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은 슬슬 짜증이 나려 하고 있었다. 대체 이 자는 어디까지 자신을 우습게 볼 셈인가. 삭혀지지 않는 감정자체도 그렇지만, 이유가 어찌 되었든 그런 인간에 의해 감정을 소모하고 있는 자기자신도 탐탁지 않게 느껴져 마틴의 기분은 더더욱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사실 마틴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짜증이 나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성질이 조금 다르다. 사적이고 개인적인 다툼이라면 몰라도 상대가 공적인 영역을 건드린 이상 마틴은 진심으로 분노할 수밖에 없다. 그 의도가 무엇인지는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마틴의 심기를 이렇게까지 건드린 자는 물론 티엔 정, 그 기를 다루는 동양인이었다.
마틴 챌피와 티엔 정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들 각각은 인간관계에 별 흠을 잡힐 일이 없는 인물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마틴은 모두에게 매력적이며 상냥했고, 티엔은 문제가 생길 인간관계랄 것 자체가 적다. 타인의 앞에서는 마틴이 되도록 얌전히 넘어가고 있기 때문에, 주위에 알려진 바는 그 실상보단 덜 유치하고 꼬여있었지만 말이다.
그들은 첫 시작부터 어긋나있었다. 서로 다른 종류의 목표와 확신을 가지고 있던 둘은 소통의 방식조차 달랐고, 특히 마틴의 방식은 상대에게 전혀 먹혀 들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와 잠재적인 위협을 동시에 마주한 마인드리더는 낯선 동양인에게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그 적대감은 상대에게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였다.
마틴이 비꼬는 말을 던질 때 티엔은 순순히 물러나는 법이 없었고, 반대로 티엔이 사소한 트집을 잡을 때면 마틴은 정중한 반박과 야유를 퍼부었다. 누가 써놓은 건지 여기 글자가 비뚤군. 못 봐줄 정도다. 아, 그래요? 완벽한 티엔씨가 알려주시기 전까지는 몰랐네요. 아무 문제 없으니 그냥 넘어가 주시죠.
하지만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둘은 으르렁거리면서도 각자의 할 일을 다했고, 마틴이 인정하기 싫더라도 티엔은 재단에 도움이 될만한 인물이었다. 단지 그가 언젠가 재단에 위협이 되거나 자신이 이뤄둔 성과를 안고 떠날 것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 전까지 마틴은 대놓고 티엔을 밀어낼 수 없었기에 딱 거기까지의 선을 지켰다. 그리고 근래에 들어 티엔은 그 선을 가볍게 넘어버렸다.
얼마 전부터 티엔은 마틴을 철저하게 무시하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비꼬는 말을 던져도 흘끗 쳐다보기만 할 뿐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고, 그대로 자신의 일에 집중하거나 아예 자리를 피해버렸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난 후에는 마틴을 향해 얼굴조차 돌리지 않게 되었다.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그를 마틴도 더는 상대하지 않았지만, 나아가 마틴이 하랑과 함께 있을 때에도 그는 금발에 주근깨 박힌 능력자가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마냥 행동했다. 하도 어이가 없어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음에도, 티엔은 마틴이 있는 자리를 아예 비어있는 공간인 마냥 대했다.
전과는 다른 의미로 불편해진 자리에 당황하던 하랑은 모르는 사이에 둘이 싸우기라도 했느냐 물었지만, 마틴에겐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다투는 일이야 잦지만 마틴 자신이 참지 못하고 폭발한다면 모를까, 티엔 쪽에서 그리 정색할만한 특별한 사건은 일어난 적이 없다. 물론 하랑이 스승에게 물었을 때에도 제대로 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둘이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졌어? 왜 살벌하게 나 있는 데서 그러냐고.”
“불평은 그 인간한테 해야죠. 원수는 이번 생에 착실히 지겠다는 것 같은데요.”
갈 곳 없는 불만을 터트리던 하랑은 이제 스승과 관련된 화제에 웃음기도 없이 대꾸하는 마틴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정말 기분이 나쁘긴 했던 모양이다.
차라리 둘이 으르렁거리던 예전이 그립지만 여기서 더 악화될까 제대로 말을 꺼내진 못하고, 둘 중 누군가가 잘못을 하긴 한 모양인데 그게 누구인지를 모르니 애꿎은 영들에게 넋두리가 나올 지경이었다.
“어휴. 우리가 뭔 고생이냐. 저러다 대판 싸워서 할배한테 혼나는 거 아냐?”
물론 영들은 그런 인세의 일에 관심이랄 것이 없고, 하랑의 처량함만 더 늘어날 뿐이었다.
하랑은 마틴이 자신의 스승을 싫어하고, 또 그 스승은 보기보다 속 좁은 사람인줄 예전부터 알아왔지만, 서로 이유 모를 냉전을 벌이는 사이에 껴있자니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평범한 대화에 쓸 에너지조차 아끼면서 마틴과는 잘만 입씨름 하던 스승이 그새 무슨 한이 그리 맺혔기에 사람을 없는 취급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마틴은 무시당한다는 불쾌함만 제외한다면 지금 이것대로 나쁠 게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래, 너무 유치하게 굴었던 것도 같았다. 지금껏 그렇게 대놓고 적대적일 필요는 없었다. 순순히 져주는 인간도 아니니 꼴 보기 싫은 것은 매한가지였고.
‘누구는 좋아서 말 섞고 있던 줄 아나.’
그처럼 뻔히 보이도록 무시할 것까지도 없다. 견제는 티엔 본인과의 마찰이 없어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상황정리를 끝내고 평소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업무에 임하고자 했던 마틴은 또 다른 기이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 부분은 티엔씨가 맡았던 것 아닌가요?”
조금 의아한 부분에 대해 물었을 때 돌아온 것은 그가 자신의 일을 타인에게 맡기고 다른 일을 잡았다는 전혀 뜻밖의 대답이었다. 지금껏 티엔은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고서야 일을 미루거나 하지 않았다. 혹시 그에게 무슨 속셈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지만, 티엔이 이번 일을 맡지 않는다면 그와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틴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똑같이 무시하자 마음먹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를 볼 때마다 속이 안 좋아지는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일정의 변화가 있기를 한두 차례, 티엔은 그가 필요했던 자리에서조차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불참에 따른 사전준비는 있었지만 일을 떠넘겨진 이들이 속으로 난색을 표하고 있음을 마틴이 모를 리가 없다. 어긋나는 상황에 마틴은 불쾌함을 느꼈고, 일을 소홀히 여기는 듯한 티엔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하. 요즘 티엔씨를 본 적이 없는데 많이 바쁘기라도 한가 보죠?”
“그러게요. 혹시 아프기라도 한가?”
그가? 마틴은 하마터면 코웃음을 칠 뻔 했다.
그리고 얼마 후, 티엔 정은 예정에 없던 출장까지 가버리고 말았다. 구실은 그럴 듯 하지만 굳이 지금이어야만 하냐고 묻는다면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전부터 티엔은 마틴과 우연히 라도 같은 공간에 있게 되면 그 즉시 자리를 피하거나 마틴이 잠깐 눈을 돌린 사이 사라져있곤 했다.
이쯤 되자 사실은 명확해졌다. 그는 마틴과 마주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일부러 찾아온 건데 잠깐 얘기나 하죠.”
“당신이 그럴만한 용건은 없을 텐데.”
일부러 피할 수 없을 시간에 맞추어 찾아가고, 자리를 뜨려는 티엔을 억지로 붙들어 세우는 수고를 들이고서야 마틴은 여러 날 쌓아온 울화를 그에게 터트릴 수 있었다.
“사람을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이날 오전, 마틴은 본래라면 그에게 돌아갔어야 할 일을 티엔이 도중에 가로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는 그 자신이 아니라 마틴의 일을 없애버리는 방식으로 둘의 접점을 지워버린 것이다. 중요하지는 않은 일이었으니 이번 건 자체는 그리 대단치 않았지만, 지금까지 쌓인 감정에 겹쳐 마틴은 이것이 자신을 눈 앞에서 치워버리려는 수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대체 뭐가 문제예요? 제가 지금까지 당신 일에 간섭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지금 당신은 뭐 하자는 짓인데요?!”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티엔을 앞에 두고, 마틴은 자신이 파악하고 있던 그의 행적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일부러 자신을 피하느라 일을 팽개치고, 심지어 마틴 본인을 치워버리기까지 했던 정황을 언어로 만들어 뱉어내자 더욱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에 비해 분노의 대상인 티엔은 마인드리더의 말을 부정하지도, 무어라 변명도 않은 채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게다가 그는 화를 쏟아내는 마틴에게서 시선을 비낀 채 무언가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자신을 적대시하고 있는 마틴을 앞에 두고 티엔이 느끼고 있는 감정은 적대감도, 그렇다고 해서 잘못을 인정하는 미안함도 아닌 듯 했다.
“……이봐요. 지금 제가 장난하는 것 같아요?”
마틴은 그를 찾아오기로 마음 먹었을 때 무어라 반론이라도 듣기를 바랬다. 마틴의 어떤 점이 어떻게 그의 짜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이렇게까지 상종하지 못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마틴의 존재 자체가 거슬린다는 종류의 말이라도. 하지만 이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어딘가 어긋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브루스씨에게 신뢰받는다고 우쭐한 가본데. 그렇죠, 전 남의 머리나 헤집는 능력자니까. 당신한텐 그게 안 통하고요. 그래서 제가 우스워 보여요? 왜 제가 있을 자리에 있는 걸 잘못된 것처럼 만드냐고요!”
이 말이 끝나고, 마틴은 그렇게 언성을 높였음에도 자신을 똑바로 내다보지도 않는 티엔의 멱살을 쥐고야 말았다.
“나보다 훨씬 위험한 사상을 가진 건 당신이야, 경계 받을 건 당신이었고 당신이 지금 앉은 그 자리도 내 거였다고.”
그는 마틴보다 훨씬 건장하고, 그의 능력은 마틴과 달리 상대에게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이다. 하지만 마틴은 왜인지 그가 자신을 힘으로 상대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설령 그것이 오판이라 하더라도, 마틴은 그의 뻔뻔한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억지로 눈을 마주보고서 퍼부은 폭언에도 티엔은 침묵을 지켰다. 그의 얼굴은 그늘지고 찌푸려져 있었지만, 굳게 다문 입은 무어라 변명조차 내뱉을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정 제가 마음에 안 들고 재단도 뭣 같으면 차라리 떠나주시죠. 당신이 없을 때도 재단은 잘 돌아갔고, 어차피 결국엔 그럴 생각이잖아요?”
더 말할 가치도 없을 것 같았다. 마틴은 붙잡았던 옷깃을 밀치듯 놔버리고 뒤돌아 성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속내는 마틴에게 읽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무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고, 재단의 인재는 이런 자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찾아온 것부터가 시간낭비였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무얼 기대했는지도 알기 힘들었지만.
“나는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
등 뒤에서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마틴은 잠깐 동안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은 것이라 생각했다. 티엔 정이 저런 식으로 말을 할 줄도 알던가. 그리고 그의 말이 전하고자 하는 뜻은 마틴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지금 그걸 믿으라고 하는 소리인가요? 절 그렇게 무시해 놓고서?”
고개를 돌려 바라본 티엔의 시선은 여전히 마틴에게서 비껴나 있다. 장소가 어두운 탓인지 조금 떨어져서 보는 그의 표정은 직전보다도 어두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질문의 대답은 없었고, 마틴은 그게 무엇이든 듣기를 포기하고 자리를 떠나고자 했다. 그게 뭐든 간에 자신과는 더 이상 상관 없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뒤늦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또렷이 마틴의 귀를 파고들어왔다.
“나는 당신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 반대지.”
언제나와 같이 안락한 침대와 언제나와 다른 늦은 시각. 자명종의 시침이 가리키는 시간은 처참할 정도로 오른쪽을 향해 쏠려 있다. 아무리 이 날이 주말이고 마틴이 늦은 기상을 즐긴다지만, 보통 때라면 이 정도는 아니었다.
최악이다.
다시 눈을 떠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마틴에게는 최악의 기분으로 다가왔다.
그 전 날 들었던 말 한 마디 탓에 이 청년은 새벽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고, 날이 밝자 새어 들어오는 밝은 빛은 그의 꿈자리를 어지럽혔다. 다급하게 낯선 풍경을 뛰어다니던 마틴은 종종 얕은 잠에서 깨어나 자신이 꿈을 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밀려오는 졸음에 다시 정신을 잃곤 같은 전개를 반복했다. 하지만 차라리 그 망할 꿈을 꾸고 있는 편이 마틴에겐 더 마음이 편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오늘은 일이 없는 날이라는 정도일까. 일터에서 실수로라도 티엔을 마주칠 일이 없다는 뜻이다.
전 날의 저녁, 그는 의미가 불명확한 말을 던지곤 지금까지의 일은 사과한다는 말과 함께 떠나버렸다. 그리고 마틴은 한참 동안 그가 남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추리하며 그대로 못박혀있어야만 했다.
‘좋아한다’의 반대는 무관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싫어한다’의 반대는? ......
단순한 호감이라고 하기엔 무언가 부족했다. 굳이 지금껏 마틴을 피해 다녔던 정황을 설명하지도 못했고, 그렇게 엄숙하게 선언할만한 이야기도 아니니까. 하지만 어떤 놀랍고도 말도 안 되는 가정을 도입하자, 그의 행동이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지…….”
정확히 말하자면 마틴의 입장에서 미친 건 티엔 쪽이었다. 마틴은 이제 그가 자신을 우습게 보든 말든 그냥 내버려두는 편이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틴은 티엔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가정을 세우곤 그의 행동을 납득해버린 자기자신을 용납하기가 힘들었다.
마틴 자신이 학창시절에 어느 여학생에게 연심을 품었을 때도 그처럼 굴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그 여학생과 일부러 다투거나, 그녀와 마주치지 않으려 수업을 빠지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그가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뭐든 간에 티엔 같은 인물이 할 거라 생각하기 어려운 짓이었다.
