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지 않아도 저는 죽는 거예요. 모두 다 함께 말이에요. 그리고 저를 쏜다면…… 당신은 세계를 구한 영웅이 되는 거죠. 간단하잖아요.”
“……그리고 평생 당신을 죽인 인간으로 남겠지.”
“그게 중요한가요?”
마틴은 이것이 자신의, 그리고 연인과의 생애 마지막 대화라는 것을 상기하며 조소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가 지금껏 상상했던 삶의 끝은 사고이기도 했고, 병이기도 했으며, 타인에 의한 것이나, 심지어 자신의 손으로 목을 매는 것도 있었지만. 적어도 이런 식이 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탁 트인 하늘 아래였다면 기분이 조금은 나았을지도 모른다. 높은 장소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날이 맑다면 검은 밤하늘에 박힌 달이나 별도 볼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세상은 지킬 가치가 있노라고 후련하게 떠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마틴의 눈에 비치는 세계란 차가운 형광등과 몰개성적인 하얀 벽, 그리고 자신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티엔. 그게 전부였다.
마틴의 세계의 한 축에 자리한 티엔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언제나 날카롭던 눈빛마저 흐려져 있었다. 그는 마틴이 쥐어준 것에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 3파운드 가량의 무게는 그에게 있어 마틴의 생명의 무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마틴, 나는……”
겨우 떨어진 입은 말을 끝마치기조차 힘들었다.
“당신을 구하고 싶었다.”
“알아요.”
과거형으로 매듭지어지는 그의 말에서 마틴은 티엔이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를 알았다. 하지만 그건 분명, 정말로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사실 누군가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마틴은 스스로 끝을 맺을 수 있었다. 그는 어디를 어떻게 쏘면 사람의 숨을 멈추게 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고, 본래 그의 손에 들려있던 총과 탄약 몇 발이면 그걸 행동으로 옮기기에 충분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틴은 결국 이기적이기를 택했다.
“티엔, 저는 지금까지 많은 거짓말을 해왔죠……. 당신도 알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진심만 말할게요. ……저는 죽기 싫어요. 절대로, 결코, 죽고 싶지 않아요……”
이걸로 괜찮다고 웃으며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당신을 위해서라면 슬프지 않다고. 하지만 마틴은 마지막까지 거짓을 담고 싶지도, 티엔에게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사는 게 미치도록 끔찍했을 때도 죽지 않았는데, 드디어 살아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죽으면 세상이 다 무슨 소용이죠? 그렇게 되면 제가 지금까지 해온 건 다 무슨 의미가 있는 거예요? 저는 어차피 거기 있을 수가 없는데……?”
지금의 죽음으로 무얼 해낼 수 있는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마틴은 이런 결말을 위해서 살아왔던 것이 아니었다. 목구멍에서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눌러 담는 것이 점점 더 힘겨워졌다.
“저는 죽기 싫어요. 이렇게 죽기 싫어요. 스스로 죽는 것도, 당신에게 죽는 것도, 전부 다 싫어요. 무서워요. 상상만 해도 괴로워요. 아플까요? 제가 죽는다고 누가 알아주기나 할까요? 왜 제가, 왜 저만 아파야 하는 거예요. 이건 불공평해요…….
…….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거라면…… 적어도 당신이 제 대신 살고서 의미가 있었다고 해주세요. 제가 살아왔던 것도, 제 죽음도 전부 의미가 있었다고……. 부탁이에요.”
눈가에 고이던 것이 드디어 뺨을 타고 흘러내리자 점점 흐려지던 티엔의 모습이 다시 선명하게 비춰졌다. 그는 전보다 더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시간이 없었다.
“제발, 티엔. 이런 일로 당신에게 애원하게 하지 말아요.”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눈물 흘리면서도 자신을 독촉하는 마틴을 앞에 두고, 티엔은 익숙하지 않은 손으로 권총을 고쳐 잡았다. 점점 더 무겁고 기분 나빠지는 감촉에 구역질마저 치밀어 그는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여기. 바로 이쪽을 관통하도록. 조심해요.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죽지 않잖아요…… 혹시라도 실패했을 땐 절대 망설이지 말고 다시 쏴요. 제가 고통스럽길 바라진 않죠?”
