기다려주길 바라는 마음이 뒤섞여 발걸음을 붙잡았지만─ 이미 떠난 길을 뒤돌기에는 남은 시간이 너무도 적었다. 게다가 그는 언제나 그 자리에 멈춰있을 테니까.
아주 오랜 시간 네 발로, 그리고 두 발로 걸어 도착한 곳은 한때 여우가 찾아가곤 했던 도성의 번화한 거리였다. 전보다도 화려해진 그곳은 장이 서지 않는 날임에도 인파의 웅성임과 음식점의 고소한 기름 냄새로 가득했다. 그곳에는 여우가 어설프게 사람과 같고자 노력했을 때 가까워졌던 지인이 있다. 멀리서 도성을 구경하러 온, 어느 부유한 집안의 넷째 아들이라고. 그런 성의 없는 사칭과 몇 가지의 편법으로 그럴듯한 우정을 쌓았던 둘은 결국 여우의 거짓이 들통 나며 깨져버렸다.
이 여우 같은 영물과는 달리 사람은 빠르게 늙어간다. 여우가 조용히 들어선 어느 방 안에는 낯선 얼굴을 한 주름진 노인이 화려한 비단 침상에 누워 멍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누구냐. 전과 아주 똑같은 모습이구나.”
가만히 다가간 젊은 얼굴을 알아본 늙은 친구가 한숨을 섞은 말을 토해냈다. 그 안에 원망은 비치지 않지만 여우의 어깨는 작게 움츠러든다.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까봐서 이전과 같은 모습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가 이런 이질감을 미워할까봐서 여우는 한동안 문 앞을 서성이고만 있었다.
“그래, 슬슬 그럴 때가 되었단 말이지……. 아직도 사람들을 속이고 다니는 게냐?”
여우가 찾아온 이유를 그는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물음은, 그가 아직 옛 친구를 용서하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미안해요.”
그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기력을 다해가는 벗은 그 이상 여우를 추궁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쌓은 것들을 볼 때마다 네가 떠올랐었지.”
그의 말은 호의의 뜻이 아니다. 일개 상인이었던 그에게 여우의 ‘선의’는 한때 그를 비참하게, 또 분노케 했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제가 떠난 이후로 모든 건 전적으로 당신의 수완이었어요.”
“그래…….”
벗은 드디어 짐을 내려놨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쁘지 않은 삶이었지.”
옛 추억을 떠올리던 노인은 마지막으로, 옛 친구가 바랐을 한 마디를 어렵게 입 밖으로 꺼냈다.
“찾아와주어 고맙구나.”
벗의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을 때 여우는 일부러 인기척을 내어 사용인들의 주의를 끌었다. 몰래 지켜본 그의 마지막은 결코 편안했다곤 할 수 없지만 노인은 끝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아마 한 번 숨이 멎고도 땅에 매여 있는 듯한 사람을 알기는 하지만 다른 평범한 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여우는 조금 울었고, 그것은 곧 낌새를 차리고 짖기 시작한 마을의 개들을 피해 다시 먼 산속으로 떠나버렸다.
여우가 돌아온 건 그가 마지막으로 들렸던 날과 같이 그믐달이 뜬 밤이었다.
마치 어제도 그랬다는 양 태연한 얼굴로 찾아온 여우는 짭조름한 무떡과 약간 술냄새가 나는 달큰한 산사육(山査肉)을 들고 있었다. 단출한 암자 앞에 선 그는 여전히 놀랍도록 같은 모습이었고, 그건 여우도 마찬가지다.
“오랜만이에요.”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네는 여우에게, 남자는 길게 침묵하고는 겨우 한 마디를 답한다.
“다시 오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럴까도 생각했죠.”
어린 호선(狐仙)의 말은 진심이다. 먼 옛날처럼 평범한 여우의 삶을 사는 게 옳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오래도록 했었다. 하지만 이미 알아들을 수 있게 된 말들을 무시하기란, 그리고 이미 맺은 관계를 포기하기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부산스러운 준비가 끝나자 어느새 뭉근한 화톳불 위에 황주(黃酒)가 데워지고, 두 비인(非人)은 따스한 기운이 피어오르는 곁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잔을 채운 호박색의 술. 여우는 기억을 더듬어 그리 유쾌하지 않았던 그 날의 대화를 떠올리곤 자조의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예전에 했던 말은 취소해야겠어요.”
그리 매끄럽지 못한 대화의 흐름에도 그는 언제나와 같이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린다. 어쩌면 관심이 없기 때문일 수도, 또 어쩌면 해야 할 말을 모르기 때문일 수도.
“외롭게 죽는 건 제가 될 것 같네요.”
늙고 쇠약해져 누군가를 마음대로 휘두를 기력도 남지 않았을 때에, 외롭게, 혼자서, 곁을 지켜줄 사람도 없이. 아마 그게 거짓을 살아온 대가가 될 거라고 여우는 생각했다. 아직도 그게 어째서 잘못인지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누군가는 그게 잘못이었다고 말했다. 여우는 결국 죄책감을 가졌으므로 그의 말은 옳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
뜻밖의 단어의 조합에 여우는 놀란 눈으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날의 그는 예의 그 화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어쩌면 오히려, 그 표정은 언젠가 꿈속에서 보았던 모습과 닮아있기도 했다.
“제가 싫지 않다는 말이에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지만 그는 여우의 해석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여우가 건넨 술잔을 매만지다 천천히 입가로 가져간다. 여전히 대답은 없지만 여우는 조금 더 오래, 천천히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평범하지 않은 그 둘에게는 아직 꽤 긴 시간이 남아있었다.
호선(狐仙): 중국 전설 속 여우가 도를 닦아서 되었다고 하는 신선.
시해선(尸解仙): 도교가 분류하는 선인의 한 종류. 도사가 육신을 버리고 선인이 되거나, 죽은 후 유해를 남기지 않고 혹은 유해의 대체품만을 남긴 채 선인으로 화한 경우.
배중사영(杯中蛇影): 술잔 속의 뱀 그림자. 스스로 의혹된 마음이 생겨 고민함. 의심암귀로 인한 두려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엔마틴] (케이크버스AU) Custard [19] (0) | 2016.07.07 |
---|---|
[하랑마틴] 선잠 (0) | 2016.06.15 |
[벨져릭] 만남 (0) | 2016.06.08 |
[티엔마틴] (케이크버스AU) Afternoon tea (0) | 2016.05.29 |
[티엔마틴] 남은 것이 없기를 바라며 (0) | 2016.04.02 |
글
까치님의 리퀘로 벨져와 릭의 첫만남&첫인상을 써보았습니다'ㅅ')9
에피소드, 벨져 애니 등을 참고.
처음 써보는 커플이어서 여러가지로 알아보는 게 재밌었어요!
거대일식과 함께 사막 한가운데에 떠오른 환영의 도시. 그 거대한 기계의 다발이 내뿜는 찬란한 빛은 끊임없는 모래바람 속에서도 건재하게 자신의 위용을 뽐낸다. 일찍이 본 적 없는 기술로 짜 맞추어진 메트로폴리스의 등장은 긴 시간에 걸쳐 수많은 무력과 정치상의 분쟁을 불러일으켰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이곳을 일부러 찾는 이들은 한가하거나 열성적인 학자들뿐이다. 단, 이 도시로 숨어든 누군가를 쫓기 위해서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추격자들 중 한 명. 낡은 로브로 전신을 감싸고 있는 은발의 사내는 모래의 바다를 내다보며 ‘숙녀’가 남긴 말을 곱씹었다. 본래의 목적이었던 액자의 회수는 뒤로 미뤄졌지만 그것은 자의에 의한 선택이다. 시바 포는 그의 우선순위가 안타리우스에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짧은 대화 속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한 그들은 이날의 충돌을 다른 언젠가의 것으로 남겨두었다.
그의 짧은 기다림은 무료함과 거리가 멀었다. 남자는 그의 허리춤에 메여있는 두 자루의 검을 차례로 손질하며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인기척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의 추측이 맞는다면 여배우가 언급한 ‘신사’는 그의 등 뒤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기계의 웅성임이 가득한 이곳에서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사람의 소리를 경계하는 것. 물론 그건 그에게 있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남자가 멀리 내다본 사막의 풍경은, 메트로폴리스의 불빛과 밤하늘에 수놓인 별들의 빛으로 선명하게 반짝이는 모래언덕의 윤곽이 마치 몰아치는 파도와 같았다. 장대한 자연의 조소를 감상하는 것도 잠시. 어느 순간 모래의 바다 사이에서 일어난 기이한 현상이 그의 눈에 똑똑히 새겨진다. ‘공간이 일그러졌다’는 생소한 표현이 어울리는, 뒤섞인 색채와 야릇한 광채로 이루어진 둥근 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새겨졌던 점은 이내 흐릿한 사람의 형체를 뱉어냈다. 담담히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남자는 곧 이어질 예정 조화의 사건을 기다렸다.
“누가 이곳으로 오는지 기다리고 있었네. 나, 시바 포, 그리고 네가 세 번째. 나와 동행할 자격이 있군.”
메트로폴리스의 세 번째 방문자. 사막에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차림에, 암살자를 추격하는 도중임에도 빈틈이 곳곳에 엿보이는 그야말로 일반인다운 경계의 태세. 이 남자, 릭 톰슨이야말로 시바 포가 지명한 루사노 수도원으로의 안내자였다. 그러나 오직 액자도둑의 이름에 정신이 팔린 그는 눈앞의 낯선 이가 누구이며 왜 여기에 있는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시바 포……! 그녀를 찾아야 해. 그녀가 노인의 액자를 가지고 사라졌어.”
까딱, 후드를 쓴 남자의 고개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기울어진다. 여행자의 목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어쩌면 시바를 놓친 책임의 일부는 그녀를 놓아준 이에게 있지만 그렇다고 죄책감을 가질 이유나 필요가 있을 리 없다. 이토록 쓸모 있는 능력을 가지고도 뒤늦게 도착한 건 다른 누가 아닌 릭 톰슨 자신의 책임이었다.
“흠, 이런. 그녀는 이미 이 곳을 떠났네. 액자는 그녀가 며칠 더 갖고 있기로 했어.”
무심한 대답에 릭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에게는 전투도, 누군가를 추격하는 것도 모두 난생 처음의 일이다. 그의 첫 전투는 기대 그 이상의 성과로 모두를 놀라게 했지만, 그렇다고 후자가 순조로우리라는 예상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었다. 릭이 가진 단서는 여배우가 남긴 ‘메트로폴리스’라는 단어 하나뿐. 직전까지 느끼던 긴장과 전혀 다른 의미의 거친 맥박이 머리를 통해 전해지고, 결의를 담았던 눈망울은 순간 빛을 잃어버렸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만 것이다.
한 여행자의 절망의 순간을 감정 없이 목도하던 은발의 남자, 벨져 홀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가 릭에게 시바 포의 부재를 전한 것은 그를 포기하거나 주저앉게 만들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정보를 줄 수도 있지.”