이 일을 빌미로 정적을 어떻게든 해본다? 마틴은 그럴 마음도 들지 않을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고백 같은 것은 마틴에게 흔한 일이었고, 마틴은 지금이 보통 때와 다른 점이 무엇인지를 헤아려보았다. 첫 째, 그는 티엔 정이다. 사실 상 그게 문제의 전부였다. 티엔 정은 마틴에게 마음을 읽히지 않는 상대였고, 마틴이 전에 없이 적대감을 품은 상대였으며, 그도 자신에게 그러하리라 믿어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마틴은 상대의 마음을 추측하기 이전에 알아버리는 데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었다. 능력을 가진 이후 그에겐 고백한 상대의 본심을 알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었고, 일어나서도 안 됐다. 마틴은 자신이 단지 그 한 마디에 의해 이렇게나 긴 고민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겨우 침대에서 벗어나 늦은 아침을 씹으며 마틴은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기름에 전 베이컨과 토스트는 없는 의욕을 짜내어 대충 차린 것 치고는 맛이 나쁘지 않아 그의 기분은 조금은 나아지게 만들었다.
티엔 정이 마틴 챌피를 좋아한다. 유치하게 느껴지는 문장이지만 마틴은 거기서부터 생각을 시작했다. 그러나 마틴 챌피는 티엔 정을 싫어한다. 그게 이야기의 끝일 터였다. 하지만 전에 없는 당혹감과 불쾌함, 그리고 낯간지러움을 느끼고 있는 마틴은 그 생각에 마침표를 제대로 찍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의 티엔의 행동에 그가 전날 밝힌 감정을 덧씌워 본 것은 정말이지 어리석은 짓이었다.
아무리 경계하고 있었다지만 자신이 이렇게까지 그를 의식하고 있던가, 하는 허망함마저 느낄 정도로 마틴은 티엔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제는 그의 감정까지 고려하게 될 것을 생각하니 신경 쓰여 죽을 것만 같다. 타인의 감정을 고려하고 움직이는 데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으니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 상대가 그 티엔이여서야.
이전에 마틴이 연애 상대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을 때, 그리고 하필이면 그가 떠올라서 부아가 치밀고 있었을 때 그는…… 마틴은 거기서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씹어 넘기고 있던 음식이 목에 걸린 듯한 기분이다.
대체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주말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버렸다. 마틴은 누구처럼 무책임한 짓은 하지 말자 다짐하고 있었고, 평소와 같이 훌륭한 월요일을 보내고자 부단히 노력하며 재단으로의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막상 사무실에 도착하여 업무를 보기 시작하자 마틴은 자신이 무얼 그리 고뇌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충실한 일과를 보냈다. 분명 컨디션이 좋지 않았음에도 그의 일 처리는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 만큼 완벽했다.
“챌피씨, 혼자서 너무 많이 맡는 것 아니에요?”
“아뇨, 오늘은 일이 잘 풀려서 괜찮을 것 같네요. 그냥 제가 하게 해주세요.”
그러나 업무의 즐거움과 안도감도 잠시, 잠깐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이 오자 마틴은 또다시 멍해진 자신을 발견했다. 정말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잡생각을 피하려 자신도 모르게 일에 열중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최악이다. 이게 다 티엔 정 때문이었다.
휴식시간을 틈타 우연인 척 티엔의 주변을 서성여보았을 때, 마틴을 그렇게나 고민하게 만든 장본인은 자존심 상할 정도로 태연한 얼굴이었다. 마틴 자신도 평정을 가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혹여나 남을 한껏 부끄럽게 만들어 놓고선 혼자 털어내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다시 한 번 짜증이 치민다.
사실, 티엔이 왜 그런 시점에 그런 말을 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적어도 그럴 예정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리고 마틴은 깊게 생각할 것 없이 그것을 다행이라 결론지었다. 그랬을 터였다.
다시 한 번 큰 심난을 겪고 나자, 마틴은 평소의 자신을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정신 없는 하루를 보냈다.
“마침 찾아가려고 했는데. 티엔은 아직 있어요?”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마틴이 티엔의 이름을 꺼내자 하랑은 의심쩍은 반응을 보였다. 한창 사이가 나빠 보이는 둘이 일부러 만나게 되는 것이 달가울 리가 없는 것이다.
“있긴 한데. 혹시 그…… 뭐더라? 결투? 그거라도 하려고?”
동양인 소년은 평소에 써볼 일이 없던 어색한 단어를 입에 올렸다. 사실 그 둘이 무얼 하든 말릴 생각은 없지만 사이에 낀 입장으로선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 거 아니에요. 승산만 있으면 진작 했겠지만.”
제발 적당히 싸워달라는 당부를 뒤로 하고 티엔이 있다는 곳으로 향하는 길에, 마틴은 그간 하랑에게 제대로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과할 겸 이번 주말에는 간만에 디저트 약속이라도 잡아볼까, 하는 계획을 세우다 보니 티엔 때문에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았다.
“이봐요.”
티엔은 마틴의 기척을 진작 눈치챘지만 부르는 소리가 있기 전까지는 아는 척을 하지 않았었다. 몇 시간 전처럼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떠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곧장 이어지는 마틴의 말은 그를 놀라게 만들었다.
“끝나고 잠깐 보죠.”
“……이유는?”
“저 안 싫다며요? 얼굴 좀 보자는 게 그렇게 어려운 부탁이에요?”
티엔은 전처럼 인상을 쓰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마틴이 먼저 찾아온 것도 모자라 그런 말을 꺼내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기어코 단둘이 보자며 불러내는 그를 티엔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상대의 반응과 상관 없이, 마틴은 뒤이어 적당히 아는 사람을 마주치지 않을만한 거리이면서 티엔이 알아듣기에 무리가 없을 만한 위치에 있는 가게의 이름을 꺼냈다.
“나오는 걸로 알고 있을게요.”
무어라 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티엔을 뒤로 한 채, 마틴은 그가 아마 전에 보였던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티엔은 깊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다시는 눈도 마주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이가 잡는 약속의 의미를 그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다.
마틴은 깍지 낀 양손으로 이마를 괴고 생각에 잠겼다. 이게 다 뭐 하는 짓인지.
가게에는 약간 들뜬 분위기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펍의 주인은 익숙한 손길로 잔을 닦으며 집 나간 아내의 생각을 하고 있었고,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앉아있는 남자는 퇴근 후의 술 한잔과 함께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비관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우울한 소리들은 경쾌한 음악과 섞여 마틴의 귀를 간질였다.
얼마 후, 마틴은 그 사이로 한 덩어리의 정적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발소리와 다른 이들의 생각으로만 눈치챌 수 있는 존재. 그리고 마틴의 곁에 멈춰 선 정적은 자신의 입으로 그의 고요를 허물어트렸다.
“술은 하지 않는다만.”
“그럼 제가 마실 테니 보고나 있던가요.”
퉁명스러운 대답에 잠깐 망설이던 티엔은 그의 맞은 편에 자리잡았다.
마틴이 주문한 음료가 나올 때까지 둘은 침묵했다. 마틴은 턱을 괸 채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고, 티엔은 마틴이 울분을 쏟았던 그때처럼 어긋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상대가 생각하는 바를 추측하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내 종업원이 쟁반에서 주문한 것을 내려놓고 사라졌고, 그 잔 속의 파문이 사라졌을 즈음에야 마틴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싫다는 말을 하려고 불렀어요.”
티엔은 피하고 있던 시선을 돌려 마틴을 마주보았다. 담담한 척 애써보았지만 그도 자신이 그렇게 비치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 얘기라면 충분히 들은 것 같다만.”
“아, 저번에 말한 것 말고도 남은 게 많거든요. 당신이 이 정도는 들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요.”
아닌가요? 마틴은 눈빛으로 그렇게 물었고 티엔은 다시 시선을 피했다. 대체 할 얘기란 것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전에 남긴 사과로 납득하지 못한다면 그걸 들어줄 의향 정도는 있다. 단지 그렇다고 해서 마틴이 이렇게 갑작스러운 방식으로 찾아온 것이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그리고 확인 차 묻는 건데. 그 싫지 않다는 건 평균 이상으로…… 그러니까 저를 좀 많이 좋아한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되나요?”
설령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오더라도 마틴에게는 할 말이 많았다. 그리고, 그간의 고민이 허탈해지긴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티엔의 반응은 마틴의 본래 추측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줄 뿐이었다.
“……실수는 인정하지.”
그의 대답은 순순한 긍정은 아니지만 반박의 말도 아니었다. 티엔 정이라는 사람의 기준에서 이것은 인정하기 어려운 사실에 대한 명확한 긍정인 셈이다.
“대체 무슨 실수요? 뭐, 그건 아무래도 좋지만……. 제가 전에 어디까지 말했더라.”
“내 낯짝이 꼴 보기 싫고, 위험한 사상을 가졌고,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지.”
당연하게 마음을 들킨 것도 모자라 마음을 둔 이의 입으로 자신의 불쾌함에 대해 듣게 된 티엔은 거의 체념한 채로 말했다.
“제대로 듣고는 있었나 보네요.”
마틴은 웃으며 손끝으로 술잔을 까딱였지만 그걸 입으로 가져가지는 않았다. 그는 이야기할 장소가 필요했을 뿐 정말로 무얼 마시려고 하거나, 특히 취기를 빌릴 생각 같은 건 아니었다.
티엔, 당신이라는 사람은- 이라는 말로 운을 뗀 마틴이 늘어놓는 인간상은, 만일 그 대상이 누군지 몰랐더라면 티엔 본인도 그가 잘못되었노라 긍정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나하나 예시를 들어가며 그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재수 없고, 자기만 옳은 줄 알고, 남 무안 주는 것이 취미인지를 설명하는 마틴의 어조는 불유쾌함과 비웃음 사이를 오갔다. 자신은 거의 잊고 있었던 일들이 하나하나 언급되는 것을 듣고 있던 티엔은 못다한 얘기 때문에 불러냈다는 마틴의 말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온갖 잘난 척은 다 하는 주제에 뻔뻔해선…… 아, 이건 같은 말이겠네요. 전 당신 평판이 아직도 바닥을 치지 않은 게 제일 신기해요.”
그 말을 끝으로 마틴은 입을 다물고, 한참 동안 무언가를 고심하며 표정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걸로 끝인가?”
“제일 짜증나는 게 뭔지 알아요?”
침묵을 깨는 티엔의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마틴은 또 다른 화제를 꺼냈다. 다른 말들이라면 몰라도 이 이야기는, 아마 어지간한 계기가 없는 한 평생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았을 터이다. 이런 자리를 마련하고도 마틴은 여전히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1년 전? 그보단 덜 됐나요? 지금 이 맘 때쯤이었던 것 같은데. 괜찮은 능력자에, 괜찮은 뒷배. 잘 성사됐다면 쓸모 있는 조합이었죠.”
티엔은 마틴이 무얼 말하려는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의 제자였으나 회사에게 빼앗겨버린 루시 리의 건이다. 안일한 판단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던 이 첫 스카우트는 티엔의 가장 큰 오점이었다.
“전 그래도 당신이 재단에 도움이 되는 짓을 하긴 하나 싶었어요. 그런데…….”
마틴은 그 일에 결과에 대해서는 말을 흐렸다. 그는 지금까지 그렇게 티엔과 싸워왔으면서도 이 일을 크게 들먹인 적이 없었다. 이 마인드리더는 의도치 않게 읽어버리곤 하는 타인의 역린을 건드리는 데에 꽤 거부감이 있었고, 그건 조금 다른 경우인 티엔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그리고 어쨌거나, 마틴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건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때 당신은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자신만만한 태도였죠. 실제로 잘 되고 있는 걸로 보였고. 그런데 당신도 결국엔 인간이더라고요.
……그 전까지 당신은 어디 멀리서 온 괴물 같았는데,”
다음 말을 꺼내기 전, 마틴은 잠시 이를 악물었다.
“당신에게 동정심이 들었어요. 저는 그게 제일 불쾌해요.”
마음을 읽을 수 없다는 두려움은 상상했던 것보다 컸다. 특히나 티엔은 속내를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인물이다. 그런데 그 상대가 실패를 겪고, 그 실패에 낙담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어딘가 묘한 기분이었다.
그 뒤로 미지에 대한 공포는 어느 정도 사그라졌지만, 마틴은 그런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짜증이 났다. 그 이후로 그와 부딪히는 빈도가 더 잦아진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주말 동안의 긴긴 고민을 거치는 사이 마틴은 자신이 어느 정도는 티엔의 인간다움을 확인하며 안심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런 긴 사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뜻밖의 발언만으로도 티엔은 당혹을 느꼈다. 마틴이 제일, 이라고 표현한 불쾌함은 티엔이 사과를 할 수 있는 사안조차 아니었던 것이다.
“브루스씨는 뻔히 절 견제하려고 당신을 앉혔지,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도 없지, 앞으로 뭘 저지를지도 모르고……. 당신은 맘 편히 거기 있기만 해도 되겠지만 전 당신을 신경 쓸 수밖에 없다고요. 이건 불공평한 거 아니에요?”
꺼내기 어려웠던 말을 내뱉어버린 마틴은 지금껏 꽤나 차분했던 말투를 내던져버렸다.
“게다가 빌어먹을 감정소모는 차고 넘치는데 왜 당신한테까지─ 하, 이번 일도 그래요. 세상에. 그 티엔 정이. 지금 본인도 인간이라고 시위라도 하는 거예요?”
마틴이 야유를 던지며 신경질적으로 술잔을 테이블에 부딪혔다.
“전 당신한테 그런 종류의 감정이 아예 없는 줄 알았어요.”
“그랬었지.”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고심하다 이렇다 할 답을 찾지 못한 티엔은 그저 담담하게 답했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티엔 자신도 알지 못한다. 심지어 그는 이것이 연심인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확신하지 못했다.