마틴이 가리키는 곳을 똑바로 조준하는 손은 처음에 작게 떨리고 있었지만, 이어지는 마틴의 말은 그의 팔에 긴장을 더했다.
“절 사랑하나요?”
“그래.”
“앞으로도 계속?”
“……물론이다.”
미안해요.
“고마워요. 저도 사랑하고 있어요.”
마틴은 결국 끝까지 이기적이지는 못했다. 마지막 순간엔 그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눈을 감아버렸으니까.
티엔 정은 신성한 종류의 경건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벽돌로 높이 쌓아 올린 건물에서 새어 나오는 풍부한 화음의 찬송가도 그저 듣기에 거슬리지 않는다는 점이 기꺼울 뿐, 그에게 이렇다 할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동지와 소한 사이, 주위가 약간 소란스러워지는 날. 그에게는 그 정도의 의미인 하루였지만, 올해로 티엔은 영국에서 두 번째의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될 예정이었다.
시곗바늘은 갓 9시를 넘긴 시간을 가리키고 있지만 주위는 한밤처럼 어두웠다. 가로등이 드물어지는 골목 사이로 발걸음을 옮기는 티엔의 뒤로 새하얀 입김이 꼬리를 끌며 따라붙는다. 길가의 물웅덩이 위로 살얼음이 두께를 더해가는 날씨였다.
곳곳이 새하얗게 얼어붙은 한적하고 좁은 길은 차가운 느낌을 더하고, 어딘가에 존재할 따스함의 흔적은 양쪽에 늘어선 작은 창에서 드문드문 새어 나오는 불빛뿐이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불빛과 함께 티엔의 발치로 내려앉았다. 저 벽에 둘러싸인 공간은 누군가의, 또 어떤 가정의 보금자리일 것이다.
낯선 땅의 가정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는 티엔은 창 너머에 흐릿한 상상을 덧씌워보았다. 따듯한 음식을 준비하는 어머니, 그 어머니의 곁을 지키는 아이, 그리고 막 일터에서 돌아와 사랑하는 아이를 안아 올리는 아버지─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니.’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티엔의 머릿속에 이제는 거의 잊었다 생각해온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아직도 그 목소리는 티엔을 원망하고, 질책한다.
‘내가 어찌 살아왔는지 아는 네가 어떻게.’
그렇군요.
목소리가 원하는 대로 티엔은 무의미한 상상을 접고 어두운 길을 나아갔다. 일부러 불빛을 외면하며 골목의 어두운 구석들에 눈을 돌리자 주위가 더 싸늘해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던 도중, 어느 순간 티엔은 누군가가 바라보고 있는 듯한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무수한 소음 속에서 자신의 이름 두 자를 들었을 때와 같은, 가볍지만 지나쳐버리기는 힘든 끌림이었다.
가만히 바라본 ‘시선’의 방향은 어둡고 조용했다. 누구? 혹은 무언가?
티엔은 그 기척을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렇게만 하면 그는 몸을 녹이고, 씻고, 잠들어 편안히 내일을 준비할 수 있다. 그것은 유혹이라기보다는 당연한 일과였으며 티엔 정은 굳이 모험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발걸음의 방향을 돌린 것은 방금 떠올린 목소리에서부터 자신의 주의를 돌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얼마나 나아갔을까, 어두운 공간 한구석에 도드라지는 밝은 빛으로 티엔은 그 누군가의 존재를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아마도 금빛일듯한 머리 색을 가진 그는 잡동사니들 사이에 웅크려 무릎 사이에 고개를 푹 파묻고 있었다. 티엔이 발을 옮길 때마다 살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선명했음에도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봐.”
남자는 티엔의 말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혹시나, 싶어 가까이 다가가 짚어본 어깨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살아있는 건 확실하지만 이대로는 위험할 것이 분명했다.
“이러고 있다가 죽는다.”