릭의 표정이 눈에 띄게 변하고, 벨져는 그가 꽤나 알기 쉬운 종류의 남자임을 확신했다. 그래, 분명 이 공간능력자는 이런 세계와 어울리지 않았으며 자신이 속해야 할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벨져가 그에게 동정을 느낄 여지는 없다. 그건 이 오만한 검사의 성격 탓만은 아니었다. 설령 정 반대의 상황에 놓여있었다 하더라도 벨져는 상대가 쓸데없는 감정으로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키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자신의 조건의 제시했다.
“하지만 먼저 날 루사노 수도원으로 데려다 주게. 그 곳에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어.”
루사노. 그 단어에 릭은 단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안타리우스는 이미 자신과 다른 이들의 손으로 파괴되지 않았던가? 시바와 액자를 제쳐두고 이미 비어있을 그곳을 찾아가려는 남자의 의도를 여행자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벨져 홀든이다. 네 이름은?”
홀든. 그 귀족가의 성과 후드 사이로 엿보이는 은발, 유창하면서도 독일어의 특색이 느껴지는 억양으로 릭은 그가 인형실 끊기 작전을 함께한 다이무스의 혈연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직전에 피어올랐던 의심이 다소 허물어지고, 릭은 높였던 언성을 억누른 채 그의 물음에 답했다.
“릭. 릭 톰슨.”
벨져는 다소 낯선 신대륙의 이름을 혀끝에 굴려보았다. 품위는 느껴지지 않지만 나쁘지 않다. 그리고 벨져 홀든은, 그들이 마주한 이래 처음으로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릭, 루사노는 당신에게도 꽤 흥미로운 장소일 거야.”
릭은 그의 단언이 단지 자신의 주의를 끌고자 하는 수단인지, 아니면 모종의 오만인가를 판단할 수 없었지만 자신이 그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할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짧은 한숨을 내쉬고, 릭은 더 이상 스쳐가는 인연이 아니게 된 그의 얼굴을 자신의 눈에 새기듯 담아 넣었다. 은발과 옅은 녹안,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창백하게 빛나는 피부. 날카로움과 수려함을 겸비한 그의 얼굴은 아마 릭의 결심이 없었을지라도 뇌리에서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좋아. 대신 약속은 지켜주시오.”
“물론.”
체념과 동시에 다른 종류의 의지를 띄우는 릭의 눈빛에, 벨져는 합격이라는 평가를 부여한다. 험난한 길을 헤쳐가게 될 것이 자명하지만, 어울리지 않는 세계에 내던져졌음에도 도망치거나 그대로 멈춰서 짐덩이가 되지 않으려는 남자. 그런 릭 톰슨은 잠깐의 동행으로 불쾌하지 않은 자였다. 그렇다곤 해도, 이 위험할지 모르는 탐색에서 벨져가 지켜내야 할 짐짝임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렇게, 서로 다른 목표와 결의를 가진 그들은 짧은 여행길에 올랐다.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랑마틴] 선잠 (0) | 2016.06.15 |
---|---|
[티엔마틴] 티마 동양고전AU 합작글 (0) | 2016.06.12 |
[티엔마틴] (케이크버스AU) Afternoon tea (0) | 2016.05.29 |
[티엔마틴] 남은 것이 없기를 바라며 (0) | 2016.04.02 |
[티엔마틴] 금목서 (0) | 2016.03.28 |
글
[티엔마틴] (케이크버스AU) Afternoon tea
별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해당 세계관의 특성상 식인소재가 포함됩니다.
거부감이 있으신 분은 주의해주세요.
어쩐지 조용하다는 생각은 했다. 그래도 이런 모습을 예상하기에 그는 말도 안 되게 철저했기만 했던 사람이었다. 세상에. 그 티엔 정이. 어쩌면 이건 함정 같은 게 아닐까.
문화충격과 비슷한 것을 경험하고 있는 마틴의 눈앞에 있는 건 무방비하게 낮잠을 청하고 있는 티엔이었다. 시간대도 그렇지만, 마틴의 기억 속에는 잠들어있는 티엔이라는 항목 자체가 존재하지를 않았다. 지극히 평범한-단, 서로의 존재감이 과할 정도로 강했던 걸 제외한다면-직장동료로서 함께 일할 때는 물론 그의 집에 수시로 들락거리게 된 이후에도 말이다. 티엔 정은 늘 애인보다 늦게 잠들었고 또 일찍 깨어났다. 처음에는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느냐며 질려하던 마틴도 시간이 흐른 후에는 별 감흥이 없게 되었다. 어쨌거나 그는 다른 누가 아닌 티엔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런 티엔이 마틴이 있는 집 안에서 눈을 감고, 창문을 등지고서 몸을 약간 옆으로 웅크린 채 규칙적으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청년은 이 날 그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인과관계와 그에 따른 놀라움은 별개의 것이다.
“티엔?”
대답은 없었다. 마틴이 조심스럽게 침대 가장자리에 자리 잡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달콤한 체향에 가슴이 뛰는 포식자가 곰곰이 생각한다. 아주 어쩌면 드디어 이들 사이에 신뢰관계라는 것이 생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건장한 사내가 결코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틴은 차마 그의 신뢰를 저버릴 만큼 부도덕하지 못하다. 아주 약간, 정말로 약간 맛을 보는 정도라면 모를까.
한참동안 고뇌하며 그를 지켜보고만 있던 마틴이 처음으로 닿을 부위를 그의 입술로 선택한 건─ 아마도 변명의 여지를 붙잡아두고자 하는 판단이었다. 신중하게 혀끝으로 살짝 핥아본 살덩이는 그의 몸이 좋지 않은 탓인지 약간 까슬하게 일어나있다. 그 감각은 여러모로 마틴에게 사탕을 감싸는 비닐껍질을 연상시켰다. 이 감질 나는 단맛과 비교도 안 되는 진한 달콤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마틴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다음으로는 그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어 보았다. 은은하게 전해지는 감미로움에 수려한 얼굴 한가득 미소가 번지고, 그가 깨어날까 조바심을 내면서도 마틴은 평소보다 진하고 깊은 입맞춤을 즐겼다. 정의하기 힘든 관계의 그들은 일단 연인의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포크의 속마음을 아는 티엔은 입을 길게 맞대는 걸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보통이라면 이 절반의 시간이 흘렀을 즈음 마틴은 억지로 떼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정말로, 그건 상상만큼이나 나쁘지 않았지만. 아직 부족했다. 축축하고 달콤한 키스가 끝나고도, 그토록 원하던 만큼의 접촉에도 포식자는 만족할 수 없었다. 한 번 맛을 본 그의 혀는, 그리고 달아오른 머리는 타액보다 좀 더 진한 것들을 원하고 있었다. 애초에 마틴의 안에 잠들어 있는 건 그를 끝까지 씹어 먹기 전에는 멈출 수 없는 욕망이고 본능이었다.
아주 약간은 괜찮지 않을까. 그는 자신을 좋아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관계가 발전할 수도 없었을 테니 마틴은 그 점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니까, 티엔은 이 정도 실례를 눈감아줄 수도 있을 터였다.
마틴은 자신의 뭉툭한 송곳니를 의식하며 눈앞에 얌전히 놓여있는 케이크를 탐하고자 했다. 팔? 아니, 그건 일부러 좋지 않은 기억을 건드리는 짓이다. 어깨? 아, 나쁘지 않다. 씹는 순간의 단단한 식감이 황홀할 게 틀림없었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마틴은 작게 입맛을 다셨다. 바로 그때였다. 커다란 손이 그의 머리를 억지로 단단한 품 안에 가두어버린 것은.
“그만.”
화들짝 놀라는 몸의 반응은 분명 밀착되어 있는 그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그만큼 마틴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자신의 입가에 모든 감각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아쉬움과, 부끄러움과, 미안함, 뭐 그런 것들이 순간 뇌리를 스치며 청년은 얼굴을 붉혀버렸다.
“비겁해요.”
“적어도 비열하진 않지.”
역시 깨어있지 않았느냐는 불평의 뜻이었지만 상대를 한 입 베어 먹으려 들었던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나름의 배려로 상대가 하는 짓을 내버려뒀던 이에게는 더더욱. 아주 잠깐 버둥거리던 금발의 포크는 티엔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마음을 단념했지만 그의 팔 힘은 풀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저 요거트가 먹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며 슬쩍 올려다본 티엔은, 피곤에 절어있던 사람을 깨운 걸로도 모자라 당당하게 먹을거리를 요구하는 태도에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마틴은 마틴대로 한껏 달아오른 식욕을 잠재울 방도를 찾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뻔뻔해도 당신을 한 입 먹고 싶다고 요구할 수는 없었으니까.
“대단하기도 하군.”
또 한 차례 가볍게 목숨을 위협 받아 심기가 불편한 가운데서도 티엔은 속으로 셈을 두드렸다. 최소한의 대가, 최대한의 효율. 많은 부분이 그의 양보로 이루어진 타협이 없었다면 애초에 이 둘의 관계는 성립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더 달라는 말은─”
“안 해요. 안 할 테니까.”
전날의 과오를 급히 무마하는 연인 겸 육식동물을 내려다보며 티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거운 몸을 일으키는 그는 앞으로 다시는 빈틈을 보이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있다.
“고마워요.”
침대 한가운데 내버려진 마틴은 그의 등 뒤로 감사인사를 보냈다. 사실 요거트 자체는 포크에게 있어 다른 무미무취의 음식들과 다를 바가 없다. 단지 그는 이제 어릴 적 탐닉하던 메이플 시럽보다도 달콤하고 선명한 빛깔의 액체를 알고 있었다. 게다가 더할 나위 없이 신선하기까지.
기대감에 부푼 마틴은 그의 케이크가 잠들어 있던 이불 속에 머리를 파묻었다. 결코 끝까지 만족할 수는 없다. 그런 아쉬움에 헐떡이면서도 그는 지금의 삶을 행복이라 여겼고, 자신의 존재를 용납해주는 티엔 역시 같은 마음이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엔마틴] 티마 동양고전AU 합작글 (0) | 2016.06.12 |
---|---|
[벨져릭] 만남 (0) | 2016.06.08 |
[티엔마틴] 남은 것이 없기를 바라며 (0) | 2016.04.02 |
[티엔마틴] 금목서 (0) | 2016.03.28 |
[티엔마틴] (케이크버스AU) Main Dish (0) | 2016.03.22 |
글
[티엔마틴] 남은 것이 없기를 바라며
사귀던 건 예전의 이야기, 일종의 후일담 같은 느낌으로.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좋아요.
“어, 음……. 정말이요?”
그 긴 시간만의 연락이 이런 내용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마지막이 언제였는지도 까마득한 통화에서, 티엔이 웃음기 하나 없는 목소리로 전한 희보는 그들의 공통의 지인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의 제자이자 마틴의 친애하는 동료인 이하랑이 드디어 결혼을 준비하고 있노라고. 이제 마틴은 전화 상대와 그가 전한 이야기 중 어느 쪽에 더 놀라움을 표할지를 고민해야만 했다.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그거 축하할 일이네요.”
사실 하랑에게 만나는 여성이 있다는 사실이나 그게 누구이며 그들이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까지도 마틴은 꽤 자세히 알고 있었다. 물론 그건 하랑 본인의 입을 통해 들은 이야기로, 단지 그 중 식을 올릴 일정에 관해서는 금시초문이었다.