“허.”
사정이야 어쨌든, 자신의 감정을 마치 남의 일인 양 말하는 티엔에게 마틴은 기가 막힐 뿐이었다.
“제가 그렇게 좋으면 어디 유혹이라도 해봐요. 마음에 들 짓을 해 보든가, 아니면 아예 밝히지를 말았어야죠. 그 전까진 그렇다 쳐요. 그런데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다 일까지 내팽개치고, 그러고서 혼자 밝히고 속 편해지면 다예요? 제 입장을 대체 뭐로 아는 건데요?”
“밝힐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어.”
“결국엔 밝혔잖아요.”
“그만큼의 악감정은 아니라고 전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실수였지.”
만일 이것이 남의 일이었다면 마틴은 꽤나 화려한 실수라며 웃어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마음이 읽히지도 않는 주제에 대체 저 속은 어떻게 돼먹은 걸까. 게다가 뻔뻔하기보다는 낙심한 얼굴로 볼 때 티엔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밝히지 않으려던 건 어차피 가망이 없으니까?”
가망이 없다는 것은, 일전에 티엔이 타인의 감정에 대해 평했던 말이다.
“틀린 건 아니네요. 말했듯이 전 당신이 정말 싫거든요. 그런데 저는 뒤에서 하는 험담 같은 건 좋아하지 않아서요. 자기 살을 깎아먹는 짓이고. 그래서 어떤지 알아요? 티엔 정을 씹는 말은 당신 본인한테밖에 못한다고요.”
하랑과 있을 때 그를 흉본 적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정도를 지키고 있다. 사실 티엔에 대한 뒷얘기는 재단 내에서 적지 않지만 티엔 본인은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관심이 없었고, 마틴은 그런 무리들과 함께하기를 꺼려했다.
“그래서 그 점에 대해 사과라도 받고 싶은 건가?”
“나쁘지 않겠네요. 그럴 의향이 있다면요? 당신한테 평생 들을 사과는 다 들은 줄 알았는데요.”
별로 사과 같지도 않았지만, 하고 조소를 띄우던 마틴은 금방 입가에서 미소를 지워버렸다. 그가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한 입장이 아니었다면 아마 어쩌라는 거냐는 반응밖에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됐어요, 이걸로. 일부러 불러낸 건 그런 이유였고, 하려던 말은 이게 다예요. 할 말은 또 생기겠지만.”
또? 티엔이 그 말에 위화감을 제대로 받아들일 새도 없이, 마틴의 다음 언사는 그에게 더욱 큰 혼란을 안겨주었다.
“그러니까…… 다음에 봐요. 전처럼 피하지나 말고.”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온 마틴은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음에도 얼굴이 불쾌하게 화끈거렸다.
그가 싫은 것은 확실하다. 그에게 한 말은 액면 그대로의 의미일 터이다. 그러나 마틴은 이걸로 그의 정이 떨어졌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기를 바랬다. 이대로 그 혼자 감정을 정리하게 두기엔 지금까지 쏟은, 그리고 앞으로 쏟게 될지 모르는 자신의 감정이 너무도 억울했던 것이다.
어느 쪽이든 마틴은 손해를 보지 않을 것이다. 신경 쓰이기는 매한가지겠지만 마음을 준 것도 그걸 밝힌 것도 티엔 측이었으니까.
마틴은 적어도, 그렇게 자신을 흔들어 놓은 사람이 혼자서 태연해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마틴이 자리를 뜨고 난 후, 티엔에게는 기어이 그를 피하게 되었을 때만큼의 심란함이 남았다.
티엔이 이 자리에 나왔을 때 그는 경멸의 말이라도 들을 것이라 생각했고, 마틴의 첫마디는 그의 예상과 그리 동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마틴은 불필요한 감정을 쓰이게 만들었다며 화를 내고 있었다.
다시 보자는 마틴의 말은 단지 티엔이 그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인지, 나아가 일부러 그 점을 이용해 자신을 괴롭히고 싶기라도 한 것인지 티엔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만일 그 외의 가능성이 있다면.
상대가 자신을 밀어낼 것이라는 생각이 유일한 위안이자 가장 큰 고통이었다. 이제는 전보다 더한 싸늘한 눈길이나 무시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험담을 잔뜩 늘어놓고서는 오히려 다시 보자는 말을 하는 마틴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적어도 왜 그렇게 싫어했는지 이유 정도는 알게 됐군.’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티엔은 마틴이 주문해놓고 비우지 않은 잔을 들여다 보았다. 단순한 자릿값의 의미던 음료는 이제 맞은편에 앉아있던 금발 청년의 유일한 흔적이었다.
잔을 들어다 매끄러운 얼음조각들이 수면에서 잘그락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티엔은, 어느새 그것을 자신의 입가로 가지고 갔다.
이름 모를 술은 은은히 달짝지근한 맛과 함께 그의 혀를 아릿하게 만들었다. 한 번에 들이키기엔 지나치게 서늘했음에도 그것이 닿은 입 안이며 목이 화끈거린다. 술의 맛이랄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에게는 뒷맛이 기분 나쁘게 씁쓸했지만, 한편으로는 지금의 그의 기분을 그대로 담아내는 것 같아 티엔은 더욱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번에는 그가 잠을 이루지 못할 차례였다. 이미 여러 날 그래왔지만, 오늘밤은 특히나 더.
전력 주제였던 '비밀연애'를 생각하면서 썼는데, 쓴 시간을 생각하면 도저히 전력은 아니네요...
평소 캐해석과 조금 다를 수도 있습니다.
조용한 시작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덕분에 그들은 마지막도 조용히 보낼 수 있었으니까.
짧다면 짧은 인연이었다. 그 동안 티엔은 상대의 미소를 아꼈고, 마틴은 상대의 고요를 기쁘게 여겼다. 가만히 어깨를 기대고 있다가도 눈을 마주치고 서로의 입꼬리가 살며시 움직이는 그 시간을 둘 모두는 사랑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벌써 알아챘어요. 당신, 이런 면에선 서툰가 본데요.”
“……대체 어떻게?”
“당신은 평생 가도 모를걸요. 상대가 누군지는 전혀 엉뚱한 쪽을 짚고 있지만요.”
대체 누가 자신의 연애상대로 점 찍어지고 있는지, 티엔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어쩐지 껄끄러운 기분이 들어 더 깊게 묻지 않았다. 그리고 마틴은 그런 연인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음지었다.
“바람 피울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아요. 티엔 당신은 몰라도 다른 사람들 생각은 훤히 보이니까.”
“반대의 상황에 불공평하다는 생각은 안 드나?”
“제가 한눈 팔 것 같아서 그래요?”
“먼저 얘기를 꺼낸 게 누구였지.”
티엔은 불신의 언사가 괘씸하다며 미간을 찌푸리고, 금발 연인은 짐짓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그럴 리는 없죠. 저쯤 되니까 그렇지, 아니면 당신 같은 사람이 누굴 돌아보기나 하겠어요?
더욱 괘씸하다며 밝은 금발을 헝클어뜨리는 커다란 손에는 그럼에도 애정이 담겨있다.
“티엔.”
돌아보는 이의 눈은 정말로 새카맣다. 검은 눈이라 해도 빛을 받으면 호박색으로 투명하게 보이기 마련인데, 그의 눈은 조금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의 짙은 갈색으로밖에 변하지 않는다. 마틴은 그 눈이 티엔 정이라는 사람을 대변해주는 것 같아 퍽 마음에 들어 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당신의 얼굴이 보고 싶었노라 웃는 얼굴로 되삼킨 말은 또다시 그의 목에 걸려 숨을 갑갑히 만든다. 무언가 막힌듯한, 죄어드는듯한 느낌.
─우리의 끝은 언제일까요?
마틴은 그들의 마지막을 자주 생각했다. 어떤 형태로, 어떤 이유로 헤어져 서로를 모른 척하게 될지를. 그런 계기가 있었던 것도, 그럴 조짐이 보였던 것도 아니다. 상대를 기만하는 듯한 생각에 죄책감을 가지면서도 마틴에게서는 그런 고민이 떠나가지 않았다.
그 때가 오면, 알려지지 않은 그들의 관계는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듯 조용히 끝을 맺게 될 것이다.
한편, 티엔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모든 가능성을 준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마지막과 별개로 눈 앞의 현실에 충실하기를 원했다. 티엔은 누군가와의 작별이 온전히 자신의 소관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내뱉을 수 없던 말이 고이다 못해 흘러 넘쳤을 때, 마틴은 차마 티엔의 눈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언젠가 다 끝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당신의 마음을 읽고 조종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미안해요. 만약에 제 마음이 식으면 어쩌죠? 당신의 마음은 그대로라면요? 그 반대라면……?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아파야 하나요? 그게 당연한 일이겠죠. 그런데도 그게 너무 두려워요.
커다란 죄라도 진 양 고개를 떨구고 불안을 고백하는 연인을 바라보던 검은 눈은, 이내 더 새까만 어둠으로 시야를 채웠다.
그 말대로 언젠간 끝이 나겠지. 그렇지 않을 거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나도 이별에 대한 생각을 했고, 실제로 하지 않은 일에 당신은 사과할 필요가 없어.
그들은 긴 이야기를 나눴다. 마틴이 지금껏 봐온 연인들의 시작과 끝이라는 것, 티엔이 생각하는 작별이라는 것, 그들 각자 자신들의 서투른 감정의 마지막을 내다볼 수 없다는 것.
감정의 변화만이 끝의 형태는 아닐 거라고 담담히 말하는 티엔에게 마틴은 가볍게 눈을 흘겼고, 자신의 변심이 두렵다 말하는 마틴을 티엔은 복잡한 심경으로 지켜보았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끝을 말하는 두 사람은 간혹 농담을 던지며 웃음지었고, 씁쓸함을 삼키려 침묵을 가졌다.
“마틴.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
“혹시 제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죠?”
이야기가 끝나고 각자 생각의 시간을 가진 뒤 티엔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제안은 마틴의 예상 그대로였다.
─만일 제가 돌아오지 않는다면요?
마틴은 또다시 말을 삼켰다. 이번에는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생각을 전부 듣고 난 티엔이 그런 마틴의 속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 동안 한눈 팔지 않는다고 약속한다면요.”
“어차피 당신 외에는 볼만한 사람도 없는 것 아니었나?”
이번 연애의 마지막 대화가 이런 내용이라니. 마틴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지만 결국엔 웃어보였다. 티엔은 마틴의 웃음을 좋아했다.
“……지금까지, 좋은 시간이었어요.”
“고마웠다. 더 좋은 모습으로 만나길 바라지.”
헤어질 때 정말 그런 식으로 말할 생각이냐는 야속함도 잠시, 꽉 끌어안는 손길 안에서는 미안하다는 사과와 그에 대한 만류, 그리고 마지막 고백이 주고받아졌다.
그들이 이별한지 닷새째.
티엔에게는 여전히 연애 중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고, 마틴은 여전히 누구에게나 상냥한 재단의 인재였다. 마틴은 ‘옛 연인’이 여러모로 철저하지 못한 사람이라며 웃으면서도 내심 안도하고 있었고, 티엔은 내색하지 않으면서도 ‘전 애인’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며 그의 흔적을 더듬고 있다.
조금 이른 귀가길, 마틴은 저 멀리 희미한 노을이 지는 주위로 검은 조각구름이 드리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오팔마냥 기이하게 빛나던 서쪽 하늘은 검푸른 빛깔에 먹혀가며 마지막 따스함을 태우고, 그 주위로 몰려든 구름은 노을을 감싸는 양 잔잔한 호선을 그리고 있다. 평범하다면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풍경이지만, 마틴은 어느 한 순간도 같지 않은 하늘을 눈에 담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마틴의 곁에 선 흑발의 사내는 그 하늘로부터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음.”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요. 어차피 다 알겠으니까.”
성의 없는 대답에 조금 심술이 난 마틴이 쏘아붙였다.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면 그것대로 좋은 말은 나오지 않았겠지만. 물론 티엔도 그런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서로의 감성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다는 태도다.
“어차피 내일도 하늘을 보고서 같은 말을 하겠지.”
“정말이지 이름값을 못하시네요.”
자기네 나라 말로는 하늘이라는 뜻을 가졌다는 이름의 동양인에게, 마틴은 한숨을 내쉰다. 참으로 낭만이 없는 인간이다.
“글쎄. 그러는 마틴 당신은?”
자신의 이름과 하늘 감상이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을 보이던 티엔은 금발의 서양인에게 반문했다.
“저요? 저야……”
뜻밖의 질문에 마틴은 잠깐 생각의 시간을 가졌다. 그는 지금껏 자신의 이름의 뜻이랄 것을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옛 성인의 이름을 따왔다고 해야 할까. 한겨울 길가에서 떨고 있는 걸인에게 자신의 겉옷을 찢어주었다는 성 마틴.
“……이름하고 사람은 별개긴 하죠.”
그리 부끄러운 삶은 아니었다 생각하지만, 성인과 자신을 비교하기 껄끄러웠던 마틴은 순순히 잘못을 인정했다. 한 마디도 져주지 않는 사람이 야속하긴 해도 인정할 것은 하는 주의다.
“그래도 이럴 땐 맞장구쯤 쳐주면 어디가 덧나요?”
여전히 부루퉁한 마틴을 가만히 지켜보던 티엔은, 그제서야 순순히 애인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노을이 좋기는 하군.”
하지만 그가 보고 있던 것은 하늘이 아니라 노을이 드리운 금빛 머리칼이다. 또다시 성의 없는 대답이라며 타박을 받으면서도, 티엔은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최근 심경의 변화를 겪는 이유는 보통 한 가지로 집중된다. 무뚝뚝하고 뻔뻔한 연인과 관련된 일이다.