티엔은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고 재차 말을 걸었다. 역시나 답은 없었고, 어깨와 무릎을 흔들어 보고서야 움찔 움직이는 몸은 이내 더 강하게 움츠러들었다.
한참을 도닥인 후에야 겨우 고개를 든 남자는 아직 앳되어 보이는, 이제 갓 성인이 되었을까 싶은 청년이었다. 옅은 색의 긴 속눈썹 위로는 눈물이라도 얼어붙은 것인지 반짝이는 서리가 내려있다.
그는 흐릿한 눈으로 티엔을 올려다보았다. 날씨에 비해 지나치게 얇은 옷 너머로는 제대로 된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고, 짧게 끊어지는 입김은 색색거리는 그의 호흡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고개를 파묻고 원래의 자세로 돌아갔다. 추위 때문인지, 단순히 갈 곳이 없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다시 원점이었다.
조용한 골목은 도움을 청하기에 마땅치 않았고, 추운 날씨 탓인지 근처에는 지나가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티엔은 이런 상황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알지 못했다. 지금껏 이런 일에 신경 쓸 만큼의 여유가 그에게는 없었으므로.
결국 검은 머리의 동양인은 길게 입김을 뿜어내며 외투를 벗어들었고, 그것을 청년에게 덮어씌운 뒤 그를 둘러업었다. 스며드는 한기와 청년에게서 느껴지는 낮은 체온으로 온몸에 소름이 일어났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발견해버린 대가라는 것일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얼어 죽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티엔이 두 사람분의 무게를 감당하며 집으로 향하는 사이, 떨리는 팔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온기를 찾아 조여들었고 얕은 숨은 계속해서 그의 뒷머리를 간질였다.
답답하군.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면서도 티엔은 업힌 이를 고쳐 매고 걸음을 재촉했다.
어차피 그의 집은 멀지 않았다.
사람이 없던 집안에는 냉기가 감돌았다. 티엔은 청년을 내려두고 난로를 켰고, 그 주위로 선명한 온기가 퍼져갔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괜찮을지 그는 그리 확신이 서지 않았다.
티엔은 역시나 냉기가 가득한 욕실로 향했고, 작고 불편해 거의 쓰지 않던 욕조에 냉수와 온수를 섞어 담았다. 청년을 뒤돌아보니 그는 난로 앞에서 몸을 웅크리고 떨고 있었다.
적당히 되었다 싶을 때 다시 청년에게로 다가간 티엔은 조금 난감해졌다. 그대로 물에 담가버리면 되는지, 옷을 벗겨내야 하는지. 물의 온도를 재어보느라 따끈하게 데워진 그의 손이 차가운 뺨에 닿자, 청년은 흠칫 놀라 두 눈을 치켜떴다. 하얗게 일어나있던 그의 볼은 물기를 머금자 붉은빛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먼저 몸부터 녹이지.”
일단 떨고 있는 그를 부축해 욕조로 다가가자, 뜻밖에도 자신을 밀어내는 손이 느껴졌다. 방금까지 정신도 제대로 못 차리고 있던 사람임 생각하면 꽤나 단호한 몸짓이었다.
“제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불쾌함이랄 것보다는 힘들게 업어온 보람은 있었나, 같은 태평한 생각이 앞선다. 처음처럼 주저앉아있기만 한다면 곤란할 뿐이니까. 아마 티엔의 체온과 난로의 온기에 기운을 조금은 차린 모양이었다.
이쪽은 뜨거운 물. 수건은 여기에 놓아두마.
그 외에 별로 중요할 것 같지 않은 설명은 제쳐놓고 티엔은 청년에게 입혀뒀던 자신의 외투를 챙겨 욕실을 나섰다. 그리고 잠시간 문 너머의 소리를 유심히 듣고 있던 티엔은,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들리고서야 청년이 입을만한 옷가지를 찾으러 자리를 떠났다.
슬슬 청년이 나올 즈음이라 생각되었을 때 티엔은 여분의 작은 의자를 내놓고 재료가 부족해 묽게 만들어진 콘수프와 작은 빵, 그리고 따듯한 물을 탁자에 올렸다. 혼자 사는 집에 마침 식재료가 떨어져 있던 탓이었다.