“아직 확실치는 않다 했지만, 내게 알렸으니 그렇지도 않을 것 같군.”
과연. 하랑이 정식으로 알릴 생각이었다면 마틴은 결코 이 사람에게서 먼저 그 소식을 들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가 이런 말을 굳이 전하고자 한 이유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았다. 티엔 정과 마틴 챌피, 둘 사이의 연락은 티엔이 재단을 떠난 이래부터 끊겨있었다. 분명 간접적으로는 서로의 근황을 듣고 있지만 서로간의 소통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없다.
때로 마틴이 지나가듯 티엔에 대해 물을 때면, 하랑은 그들 모두 언제까지 이럴 거냐며 비아냥대곤 했다. 그건 그러니까─ 티엔 측에서도 그와 비슷한 태도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말이다만.”
이게 본론이로군. 오랜 공백의 기간 끝에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서 손을 내밀었을지 마틴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티엔은 예전부터 도무지 읽어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남들은 대개 그가 알기 쉽다고들 했지만, 글쎄. 그래서 대체 뭐지? 어차피 얼굴을 보기 전에 화해라도 하자는 건가. 그러나 분명 그들의 마지막에는 서로의 잘못이 아니라는 협의가 함께했었다.
이렇다 할 결론은 떠오르지 않은 채로, 마틴은 숨을 죽이고 티엔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축사를 부탁 받은 참이다. 그런 일엔 익숙하지 않아 도움을 받고 싶군.”
“……아, 네. 2년 만에 연락을 한 이유가 그건가요?”
대답은 없었다. 실망을 하기엔 스스로가 우스워 그런 마음을 억눌렀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그 사이 그도 많이 변해 있어서, 그런 이유를 핑계로 다른 이야기를 꺼내고 싶은지도 모른다고.
“그래요, 뭐. 안 될 건 없네요. 안 될 건 없어요. 그런 건 없겠지만…….”
하지만 그런 기대를 가지기에는, 좋지 않았던 끝에서, 과정에서, 그리고 남은 모든 기억들에서 쓴맛이 배어났다. 거절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마틴은 이 부탁을 몇 마디 간단한 조언만으로 끝낼 수도 있었다. 마음이 전해진다면, 그저 생각하는 바를 표현하면 그걸로 되는 게 아니겠냐고. 실제로도 그는 티엔에게 그 이상 무얼 더 알려줄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됐어요. 그럼…… 제가 그쪽으로 가면 될까요.”
그런 모든 생각에도 불구하고 마틴은 결국 그의 요청을 승낙하고 말았다. 정말로 그런 바보 같은 이유라고 해도 부탁을 거절한다면 이게 마지막 통화가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마틴은 그런 결말을 원하지 않는다. 충분히 할 수 있었던 연락을 하지 않은 것은 스스로도 마찬가지였음에도.
“그럴 필요 없다. 중간지점으로 하지.”
역시 그는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 마틴은 헛웃음 같은 것을 흘리며 그의 바람대로 장소와 시간을 조율했다. 서로에게 공평하게. 누구 하나를 위한 배려 따위는 없도록.
연락이 끊기기 직전, 그들 사이에 특정한 불화 같은 것은 없었다. 표면상으로는 확실히 그랬고 그들 자신도 그 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차라리 어떤 특정한 사건이 있었다면 그와 지금만큼 껄끄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서히 멀어진 사이는 단숨에 깨진 사이와는 또 다른 단절의 벽이 있다. 우연히 다시 마주쳤을 때 아무렇지 않은 대화를 하고선 영영 돌아서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유리벽.
“─오랜만이로군.”
“이게 얼마만이죠.”
그들의 재회에 극적이랄 것은 무엇 하나 없었다. 약속장소인 카페에 먼저 발을 들인 건 마틴이었고, 티엔은 마치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정확한 시간에 맞추어 도착했다.
상대의 어디가 얼마만큼 변했는지 말로 할 수는 없었다. 그의 결함은 그대로였고, 마틴은 시선을 그 방향으로 향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 다음은 무슨 말을 꺼내야 했을까. 보고 싶었어요. 글쎄. 실천의 부재라는 점에 있어서 그건 일종의 뻔뻔함이다.
“좋아 보이네요.”
오는데 불편하지는 않았어요? 그런 일상적인 물음마저 목구멍에 눌러 담으며 마틴은 완전히 거짓이 아닌 감상을 입에 담았다.
“당신도 그렇군.”
그리 성의가 담기지 않은 듯한 가벼운 인사가 오가고, 간단한 주문을 마친 그들은 조용히 서로의 시선을 피해 공허한 눈빛을 먼 곳으로 흘려보냈다.
“아직 죽지 않았네요. 둘 다.”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었으니까, 몇 년 뒤엔 누구 하나가 세상에 없을 수도 있지 않겠냐고, 그들은 언젠가 그런 요지의 대화를 나누었던 적이 있다. 아마 티엔도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그래. 아직은 그런 것 같군.”
다행히도 어색한 공기를 누그러뜨릴 차기는 너무 늦기 전에 테이블 위로 정갈히 올려졌다. 청년이 주전자의 따듯한 액체를 잔에 옮겨 담자 그 위로 옅은 김이 피어올랐다.
“축사라……. 그 덕에 절 다 부르고, 여전히 제자를 끔찍이도 아끼시네요.”
“갑작스러운 부탁에 응해주어 고맙다. ……제자 녀석에게는,”
찻잔을 넘겨받은 그는 가볍게 말을 이었다.
“이제 다른 건 더 이상 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담담한 티엔의 말에 마틴은 막혀있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마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하랑은 그런 말을 좋아하지 않을 텐데요.”
“안 그래도 정색하더군.”
그런 반응을 알고서도 기어이 같은 말을 한 건가. 이럴 때의 그는 무심하다기보다는 일부러 상대를 괴롭히려 작정한 사람 같다고, 마틴은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었다.
“그렇겠죠. 일단 그걸 판단하는 건 당신이 아니니까요.”
티엔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불편한 다리도, 힘없는 손도, 아무렇지 않다며 끝없이 결함을 비통해하는 그 말들도. 설령 무언가 달라졌다 할지라도 그걸 받아들여야 하는 이에겐 여전히 그 모든 게 끔찍했다.
마틴은 아직 뜨거운 찻주전자를 손 안에 가볍게 쥐어보았다. 그건 마치 그를 대할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고, 금발의 청년은 속으로 웃었다.
“그 하랑이 벌써 결혼이라니. 하긴 그럴 때가 됐기는 하죠. ……당신은 아직 결혼 생각이 생각 없어요?”
“그건 농담이라고 하는 소린가?”
덤덤하던 그의 말에 약간의 가시가 돋쳤다. 마틴은 자신의 말이 어떤 면에서 그의 노여움을 가장 부추겼을지 가늠해보았다. 순전한 궁금함이 없던 건 아니었다. 물론 평소라면 그런 무례한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날카로웠던 자신의 어조를 깨달았는지 그가 덧붙인 말은 약간 누그러져 있었다.
“뭐……. 저도 제 나름대로 이유가 있잖아요. 아시다시피.”
마틴은 그를 만나고서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언제나처럼 사람 좋은 매력적인 미소. 마틴의 그 얼굴은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특별한 몇몇이 없지는 않지만, 누군가와 정말 깊은 관계를 가지기란 그에게 꽤나 어려운 일이다.
다시 차를 홀짝이는 시간이 있고서 티엔은 이 만남의 명목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지금까지 영국에서의 결혼식에 참석해본 적이 없으며, 축사 외의 예의범절 등에 대해서도 간단한 설명을 원한다고. 제자쯤 되지 않으면 그는 그런 초대에 응하지도 않을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미리 알아본 내용도 있지만,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오늘 부른 이유는 정말 그것뿐인가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 마틴에게, 티엔은 자신의 찻잔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다른 이유가 더 필요했나?”
‘필요’했냐고. 그렇게밖에 되물을 줄 모르는 사람인 걸까. 아니면 정말로 일부러, 괴로움을 주려 작정한 걸까.
“적어도 그렇기를 바랄 수는 있죠.”
“예를 들면?”
“……제게 할 말이 남아있었다든가.”
이번에는 대답조차 없었다. 아니라는 확답이 없더라도, 마틴은 그에게서 들을 수 있을 말이 없으리라 직감하고 말았다. 설령 그의 안에 남아있는 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마틴은 그저 웃어버렸다.
“당신을 읽을 수 없다는 게 정말 싫어요.”
그들이 자리한 카페는 꽤 조용한 편이었다. 하지만 마틴이 조금만 귀를 기울인다면 그 주위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시끄러운 장소가 되어버릴 것이다. 음료의 맛, 마주앉은 상대에 대한 불평, 삶의 괴로움, 들뜬 마음, 불안과 음모와 말하지 않을 진실들, 혹은 그 이상의 것들도. 그렇게 아무 의미 없는 소음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도 청년은 정작 입을 다문 한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뭐, 좋아요……. 그럼 어디 반대로 해볼까요.”
“뭘 말이지?”
입가에 비아냥의 웃음을 드리운 마틴에게, 티엔은 순수한 의문을 표했다. 청년이 습관적으로 손을 옮긴 찻잔은 이미 식어있었고, 비워진 잔의 바닥에는 찻잎 찌꺼기가 가볍게 찰랑이고 있었다. 어디 맞춰보겠어? 그는 내 말을 듣고 무어라 답할까. 물론 맥없이 가라앉은 그것들은 점을 치는 데조차 쓸 수 없는 부스러진 알갱이일 뿐이다.
“할 말을 하는 거요. 아니면 속내를 까발리는 걸 수도 있고. 당신이 언제나 말했잖아요. 남의 속을 읽는 건 불공평하고, 일방적이고, 치사한 짓이라고요. 이번엔 그 반대로 해봐요. 제가 여기 온 이유는 겨우 당신의 부탁 때문이 아니에요.”
청년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차라리 이때 티엔의 눈빛이 방어적이기라도 했다면, 일말의 불안이나 불쾌함을 담고 있기라도 했다면 기분이 조금은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런 기대가 없다는 지금의 그 얼굴이 아니라. 그런 그를 앞에 두고서 마틴은 애써 자신의 할 말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전 당신이 좋았어요. 그러니까 예전의 당신이요.”
그렇다면 지금은? 그건 마틴 자신도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겨우 전화 한 통에 흔들릴 정도의 마음이란, 그리고 변치 않은 그의 모습에 추락할 정도의 마음이란 과연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그때의 티엔 정은, 더 당당하고, 확신에 차있었죠. 고집 세고 재수 없는 건 그대로지만요. ……그때의 당신은 더 강하고, 건강했지만. 그런 것보다도 그 사람은 스스로를 결함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요.”
마틴은 불필요하게 일어나는 감정을 밀어 넣으려 노력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지금 꺼내는 말은 그 날들의 잔해일 뿐이다.
“예전과 똑같기를 바란 건 아니에요. 차라리 누군가를 탓했어야죠……. 저나, 재단이나, 차라리 속 시원하게 누굴 욕하라고요. 그러면 전 다 받아줄 수 있어요.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 게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당신은 끝까지…… 전 그런 당신을 보는 게 싫어요. 괴로워요. 대체 뭘 바라는 거예요. 뭘 원했냐고요.”