얼마 전부터 교제를 시작한 둘의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함께 식사를 하거나, 이전보다 긴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살을 맞대거나. 하지만 아직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골똘히 고심하던 마틴은 이내 그 부족함이 두 사람 각각의 충만함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티엔 정과 마틴 챌피, 그들은 각자 스스로에게 철저한 인물이었다. 일상부터 업무, 대인관계까지, 서로 그 내용이나 의미가 다르기는 했지만 둘은 혼자서도 맡은 바를 철두철미하게 해냈고, 거기에 타인의 배려나 관심은 그저 부차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서로가 서로의 철저함을 알고 있는 만큼 각자의 생활에 별로 관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지나친 간섭이야 실례가 되겠지만, 아무리 신뢰에 의한 것이라도 무관심은 무관심이다. 공허의 원인을 깨달은 마틴은 조금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그 날 점심 무렵, 티엔의 눈 앞으로 들이밀어진 마틴의 손에는 따끈한 김이 피어 오르는 머그잔이 들려있었다.
“……날도 추운데 감기 조심하라고요.”
무슨 뜻이냐며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티엔에게 마틴은 결국 자신의 뻔한 행동에 설명을 덧붙여야만 했다. 평소에 하던 짓이 아니니 그를 나무라기도 힘들다.
“고맙군.”
그런 걱정은 필요 없다 여기면서도, 티엔은 마틴의 작은 호의를 순순히 받아 들었다. 약간 붉은 빛을 띠고 찰랑이는 잔 속의 액체는 물결을 따라 은은한 향을 내뱉는다. 하얀 자기 너머로 전해지는 뜨거운 기운이 그의 손을 포근하게 데우고 있었다.
“뭐…… 끝나고 봐요.”
차가 식기를 기다리는지 잔을 가만히 들여다보고만 있는 티엔에게 그렇게 말하곤, 마틴은 가벼운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썩 만족스러운 반응은 아니지만 토를 달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냐는 생각이었다.
사실 별 도움이 되지는 않는 행동이라도, 막상 해보니 마틴은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타인에게 베푸는 일에 익숙한 마틴이면서도 유독 티엔에게는 그렇게 해본 적이 없었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연인이 되었다는 실감이 들어 속이 조금 간지러울 따름이다.
마틴은 티엔에게서 무언가를 기대하진 않았지만 자신이라도 가끔은 배려를 실천해보자 마음먹었다. 담백한 연인의 반응과는 별개로 마틴 자신은 뿌듯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으므로.
기분 좋은 오후를 보낼 예정이던 마틴은 지루한 서류 작업에 함락되고 말았다. 오늘따라 지겹게 이어지는 일감 위에 무심하게 펜을 놀리는 마틴은 일이 끝나면 무얼 할지를 생각하며 겨우겨우 긴 시간을 버텨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마틴의 시선 끝에 새빨간 무언가가 나타났다. 놀라서 고개를 들자 책상 한 켠에 잘 익은 사과 한 알이 나타나 있다. 영문을 모르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마틴이 등 뒤의 그림자를 발견했을 때, 그 인영은 커다란 손으로 마틴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곤 멀어져 버렸다.
“아- 저기요!”
조금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외치는 마틴에게 등뒤로 손을 흔들어 보인 티엔은 그대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연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마틴은 덩그러니 놓인 사과로 눈을 돌렸다. 그새 이런 건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르지만, 무뚝뚝한 동양인은 아까의 답례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걸 지금 당장 먹을 수도 없는데, 지금 놀리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틴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린다. 일이 끝나면 그를 만나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생겼다.
속에 든 것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느낌에 마틴은 강제로 눈을 떴다. 주위가 어둡다. 바로 직전까지 마틴은 안락한 침대 위에서 까무룩 잠들어있던 참이었다. 곧장 돌아누워 입을 틀어막는 것으로 참사는 면할 수 있었지만, 이내 그는 자신에게 있는 문제가 그것뿐이 아니라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머리는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고, 위장은 사정없이 뒤틀리고 있었으며 손발은 생소하게 저리고 무감각하여 자기 것이 아닌 양 느껴졌다. 게다가 거슬리게 울리는 이명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그의 사고를 더욱 망가뜨리고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온갖 고통을 마주하게 된 마틴은 괴로움에 몸을 비틀다 침대에서 반쯤 떨어져 내렸다. 손으로는 이불자락을 쥐어짜며 가쁜 숨을 삼키던 그에게 다시 한 번 구토감이 밀려온다. 차마 어딘가로 달려갈 기운이 없는 마틴은 고개를 돌리고 그 자리에서 속을 게워냈다.
우읍. 딱딱한 감촉이 식도를 거슬러 올라오고, 손톱만한 작은 조각들이 끈적한 액체와 함께 바닥에 흩어졌다. 목 끝에 걸린 조각을 한참이나 콜록여 떨쳐낸 후 손끝으로 바닥을 더듬어본 마틴은 그제서야 그것들이 녹다 만 알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가 흔들린 탓에 두통이 더 심해진 청년은 다시 침대에 매달려 신음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마틴의 기억은 혼자 집에서 위스키를 들이킨 것으로 끊겨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두통과 울렁거림은 결코 숙취 때문만이 아니었다. 특히나 마틴이 방금 쏟아낸 것들은 그 사실을 여실히 증명한다. 취해있던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 찬장에 있던 진통제를 입에 들이부었던 모양이었다.
원인을 알게 되자 구토감은 더욱 심해졌다. 게다가 그 와중에 통증 외의 오감이 앞을 다투어 마틴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미 있던 저릿한 느낌과 이명에 더하여, 혀를 괴롭히는 쓰고 신 맛,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 모를 역한 냄새, 그리고 고통이 심해질 때마다 눈 앞을 어른거리는 흰 반점은 그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었다.
몇 번의 구토와 헛구역질이 더 있고서 마틴은 기어가다시피 하여 겨우 전화기 앞에 도착했다. 이 밤중에 누구에게, 무어라 알려야 할까. 떠오르는 사람은 있었다.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떠올리고 있던 얼굴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손이 떨어지지 않아 망설이던 마틴은 이대로 버티다 까무러치게 될 것 같아 떨리는 손가락을 가까스로 움직여 익숙한 번호로 다이얼을 돌렸다.
긴 신호음. 다시 속이 나빠지는 것을 느낀 마틴은 태아처럼 몸을 웅크렸다.
찰칵.
저 죽을 것 같아요.
아뇨…… 취했는데…… 약을 좀 많이 삼켜서……
토했어요. 죽을 것 같아요. 네…… 집이요.
미안해요.
마틴은 통화가 끊긴 수화기를 쥔 채 한참 동안 놓지 못했다. 다시 몸을 일으킬 힘이 없어서였다.
이대로 그가 올 때까지 가만히 웅크려 있을까 체념하고 있을 때, 이성인지 무엇일지 모르는 무언가가 고통으로 비틀리는 머리 한 켠에서 태연한 생각을 지껄였다. 어서 그거 내려놓고 문으로 가. 그 사람은 네가 여는 게 조금만 늦어도 현관을 부수고 들어올 거야.
맞는 말이다. 마틴은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아픈 몸을 이끌고 기어가 현관의 잠금을 풀었고, 이제는 정신까지 이상해진 것 같다 생각하며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져버렸다.
차가운 바닥이 몸에서 체온을 서서히 빼앗아가고 있을 때, 뜨거운 온기가 마틴을 붙잡았다. 귓가에 어떤 소리가 울리는 것 같지만 이명이라 여기곤 반쯤 떴던 눈을 다시 감아버렸다. 이어서 몸이 붕 뜨는 느낌, 눈꺼풀 너머로 느껴지는 환한 빛, 그리고 머리를 감싸는 커다란 손이 느껴진다. 마틴은 그제서야 제대로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마틴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말에 티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이 지경이 되어 한밤중에 사람을 불러낸 건지, 새하얗게 질려있는 마틴의 얼굴을 확인한 티엔은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정신이 드냐는 물음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마틴의 미간이 점점 좁혀진다. 의식과 함께 아픔도 함께 돌아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뒤 티엔이 그에게 물컵을 들이밀자 마틴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당장 마시라는 티엔의 완강한 태도에 못 이겨 차가운 액체가 반쯤 억지로 위 안에 흘러 들어가고, 속이 다시 채워지자마자 마틴은 이제 거의 형체가 사라져있는 약들을 마저 토해냈다.
“죽겠어요…….”
똑바로 눕지도 못하고 웅크려서 끙끙대는 이를 티엔은 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게 죽으려고 작정했었냐는 말이 치밀어 오르지만 차마 아픈 사람을 붙들고 다그칠 수 없어 목구멍에 눌러 담고,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선 병실을 나섰다.
티엔이 마틴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얕은 숨을 몰아 쉬며 문가에 쓰러져있는 마틴을 발견했다. 탁자에는 그리 마시지도 못하던 독한 술이 비워져 있고, 부엌에는 내용물이 쏟아져있는 약통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본인은 사고라고 말했지만 까딱하면 정말 돌이킬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티엔의 입장에서는 가벼운 의견 차이일 뿐인 일로 둘이 다투었던 것이 바로 어제, 그도 자신이 어른스럽지 못했다는 자각은 있어서 다음날 얼굴을 보면 사과하겠노라 마음먹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잠든 그의 집에 무례하게 울리는 전화를 받아보니 멀쩡한 얼굴로 헤어졌던 연인이 죽어가고 있단다.
만약 마틴이 고의로 티엔에게 죄책감을 주고 싶었던 거라면 효과는 탁월했다. 티엔은 잔뜩 화가 난 마틴에게 무심한 말을 던져댔던 어제의 자신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에서도, 정신이 들자마자 하는 첫 마디도 사과였던 걸 보면 그럴 의도는 없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오히려 상태가 호전되고 나면 상대의 얼굴을 마주보기 힘든 쪽은 마틴일 터이다.
티엔은 이런저런 정리를 위해 마틴의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가 뱉어둔 것들을 치우고, 약간의 분노를 섞어 집안의 얼마 되지도 않는 술을 요리주까지 포함해 전부 쏟아버렸으며, 내친 김에 꼴 보기 싫은 약통도 내용물째로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다. 몇 시간도 채 잠들지 못한 그의 머리가 울려오지만 마틴의 상태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을 알기에 그는 이날 밤 다시 잠을 청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해 처방을 받고도 사라지지 않는 고통에 마틴은 한참이나 몸을 뒤척였고,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티엔이 자신을 다독이는 손을 느끼며 겨우겨우 잠에 빠져들었다.
해가 중천에 걸린 무렵에야 깨어난 마틴은 한동안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보다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은 텅 빈 동시에 욱신거려 불쾌함이 밀려왔다. 숙취? 숙취인가? 어제는 뭘 했지?
그러던 와중 떠오른 얼굴에 마틴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불편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 그런 그를 발견한 간호사가 몸 상태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져왔다. 대답을 듣고 난 그녀의 말에 따르면 마틴은 순조롭게 회복되고 있었고, 의사의 소견과 충분한 안정이 필요하겠지만 보호자와 함께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퇴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틴은 겨우 지난 밤의 일들을 떠올렸다. 자신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 깨닫고 나자 그는 차라리 병원의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더 마음 편할 것 같았다.
아, 마침 저기 오시네요.
간호사가 부르는 소리에 마틴은 그녀가 의사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이는 마틴이 지금 보기를 가장 원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금발 청년은 꽃병을 깬 사실을 들킨 어린아이처럼 몸이 굳어버렸다.
마틴이 무어라 입을 뗄지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 간호사가 티엔에게 먼저 환자의 상태를 알렸다. 티엔은 가벼운 목례로 감사를 전하고, 그녀가 근처를 떠날 때까지 말없이 마틴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눈이 마주치자 마틴은 아픈 속이 더욱 불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저- 그게……”
“미안하다.”
뜻밖에도 티엔은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마틴에게 먼저 사과를 전했다. 애초에 그렇게까지 취하게 만든 계기가 자신이니 자신의 책임이라며 고개를 숙이는 티엔의 모습에 마틴은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사과하면 좋을지 쥐구멍에라도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도리어 사과를 들으니 그의 속내를 알 수 없는 마틴으로서는 그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이번 일은 제 잘못이잖아요.”
멍하니 티엔을 바라보다 어렵사리 입을 뗀 마틴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왜 당신이 사과를 하냐는 물음은 도중에 끊겨버릴 것 같아 꺼내지 못했다. 질끈 깨문 어금니가 아파왔다. 티엔은 그런 마틴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내 잘못이라고 했다.”
“……미안해요.”
울컥 올라오는 감정 사이로 간신히 내뱉은 말은 떨리고 있었다. 마틴이 더 이상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여버리자 티엔은 잠깐 시간을 두고 무릎을 굽혀 그를 품에 안았다. 무사하니 그것으로 되었다고 속삭이는 연인에게, 마틴은 대답 대신 양 팔로 그를 마주 껴안았다. 이번에는 몸이 차갑지 않았음에도 그의 온기는 여전히 뜨겁게 느껴졌다.
어느 건반을 건드리면 어떤 현이 울려 어떻게 공기를 떨리게 할 것인지, 그것이 어떤 음색이 되어 어떤 식으로 심금을 떨리게 할지 소녀는 커다란 피아노가 자신의 몸의 일부인 양 잘 알고 있었다. 그 음색들을 어떻게 얽히게 하여 아름다운 음악을 울려 퍼지게 할 수 있는지도.
하지만 소녀는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가는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렸다가도 그것이 소리를 만들어내기 직전에 몸이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는다. 피아노와 함께 했던 즐거운 기억들은 그것이 준 괴로운 기억에 묻혀 가슴을 저릿하게 만들곤 한다. 때때로 소녀는 피아노를 가까이 하는 것조차 힘들게 느껴졌다.
어릴 적엔 단지 자신이 만들어낸 소리가 좋았을 뿐인데, 그 소리를 들어주며 웃는 동생이 좋았을 뿐인데. 누군가가 그 찬란했던 기쁨을 모두 빼앗아가 버렸다.