이윽고 약간 젖어있는 금발과 붉은 얼굴이 문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욕실에서 느꼈던 경계의 기색은 그대로였다. 티엔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눈에 띄게 차려져 있는 식사는 명확한 뜻을 전달했고, 청년은 머뭇거리면서도 티엔의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걱정하지 마라. 더러운 손은 아니니까.”
청년의 시선이 자신의 특이한 손을 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티엔이 말했다. 거의 평생에 걸쳐 받아온 오해인지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청년은 그런 뜻은 아니었다는 듯 고개를 저었고, 빈약하지만 따듯한 수프를 바라보다 작게 한 스푼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티엔은 방에서 담요를 한 장 꺼내와 청년의 어깨에 걸쳐두곤 자신은 다시 맞은편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스푼이 접시와 부딪히는 소리,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 그리고 난로가 열을 내며 타닥거리는 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부드러운 침묵처럼 내려앉았다.
마침내 식사가 끝나고, 티엔은 읽던 책을 조용히 덮었다.
“이름이 뭐지?”
대답이 없었다. 단지 편의를 위한 물음이었기 때문에 티엔은 그를 더 추궁하지는 않았다.
“......범죄 같은 데에 연루됐나?”
역시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은 물음이었다. 단지 이렇다 할 외상도 없고, 오래 바깥을 떠돈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 청년이 왜 그런 곳에서 떨고 있었는지 그 외에 짚이는 구석이 없을 뿐이었다.
“그렇다면요?”
“신고해야겠지.”
티엔의 대답에 그는 겨우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그런 반응을 지켜보던 티엔은 맞은 편에 앉은 청년 자신이 신고를 받을 입장이라 해석했지만, 그런 생각을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와는 별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 생각을 모른 채, 이제는 드러내놓고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청년에게서 또다시 ‘시선’이 느껴졌다. 역시. 틀린 사람을 주워온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티엔은 가만히 그를 마주 보았다. 밝은 곳에서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밝은 갈색을 띠고 있다. 묘한 느낌은 저 눈에서부터 오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청년은 고개를 푹 숙여버렸고 ‘시선’도 그와 비슷하게 사라져버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청년을 바라보며 티엔은 이후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그로서는 드물게, 티엔은 눈앞의 청년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갈 곳이 없는 거라면.”
마치 혼잣말을 하듯 낮게 읊조리자, 청년은 고개를 들고 티엔을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별로…… 돌봐줄 생각은 없지만. 당분간은 있어도 좋다.”
당분간. 티엔은 더 명확한 선을 긋는 쪽을 선호했다.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티엔이 기한을 굳이 성탄절로 잡은 데엔 별 이유가 없었다. 크리스마스는 그저 근시일 내에 다가올, 그가 기억하고 있는 날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보름이 약간 덜 되는 시간이 너무 길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가벼운 후회도 있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바꿀 생각은 없었기에 그는 앞으로의 일정으로 생각을 옮겼다.
다음날 새벽, 티엔은 안락의자에서 불편하게 잠들어있는 청년을 침대로 옮겼고, 평소보다 더 빠른 시간에 집을 나와 일찍 문을 연 가게를 찾았다. 그리고 다소의 먹을 것을 찬장에 채워 넣고서야 그는 다시 직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의 집이라는 공간이 빼내 갈 것도 없는, 그야말로 숙박만을 해결하고 있는 곳이어서 다행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티엔은 미세하게 달라진 물건의 배치로 집 안 구석구석에 타인의 손이 닿아있음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꽤 신기한 일이다. 그는 여태껏 누군가가 자신의 생활을 어지럽히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는 종류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마음 편한 청년에게 편하게 지내라는 말은 따로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식사는?”
어색하게 마주 보고 있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쪽은 티엔이었다.
“했어요.”
“그래.”
살가워야 할 사이도 아니니 이 정도로 충분할 것으로 생각하며 욕실로 향하는 티엔에게 청년은 또렷한 한마디를 던졌다.
“마틴이에요. 제 이름.”