만일 오늘의 그가 예전과 달랐다면, 마틴은 이 말들을 영영 가슴에 묻어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틴은 지금의 티엔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표정, 눈빛, 그리고 무엇보다 담담한 그의 대답이.
“아무것도.”
“……하.”
애초부터 기대 같은 건 없었다. 그래야만 했다. 이건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이나 같은 짓이었다.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고 해서 내면이 달라져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는 건 순진한 생각이다.
“제가, 당신을 탓해서는 안 되지만…… 절대 그럴 수는 없는 거지만…… 망가져가는 걸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줄 수는 없었어요……? 아주 조금이라도, 다른 식으로 말해줄 수는 없던 거예요?”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그 사이 마틴은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의미 없는 타인의 생각들을 머릿속에 흘려 넣었지만, 아무렇지 않다며 자신을 속이기에는 일렁이는 감정이 감추어지지 않았다.
“나도 당신이 좋았다. 그건 사실이지.”
티엔이 드디어 입을 열고, 그가 하는 잔인한 말들은 고요해진 마틴의 속으로 남김없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대로의 모습을 가장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군. ……그 정도의 감정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뿐이다. 마틴. 당신이 가지는 건 불필요한 죄책감이다.”
부족했던 건 그 자신의 배려, 혹은 노력이었을 뿐이라고. 결국 모든 건 자신의 결함 탓이었을 뿐이었노라고. 그렇게 말하는 그는 또다시 마틴이 가지는 감정들을 불필요라는 단어로 압축해버렸다.
“……제게 잘못이 없으니까 당신을 모른 척 해도 됐다고요? 그게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 같아요?”
“불쌍한 꼴이 되었다고 해서 내게 잘못이 없는 건 아니지. 그게 괴로웠다면 놓아주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게 더 나은 선택 아니었던가?”
울컥. 그들 사이의 테이블이 작게 요동치고, 마틴은 이날 처음으로 흑발의 남성에게 언성을 높였다.
“그래서 당신은 행복했습니까? 그동안 혼자서 마음껏 스스로 불쌍할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정말 그걸로 좋았던 거냐고요? 전 그저…… 당신이 나아지기를 바랐어요. 그뿐이었는데……!”
“괜찮다는 말을 듣지 않았던 건 누구였지? 날 불쌍하게 여기던 건, 내가 하는 모든 걸 그렇게 보고 들은 게 누구였는지 알기는 하는 건가?”
순간 숨이 막혀왔다.
당신을 안타깝게 여긴 게, 그게 제 잘못이었다고요? 망연한 시선을 피하는 티엔은 분명 어떤 말들을 깨물어 삼키고 있었다.
“당신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고 나는 분명 말했었다. 그걸 듣지 않은 건, 그래. 당신의 자유겠지. 그 얘기는 이제 충분한 것 같군. 본론으로 돌아가도 되겠나?”
더 이상의 진전은 없다. 그들의 사이에는 이미 진심이 전해진 것만으로는 메울 수 없는 틈이 있었다. 마틴은 고개를 두 손 안에 파묻고 연민을 원치 않는 이를 시야에서 지워버렸다.
“……그러죠. 그냥…… 대신에…… 적어도 지금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줘요. 부탁이에요.”
“그렇다면 마틴, 나를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마주본 티엔의 얼굴은, 처음으로 괴로운 빛을 드리웠다. 악의 없는 고문은 그들을 모두 절망을 느꼈던 그 날에 붙잡아두고 있었다.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릭] 만남 (0) | 2016.06.08 |
---|---|
[티엔마틴] (케이크버스AU) Afternoon tea (0) | 2016.05.29 |
[티엔마틴] 금목서 (0) | 2016.03.28 |
[티엔마틴] (케이크버스AU) Main Dish (0) | 2016.03.22 |
[티엔마틴] 평범한 이야기 (0) | 2016.03.07 |
글
[티엔마틴] 금목서
재단의 스카우터인 마틴과 마틴이 영업하려는 대상인 티엔.
름구님과 연성교환이었습니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던 그 무렵, 간혹 그의 얼굴을 스치며 간질이던 서늘한 바람에는 목서의 향이 실려 있었다. 가까이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더욱 짙은 향을 두르던 푸르고 흰 빛깔의 나무. 그곳에서 제자로서 머물던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목서꽃은 조용히 피어나 일대를 청아한 향으로 가득 채웠고, 과연 티엔은 ‘만리향’이라는 그 별명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당시의 그가 몸을 의지하고 있던 스승께서는 그 목서를 퍽 아끼셨다.
스승은 간혹 볕이 좋은 곳에 자라고 있는 그 나무를 보러 발걸음을 옮겼다. 한 번은 그도 스승의 곁에서 목서의 자그마한 꽃송이들을 올려다본 적이 있었다. 새하얀 꽃잎이며 금사 같은 꽃술이 어여쁘다면 어여쁘지만, 가까이서 오래도록 보고 있기에는 그 짙은 향에 머리가 아파왔다. 네 코가 좋은 모양이구나. 스승은 그렇게 말하며 웃으셨다.
그로부터 얼마 뒤 티엔이 가졌던 새삼스러운 불안감은 현실이 되어, 그렇게 온화하던 스승도 결국은 그를 밀어내듯 떠나보낸 이들 중 하나가 되었다. 언젠가 멀리서 찾아온 옅은 향이 그의 머리맡을 맴돌았을 때, 티엔은 씁쓸한 기억을 떠올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향이 곱다는 생각을 하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챌피씨.”
두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단단하게 붙잡은 손은 앞으로 이어질 결속의 상징이다. 눈앞의 능력자는 이제 재단의, 그리고 자신의 사람이라며, 마틴은 부드러운 미소 아래에 확신의 웃음을 띠웠다. 청년은 또 다른 자신의 당연한 성공을 자축하고 있었다.
그랑플람 재단의 스카우터 마틴 챌피. 이 자리에 오른 시간에 비해 마틴은 가히 놀라운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새로운 후원자들 중 이 청년을 통해 재단의 일원이 된 이들은 적지 않은 수를 차지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재단의 큰 전력이자 유능한 동료였고 자신들을 영입한 마틴과도 쭉 긴밀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어지간히 큰 트러블이 있지 않은 한 그들은 계속해서 재단과 함께할 것임을 마틴은 자신하고 있었다.
사실 지금의 능력자 사회에서 소속을 가지고자 할 때 그랑플람 재단은 그리 매력적인 선택이 아니다. 최초의 능력자 단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현재 재단은 그리 크지 않은 규모에,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조건을 가진 데다 근래에 들어서는 막강한 세력을 가진 회사의 견제까지 받고 있다. 설령 재단의 이념에 동조하는 사람이라도 이런 사정을 안다면 재단에 몸을 의탁하기에 회의감을 가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마틴은 그런 사람들을 ‘설득’하여 마음을 돌리는 데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스카우터 일을 시작하게 된 것도 전 후원자였던 몇몇의 마음을 돌려 다시 합류토록 한 성과를 인정받은 덕이다. 마틴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가 이만큼의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에 의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만큼 마틴에게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마인드리더가 무분별하게 사람을 불러 모은 것은 아니다. 마틴은 불필요한 이목을 끌지 않도록 주의하며 몇몇 사람들과는 그저 친분을 유지하고 재단에 좋은 인상을 가지는 정도의 선을 긋기도 했고, 재단의 이념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사람의 가입을 완곡히 거절하기도 했다. 그는 숭고한 길 재단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키워나갈 수 있음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또 한 걸음…….”
자신의 사무실에 돌아와 한숨을 돌린 마틴이 작게 중얼거렸다. 또 한 명의 후원자는 또 하나의 전력을 의미한다. 이렇게 조금씩 세력을 늘려간다면 회사가 그 사실을 눈치 챌 즈음에는 많은 일이 수월해져 있을 것이다. 어린 동생과도 같던 존재로부터 갖은 압박을 마주한 재단의 사람들은 단체와 단체 사이의 공평함이 동등한 힘에서부터 온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다. 마틴이 잊으려 노력하던 자신의 능력을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은 그런 재단을 위기에서부터 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멀기만 했다.
이번 일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니 슬슬 다음 일로 차례를 옮겨가야 했다. 마틴은 거의 반사적으로 책상 위에 놓여있던 자료를 집어 들었고, 그 위에는 이제 꽤나 익숙해진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흑백의 사진 위에서도 고집스레 자신의 빛깔을 잃지 않는 검는 머리의 남성. 티엔 정, 중국 국적, 29세. 기공 능력자. 참전 이유는 불명이며 현재 무소속. 그는 강한 능력을 가졌고, 최근 능력자들 사이의 전투에서 꽤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이곳에서 보기 드문 아시아인. 그는 현재 마틴이 바라는 재단의 방향성에 어느 정도 부응하는 인재다. 먼 대륙에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능력자가 다수 있을 것이라 추정되고, 재단의 스카우터는 티엔을 시작으로 다른 동양인 능력자를 영입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단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번 사전조사가 그리 충분하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티엔 정은 전장에 참여한지 오래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겉으로 드러난 친분관계가 매우 적었다. 그에 관해 알려진 정보도 덩달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마틴은 정보수집에 있어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지만, 이번만큼 단서가 적은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그와 직접 대면한다면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그저 그가 정말로 재단에 어울리는 인재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은 약간 꺼림칙하게 느껴진다.
우선 마틴은 그가 왜 굳이 먼 땅에까지 와서 능력자 전쟁에 참여했는지 의문을 가졌다. 전만큼은 아니지만 이곳은 여전히 혼란하다. 분명 그는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이곳에 왔을 것이고, 만일 그것이 재단의 방향성과 크게 어긋난다면 그를 끌어들이는 데엔 재고가 필요하다.
마틴은 여러 번 읽어본 그의 자료 위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여전히 그 짧은 내용에서 유추할 수 있는 점은 적디 적을 수밖에 없었다. 마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생각할 시간을 조금 더 가질 겸 그와는 먼저 서면을 통해 접촉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금발의 청년은 이 미지의 동양인에게 전할 내용을 갈무리해보며 펜에 새 잉크를 가득 채워 넣었다.
‥‥
“안녕하세요, 티엔 정씨죠? 저는 마틴 챌피라고 합니다.”
마틴이 그와 처음으로 대면한 장소는 티엔이 정기적으로 들리는 식료품 가게의 근처였다. 그때 마틴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사람 좋은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는데, 실제로 마주한 이 동양인은 생각만큼이나 딱딱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무슨 용건이지?”
갑작스레 자신을 불러 세운 낯선 이에게 티엔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경계에 가까운 감정을 드러냈다.
“전에 편지를 드린 적이 있었죠, 저는 숭고한 길 재단 소속의 후원자입니다.”
마틴의 침착한 소개에 무인이 가진 경계의 기색이 아주 조금 덜해졌다. 그러나 그에게서 나온 말에는 단호한 거절의 뜻이 서려있었다.
“그랑플람의 사람이었나. 나는 분명 거절의 뜻을 밝혔다만.”