그건 누구였을까. 자신에게 싫은 소리를 만들어내길 강요하던 사람? 웃으며 다가와서는 싫은 소리를 자신에게 향하던 이들?
소녀는 울리지 않는 피아노를 덮어버리고 소중한 오르골을 귓가로 가져갔다.
이음매 하나, 작은 흠집 하나까지도 머릿속에 새겨놓은 이 작은 물건은 소녀에게 완성된 세계와 같았다. 이 소리와 함께라면 다른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태엽이 끝까지 풀리고 소리가 멈출 때면 밀려오는 불안감은 소녀를 비참하게 만들곤 했다.
오르골의 선율을 듣고 난 후에는 소리에 대한 감각이 평소보다 예민해진다. 계속해서 아름다운 선율에 잠겨있거나, 시끄럽고 불쾌한 소리를 마주하고 괴로워지거나.
한참 동안 오르골의 태엽을 감고 또 감기를 반복하던 소녀, 리사 스트라우스의 세계 안에 다른 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하지만 그 소리는 결코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만드는 소리가 리사에게 어떻게 들릴 지, 혹은 보일 지를 알고 있는 이의 발소리. 다른 이들의 무신경한 불협화음이 아닌 경쾌하고 맑은 음색에 리사의 무표정한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언니-! 돌아왔어!”
“리첼!”
방 문이 열리고, 역시나 경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양 손에 봉투를 잔뜩 들고 흔들어 보이는 리첼 스트라우스는 밴드의 공연을 끝내고 오는 길이었다. 화려하고 반짝이는 치장을 두르고 음악에 몰입하는 리첼은 연주를 하는 리사와는 다른 의미로 청중들을 휘어잡는다. 작은 규모지만 오늘의 공연도 분명 열기가 뜨거웠을 것이다.
“멋-진 공연이었어! 환상적이었다구! 언니도 보러 왔으면 좋았을 텐데. 여기 팬들이 준 선물!”
리첼은 여전히 들뜬 얼굴로 먹을 거리와 작은 물건, 그리고 편지들이 가득 들어있는 봉투들을 내밀었다. 리사는 수고했다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리첼은 환한 얼굴로 화답한다.
리사는 자신과 달리 스스로를 드러내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동생을 걱정하고, 또 혹시 이 아이가 타인과 어울리며 자신과 멀어지게 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지만 리첼은 그럴 때마다 둘만이 있을 때의 가장 행복한 미소로 리사를 안심시켰다.
“아, 재뉴어리한테서 연락이 왔어. 이번 주말에 일이 있대.”
선물을 하나하나 꺼내 보이며 소개하던 리첼이 문득 떠오른 소식을 리사에게 전했다. 막 공연 준비로 바쁠 즈음에 전해 받은 연락이라 하마터면 잊을 뻔 하고 있었다.
“……또?”
리첼이 말하는 ‘일’이라는 것은 이 소녀들이 속해있는 단체와 관련된 것이었다. 능력자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사건을 조사하거나, 능력자의 인권 향상에 기여하는 활동에 참여하거나. 더 호라이즌은 능력자 소년소녀가 자신들의 힘으로 변화를 만들기 위한 단체였다. 그리고 이번 일은 전자에 속한다.
일과 관련된 이야기에 리사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리첼은 얼굴을 가까이 대고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으응, 우리 언니 가기 싫은 거야?”
“그건 아니지만……”
리첼이 가볍게 던지는 듯한 말에는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걱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사실 리첼은 위험할 가능성이 있는 곳에 언니를 데려가고 싶지 않았지만 단체의 일에 소홀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오랜 시간 리사와 떨어져있는 것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 리사는 무력하지 않지만 혼자 두기엔 너무도 불안정했다.
“싫으면 말해야 해. 괜히 언니를 힘들게 하고 싶진 않아.”
똑바로 마주보는 푸른 눈동자는 리사에게 소리만큼이나 많은 것을 말한다. 애정과, 걱정과, 미안함. 리사는 리첼의 그런 눈빛이 좋았다. 마음 한 구석이 아련해지고, 자신이 얼마나 동생을 사랑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난 정말 괜찮아. 리첼과 함께라면……”
용기를 짜내는, 그리고 진심이 담겨있는 목소리에 리첼은 웃음지었다.
“우리 언니가 최고라니까. 사랑해! 언니는 내가 지켜줄 테니까 하나도 걱정할 것 없어.”
“나…나도 리첼을 지켜줄 거니까!”
얼굴을 붉히며 항변하는 리사를 껴안고 토닥이는 리첼은 마치 어린 동생을 달래는 손위형제 같다. 그럼, 그럼. 언니는 언제나 날 지켜줬잖아. 그러니까 나도 지켜줄 거야.
바깥 세계를 두려워하게 되어버린 언니가 이런 말을 할 정도로 자신을 좋아해준다는 사실은 언니에게 죄책감을 가진 리첼에게 큰 위안이 된다. 그렇기에, 그렇지 않더라도 리첼은 리사를 지켜주고 싶었다.
리첼이 옷을 갈아입으러 간 사이, 리사는 피아노 뚜껑을 열고 어느 한 건반 위로 손을 향했다.
가벼운 심호흡, 손끝으로 전해지는 떨림, 길게 울리는 단음. 어릴 적의 두 소녀는 이 음으로 연주를 시작하길 즐겼다. 높지도 낮지도 않아 어떤 방향으로 연주를 이끌어도 휘둘리지 않는 맑은 음색. 시원스러운 빛깔을 가지고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는 소리는 그 뒤를 이어보라며 리사의 등을 떠밀지만 지금은 그럴 용기가 없다.
나아가고 싶지 않다. 바깥 세상에는 리사를 아프게 만드는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하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면, 그 곁에는 리첼이 있기를 바랬다. 강인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주는 나의 소중한 동생.
이것으로 몇 번째의 거절일까, 그 숫자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티엔의 마음이 말라 비틀어져 간다.
거절의 이유를 묻고자 떼었던 입이 차마 움직이지 않아 이번 여정이 그에게 남긴 것은 실로 아무것도 없다 해도 좋았다. 더 이상 이렇다 할 대답을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남겨진 허탈함과 허무함에 티엔은 자신의 실책을 탓했다.
흑백의 손을 가진 청년은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이끌어줄 이를 찾고 있었다. 물론 혼자만의 수련으로도 그는 강해질 수 있다. 더 어렸던 시절의 그는 그리 하여 모두가 놀라워하는 강함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첫 스승에게서부터 배운 자신의 모자람, 그리고 비어버린 자리의 공허함은 그로 하여금 스승의 존재를 원하게 만든다.
그러나 티엔이 스승으로 모시고자 했던 이들은 시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국 그를 내쳐버렸다. 계속해서 자신을 의심하며 단련을 거듭하는 동안 그의 육신은 강인해졌지만 내면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자신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며 노력해보아도 변치 않는 결과에 티엔의 마음은 지쳐가고 있었다.
옛 스승님을 다시 뵙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하지만 한 번 자신을 떠난 이가 그것을 원치 않으리라는 생각에 그것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망념일 뿐이다.
자신의 무엇이 잘못이며 무엇을 더 해야 한다는 것일까.
괴로움 자체보다도, 그 괴로움에 대한 의문이 그를 더욱 괴롭게 한다. 자신의 어떤 잘못이 스승들을 멀어지게 했는가를 되짚다 보면 어떤 흐릿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자신을 이끌어주리라 기대했던 이들이 그런 시시한 이유로 자신을 기피했으리란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으므로. 잘못은 분명 티엔 자신에게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또다시, 무엇이? 그리고 무엇을?
좀처럼 흔들리지 않고 곧게 나아가던 티엔이 자신의 발걸음에 의심을 품자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워졌다. 오직 잡념을 잊고 수련에 임할 때만이 티엔에게는 가장 편안한 시간이었고 유일한 위안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결국 이 시간도 지나가게 될 것이다. 지금의 그가 이전에 스승님과 함께하던 시간을 아득하게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때에는 지금의 의문을 모두 떨쳐낼 수 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닿았을 무렵, 홀로 수련을 마치고 피로한 하루를 망연히 곱씹던 티엔은 의식적으로 눈을 감고 꿈도 없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어느 오전, 마틴은 재단의 새로운 활동과 관련하여 전할 사항과 확인할 것이 있어 티엔 정의 사무실을 찾았다. 대면해야 할 사람을 생각하면 전혀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지만 공적인 일에 굳이 감정을 개입할 생각은 없다. 이런 때 티엔의 빠른 일 처리는 마틴이 그에 대해 달갑게 여기는 몇 안 되는 특징이었다.
닫혀있는 문을 마주보고, 마틴은 해야 할 말과 확인할 사항을 되새겨본 뒤 가볍게 노크했다. 그러나 다잡은 마음이 무색하게도 문 너머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제대로 들리지 않았나 싶어 다시 노크해보아도 결과는 같았다.
“분명 자리에 있을 시간인데……?”
티엔은 잠시 자리를 비웠거나 다른 일정이 생긴 것일지 모른다. 다시 일부러 여기까지 오기엔 번거롭지만, 그렇다고 언제 올지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고 싶은 마음도 없다.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근처를 서성이다 역시 나중에 다시 찾아오자는 생각을 했던 찰나, 마틴은 사무실 안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잘못 들었을 리 없는 분명한 사람의 기척이었다.
의아함에 멈춰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이 반대편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반쯤 벌어진 틈 사이로는 문고리를 잡은 채 안을 향해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하랑이 보인다. 무언가 답답한 듯 머리를 짚던 소년은 문 앞에 선 마틴과 눈이 마주치자 확연히 당황한 기색이었다.
“마틴 형? 여긴 무슨 일이야?”
“그야 당연히 업무 관련으로…… 방금 노크했는데 못 들었나요?”
하랑이 난감해하는 표정을 볼 때 일부러 없는 척 했던 것이 뻔하지만 변명을 할 기회를 주는 예의상의 물음이다. 만일 상대가 티엔 본인이었다면 이런 배려는 필요 없었겠지만 말이다.
“어- 응, 사부랑 얘기하느라 못 들었나 봐.”
어색하게 웃으며 문을 가로막고 서있는 하랑이 태도는 아무리 봐도 미심쩍었다. 어차피 자신에게서 비밀을 지킬 수 있을 리 없는데 이 소년은 무얼 숨기고 있는 것일까.
“그럼 티엔씨는 안에 있는 거죠? 잠깐이면 되니까 들어갈게요.”
황급히 무어라 말하려는 하랑을 모른 척, 마틴은 티엔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티엔씨, 이번 협상 건에 아시아지부의 정보가 좀 필요한데요.”
반쯤 막무가내로 들어간 사무실 안은 그리 특이할 것도 없었다. 무슨 일인지 각종 자료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고, 티엔은 그것들을 훑어보고 있던 것 같았다. 마틴은 방문을 무시당했던 심통으로 약간 무례하게 서류를 건넸고, 티엔은 말 없이 그것들을 받아 들곤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마틴은 이상을 깨달았다. 티엔은 평소보다 말이 적었고, 마틴과 좀처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게다가 평소보다 과묵하게 마틴의 말을 경청하던 그는 바로 결론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사항에도 대답을 미뤘다. 여기까지는 그에게 무언가 심경의 변화라도 있는가 하며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마틴은 그만의 방식으로 눈 앞의 기공사에게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티엔씨?”
마틴의 부름에 고개를 든 티엔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하지만 평소대로의 그라면 이런 반응을 보일 리 없었다.
문가에 기대어 불안한 눈길로 마인드리더와 스승을 지켜보고 있던 하랑은 마틴의 눈빛이 한 순간 자신을 향한 것을 발견했고, 결국 올 것이 왔음을 깨달았다. 부주의했던 자신을 탓해보아도 이미 때는 늦은 참이었다.
마틴은 티엔에게 업무와 관련된 사항을 마저 전달했고, 뒤돌아 사무실을 나서며 넌지시 하랑을 불러냈다. 소년의 체념한 표정에서부터 마틴은 어렵지 않게 대화를 진행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저 사람 뭔가 문제 있는 거 맞죠?”
하랑은 영악한 아이인 만큼 지금 이 자리를 모면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얼버무릴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가 다름 아닌 마틴이라면 별 의미가 없었다. 정확히 어느 부분에서 마틴이 위화감을 눈치챘는지도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음…… 그… 문제가…… 있긴 하지?.....”
제 입으로 상황을 밝히기 떨떠름해하는 하랑을 추궁하길 몇 차례, 어느 정도 능력의 도움과 함께 마틴은 일의 자초지종을 알 수 있었다.
“아까는 실례가 많았네요. 반가워요, 저는 마틴 챌피, 편하게 마틴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악수를 청하자, 티엔의 너머로 하랑의 황당하다는 눈길이 느껴졌다. 평상시 둘의 사이를 생각하면 능청스레 미소 짓는 마틴의 태도는 거의 가증스러울 정도였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네, 네. 뭐라고 생각하는지 다 들린다고요.
“……반갑습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한 나직한 목소리, 그리고 손을 맞잡은 짧은 순간 검은 눈동자가 마틴을 탐색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분명 갑작스레 마주친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이었다. 또한 그에게서부터 흐릿하게 읽히는 단어들은 마틴이 느꼈던 위화감이 착각이 아님을 확신시켜주었다. 누구, 무엇.
“─마틴씨는 저를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하랑이 마틴에게 설명한 상황은 다소 황당했다.
남들은 아직 꿈 속에 있을 이른 시각, 이 사제는 매일같이 새벽수련을 해오고 있다. 그런데 이 날은 정해진 시간을 한참 넘어도 스승이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하랑이 그의 숙소로 찾아가게 되었다. 당시 이 제자는 자신을 바람맞힌 스승에게 화가 나면서도 대체 무슨 연유로 완벽주의인 스승이 약속을 어겼는가에 대한 의문이 더 컸다고 한다.