어제의 질문에 드디어 답할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에 티엔은 잠시 망설였고,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한 마디로 호응했다.
“나는 티엔 정이다.”
그렇게 두 사람을 서로를 부를 이름을 알게 되었다.
돌봐줄 생각이 없다고 말은 했지만, 누군가와 함께 생활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분의 공간과 스푼 하나보다는 더 많은 것이 필요했다. 당장 티엔에게 있는 여벌의 옷은 마틴에게 잘 맞지도 않았을뿐더러, 그 외에도 티엔의 집에는 딱 한 사람을 위한 여건밖에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잘 짜인 공간은 예정에 없는 변화에 취약한 법이었다.
마틴이 들어온 지 사흘째, 티엔은 그 무례한 금발의 청년과 함께 물건을 사러 나섰다. 무언가를 사주는 것이 ‘돌본다’는 표현과는 거리가 있다는 합리화를 거치긴 했지만, 처음 자신의 말에 현실성이 없었던 것만큼은 인정한 참이었다.
함께 외출하자는 말에 마틴은 또 의심의 눈길을 보내왔지만, 일단 가게에 들어서자 아주 당연하다는 듯 물건을 고르기 시작했다. 물론 마틴은 맨몸으로 집에 얹혀 들어온 입장이었기에 그 대금은 온전히 티엔의 몫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틴이 물건을 고르는 사이 만들어두었던 여분의 열쇠를 건네자 마틴은 신기한 눈빛을 보냈다.
“오래 있을 것도 아닌데요.”
“이편이 편리하니까.”
보통은 이렇게 하지 않는 건가. 자신의 집을 가족 외의 사람과 공유해본 적이 없는 그는 일반적인 동거 방법 따위를 알지 못했다. 게다가 근거 없는 믿음일지 몰라도, 티엔은 이제 와서 마틴이 허튼짓을 하리라는 생각 같은 것이 들지 않았다.
“이게 당신 이름이에요?”
마틴이 책장에서 찾아낸 수첩에는 반듯한 글씨로 두 글자가 적혀있었다.
“그래. 앞쪽이 정, 뒤의 것이 티엔.”
서양에서는 성씨가 아닌 이름이 앞에 오겠지만, 그가 한자로 적은 성명은 그 반대의 순서로 쓰여있다. 그리고 그는 검지로 용케 올바른 획순을 찾아 그어보고 있는 마틴에게 또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늘이라는 뜻이다. 티엔은.”
“제 이름은…… 로마의 신이 유래라던가요.”
전혀 안 닮았지만. 그렇게 중얼거리던 마틴은 손에 들고 있던 수첩을 열고 내용을 훑었다. 어차피 그 안에는 마틴이 알아볼 수 없는 언어가 빼곡했다. 다만 그 내용에 상관없이 티엔이 도중에 제지한다면 마틴은 그 물건에 다시 손대지 않았고, 티엔도 미리 말해두지 않은 건에 대해서는 추궁을 삼갔다. 그런 약속이었다.
그 외에도 둘 사이에는 몇 가지 규칙이 생겨나 있다. 그 중 하나는 직전의 대화와 같이 상대가 어떤 사실을 밝히면 자신도 그에 상응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누가 먼저 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규칙은 나름대로 착실한 효력을 가졌고 둘은 서로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아가게 되었다.
“당신은 대체 무슨 낙으로 사는 거예요?”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명상을 하지. 책을 읽거나.”
담담한 대답에 마틴은 맥 빠진다는 반응을 보였다. 둘은 식탁 겸 탁자에 마주 앉아 각자 자신의 일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티엔은 가계나 앞으로의 일정을 정리하고 있었고, 마틴은 그런 티엔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걸 낙이 없는 거라고 하는데요.”
티엔은 그 말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별로 궁금했던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마틴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는 너는 무얼로 살지?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티엔은 마틴이 대답을 원하지 않는다면 강요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릴 정도의 배려가 그에게는 없어서, 그저 펜촉이 종이 위를 스치는 소리가 그들의 사이를 메웠다.
“사람을 좋아했다가 실망하는 거요.”