그랬다. 정중하게 써 내렸던 마틴의 편지에 티엔 정은 자신이 어느 단체에도 소속될 의향이 없다는 뜻을 밝혀왔다. 거기에는 어떤 이유나 양해를 구하는 말도 없이, 그 한 마디의 깔끔한 문장이 전부였다.
“물론 티엔씨의 답신은 잘 받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보고 결정해주실 수는 없을까, 싶어 직접 찾아뵈었어요. 혹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그 자신도 이것이 무례한 방문임을 알고 있기에 마틴은 최대한 정중하게 행동하려 노력했다. 그런데 이 대화에는 위화감이 있었다. 티엔과의 대화는 놀랍도록 조용했고, 마틴이 이상을 제대로 깨달은 것은 마틴의 말이 끝나고 짧은 침묵이 흐르던 바로 그때였다. 분명 들려야만 하는 것들이 이 동양인에게서는 들리지 않고 있었다.
“내 대답은 전과 같다.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것도 달갑지 않군.”
그는 그가 보냈던 답신만큼이나 단칼에 마틴의 요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마틴은 이대로 대화를 끝마칠 수 없었다. 재단의 스카우터는 겨우 이런 대답을 듣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티엔씨, 잠깐만요!”
청년은 다급히 그가 생각하는 바를 알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여전히 들리지 않는다. 마치 그의 생각을 무언가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마인드리더는 이례적인 감각에 당혹을 느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멀어지려던 티엔의 발걸음이 굳은 듯 멈춰 섰다.
“……뭘 하는 거지?”
처음과는 다르게 불쾌함과 의문이 또렷하게 묻어나는 목소리. 천천히 뒤돌아서는 그는 마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마틴은 약간 무기력하게 자신의 사무실 의자에 기대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실패, 혹은 한계. 그는 자신이 과연 어느 지점에서 가장 좌절감을 느끼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조차 없었다.
마틴이 사람을 싫어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타인이 스스로 밝히지 않을 불필요한 정보까지 알아내버리는 그는 대개 호감과 비호감이 아니라 몇몇 특정한 분류를 통해 사람을 보려 노력했다. 그건 한편으로 타인에게 편견을 씌우는 행동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훌륭하게 작동해온 자기방어기제였다. 그런데 얼마 전 그가 마주해야 했던 티엔 정은 그런 분류가 불가능한 부류였다. 그리고 지금 마틴의 내면은 그를 비호감이라는 카테고리에 집어넣기를 매우 강력하게 추천하고 있다. 안 될 이유가 있을까. 마틴은 내면의 충고를 받아들여 그를 마음껏 미워하고 싶었다. 만약 그 날 자신이 먼저 잘못을 저지른 것만 아니었다면 청년은 그렇게 하고야 말았을 것이다.
본래라면 그를 영입하려는 생각은 포기해야만 했다. 일단 수지가 맞지 않았으므로. 마틴은 결코 한가하지 못했고 스카우트를 위해 쏟을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이대로 그를 놓아버리기에는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첫 번째로, 티엔은 마틴의 스카우트 과정에 정신감응능력이 개입하고 있음을 명확히 인지했다. 당황이 앞서 제대로 된 사과나 변명을 꺼내지 못했던 당시의 상황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마틴에게는 좋을 것이 하나 없다. 늦든 이르든 그 일에 관해서는 어떻게든 매듭을 지어야 할 것이다.
이어지는 두 번째 이유는 매우 개인적인 사유가 개입하고 있다.
“……브루스씨가요?”
마틴은 자신의 스카웃 대상 목록을 정기적으로 이사회에 보고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어제, 마틴과 관련된 일에는 일절의 반응도 보이지 않던 브루스 보이틀러가 티엔 정의 이야기에는 유독 관심을 보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어째서 하필 그일까. 어쩌면 브루스는 어떤 경로를 통해 티엔을 눈여겨보고 있던 것일지 모른다. 그리고 만약 그를 영입하는 데에 성공하게 된다면, 정말로 만약이지만, 브루스는 다시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을까.
은인에 관한 생각에 마틴의 마음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 그리고 생각이 거듭될수록, 마틴의 마음속에는 일종의 오기 같은 것이 생겨나고 있었다.
‥‥
티엔의 앞에 그 재단의 사람이 다시 얼굴을 비췄다. 티엔은 낯선 이가 먼저 말을 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드물지만 이 타국에서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까닭 없는 시비를 마주한 일이 있던 그는 마틴을 꽤나 퉁명하게 대했다. 어쨌거나 그때의 시도에서 이 청년은 적어도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데에 충분한 성공을 거뒀다.
“안녕하세요, 티엔씨.”
“잘도 다시 얼굴을 비추는군.”
딱딱한 그의 말에 마틴의 얼굴에서 미소가 약간 옅어졌다. 당시 몇 번의 추궁이 있고서 마틴 챌피는 마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신에 대한 것은 알아보았다. 그랑플람의 마인드리더. 당신네 재단에서는 그런 식으로 남을 대하는 게 예의인가?”
면전에서 쏟아지는 신랄한 말은 마틴도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던 바였다.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마틴은 최대한의 진심을 담아 그에게 사과의 말을 꺼냈다.
“전의 일은 정말로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려요.”
고개를 숙인 마틴을 마주한 티엔은 잠시간 입을 열지 않았다.
“굳이 다시 와서 사과를 할 줄은 몰랐군.”
“제가 실례를 저지른 건 사실이니까요.”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들키지 않았다면 모를까, 마틴은 함부로 남의 머리를 들여다보는 짓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정도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사과는 받아들이지. 용건은 그걸로 끝인가?”
흔쾌하리만큼 짧은 대답. 티엔은 사과를 받은 와중 그 일에 대해 더 물고 늘어질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애초부터 그는 마틴의 존재 자체를 크게 신경 쓰고 있지 않았을 테니까. 재단의 스카우터는 그의 곱지 않은 시선을 흘려버리고 준비해온 말을 꺼냈다.
“아뇨, 그것 외에도 사과의 뜻으로…… 듣기로 티엔씨는 능력자 연구에 관심이 있으신 것 같은데요.”
그건 티엔에 관해 마틴이 알아낼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정보 중 하나였다. 그는 여러 서점을 들리며 종류를 불문하고 능력과 관련된 서적을 다수 구입하고 있다. 그 이유로 마틴은 다른 이유를 생각해낼 수 없었다.
“저희 재단의 서고를 이용할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영국에서도 능력 연구에 있어서 그만큼 좋은 곳을 찾기는 힘들죠.”
재단은 능력자 그랑플람이 활동하던 시절부터 수집한 자료를 보유하고 있기에 그 말에는 거짓이 없다. 그러나 티엔의 입장에서는, 속을 읽으려 들던 자가 자신의 뒷조사까지 했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으니 그 말이 곱게만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겨우 그 정도로 내가 재단에 들기라도 할 것 같나?”
물론 그럴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마틴은 그 방면으로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아뇨, 그런 뜻이 아니에요. 이건 그러니까…… 순전히 제 사과의 뜻이에요. 단, 자료의 반출은 불가능하고 서고의 열람은 저와 동행했을 때 한정이지만요.”
티엔은 물론 이 제의가 순전한 호의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요컨대, 당신의 요구는 시간인건가.”
그의 말을 마틴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원치 않더라도 곁에 붙어있을 수 있는 시간. 그걸로 마틴은 티엔을 관찰하고 설득할 시간을 벌고, 티엔은 원하는 자료를 얻으며 마틴을 향하는 경계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글쎄요……. 혹시 마음을 돌리셨을 때 제게 부담 없이 말씀해주실 수는 있겠죠.”
무인은 속으로 자신의 득실을 계산해보았다. 당연하게도, 마틴은 자신이 내건 조건을 그가 거절할 리 없다는 확신을 가졌다.
‥‥
일주일에 세 번, 정해진 시간에. 처음으로 재단의 서고를 눈에 담은 티엔의 감상은 간결했다.
“당신이 원하는 시간은 넘치도록 줄 수 있겠군.”
마틴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외부인인 그에게 그 안의 전부를 보여줄 수는 없지만, 그 정도만으로 티엔은 충분히 만족의 뜻을 비췄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여기에는 오는 사람도 적고, 불편한 점은 없을 거예요.”
둘만이 있는 서고에서, 티엔은 조용히 자료를 열람하거나 자신의 노트에 무언가를 기록했고 그동안 마틴은 자신의 일을 처리하거나 티엔이 하는 양을 가만히 살폈다. 아주 조심스레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려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필기를 하던 그의 손이 몇 번인가 멈추고 나서 마틴은 그를 읽으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아마 그의 독특한 능력 때문이겠지만 처음으로 한계에 부딪혔다는 좌절감은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다. 다행인 점이라면 티엔이 굳이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둘 사이에 대화는 그리 많지 않았다. 티엔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고, 마틴은 처음의 실패를 곱씹으며 그를 대하는 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와 있을 때의 온전한 정적은 마틴에게 새삼스럽도록 낯설게 느껴진다. 예상했던 바지만, 티엔은 도무지 속내를 알기 힘들 사람이었다.
몇 번의 반복이 있고서 청년은 드디어 넌지시 재단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티엔은 몇 번의 애매한 대답을 남겼을 뿐, 능력 관련 연구자료에 시선을 고정한 그는 마틴의 말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않는 듯 보였다. 이번에 그는 꽤 낡은 문서를 펼쳐두고 있었다. 이 많은 양을 시간 순으로 보기라도 할 생각인지, 마틴은 그가 자료를 고르는 기준을 아직 정확하게 찾을 수 없었다.
“음, 물론 티엔씨가 원하신다면 말이지만요……”
“지금까지 생각해봤다만.”
마틴이 애매하게 말을 끝마치려던 시점이었다. 티엔은 마치 그 말을 꺼내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나를 굳이 끌어들이려는 건 당신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 게 껄끄러워서인가?”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마틴은 대답을 꺼내지 않은 채 그에게 반문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 외의 이유를 생각할 수 없더군.”
티엔은 보고 있던 문서를 치우고 새 파일을 끌어당기며 말을 이었다.
“무소속의 능력자라면 나 외에도 얼마든지 있지. 심지어 능력자가 아닌데도 우리와 대등하게 싸우는 자들도 있더군.”
“그런 분들도 있는 건 사실이죠. 드문 경우긴 하지만…… 하지만 그런 경우가 재단의 취지와는 맞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아실 것 같은데요.”
“쓸데없는 노력을 계속 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겠지.”
그는 티엔을 끌어들이려는 마틴의 시도를 말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 걱정까지 해주실 줄은 몰랐네요. 제가 드린 편의는 꽤 유용하게 쓰고 계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생색이라도 내고 싶은 건가?”
마틴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물었지.”
티엔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째서 그가 이날따라 입을 열 마음이 들었는지 마틴은 알 수 없었지만, 다른 무엇보다 그에 대한 정보가 절실한 마틴은 그의 발언에 귀를 기울였다.
“완벽에 도달하기 위해서다.”
그답다면 정말로 그다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마틴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도 되는지, 그리고 과연 그런 애매하고 거창한 이유라는 것이 자신의 업무에 도움이 되기나 하는 것인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군요, 완벽이라……. 혹시 그 목표를 재단에서 도와드릴 수는 있을까요?”