숙소에서도 그를 찾을 수 없어 스승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약간 걱정이 되기 시작할 즈음, 하랑은 근처를 배회하고 있던 티엔을 발견했다. 그리고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스승을 불러 세운 하랑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마주하게 되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류의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티엔은, 하랑이 자신의 제자라는 사실부터, 심지어 자신이 영국 한복판에 있는 이유까지 무엇 하나 기억하지 못했다. 한참이나 어긋나는 대화를 하던 하랑은 겨우 그의 기억이 과거의 어느 때를 기점으로 끊어져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눈 앞에 있는 것은 하랑이나 재단을 알기 한참 더 전의 티엔이었다.
물론 그대로 믿기는 힘든 일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하랑의 스승은 농담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고서, 몇 년… 거의 십 년치 기억이 통째로 날아간 사람을 무작정 데리고 왔다고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자, 이번에는 마틴이 하랑에게 황당하다는 눈빛을 보낼 차례였다.
사사건건 시비였던 사람의 얼굴을 한 주제에 자못 예의 바르게 자신을 대하는 티엔의 태도에 마틴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전의 사람을 깔보는 듯한 표정이 없음은 물론이고, 말투도 본래의 그보다 정중하여 영 적응이 되지 않는다. 물론 여기에는 마틴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티엔은 자신이 기억을 잃은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기억을 되찾을 것이라는 어렴풋한 확신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어딘가 어긋난듯한 기의 흐름과 이유를 알 수 없는 답답함이 사라지면 기억이 돌아올 것이라고. 이렇다 할 근거는 없지만 기억상실 자체가 그의 능력과 관계가 있을지 모르니 흘려 들을만한 말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자신이 일하던 곳을 찾아온 정도로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고, 이렇게 금방 타인에게 이상을 들켜버렸지만 말이다.
“정말이지…… 티엔씨 본인이 알면 뒤집어지겠네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누구한테 먼저 알릴 생각은 못했어요?”
“난 그럴까 했는데 사부가 싫다는 걸 어떡해.”
게다가 확실히 사부 편인 할배가 지금 없으니까.
마틴에게 읽힌 하랑의 속마음은 또 다른 이유를 제시한다. 재단 내에는 마틴 외에도 티엔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이 꽤 존재하고 있다. 하랑도 그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닌지라, 브루스가 자리를 비우고 있는 지금 섣불리 누군가에게 이런 일을 알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마틴도 이 일을 이용해서 그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으니 그리 틀린 생각은 아닌 셈이다.
“아무리 저라도 그런 건 해본 적이 없는데다. 알잖아요, 제 능력은 이 사람한테 안 통해요.”
지금이라면 완전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어쨌거나 기억을 건드릴 정도로 손을 댈 자신은 없다. 전혀 읽히지 않던 티엔의 생각은 안개가 약간 걷힌 듯 몇몇 단어를 내보이고 있지만, 그 이상으로 깊게 파고 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곤란하게 됐네요. 티엔씨가 혼자 하겠다고 끌어안은 일이 한둘이 아닌데.”
“……그 점이라면 문제 없을 겁니다.”
자신의 일이면서도 거의 입을 다물고 있던 티엔이 입장을 표명했다.
티엔은 자신의 상태를 알리지 않은 채 지금까지의 일을 계속 하기를 원했다. 일이 커지는 건 바라지 않으며 그럴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다. 지금까지 그가 훑어본 바로 사무실의 자료나 마틴이 가져온 서류를 이해하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소홀히 두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일단 능숙하게 영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점만 보아도 기억 외에 그의 지식이 온전하다는 사실은 명확했다.
티엔의 말에 마틴은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티엔 정은 하랑을 지도하는 역할, 그리고 현재는 정보의 수집과 관리를 담당 중인 아시아지부의 스카우터라는 직책, 또 그와 상성이 맞을만한 몇 가지 업무를 자발적으로 맡고 있었다. 아무리 사적인 대화가 적다지만 그 모든 일과 얽힌 사람들을 상대해가며 그가 자신의 상태를 숨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자리의 가장 연장자나 다름 없는 마틴의 지적에 하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티엔은 고민에 빠진 듯 했지만 자신의 결정을 철회할 마음은 없어 보인다. 뚜렷한 대책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곤 마틴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렇게 된 것은 그에겐 차라리 잘 된 일일지도 몰랐다.
“뭐…… 제가 협력하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요.”
마틴이 굳이 티엔을 돕겠다 나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정적에게 빚을 지우기 위해서, 과거의 모습으로나마 그를 파악하기 위해서, 또 괜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티엔 정이 아무런 이유 없이 기억을 잃었다고 한다면 브루스나 몇몇 후원자는 분명 마틴을 제일 먼저 의심할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나마 억울하지는 않겠지만, 이 경우에 마틴은 정말로 무고했다. 하랑에게서도 약간이나마 그런 생각을 읽어낼 수 있었으니 마인드컨트롤러인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은인이 어찌 생각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과연 이것이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선택일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동시에 나쁘지 않은 기회임은 틀림없었다.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 가까운 곳에서 도움을 주는 동안, 마틴은 그를 관찰하며 원래의 그를 티엔 정, 지금의 그를 티엔이라 불렀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감추기 위해 티엔은 최대한 마틴과 하랑이 말하는 티엔 정의 모습을 모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억의 공백을 완전히 메울 수는 없는지 곁에서 지켜보는 마틴이나 하랑에게는 본래의 그와 다른 점이 더 눈에 들어왔다.
티엔 정은 적어도 일을 하는 동안에는 늘 딱딱한 무표정 아니면 깔보는 듯한 표정이라고 생각했는데, 티엔은 표정 변화가 좀 더 다양하다. 놀라거나, 흥미를 보이거나, 고민을 하거나. 그마저도 남들보다는 뚜렷하지 않은 편이지만 드문드문 들리는 그의 마음까지 더해져 가끔은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좋게 말하자면 더 인간다워졌지만 원래의 그가 가지고 있던 여유가 사라졌다고 할까. 그는 가끔 조급한 모습을 보였고 예의 그 깔보는 듯한 표정은 지금의 티엔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걸로 괜찮겠나?”
그렇게 물으며 건넨 서류는 기대 이상으로 완벽하고 꼼꼼하게, 그러니까 티엔 정이 작성하던 것과 다를 바 없이 채워져 있었다. 이전과 같은 일을 하고 있을 뿐이면서 평가하는 쪽에서 무어라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재주는 놀랍다고 해줄 만 하다.
“……이 정도면 이 일 관련으론 더 확인 받을 필요도 없을 것 같네요.”
“다행이군.”
조금 기쁜 기색이 드러나는 그의 마음을 읽고 있자면 마틴의 마음은 심란해진다. 티엔 정은 무슨 일을 하든 무심하게 넘겨버려 그를 성과를 칭찬하는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곤 했다. 그런데 티엔은 타인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을 어느 정도 신경 쓰고 있는 듯 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완벽한 성과에 무감해지기라도 했던 걸까.
사실 애초에 마틴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은 인명이나 구체적인 사건뿐이었고, 기억이 아닌 지식이 필요한 부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하랑과의 수련도 몇 번의 시행착오가 있고선 장애를 느끼지 않는다고 하니까. 가르침을 받는 입장인 하랑은 도무지 티엔에게 적응할 수가 없다며 투덜대고는 했지만 말이다.
“……너무 친절해서 재수없어.”
티엔과의 첫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하랑의 감상에 마틴은 웃어버리고 말았다. 지금의 티엔도 그리 친절하다고 말해질 상은 아니건만, 마틴에게 보이는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진 것이 소년은 스승의 변화가 어지간히도 간지러운 모양이었다.
“그건 원래보다 낫다는 말 아니에요?”
“아, 그것도 그렇고…… 이 상황에 누굴 가르친다고 하는 것도 웃긴데 수행하는 내내 자기 힘에 자기가 놀란다고. 아닌 척 하긴 하는데…… 형이 사부가 그러는 거 보고 있어 볼래?”
“……아뇨, 사양할게요.”
하랑의 말에 따르면 그는 심지어 자신의 힘이 능력이라는 자각조차 없었던 듯 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단지 동양의 기공으로만 이해하고 있던 것이다. 완전히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의 힘은 분명 일반적인 기공과는 이질적이다. 지금의 티엔은 능력에 대한 지식이 있기에 자신의 힘에 대해서도 이전보다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것과 놀라움은 별개였다.
그는 이전에 수행을 어떤 식으로 진행했는지 설명을 듣고선 비슷하게 해낼 수 있으면서도 자신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를 확신하지 못해 헤맸다고 한다. 티엔의 기억의 나이는 마틴보다도 어리다.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단련을 지속해온 성과가 얼마만큼의 것인지는 티엔 본인만이 알 것이다.
마틴은 굳이 둘의 일정에 동행하지는 않았지만 티엔이 지금의 자신이 이뤄낸 성과를 되짚어보며 어떤 감정을 느꼈을 지에 대해서는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 마틴의 능력이 약하게나마 통하는 것은 지금의 티엔의 내면이 그의 능력에 비해 미숙한 탓일지도 몰랐다.
사실 이대로라면 마틴에게 나쁠 것은 없다. 오히려 환영할 수 있을지도. 브루스의 존재 때문에 어렵긴 하겠지만 기억을 잃은 사실을 쭉 숨길 수만 있다면 자신에게 불똥이 튈 일도 없고, 그는 마틴에게 도움을 받는 입장이므로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아직까지 이렇다 할 성과는 없지만, 약간이나마 그의 속내를 알 수 있음은 마틴에게 굉장한 이점으로 작용한다.
“하랑군은 만약에 티엔의 기억이 아예 안 돌아온다면 어떨 것 같아요?”
마틴의 물음에 하랑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 글쎄.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도 아니고, 원래보다 지금이 나을 때도 있긴 하고.”
하랑은 티엔의 기억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예외가 생기기는 했지만 약속 하나는 잘 지키던 스승이다. 본인이 기억이 돌아올 거라 한다면 분명 그렇게 될 것이라 자연스레 납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전과 다른 모습이 새롭기도 하고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잠깐 동안의 변화로만 생각하고 있을 뿐 기억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가정에 대해서는 깊게 고민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파고들어갔을 때 하랑이 느끼는 것은 거부감이었다.
“어쨌거나 나중에 놀려먹을 수 있으려면 당연히 돌아와야지. 사람을 거의 끌고 와놓고선 그걸 기억도 못하니까 나만 바보 됐잖아.”
하랑이 처음 기억을 잃은 티엔과 마주쳤을 때,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제자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듯한 모습을 보였다. 몇 번이나 그것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곤 어떻게, 왜 사제관계가 되었는지, 또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묻는 그에게 하랑은 떨떠름한 기분을 느꼈다. 결과가 어찌되었든 하랑이 원해서 그를 스승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처음에 티엔이 기억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스승이 되어줄 사람을 찾고 있었음을 언급했다. 반대로 지금은 자신이 스승이 되어 제자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질 법도 하지만 하랑은 그런 그의 태도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못마땅하게 시작된 만남을 순수하게 경탄하는 모습에 심경이 복잡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티엔 정과 비교할 때 확연한 차이라고 한다면, 티엔은 타인을 대할 때 좀 더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단지 시대나 장소가 낯설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 하랑과 마틴에게도 같은 태도였기 때문이다. 본래의 그를 생각하자면 조금 주눅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어딘지 모르게 유해진 그의 태도에 다른 후원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마틴은 그 점에 대해 지적해야 할지를 고민하곤 했다.
또한 티엔은 사과를 할 줄 안다. 티엔 정은 본인의 과실에 대해 ‘실수’를 ‘인정’할 뿐, 제대로 된 사과를 하는 적이 거의 없었다. 기억을 잃었다지만 처음으로, 그것도 정중한 어투로 잘못에 대해 사과하는 티엔을 봤을 때는 마틴과 하랑 모두 할 말을 잃고 그에게 묘한 눈길을 보냈을 정도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몰라 당황하는 티엔에게 잘못된 건 그가 아니라며 감격하는 하랑의 심정을 마틴은 절절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주관이 뚜렷하다 뿐이지 독선적인 성격까지는 아닌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리 되었을지 마틴과 하랑은 여러 가설을 세워보기도 했다. 혼자 틀어박혀 수행이라도 하다가 남의 말을 듣지 않게 된 것은 아니냐는 둥, 본인에게 물어봤자 대답이 돌아올 수 없으니 굳이 그 앞에서 이런 언급을 한 적은 없지만 티엔 자신도 간혹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연결점을 의아해할 때가 있었다.
“방금, 고맙다고 했을 뿐인데 반응이 이상하다만…… 뭔가 잘못 말한 건가?”
용기를 짜내 티엔에게 작은 선물을 건넸던 동료 후원자에 관한 말이다. 그녀는 순순히 선물을 받고선 감사인사까지 하는 티엔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도망치듯 사라져버렸다. 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던 하랑의 마음은 조금 착잡하다.
“그야 사부는 거절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거냐고 묻는 게 정상이라 그렇지.”
“……?”
제자의 심드렁한 설명에 잠깐 고민하다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면, 이번 일에 대해서는 그리 의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기억을 잃은 티엔은 거울이 있는 곳을 지나칠 때면 멈춰 서서 그곳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곤 했다.
누가 보면 그에게 자기 얼굴을 감상하는 취미라도 생겼거니 짐작하거나, 사정을 알더라도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놀라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얼굴에서 조금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어디라고 딱 짚어 말할 수는 없지만 기억 속의 모습과는 달라진 자신의 얼굴에서 티엔은 생김새를 모르는 아버지를 연상한다. 그토록 닮았다고 말해지던 아버지가 어릴 적의 그와 함께 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당시의 소년이 아버지와 닮기 위해 수행을 시작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그 꿈이 이루어졌다고 말해도 좋을지 모른다. 아마 현재의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갑작스러운 변화를 눈에 담은 그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티엔은 자신이 단순히 기억을 잃은 것이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을 가진 그에게 있어 지금은 마치 먼 미래를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 스스로에게 쫓기던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는다. 나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노라고. 완벽을 추구한다는 지금의 자신은 걸어온 길보다 나아가야 할 길을 바라보고 있겠지만, 또 이런 안도감을 느끼는 자신을 해이하다 여기겠지만.