일부러, 라고 생각되는 밝은 목소리의 대답. 하지만 그 내용은 티엔의 시점에서조차 낙이라 말하기엔 어려운 취미였다.
“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마틴의 입가에서는 여전히 지어낸 미소가 걸려있었다.
“별로 다를 것도 없는 것 같구나.”
그렇게 평하고 티엔은 다시 가계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틴이 들어와 살게 된 이후로 지출이 크게 늘었다. 그는 보통 검소한 사람이어서 이 정도 변화로 재정적인 문제가 생기진 않지만, 만일 번잡한 사이에 기록이 어긋난다면 티엔은 그것을 더 참을 수 없을 터이다.
또 예의 그 ‘시선’이 느껴졌다.
티엔은 마틴이 자신에게 무언가 의문을 느낄 때면 ‘시선’을 보내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모른 척했고 마틴도 이제까지 특별한 언급을 한 적은 없다. 티엔은 그저, 이 금발의 존재도 자신과 닮아있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었다.
“저는 잠깐이라도 즐거워요. 그런데 당신은 그것조차 없잖아요.”
항의인지 변명인지 모를 것이 마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아마도 낙이 없기는 마찬가지라고 하는 티엔의 평가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글쎄. 그래서 좋은 기억이 되었나?”
“……어떤 때는요.”
“흠.”
그렇든 아니든, 티엔에게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단지 실망이라는 단어는 그의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너는 내게도 실망하게 되겠구나.”
“아직 당신이 좋다고 한 적도 없는데요.”
“아니라면 다행이군.”
기대가 없다면 실망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당신은 이상한 사람이에요.”
마틴이 티엔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같이 있는 게 싫지는 않아요.”
“……그것도 다행인 것 같구나.”
그날 밤은 꽤 쌀쌀했다. 둘은 좁은 침대를 함께 사용했고, 얕은 잠 사이사이에 느껴지는 체온은 그리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뒤로도 그들은 그 비좁은 공간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함께 지내는 동안 마틴은 집 밖으로 나갈 의지를 그리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티엔 정의 집은 영국인 사내아이가 시간을 보내기에 그리 좋은 장소라고 할 수 없다. 티엔은 자신이 일을 나간 사이 마틴이 시간을 어떻게 때우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읽지도 못하는 책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은 아무리 그라도 눈에 밟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가 퇴근 후 서점에 발을 들인 이유였다.
물어본 적은 없지만 마틴은 책을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나마 손에 잡을 것이 그것뿐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여기 있는 책들은 한자가 빼곡한 서적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낯선 땅의 문학에 별 조예가 없는 그는 잘 보이는 곳에 비치된 책 중의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티엔은 손에 들린 책의 앞장을 훑어보았다. 겉으로는 미처 몰랐지만 이 책은 하나의 장편이 아니라 여러 단편을 묶은 형식인 것 같았다. 그런 만큼 틈이 날 때 가볍게 읽기에는 나쁘지 않을 터이다.
-어느 추운 날 밤, 귀가 중이던 남자는 얼어 죽어가고 있는 금발의 청년을 발견한다.
흠. 첫 단편을 펼쳐 본 그는 이야기 속의 풍경이 어딘가 낯익게 느껴졌다.
-남자는 그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말이 없지만 총명하고 성실했으며, 간혹 신비한 미소를 지었다.
총명하고 성실한지는 모르겠지만. 미소가 퍽 예쁘기는 하다.
-청년은 사실 죄를 짓고 땅에 떨어진 천사였다. 깨달음을 얻고 죄를 용서받은 그는 은인에게 사실을 밝히고 결국 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음.
티엔은 조용히 책을 덮었다.
내용은 그런대로 흥미롭지만, 그는 이 책을 마틴에게 건네줄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주로 불쾌라기보단 낯간지러움에서 기인하고 있었다.
“천사라…….”
금발에 반짝이는 눈, 사람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차가웠던 희고 붉은 피부. 이 이야기를 미리 알고 있었다면 티엔은 낯선 이가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는 아닐까 잠시 의심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마틴은 좀 더 많이 웃고, 많은 이야기를 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결국 떠나게 될 거란 사실까지도 닮아있었다.