그건 단지 기계적인 질문이었다. 그 외에 어떤 반응을 보이면 좋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글쎄. 당신이 나를 이기기라도 한다면 흥미가 동할지도 모르지.”
이번에는 헛웃음이 나오는 발언이다. 마틴은 슬슬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야만 했다.
“편법밖에 쓰지 못하는 사람에게 과한 요구였나?”
“하하. 말씀이 좀 심하신 것 같네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진짜 싫은 사람이다. 관건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목적은 의미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이기면 흥미를 가져주겠다고. 능력조차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의 말은 심술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능력을 제대로 쓸 수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일이 꼬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
사실 티엔은 마틴 챌피라는 인물에게 어느 정도의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일단 그는 티엔에게 그 본인의 능력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 존재다. 서로 의도치는 않았지만, 마틴과의 만남은 그가 이론으로만 접해보았던 능력간의 상성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멋대로 마음을 훔쳐보려는 시도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티엔은 그가 무례를 사과하지 않더라도 크게 마음에 담지 않을 생각이었고, 마틴이 일부러 찾아와 사과의 말을 꺼냈을 때 좋지 않았던 첫인상은 꽤나 누그러졌다. 굳이 그걸 표현하지 않았을 뿐.
그리고 이제 와서 자신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을 만난 것은 약간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티엔은 마틴의 요청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이전에 티엔은 도움을 요청했던 이들에게 외면당해왔다. 그는 결국 스스로 강해져 더 이상 타인의 도움을 원치 않았고, 굳이 누군가와 어떤 관계를 맺거나 어딘가에 소속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이건 자신이건 결국 떠나게 될 것이 분명했으므로.
‥‥
마음을 안다고 해서 반드시 그에 부응할 필요는 없다. 그건 꽤 전부터 떠올리고 있는 생각이지만, 마틴은 지금까지 지켜온 행동수칙을 깨는 게 두려웠다. 조금만 더, 그리고 조금만 더. 그런 식으로 선을 파고들다가는 지금까지 쌓아왔던 것들이 전부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좋은 사람’이 되자. 그건 능력을 가진 후로 그가 쭉 지켜왔던 원칙이었다.
이날은 마틴이 또다시 자신의 한계를 시험당한 날이었다. 침착하게, 미소 짓고, 상냥한 목소리로. 그렇게 사람과의 관계에 지쳐있던 마틴이 문득 떠올린 마음 편한 장소란, 얄궂게도 동시에 그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자리기도 했다.
“오늘은 더 오래 계셔도 괜찮아요.”
“재단도 한가한가보군.”
“그러니까 어때요, 이렇게 한가한 곳이라면 들어와도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할 수 있잖아요?”
“거절한다.”
그간 자주 얼굴을 보아온 보람은 있었는지, 둘은 이제 꽤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한가한가보네요. 정말로 이렇게 매번 오실 줄은 몰랐는데요.”
“아직도 날 설득하려는 사람치고는 꽤 무례하군.”
“처음부터 최악의 인상이었는데 나쁠 것도 없죠.”
더 떨어질 평판이 없다면 거리낄 것도 없다. 그건 분명 마틴에게 평소답지 않은 생각이지만 이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을 상대한지 오래된지라 그의 기준도 이상해져 있었다. 문제는 그에게 있다. 마틴 자신이 아니라.
“뭐……. 완벽을 찾으러 영국까지 건너온 분이니까 안 될 것도 없겠네요.”
아직도 마틴은 그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아마 동양에서 말하는 내적 수양과 비슷한 무언가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약간 비꼬는 듯한 그 말에, 티엔은 마틴이 처음 듣는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이 나라에 온 건 브루스 보이틀러의 소개가 있어서다.”
“네?”
그의 입에서 브루스의 이름이 나올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를 알고 있나? 재단 소속이라는 건 최근에 알았다만. 자신을 시험하고 싶다면 전장에 뛰어들어보라는 논지였지. 틀린 말은 아니더군.”
어째서 전에 브루스가 티엔과 관련된 자료에 반응을 보였는지 마틴은 드디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재단에 합류할 이유는 없지. 재단과 나의 이익관계는 일치하지 않아.”
티엔은 거의 습관적으로 거절의 뜻을 표했지만 마틴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브루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처음의 목표를 거의 잊고 있었던 자신에게 놀라움을 느끼고 있는 참이었다. 이제는 단지 이 시간만으로 마틴에게는 꽤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
마틴과 여러 번 동행하며, 티엔은 이 청년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를 그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피곤의 얼굴을 하고서는, 누군가 다가올 때면 밝은 미소를 짓는다. 마틴은 재단에서 마주치는 누구와도 친분을 가진 것 같았다. 그건 티엔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종류의 삶이었다. 그 중에는 티엔 자신이라면 도저히 살갑게 대할 수 없을 종류의 사람도 있었는데, 종종 그런 이들과 대화를 끝마치고 난 후의 마틴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어 있곤 했다.
그런 금발의 청년을 보며 티엔은 왠지 모르게 목서를 떠올렸다. 진한 향기를 널리 퍼트려 사랑받지만, 그 향으로 원치 않는 것들마저 불러와 갉혀 먹힌다는 점에서. 마틴에게 비하자면 그 중에서도 짙은 향을 가졌다는 금목서가 가장 어울릴 것 같았다.
지금껏 그런 향에 취해본 적 없는 티엔은 금목서와 닮은 이 청년에게도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남들이 어째서 그에게 홀리는지를 알면서도 자신과는 어딘가 어긋났다는 그런 감각. 그리고 정말로 목서와 같이, 아주 가끔은 그도 그 향이, 또 가까이서 들여다본 그 꽃이 어여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
꽤 긴 시간 이어졌던 그들의 약속은 티엔의 갑작스러운 선언으로 끝이 났다.
“이곳에 오는 건 이걸로 마지막이다.”
“어째서요?”
“이게 순전한 호의가 아니라는 건 서로 알고 있지 않았나? 사과는 처음부터 필요 없었고, 내게는 재단에 들 마음이 없으니 이대로 당신에겐 아무런 이득도 없다.”
그 중 자신의 볼일이 끝났다는 말은 없다. 평소의 그의 언행에서도 능력 연구를 그만두려는 낌새는 보이지 않은 참이었다.
“그러는 티엔씨에게 나쁠 건 또 뭐죠? 제 노력이 헛수고라면 단지 그것뿐인데요.”
“……쓸모없을 노력을 하는 모습이 그리 보기 좋지는 않더군.”
마틴에게 그를 억지로 붙잡아둘 구실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고, 그 뒤로 티엔은 정말로 다시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딱 그 정도였다는 건가?’
어쩌면 그건 마틴에게 약간의 호의를 품게 된 티엔이 보인 성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틴은 그가 가까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추측은 별 쓸모가 없었다.
티엔과 함께 하는 시간은 여러 의미로 낭비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티엔을 스카웃할 수 없다고 해서 마틴에게 큰 타격은 없지만, 이걸로 끝이라면 너무 재미없는 결말이다. 그의 앞에 다시 나타난다면 티엔은 화를 낼까, 아니면 조금은 반가워해줄까.
그리고 마틴은 그가 지금까지의 답례라며 건넨 화차의 의미를 묻고 싶었다. 그가 망설이며 꺼냈던 ‘당신이 생각나더군,’ 이라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이었는지를. 어쨌거나, 마틴은 샛노란 빛깔이며 고운 향을 가진 그 차가 퍽 마음에 들었다.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엔마틴] (케이크버스AU) Afternoon tea (0) | 2016.05.29 |
---|---|
[티엔마틴] 남은 것이 없기를 바라며 (0) | 2016.04.02 |
[티엔마틴] (케이크버스AU) Main Dish (0) | 2016.03.22 |
[티엔마틴] 평범한 이야기 (0) | 2016.03.07 |
[티엔마틴] 「검은양」예약특전 (미수령시 연락주세요!) (0) | 2016.02.16 |
글
[티엔마틴] (케이크버스AU) Main Dish
케이크티엔과 포크마틴. 둘이 만나기만 합니다(...)
유혈 묘사는 없습니다(_ _)
-Side: Fork-
“챌피씨, 또 샌드위치예요?”
마틴은 동료 직원들과 함께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의 앞에는 깔끔하게 잘린 샌드위치 몇 조각이 놓여있었는데, 각종 재료가 보기 좋게 끼워진 빵조각들은 썩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하지만 질문을 던진 이가 가진 의문은 음식의 맛과는 별개의 것이었다. 전에도, 그 전에도 마틴은 같은 음식을 주문한 듯한 인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게. 전에도 같은 메뉴 아니었어요?”
그 말에 동조해 누군가가 한 마디를 거들었다.
“여기는 선데이 로스트가 참 괜찮은데.”
“그건 맛없기가 더 힘들잖아요?”
어느새 그들은 자기들끼리의 대화에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런 동료들을 향하는 마틴의 표정에는 평소보다 약간 서늘한 기운이 서렸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야 이것도 맛있잖아요, 먹기도 편하고.”
이 상냥하고 달콤한 청년은 그렇게 말하며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다는 듯 약간 과장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약간의 실소가 들려오고, 상냥한 말 몇 마디가 뒤를 이었다. 와, 챌피씨가 먹는 걸 보면 저까지 기분이 좋다니까요. 저기 건너에 맛있는 곳을 아는데 알려드려야겠어요. 정말요?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죠.
처음부터 마틴의 입맛 같은 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몇 마디 대화가 지난 뒤 그들을 이내 자신이 빵에 곁들이기를 좋아하는 재료 따위의 화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그 곁에서 마틴은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조용히 입 안에 든 것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약간 질긴 빵, 아삭하게 씹히는 푸성귀들, 어금니 사이에서 으깨지는 베이컨, 그리고 너무 익지 않아 단단한 감촉의 토마토. 이 가게의 샌드위치는 씹는 맛이 썩 좋았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 이런 즐거움조차 자주 누리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 그 맛을 묻는다면 그는 명확한 대답을 내놓을 수 없을 것이므로.
마틴은 입 안을 넣은 것들을 그저 감촉으로밖에 구분하지 못한다. 단단한 것, 부드러운 것, 부스러지는 것, 끈적한 것. 그가 본래부터 이런 식으로 태어난 건 아니었다. 마틴은 달고 짠 맛이나 향긋하고 고소한 내음을 알고 있으며 지금도 그것들을 생생히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이제 그저 음식을 입에 들일 때마다 마틴을 비참하게 만드는 원천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다시는 음식의 맛을 알 수 없을 ‘포크’였다.
포크는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미각을 잃고 마는, 그리고 그 사실을 들키는 순간 사회의 적이 되어버리는 기이한 존재다. 마틴이 자신이 포크임을 자각한지는 벌써 몇 년이 흘렀다. 그 이전의 일상이 멀게만 느껴지는 지금, 그런 근심 없는 날들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는 홀로 이해했다.