처음 낯설지만 익숙한 곳에서 눈을 떴을 때는 당혹스러웠다. 어째서 자신이 이런 곳에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음에도, 본 적이 있을 리 없는 물건들의 이름이나 쓰임은 자연스럽게 알고 있다. 또 자신에게서 느껴지는 기의 흐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무얼 뜻하는지 깨달아 가면서도 혼란에 빠져있던 그가 하랑과 빠르게 조우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하랑과의 대화나 숙소나 사무실에 자필로 남아있는 기록들을 통해 현재의 자신에 대해 알게 된 티엔은 그, 혹은 자신이 얼마나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상을 좇는 것을 잊고 부족함을 메우고자 급급했던 그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꿈들이었다.
완벽이라.
첫 스승에게서 들었던 말을 문자 그대로 따르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그 꿈을 위해 차근차근 다른 인재를 양성해가면서. 지금의 자신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를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티엔은 지금의 자신에게 과거의 날들을 어떻게 보내왔는지, 어떻게 확신을 가지고 나아올 수 있었는지를 묻고 싶었다. 대답은 모두 자신 안에 있지만 지금은 그것을 끄집어낼 방도가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티엔이 혼란 속에서도 자신의 일을 계속 하겠다 고집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티엔은 기억을 찾고 나면 이런 생각들은 무의미해질 것임을 알았다. 과거의 자신이 현재를 바라보며 느끼는 것들은 결국 과거에 속하므로. 어차피 잊혀지게 되더라도, 티엔은 자신의 발전을,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사이에 자신이 놓친 것들까지도 알고 싶었다.
“지금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지?”
낯선 곳에서 낯선 자신을 모방하기를 나흘째, 티엔은 기억을 잃은 것을 타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이미 수 차례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가 듣고자 하는 것은 지금까지와 다른 종류의 평가였다.
“지금까지 들었던 것 외에, 개인적인 감상이라도 좋으니. 느끼던 바를 말해주었으면 한다.”
티엔이 이런 질문을 던진 상대는 며칠 전의 티엔 정의 행적에 대해 알아낸 바를 전하고 있던 마틴이었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금발 청년은 조금 난색을 표했다.
“그건 하랑에게 듣는 게 더 나을 텐데요. 지금 돕는 것과 별개로 전 당신을 좋게 보지 않았어요.”
“그럴 것 같더군. 그렇기 때문에 당신에게 묻는 거다.”
시원스러운 대답이 돌아온다. 마틴은 티엔이 뜻하는 바를 가늠해보았다. 들려오는 그의 속내가 확고한 것을 보면 허투루 하는 말은 아닌듯했고, 그의 말과 생각을 종합해 볼 때 티엔이 원하는 것은 한 가지였다.
“그러니까, 티엔씨의 험담을 듣고 싶다는 말인가요?”
마틴의 표현에 티엔은 긍정을 표했다.
사실 마틴은 되도록 관찰자의 시점에 머무를 생각이었고, 관찰대상이 이런 식의 평가를 요구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마틴이 티엔 정과 으르렁거리는 것은 재단 내에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었고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기에 티엔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기에 본래 둘의 사이는 지금껏 화제에 오른 적이 없다.
어찌되었건 티엔이 본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듣고 싶은 거라면 마틴은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주 많았다. 티엔의 검은 눈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천천히 팔짱을 끼는 마인드리더를 응시했다.
“……본인은 완벽을 추구한다지만 글쎄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재단에 들어온 것도 순전히 자신의 목적을 위한 것이 보였거든요. 누군가는 신념을 바치고 있는 집단에 들어와선 그곳을 발판으로 사용한다는 게 달가울 리가 없죠. 제가 아는 티엔씨는 이기적이에요.”
평소보다 차가운 마틴의 눈빛은 티엔 너머에 있을 본래의 그를 향하고 있다.
“브루스씨가 당신의 뭘 보고 이렇게 깊숙이 끌어들였는지는…… 전혀 모르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위험요소란 것도 변하지 않죠. 집단이나 의리 같은 건 당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친분관계도 제대로 만들지 않고, 목표만 이룰 수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은 사람이죠.”
“혼자서 완벽한 사람일 수는 없어요. 당신도 그걸 알고서 제자를 들였을 거예요. 그런 주제에 타인의 호의 같은 건 무시하고, 자기 방식만 합리적인 줄 아는데다, 결국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능력을 키울 생각만 하고 있고요. 당신은 그 모든 게 얼마나 위협적으로 보이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아요.”
하고 싶은 말은 더 있었지만 이 이상은 개인 감정이 심하게 개입될 것 같아 마틴은 입을 다물었다. 상대는 자신에 대한 평가를 물었지, 마틴의 심경을 물은 적은 없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티엔은 이 험담의 당사자가 아니고, 마틴은 타인의 뒷담을 하는 취미는 없었다.
“그런가……”
도중부터 마틴은 티엔 정과 티엔을 동일시했지만, 어차피 틀린 말도 아니어서 티엔은 그런 지칭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덕분에 이것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라는 점을 잘 알 수 있다.
“어때요, 듣고 나니 기억나는 건 좀 있어요?”
“아니. 기억을 떠올리려 했던 질문은 아니지만…… 덕분에 좀 더 납득이 가는군.”
티엔의 입에서 나온 납득이라는 단어에 마틴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하.”
자신의 오만하고 무례한 점을 열거해서 들어놓고도 그에게서는 부정적인 반응을 느낄 수 없다. 마틴은 티엔이 본래의 단점마저 참고해 연기하려는 것이나, 혹은 단순히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담담하게 납득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조금 다른 것이 느껴졌다.
“제가 말한 그런 모습이 옳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어느 정도는.”
티엔을 바라보는 마틴의 눈빛이 적의 비슷한 것을 띈다. 다시 긴 대답을 곱씹으려던 티엔은 마틴이 더 해보라는 듯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요하지 않다 여기는 것들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목표를 추구한다. 예전의 나는 하지 못했던 일이다. 지금 내가 얻은 것, 누리고 있는 것들은 그렇게 해서 손에 쥘 수 있었겠지. 만일 내가 과거에 지금의 나와 같이 행동할 수 있었다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었어. 그런 점에서 나는 지금의 나를 긍정한다.”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친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자신의 모습이 이기적임을 인정하고도 긍정의 뜻을 보이는 티엔을 마틴은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티엔은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놓치고 있는 것들도…… 적지 않은 것 같군. 거기까지가 나의 한계라는 거겠지. 지금의 나는 완벽하지 않고, 더 나은 길이 없다면 이것이 최선일 뿐이다. 이해해달라고 하지는 않아. 기억이 돌아오면 나는 같은 행동을 할 테고, 당신은 나를 못마땅하게 보겠지. ”
흠, 재단의 마인드리더는 콧소리를 내며 자세를 조금 고쳐 앉았다.
“오해하진 말아요. 입장 차가 있어서 그렇지, 저는 티엔씨를 완전히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거짓말을 하고 있군.”
타인을 좀 더 신경 쓸 줄 아는 티엔은 이런 면에선 티엔 정보다 날카롭다. 단지 확신을 하지 못했을 뿐이었던 그가 조금 여유를 가지게 되자 마틴이 겉치레로 꺼낸 말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거 알아요? 이제는 당신까지 싫어지려고 하는데요.”
생각지 못한 반박을 마주한 마틴은 반쯤 진담인 말을 건넸고, 동일인물이니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뉘앙스인 그의 마음을 읽으며 다시 처음의 비즈니스적인 화제로 돌아갔다.
“요즘 사부한테 무슨 일 있냐는 말을 들어.”
수련을 시작하기 전, 가볍게 몸을 풀고 있을 때 하랑이 그런 말을 꺼냈다. 역시 이상이 느껴지는가 하여 티엔은 더 조심하겠노라 답했지만, 제자가 듣는 말들은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보단 여자라도 생긴 것 아니냐고 묻던데.”
대체 어떤 종류의 변화에서 그런 맥락을 읽는지 당황스러울 따름이지만, 혹시 기억을 찾고 태도가 또 돌변하면 실연이라도 당했다고 여겨질는지 조금은 불쾌한 기분이다. 하랑도 그런 생각을 아는지 질문에는 잘 대답해놓았다고 말하지만, 애초에 그렇게 멋대로 남의 사생활을 추측하는 이들에게 부정의 대답이 통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래서 기억은 언제쯤 찾을 것 같소?”
시답잖은 대화를 밀어놓고 하랑이 궁금한 바를 물어왔다. 그리 오래 지난 것은 아니지만, 혹여나 스승이 영영 이 상태일까 싶어지는 것이다.
“아마, 곧 일거다.”
처음 눈을 떴을 때부터 느껴지던 어긋난 감각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단순히 그의 추측이지만, 기억상실은 자신의 능력과 관계가 있었다. 철두철미한 현재의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하랑.”
스승의 부르는 목소리에 다리 근육을 풀고 있던 하랑이 고개를 들었다. 뭔가 지적이라도 하려나 싶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티엔의 얼굴이 혼내려는 사람의 표정은 아니었다.
“제자로 있어주어 고맙다.”
하랑이 경솔한 약속 탓에 반 억지로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들었다. 스승을 구하던 때보다도 더 진득하게 따라붙었다는 자신의 뻔뻔함도 놀랍지만, 내기에 지고서는 그런 자신을 순순히 따라준 하랑에게는 고맙고도 미안할 따름이다.
“젊은 사부, 제발 그런 말 하지 말래도 그러네.”
“지금이 아니면 꺼내지도 않을 말 아니냐.”
하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낯간지러운데다 딱히 원하는 것은 아니지마는, 지금 아니면 언제 다시 들어볼까 싶은 말이기는 하다.
“그래, 나도 고맙소. 마음엔 안 들어도 지금껏 받은 것이 있으니.”
조금 퉁명스러운 제자의 말에 티엔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헝클어뜨렸다. 하랑은 뭐 하는 거냐며 멀찍이 떨어졌지만, 진심으로 불쾌해하는 것 같지는 않기에 그는 웃어넘겼다. 괴롭던 시절의 자신이나, 현재의 딱딱한 자신 모두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저리도 질색하는 아이 대신에 어렸던 자신이 제자가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었다. 처음으로 스승의 역할이 되어본 티엔은 누구를 향하는 것일지 모르는 질투와 동시에 뿌듯함을, 즐거움을 느꼈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그들이 아직까지는 잘 해내고 있음을 알기에 앞으로의 날들도 그러하길 바랄 뿐이다. 아마 그곳에 ‘자신’은 없겠지만 말이다.
기억을 잃은 지 닷새째였던 그날, 숙소로 돌아가며 티엔은 자신을 도왔던 두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하랑은 또 그 말이냐며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다음 날 보자는 인사를 했고, 마틴은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는 듯 하다가 조심히 들어가라는 말로 대화를 끝맺었다.
티엔은 평소와 같이 눈을 떴다. 잠에 취한 것도 아니건만 머리가 복잡하다.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음에도 아주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한 혼란스러운 감각이었다. 퍼뜩 고개를 들었더니 수 년 만의 달빛을 본 듯한 느낌이 이러할까. 아니면 반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 쪽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깨어나기 전의 자신은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하고자 했던 것 같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떠올릴 수 없었다. 입가를 맴돌면서도 말로 꺼낼 수 없는 단어의 실타래 속에는 스승, 제자, 변화 같은 것들이 있었다.
어쩌면 먼 과거의 꿈을 꾸기라도 했던 걸까.
몸을 일으키고 생각을 정리하던 도중, 티엔은 묘한 것을 발견했다.
「深感謝意」
자신의 필체로 쓰인 글은 감사를 표시하고 있었다. 감사를 전할 상대나 그 이유도 없이 네 글자가 반듯이 쓰여진 메모지는 탁자 위에 눈에 띄게 놓여있었고, 분명 자신의 손으로 그곳에 두었음이 분명하지만 티엔에게는 그런 기억이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다.
티엔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 종이를 살피는 사이, 그의 안에 고여있던 잔향이 모래알 마냥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사라졌다. 더 이상 영문을 알 수 없는 감정이 떠오르지도, 말로 화하지 못하는 언어들이 혀를 간질이지도 않는다. 글자에서 눈을 뗀 티엔은 이내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단지 꾸었던 꿈이 사라졌다 여길 뿐이었다.
끝내 자신이 무엇을 얻고 잃었는지 알아채지 못하고,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감사 인사를 마음에 담은 채 티엔 정은 또 다른 하루를 시작했다.
재단의 마틴 챌피와 티엔 정, 두 사람은 전화보다는 얼굴을 마주하기를 선호한다. 어차피 일하는 곳이 같겠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둘의 교류는 거의 정해진 때, 정해진 장소에서의 만남으로 이루어지곤 했고 오늘 오후에도 그런 식의 저녁 약속이 잡혀있는 참이었다.
어쨌거나 마틴은 드문 형태로 찾아온 그의 연락이 꽤나 반갑게 느껴졌다. 적어도 티엔이 저녁 약속을 취소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 그런가요. 예약은 취소해야겠네요. 네. 그럼 나중에.”
통화를 마친 마틴은 작게 한 숨을 쉬었다. “개인사정으로” 라는 짤막한 설명만으로도 그가 괘씸하게 느껴지기엔 충분했지만, 그보다도 다음 약속에 관한 이야기나 간단한 안부조차 묻지 않는 태도가 영 껄끄럽다. 자신은 이런 사람과 함께 해도 정말 괜찮은 걸까.