평온한 삶을 살아온 마틴에게 케이크나 포크 따위는 먼 이야기였다. 그런 인종이 있다더라. 세상에, 끔찍해라. 그게 마틴이 아는 전부였다. 마지막 학창 시절의 어느 날 돌연, 입에 들이는 모든 게 잘못 만든 파이처럼 변하지만 않았더라면 쭉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성년이 가까운 나이에 갑작스레 찾아오는 미맹. 마틴이 알기로 그런 증세를 가진 병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됐다. 그러나 한 스푼 가득한 소금을 삼켜도, 생 레몬을 껍질째로 씹어보아도 맛을 음미하려는 모든 시도는 마치 솜이불 너머로 섬세한 유리공예를 더듬는 것과 같았다. 그 어떤 것을 넣어도 그의 입 안은 기분나쁘도록 공허할 뿐이었다.
“오빠, 그거 안 먹을 거야?”
멍하니 으깬 감자를 씹고 있던 마틴이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여동생은 그의 몫으로 놓여있는 파이를 가리키며 묻고 있었다.
“어……, 응.”
그건 평소 남매가 모두 좋아하던 요리 중 하나였다. 마틴이 접시를 건네자 아이는 그걸 즐겁게 받아들었고, 다진 양고기로 가득 채워진 파이는 몇 번의 포크질이 있고서 육즙이 흘러내리는 먹음직한 모양이 되었다. 마틴은 식사를 하는 것도 잊은 채 그 애가 고기와 파이조각을 입으로 밀어 넣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왜 그래? 한 입 먹을래?”
입 안 가득한 음식으로 뭉크러진 발음에 마틴은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난 어차피 그걸 맛있게 먹을 수가 없어서. 물론 그 한 마디는 목구멍에 걸려 넘어오지 않았다.
며칠이, 몇 주가 지나도 호전은 없었지만 그 이상의 악화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런 맛도 느낄 수 없는 삶이란 생각 이상으로 무미건조한 것이어서, 혼란스러운 마음에 더해 마틴은 식욕을 점점 잃어만 갔다. 무력하게 지내는 시간이 늘며 그는 자신이 무엇인가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했다.
만약 눈앞에 촉촉한 시트와 달콤한 향기, 그리고 무엇보다 혀를 찌를 듯 강렬한 맛을 가진 케이크 한 조각이 놓여있다면. 어쩌면 마틴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게 될지도 모른다. 도덕적인 축에 속해온 그로서는 놀랍지만 유혹을 참지 못한 채 그걸 입으로 가져가게 될지도. 하지만 그 케이크가 살아있고, 숨을 쉬며, 자신과 같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면? 청년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해칠 자신을 상상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만큼 운이 나쁜 건 아닐 수도 있다고, 실제로 자신은 포크 따위가 아니거나 충분히 유혹을 참아낼 수 있을 거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마틴은 그런 막연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뜻밖에도 마틴이 자신을 시험할 날은 생각보다 이르게 찾아왔다. 어느 주말, 마틴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엘리엇은 까닭 없이 가라앉아있는 그를 이끌고 시내로 향했다. 일부러 식사 시간을 피해 잡은 약속은 정말로 기분전환에 도움이 되었고 마틴은 간만에 그 나이에 걸맞은 웃음을 터트렸다. 둔감한 혀를 가지고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거의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까 하는 경솔함마저 느꼈다.
바로 그 직후의 일이었다. 갑작스레 이상할 정도로 들뜬 기분에는 위화감을 가질 틈조차 없었다. 생각은 무용했고 실로 오랜만의 찌릿한 감각이 소년의 코끝을 스쳤다.
“마틴, 뭐 해?”
앞서 가던 엘리엇이 뒤돌아보았을 때 마틴은 못 박힌 듯 어느 한 방향을 향해 굳어있었다. 향긋함, 달콤함, 언제나 과장됐다고 생각해온 황홀함이라는 표현에 어울리는 향기가 가벼운 바람을 타고 그에게 흘러들었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난 할 일이……”
마틴은 엘리엇과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말을 흘리고는 향이 이끄는 대로 빠른 걸음을 옮겼다. 외면할 수 없는 깊은 유혹. 놓치면 안 돼. 놓쳐서는 안 된다. 당장 찾아서, 마음껏 들이마시고, 이 폐를 그 향기로 채워야만. 물론 마틴이 원하는 건 그 이상이었다. 맛과 함께 잃어버렸던 식욕이 한꺼번에 밀려와 그의 이성을 저 아래로 가라앉혔다.
그 날 오직 한 조각의 체향에 미료된 마틴은 한참이나 홀로 거리를 헤맸다. 함께였던 친구나, 피로나 배고픔에 개의치 않고 그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그 주변을 서성였지만 결국 케이크 조각은 마틴의 손에서 벗어나 어딘가로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그날 누군가는 목숨을, 그리고 마틴은 결백함을 보전했다.
마틴은 몇 번이고 그 거리를 다시 찾았다. 단지 그 향을 다시 맡고 싶을 뿐이라고, 그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지만 정말로 케이크와 마주한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지 마틴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괴물 자식.”
그는 나직한 말 한 마디에 모든 감정을 담아 자신을 정의했다.
케이크의 향기가 떠올라 식욕이 가라앉지 않던 어느 날 밤 마틴은 썩은 음식을 씹어 넘겼다. 혀를 감싸는 물컹한 감각이 기분 나빴을 뿐, 역한 냄새나 기괴한 맛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 마틴은 속으로 웃으며 그것들을 남김없이 삼켜버렸다. 그 새벽 내내 복통과 구역질에 시달리며 마틴은 자신이 마주해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며칠 간 혼자만의 농성이 있고서 마틴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그는 전보다 더 잘 웃었고, 타인의 기분에 자신을 맞추기 시작했다. 너무 갑작스럽지는 않도록, 서서히 자연스럽게. 마틴은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다. 그건 자신이 아직도 태연히 거리를 걷고 있는 것에 대한 사죄이자 자신을 들키지 않기 위한 방어였다.
감각의 일부가 훼손되면 다른 감각이 그 자리를 채운다고 하던가, 물론 그보다는 명확한 동기를 가지고 마틴은 눈과 귀로 전보다 많은 것을 살폈다. 표정, 몸짓, 목소리의 높낮이, 그 모든 것이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그에게 알려준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마틴은 친절함과 상냥함으로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그러나 너무 가깝지는 않게, 적당한 거리를 가지고서.
평온한 일상 속의 마틴은, 때로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 모두가 살인마의 것이라고 생각하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봐요, 아시나요? 예비살인자는 이런 얼굴로 웃는답니다…….
누구보다도 좋은 사람의 얼굴을 한 포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케이크의 유혹을 참아내겠노라 수없이 다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혀끝으로 느껴질 그 달콤함을 알고 싶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그런 행운이 자신에게 찾아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Side: Cake-
정 티엔은 케이크다. 아마도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쭉, 의심의 여지없이. 언뜻 평범하게 보이는 그는 누군가에게 이성을 잃을 정도의 달콤한 먹이였다. 티엔의 피와 살과 뼈는 그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만찬이었고, 그는 스스로 느낄 수 없는 진한 사냥감의 향기를 가지고 있다. 가엽게도. 언젠가 들었던 무덤덤한 말 한 마디는 케이크로서의 삶이라는 것을 간결히 요약한다.
케이크의 행복한 삶이란 단연 자신이 케이크임을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포크가 없다면 케이크는 여느 사람과 다름없이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행운을 가진 케이크가 존재하는지에 관해서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고, 많은 사람들은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고까지 말하곤 한다.
티엔이 자신의 정체를 깨닫게 만든 사건은, 그가 케이크와 포크라는 개념조차 알지 못하던 어린 시절에 일어났다. 그때 어린 티엔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시장구경을 하고 있었다. 색색깔의 물건과 인파는 물에 젖은 듯 번져 보였고, 억지로 떨어진 손에 뒤이어 그 작았던 아이는 어느새 낯선 품 안에 갇혀 있었다.
그는 그 이후의 일을 제대로 떠올리지 못한다. 생소한 비명 소리, 그리고 간혹 꾸곤 하는 흐릿한 악몽이 그가 아는 전부다. 결과적으로 티엔은 너무 늦기 전에 구출되었지만 그 양 팔에는 깊은 상처가 남았다.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라고, 작은 아이는 몇 번이고 등 뒤에서 같은 말을 들었다. 너무나 아프고, 두렵고, 괴로웠음에도 그가 겪은 건 ‘다행’의 축에 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들어야 했던 말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제 아비를 닮은 모양이야. 끔찍해라.”
티엔이 어떤 경로로 이 말을 들었는지는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어느 무신경한 사람이 그런 말을 아이의 앞에서 흘렸는지를. 하지만 영문을 알 수 없던 그 한 마디는 어느 순간 뇌리에 되살아나 그의 팔의 자국처럼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를 깨닫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티엔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을 배웠다. 저항하고, 제압하고, 필요하다면 그 이상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어떤 강인함이라도 모든 위협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위협을 피할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일찍 독립해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선 티엔은 언제고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그는 그들의 존재를 알아챌 수 없지만, 그들은 그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모든 창에 쇠창살을, 현관에 여분의 자물쇠를 더하는 그의 행동은 편집증에 가까워 보였다.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티엔은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자신이 하는 일에 모든 집중을 쏟았다. 자신을 지키고, 사냥감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충실히 살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살다간 늙어서 외롭게 죽을 걸요.”
타인을 대하는 그의 쌀쌀맞은 태도에 누군가가 던진 독설이었다. 티엔은 잠시 생각한 뒤 그 축복의 말에 짧은 대답을 남겼다.
“부디 그렇기를 바라지.”
그 전까지, 티엔은 자신의 먼 미래를 떠올리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치열하지만 조용한 날들이 흘러갔다. 이십 여 년이 지나 그날의 흔적도 이제는 옅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꿈속에서 자신을 물어뜯는 탐욕스런 괴물과 싸워야만 했다. 괴물의 모습은 언제나 달라서, 어릴 적의 흐릿한 악몽이 그대로 재현될 때도, 때로는 익숙한 얼굴이 그를 덮칠 때도 있었다. 무뎌지고 있던 공포는 그런 밤마다 되살아나 더 이상 작은 아이가 아닌 그를 괴롭혔다.
티엔은 괴물이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나기를 바랐다. 그가 너무 지쳐버리기 전에, 경계를 늦춰버리기 전에. 그는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
드디어 행운이 그에게로 찾아왔다.
“마틴, 이 사람이 바로 전에 말했던……”
소개의 말은 거의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 드디어. 이렇게 운명적으로. 쓸데없는 말을 귀에 들이지 않아도 마틴은 그가 누구인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나의 첫 번째 먹이가 될 것이다.
그가 다가오고 있을 때부터, 처음으로 맡았던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짙은 향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간신히 마주본 그의 눈은 그의 머리색만큼이나 짙은 색을 띠고 있었다. 그 눈은 푸딩 같은 맛이 날까? 아니면 젤리? 카라멜?
“어……”
청년은 무언가를 말해야 할 것 같다고 느꼈지만 포화된 머리는 둔한 반응만을 내놓았다. 달콤한 향에 취해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마틴에 앞서,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그였다.
“잘 부탁한다.”
퉁명한 그의 말은 다소 무례하게 들렸지만 그런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달콤했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맞잡은 손이 뜨겁게 느껴졌다. 마틴이 당장 그의 살을 씹지 못한 건 순간의 경솔함으로 영영 기회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그러니까……”
“티엔. 티엔 정.”
“티엔씨. 만나서 반가워요.”
정말로 오랜만에, 행복한 미소가 마틴의 얼굴 위로 번졌다.
괴물의 눈빛이다.
드디어 그의 눈앞에 나타난 어린 괴물이 먹이를 마주하여 즐겁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역겨워 마땅할 그 얼굴은 티엔에게조차 찬란하게 보였다. 이만큼 밝은 미소가 자신을 향한 것이 얼마만이던가.
맞잡은 손으로 느껴지는 체온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따스했고, 송곳니를 숨긴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다른 누구의 것보다도 보드라웠다. 그 괴물은 사냥감인 티엔보다도 훨씬 인간다운 모습을 하고서 말을 걸었다.
그는 괴물의 환한 미소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우습게도, 괴롭게도.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엔마틴] 남은 것이 없기를 바라며 (0) | 2016.04.02 |
---|---|
[티엔마틴] 금목서 (0) | 2016.03.28 |
[티엔마틴] 평범한 이야기 (0) | 2016.03.07 |
[티엔마틴] 「검은양」예약특전 (미수령시 연락주세요!) (0) | 2016.02.16 |
[티엔마틴] 전력 60분 - 소원 (0) | 2016.01.03 |
글
[티엔마틴] 평범한 이야기
연성 재활로 짧은 글. 회지랑 반대로 티엔이 마틴네 들어가서 삽니다.
사귀면서 그럭저럭 서로를 좋아하는 느낌을 보고 싶었어요:3
좀 횡설수설.
─피곤하다.
바쁜 일정을 마치고 사흘 만에 귀가한 마틴은 짐을 풀어둘 새도 없이 소파 위에 늘어져버렸다. 불편한 자리를 전전하다 드디어 마음 편히 안락한 곳에 몸을 붙이자 그대로 가라앉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깊은 한숨이 조용한 집안을 채웠다. 다시는 이런 식의 출장을 나서지 않으리라 결심해보지만, 막상 같은 상황이 눈앞에 닥친다면 또 같은 일을 반복하고 말 게 뻔했다. 마틴 스스로도 느끼고 있지만 그의 성격은 전부터 건강하고 근심 없는 생활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진행될 일은 아니었다. 단지 예정에 없던 출장이 안 그래도 빽빽하게 짜여있던 일정을 어그러뜨린 게 문제였다. 급하게 양해를 구하고 동료들에게 맡긴 일거리도 있지만, 결국 먼 길을 떠나면서도 마틴은 적지 않은 서류뭉치를 떠안고 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결과적으로는 그럴 만한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잠자리며 긴 이동시간은 그를 지치게 만들기 충분했고, 거기에 더해 마틴은 긴 시간을 거쳐 돌아온 후에도 다시 그동안 처리한 것들을 넘기고 이런저런 것들을 체크한 뒤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챙겨 간 짐이 많지 않았던 것이 다행일 따름이다.
숨을 고르고 피로로 화끈거리는 이마를 짚어보던 마틴은 고개를 돌려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주변을 살폈다. 집안은 그가 떠나기 전과 마찬가지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 익숙한 공간 속에 몇몇 낯선 물건이 눈에 띄었다. 의아함도 잠시, 그것들은 마틴이 잘 아는 누군가의 목소리로 살며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잘도 내버려두고 가더니 이 꼴로 돌아오는군.
“하하…….”
별로 웃기지는 않았다. 그가 정말로 그런 소리를 할 것 같지도 않았고. 어쨌거나 재단에 관련된 일에는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녁 전에는 돌아오려나.’
마틴이 멍하니 떠올린 그의 얼굴은 약간 찌푸린 듯한,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래, 아마도 그는 그런 얼굴을 하고서 한창 일에 열중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수련이나 그 비슷한 거라도.
방금까지 반쯤 잊고 있던 사실이지만 지금은 티엔이 이 집에 살고 있었다. 그가 숙소의 문제로 얼마간 갈 곳이 마땅치 않게 되었을 때 마틴이 먼저 제안한 일이었다. 그런데 티엔이 이곳에 들어오기도 전, 마틴은 열쇠만을 그에게 넘기고 급하게 여행길에 올라야만 했다.
떠나있는 동안 그에 대한 걸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약간의 죄책감이 고개를 들었다. 그건 아마도, 현재 사귀고 있는, 게다가 일단은 함께 살고 있기까지 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전혀 아니었다. 그대로 쭉 떨어져 있었다면 그를 완전히 잊고 살게 되기라도 했던 걸까. 실없는 생각이지만 별로 유쾌한 상상은 아니었다. 이제 막 제대로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과의 사이가 그렇게 얄팍할 수도 있다는 건 말이다.
어, 당신도 알잖아요, 전 바빴고. 거기서 다른 걸 생각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고요.
또다시 있을 리 없는 항의를 떠올린 마틴은 속으로 그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문득 자신이 눈을 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대로는 금방이라도 잠들어 버릴 것 같다. 그는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 물건을 정리하고, 씻고, 적어도 옷을 갈아입고서 침대에 제대로 눕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러기엔 지금 누운 자리가 너무도 안락했다. 게다가 곧 티엔이 돌아오면 깨어나게 될 테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연락도 제대로 못했는데. 그쪽에서도 마찬가지고. 내 생각을 하고 있긴 했던 걸까. ……피곤하다.’
새까맣던 눈앞에 티엔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스스로는 제대로 깨닫지 못했지만, 그 즈음 마틴은 이미 반쯤 꿈속으로 빠져들어 있었다.
바로 곁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마틴은 살며시 눈을 떴다. 전보다 주위가 어두워져 있었고, 어쩐지 따스하다 싶었던 몸 위에는 포근한 담요가 덮여있었다. 마틴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누군가 분명 그의 곁에 있었다.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아 그 사람이 무얼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가 방이 아니라 굳이 여기 있어야 할 이유는 없을 텐데도.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들리지 않을 재회의 인사를 속으로 건네며 마틴은 다시 눈을 감았다. 곁에 있는 사람을 포함한 지금 이 자리가 너무도 편안해 아직은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몇 시예요?”
다시 눈을 떴을 때 티엔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탁자 위에는 어디서 찾아냈는지 작은 램프가 놓여있다. 더 밝은 전등을 켜놓지 않은 건 마틴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배려인 것 같았다.
“8시 47분. 곤히도 자더군.”
“벌써요? ……중간에 한 번은 깼어요.”
티엔의 대답에 별 감정은 담겨있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늦은 시간인 걸 알게 되자 괜히 마음이 찔렸다. 그 탓에 마틴은 별 의미 없는 변명을 덧붙여야만 했다.
“결국 못 일어났잖나.”
“뭐……, 당신이 옆에 있길래요.”
많은 이야기를 생략한 그 대답에 티엔은 약간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때의 그 기분을 간략하게 전달할 자신은 없었기에 마틴은 그저 머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일어났으니 저녁 준비라도 하지.”
“간만에 봤는데 뭐 없어요?”
마틴은 몸을 일으키는 티엔을 불러 세웠다. 그는 당돌한 연인을 내려다보며 그 요청이 정확히 뭘 원하는지를 가늠했다. 마틴이 여전히 누운 채로 손을 뻗자, 그는 그제서 다가가 허리를 숙이곤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음…….”
입술이 닿는 감촉이 간지럽게 느껴졌다. 꽤 간만에 얼굴을 보는 탓인지 마틴은 이날따라 가까이서 보는 그가 잘 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로 새삼스럽게도. 그런 자신의 생각에 웃어버린 마틴을 티엔은 의문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좋잖아요. 당신은 안 그래요?”
티엔은 약간 뜸을 들이더니 의미심장한 대답을 남겼다.
“이것만으론 잘 모르겠군.”
아, 이런. 혹시 내 무덤을 판 건가. 아직 더 피곤해질 자신은 없는 마틴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저 없는 동안 제 생각은 많이 했어요?”
“글쎄……. 이 집에 있는 동안에는 아무래도.”
티엔은 사실을 전달하는 데 있어 매정하리만치 철저해서, 이런 일에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런 그의 대답에 마틴은 미안한 마음이 더 늘어났지만 다행히 티엔은 그런 속을 알아챈 것 같지는 않았다.
“음, 저도 그랬어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적어도 집에 돌아와서는 그의 생각을 잔뜩 했으니까. 마틴이 몸을 일으키자 찌뿌듯한 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생각보다 길어진 낮잠 덕에 체력은 회복되었지만 좁은 공간에서의 잠은 역시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끙……. 저녁 준비는 같이 해요, 기다리느라 배고팠을 텐데.”
티엔은 속으로, 그걸 아는 사람이 깨었다 다시 자버렸느냐고 반문했지만 피곤한 몸을 이끌고서 돕겠다는 이에게 면박을 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전에 씻고 옷이나 갈아입어라. 그리고 당신이 문 앞에 던져둔 가방은 방에 옮겨뒀다.”
“맞다, 그것도 정리해야죠…….”
한껏 기지개를 펴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난 마틴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이 여기 있는 게 실감이 안 나요.”
“이제 있을 날도 얼마 안 남았지만 말이다.”
티엔이 등 뒤로 던지는 말은 사실이다.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 중에 벌써 사흘이 흘러 있었다.
“그러면 더 있을래요? 저는 그래도 상관없어요.”
“같이 살아본 지 아직 몇 시간도 안 된 것 같다만.”
“뭐 어때요. 제가 당신을 꽤 좋아하는 것 같거든요.”
잠시 잊고 있기는 했지만. 단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평소처럼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풀린다는 건 아마 그런 의미가 아닐까. 능청스러운 마틴의 말에 티엔은 피식 웃음을 보였다.
“생각은 해보지.”
“뭐예요, 그건. 무슨 선심 쓰는 것 같이.”
“왜, 아니었나?”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그리고 이제는 그를 돌아보고 있는 티엔을 흘겨보며 마틴은 방으로 향했다. 뭐가 문제냐고 한다면, 아마 저런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점 아닐까.
어쨌거나 앞으로도 며칠 간은 확실히 함께할 수 있다. 그 사실에 마틴은 기분이 좋아졌고, 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 사이에는 정말 만약이라도 서로를 잊을 날이 없을 테니까.
“그 사이에는 확실히 제 거라는 거죠…….”
전에 없던 생각에 약간 놀라면서도 마틴은 짧은 동거의 첫 날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건 아마도 꽤 뜻 깊은 시간이 될 거라고, 막연하지만은 않은 상상에 그는 다시 웃음 지었다.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엔마틴] 금목서 (0) | 2016.03.28 |
---|---|
[티엔마틴] (케이크버스AU) Main Dish (0) | 2016.03.22 |
[티엔마틴] 「검은양」예약특전 (미수령시 연락주세요!) (0) | 2016.02.16 |
[티엔마틴] 전력 60분 - 소원 (0) | 2016.01.03 |
[티엔마틴] 마른쪽 크리스마스 합작글 (0) | 2015.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