오전의 업무를 마치고 간단한 점심을 다른 후원자들과 함께 할 때, 마틴은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티엔 정이 병가로 얼굴을 비추지 않았노라고. 그가 출장이나 외근 외의 이유로 일을 빠진 것은 처음 봤다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동료들 사이에서 마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티엔의 병가 소식을 전한 이도 자세한 상황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고, 단지 그가 일을 쉴 정도라면 꽤 심하게 앓겠거니 하는 추측뿐이었다. 마틴은 겨우 웃는 낯을 되찾고는 그거 걱정이네요, 라며 대화를 받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정말이지 그는 마틴이 알아온 사람 중 가장 괘씸한 존재였다.
적당한 이유를 대고 일찍 재단을 나선 마틴의 그의 숙소로 무작정 찾아간 것은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에서였다. 일단 그에게 전화를 걸기엔 자존심인지 오기인지 모를 무언가가 마틴을 저지했고, 그의 제자를 탐문해보아도 이렇다 할 행방을 알아내지 못했으니 이곳이 아니라면 어차피 마틴이 그를 찾을 가망은 거의 없었다.
만일 그렇다면 마틴은 정처 없이 가까운 병원을 돌아다니게 되었겠지만, 초인종을 울리자 잠깐의 침묵 뒤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예요. 문 열어요.”
몇 번의 철컥이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문이 열린다. 그 너머에는 가벼운 차림의, 그리고 피로해 보이는 티엔이 있었다. 그는 예상치 못한 방문객에게 약간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틴? 무슨 일이지?”
“그러게요. 왜일 것 같아요?”
아프다는 사람을 찾아온 애인을 향한 첫 마디에 마틴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다행히 티엔은 마틴이 걱정했던 최악의 상태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적어도 죽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진 않았으니 말이다.
“……약속을 깬 건 미안하게 됐지만-”
“아, 진짜. 들어가기나 해요. 아프다는 사람이 저까지 세워둘 거예요?”
마틴이 티엔의 말을 끊고 거의 짜증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자, 티엔은 뭔가를 말하려던 입을 다물고 제 애인을 집 안으로 들였다. 아프다는 말은커녕 티도 내지 않았는데 어디서 알아왔는지 단단히 화나게 만들어 버린 것 같다. 안 그래도 열로 무거운 머리가 복잡해지는 순간이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건데요?”
“독감이라더군.”
돌아오는 대답이 너무나 평범하다는 점이 놀랍다. 마틴은 그도 병에 걸리는 사람이라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보다 신경 쓰이는 점이 한둘이 아닌지라 그런 것은 일단 마음에 묻어두기로 했다.
“계속 누워있었어요?”
“아니, 가벼운 단련 정도는.”
“미쳤어요?”
이 물음에는 답하지 않는 게 좋다는 것 정도는 사교술이 좋지 않은 티엔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마음이 읽히는 것도 아니건만 거짓을 고하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기 때문에 있었던 일을 숨기지는 못하고, 아픈 것 자체를 감추고 조용히 넘어가려던 생각이 오히려 화를 부른 모양이었다.
티엔은 거의 떠밀리듯 침대로 들어갔다. 행여 병을 옮기기 전에 돌아가달라는 설득은 무시당했고, 증상이 심한 것도 아니니 혼자여도 괜찮다는 말에는 대신에 잔소리나 실컷 해주겠다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왜 말 안 했어요?”
“내일쯤이면 회복할 수 있을 텐데 굳이 알릴 필요가 없지 않나…….”
티엔에게는 질병이나 부상도 단순한 개인사정의 일환으로, 생활에 장기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타인에게 밝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알리더라도 괜히 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일이 지나간 후에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마틴의 입장에서는 그런 티엔의 생각이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왜 가장 가까워야 할 자신이 타인의 입에서 티엔의 신변을 전해 들어야 하는지부터, 기껏 찾아온 사람을 되돌려 보낼 생각부터 하는 연인을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제가 아파도 그럴 거예요? 잠깐 아프고 말 테니까 괜찮다고 하면 내버려 둘 거냐고요.”
마틴이 차를 끓여오려 방을 나서며 물었다. 그는 티엔의 대답이 긍정이더라도 절대 놀라지 말자며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었다.
만약 마틴이 아프고, 혼자서도 괜찮다고 말한다면. 티엔은 그 가정에 대해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아니.”
등 뒤에서 들려오는 대답에 마틴의 발이 멈췄다.
“……그러면 당신도 말을 해요. 적어도 신경 쓸지 말지는 내가 정하게 해달라고요.”
이어지는 깊은 한숨과 발소리를 들으며 티엔은 눈을 감았다. 대화에 집중하며 잊고 있던 병색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이 정도로 병간호는 필요 없을 터인데.
티엔은 마틴이 쓸데없이 마음을 쓰게 한 것 같아 조금 괴로우면서도, 자신을 뉘이며 열을 짚어보던 연인의 손을 떠올리면 어딘가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잠깐의 망설임이 있고서 굳게 쥔 손을 천천히 밀어내자 기름칠이 되지 않은 경첩이 언제나처럼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
금속이 마찰되는 기분 나쁜 음색에 마틴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런 소음이라도 있지 않고선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공간에 발을 들여야 함을 알기에 별다른 불평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마틴이 찾아온 방 안에 자리한 사람은 언제나처럼 조용했다. 손님을 맞이하는 인사 한 마디 없는 것은 물론이고, 마틴을 괴롭히곤 하는 마음의 소리마저 그에게서는 읽어낼 수 없다. 이미 기대를 버린 지 오래기에 마틴은 상대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안으로 향했다.
“저 왔어요.”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상대 앞에서 마인드리더는 격식도 차리지 않고 의자를 끌어다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 봐야 상대방이 자신에게 관심조차 가지지 않을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일부러 피하고 있던 시선을 흘끗 돌리자, 역시나 그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을 읽어낼 수 없었다.
“마지막이라고 해놓고 왜 또 왔는지 알아요? 아직 못다한 말이 있어서요.”
자신을 바라봐주지도 않는 이를 외면하며 마틴은 미세한 균열이 보이는 하얀 천장으로 눈을 향했다. 딱딱한 나무의자가 불편하게 기대어 있는 마틴의 등을 아프게 짓눌렀지만, 비현실적으로 조용한 이 공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감각은 그에게 현실감을 깨닫게 만든다.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지도.
"평생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자존심 상하잖아요. 당신은 신경도 안 쓸 테고."
마틴은 방 안으로 들어설 때보다 깊게 숨을 골랐다.
"저 티엔씨를 좋아해요."
무언가를 더 말하려 입을 뗀 마틴은 혹시나 있을 상대의 반응을 기다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바보 같은 생각임을 알면서도, 자꾸만 무언가를 기대하게 되는 자신이 원망스럽다.
긴 침묵이 흘렀다.
"……알아요, 말도 안 된다는 거. 그 동안 무례했다는 사과는 안 할 거예요. 당신도 똑같았잖아요. 처음에 당신을 싫어했던 건 진심이었어요."
대답 없는 이 앞에서 마틴은 몇 번이고 실망과 포기를 곱씹었다. 오늘도 단지 그 반복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머나먼, 그리고 점점 더 가까운 과거를 회상하던 마틴은 자신의 입을, 얼굴의 절반을, 그리고 눈을 손으로 덮어버렸다.
"차라리 그때 당신이 그냥 죽어버렸다면 훨씬 나았을 거예요. 그랬다면 당신도 저도 편했겠죠. 그랬을 거예요, 분명."
죽어버렸다면, 하고 나직이 반복하는 마틴의 말은 의식이 없는 이에게 닿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지금까지 해온 어떤 말도 그에게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이 제게 지킬 의리가 없다는 건 알아요. 그래도 딱 한 번만…… 소원을 들어줘요. 일어나요. 지금껏 악담을 했다고 화를 내도 좋고 상종 못하겠다고 평생 말 한 마디 안 붙여도 괜찮아요. ……제가, 당신을 좋아한다고요."
마틴은 티엔의 목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손끝으로 어렵지 않게 그의 심박이 전해져 왔다. 마틴 자신의 것보다 훨씬 느린, 하지만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고동. 그가 아직 이 세상에 메여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몇 안 되는 표식이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수척해진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마틴은 맥박을 느끼는 손을 거두지 않은 채 그와 입술을 포갠다. 마틴을 밀어내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 그의 입술은 따스했다. 당신은 아직 살아있군요.
하지만 그뿐이었다. 단지 감촉만이 마틴의 입가를 맴돌 뿐.
“……사랑해요.”
누구의 마음이라도 흔들 수 있을 감미로운 속삭임에도, 티엔의 심장에는 닿지 않는다. 시계바늘마냥 변치 않는 일정한 두근거림에는 설렘은 물론, 그가 응당 느껴야 할 불쾌함조차 담기지 않았다.
차라리 당신이 사라져버린다면 돌아서서 다시는 미련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 텐데.
자신을 아프게 하는 그의 심박과 온기에 안도를 느낀다는 사실은, 마틴을 가장 비참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악수를 나누고 형식적인 대화를 나눴다. 멀리서 와서 불편한 점은 없는지, 재단의 일은 할만 한지. 서로 내용에 의미를 두지 않고 지극히 친교적인 기능을 띈 대화의 도중, 마틴은 상대의 외모, 말투, 보이는 태도, 습관, 그리고 알아낼 수 있는 모든 것을 훑고 있었다.
동양인의 특징이 있는 단정한 외모. 약간 놀라운 양팔의 문신. 어색한 영어. 사교적인 미소를 전혀 보이지 않는 딱딱함. 사람을 여러 종류로 분류해 각각에 맞게 상대하곤 하는 마틴은 그가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를 탐색했다.
하지만 마틴은 결국 그에 대한 평가를 보류했고, 둘은 여전히 상투적인 인사와 함께 작별했다. 마틴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티엔이 어떤 사람인 것 같느냐는 누군가의 물음에 마틴은 간단히 대답했다.
“마치 동양화 같은 사람.”
이 말을 들은 사람은 그의 특이한 외모나 조용한 성격을 말하는 것이라 받아들였지만, 마틴이 생각하는 바는 달랐다.
동양화에는 여백의 미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다. 종이를 칠하지 않고 비워둔 채 여운을 남기고, 감상하는 이의 상상을 자극하는 아름다움.
그리고 티엔 정에게서는 마틴이 사람을 감상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한 가지가 동양화의 여백마냥 보이지 않았다.
‘내 능력의 한계라는 건가.’
그 뒤로 여러 번의 만남이 있었음에도 안개가 낀 마냥 뿌옇게 보이는 그의 머릿속은 수 많은 이들의 생각을 읽어온 마틴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마치 정말로 한 폭의 그림이 놓여져 있는 것처럼 마틴은 그를 탐구하고 싶었고, 과연 그 여백 너머에 어떤 풍경이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티엔 정은 놀랄 만큼 성실했고, 자신의 노력과 동료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처음 접하는 일의 서투른 부분을 메워나갔다. 그러나 타인과의 교류에는 적극적이지 않아 그와 관련된 정보를 얻기란 마틴에게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마틴이 알아낸 바로 티엔은 ‘기’라는 특이한 능력을 다루며, 그의 고향과 달리 능력자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이곳에서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한다. 브루스와의 접점은 뚜렷하지 않고, 재단 자체를 위하고자 하는 인물이 아니기에 바람직한 후원자라고는 할 수 없다.
재단을 위해서도, 자신의 호기심을 위해서도 마틴은 그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길 원했다. 그리고 업무나 다른 핑계로 자연스럽게 티엔과의 접촉을 늘리는 일은 마틴에게 숨쉬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몇 번인가 사무적인 만남이 있고 나서, 이 속내를 알 수 없는 동양인과 어떻게 친분을 쌓으면 좋을지를 고민하던 참에 뜻밖에도 티엔이 먼저 마틴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 때 마틴은 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던 참이라, 급하게 불을 비벼 끄며 담배연기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별 상관 없습니다. 아편이라도 피우는 게 아니라면.”
마틴은 그가 중국인과 영국인 사이의 심각한 농담이라도 던진 것인가에 대해 잠시 동안 고민했지만, 티엔이 그럴 성정은 아니라 판단하고 티엔의 용무로 말을 돌렸다.
티엔이 마틴을 찾은 이유는 물론 업무상의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가 아닌 마틴을 찾았다는 점은 꽤 의외였다.
“브루스씨와 친분이 있다면 절 꺼릴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마틴의 말에 티엔은 잠시 생각하곤 입을 열었다.
“다른 분에게 얘기를 들었을 때, 연합에는 영웅이 있다면 재단에는 챌피씨라는 기둥이 있다고 하더군요.”
들을 때마다 낯간지러운 말이지만 마틴은 이에 대해 부정할 생각은 없다. 지금의 그랑플람은 마틴의 힘으로 지탱되어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누군가의 한 면으로 그 사람을 평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정석적인 대답을 들으며, 마틴은 그가 누군가를 평가할 정도로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기는 하는지 의문스러웠다. 그럼에도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은 그가 마틴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가졌다는 뜻이 아닐까.
“제 능력이 기분 나쁘진 않나요?”
“제 마음을 읽지 못하신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이런, 알고 있었던 건가. 그의 생각이 마틴에게 뿌옇게 보이듯이 그에게는 마틴의 능력이 어떤 방식으로든 감지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의 능력은 마틴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까다로운 모양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읽으려 계속해서 시도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온 것은 자신감일까, 비꼬는 것일까, 아니면 그 외의 무언가일까. 어느 쪽이든 이 동양인은 순순히 자신을 내비칠 뜻이 없는 듯 했다.
“이거 실례를 했네요. 그래도─”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마틴은 평소라면 하지 않을 경솔한 언사를 내뱉었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은 있답니다.”
마틴이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하자, 티엔은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자신의 능력에 헛점이 있는지, 혹은 마틴의 능력이 그의 생각보다 강대한 것인지. 물론 이것은 마틴의 거짓말이었지만.
그렇게나 무뚝뚝해 보이면서, 살짝 흔들어본 것만으로 당황하는 그를 보며 마틴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