마틴의 마중을 받으며 집에 도착한 티엔은 또 다른 복병과 마주쳤다. 잠깐 씻고 나왔을 뿐인데, 마틴이 그가 서점에서 산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맹랑한 청년이 종종 집안을 뒤지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새 가방의 내용물을 들켰을 줄 예상치 못했던 티엔은 조금 난처한 기분이 되었다.
“……경험담이에요?”
보란 듯이 책을 덮으며 묻는 마틴은 분명히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선물 받은 물건이다.”
사실대로 말하기엔 멋쩍어 적당히 둘러대자, 마틴은 당신이 선물 같은 것을 받기도 하느냐는 듯 미심쩍은 눈빛을 보냈고 이내 그 눈은 고운 호선을 그렸다.
“그러면 가서 말해줘요. 이런 얘긴 안 읽어도 된다고.”
마틴이 굳이 입에 담지 않은 뒷말은 이럴 것이다. 집에는 이미 천사 같은 젊은이가 하나 있노라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시 책을 펼쳐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걸 보면 책을 일부러 구해온 보람 정도는 있는 모양이었다.
“어릴 적에 천사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긴 해요.”
빠르게 뒷장을 훑던 마틴이 문득 생각난 듯 말을 던졌다. 어쩌면 그는 그 천사의 이야기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15살도 넘었는데 천사 같다는 말이 나오면 글쎄요, 그건 누굴 꼬시려는 말 아니에요?”
절대 입밖에 내면 안 되겠군. 티엔은 귀갓길에서 떠올렸던 생각에 자물쇠를 채우기로 했다.
마틴은 그날 잠들기 전에 책 한 권을 전부 읽어버렸고, 내용에 대한 감상을 한참 조잘거리고서야 겨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꽤 즐거워 보이던 모습을 회상하던 티엔은 다른 책을 구해올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곧 그 생각을 접어버렸다. 어차피 그런 여흥거리가 필요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아 있었다.
마틴의 웃는 모습이 늘었다. 아마 본래부터 그런 성격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티엔은 그가 처음에 보였던 태도도 ‘마틴답다’고 여겼다. 마틴의 웃는 얼굴은 어여쁠지언정 진심이 아닌 때가 적지 않았으므로.
“티엔, 내일은 함께 보낼 수 있어요? 당신이 쉬는 날이기도 하고─”
크리스마스이브지. 그리고 그 다음 날은 티엔이 정한 마지막 기한이었다.
지금껏 둘은 그 기한에 대해 다시 언급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티엔은 달력 위의 한 날짜가 어느새 작게 표시된 것을 발견했고, 티엔 자신도 그 날이 다가오는 것을 신경 쓰고 있음을 깨닫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티엔은 마틴의 제안을 수락했다.
일부러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고 해도 좋을 만큼 티엔은 많은 일을 떠안고 있었다. 마틴이 오고 나서 그 빈도를 조금 줄였을 뿐, 본래는 집에까지 업무를 들고 와서 처리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것이다. 그가 일하고 있는 무역회사에서는 그를 별난 사람이라 여기긴 하여도 만류를 듣지 않는 사람을 굳이 막지는 않았다. 젊은 나이에 몸을 혹사한다며 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런 티엔이였기에 보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두 사람이 깨어있는 채 긴 시간을 함께 보낸 적은 거의 없었다. 마틴이 굳이 쉬는 날의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느냐고 물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오후, 비록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날씨는 그들이 처음 만났던 날만큼이나 차가웠다. 하지만 그 날과 달리 거리는 즐겁게 떠드는 사람들, 눈에 띄는 장식들, 그리고 노랫소리와 종소리로 전에 없던 활기를 뽐내고 있다.
붐비는 식료품점에서 함께 장을 본 두 사람은 양손 가득 먹을거리를 들고서 가게를 나섰다. 자신이 제대로 된 요리를 해보겠다는 마틴의 호언에 의한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간식 가게에 들른 마틴은 눈을 빛내며 달콤한 것들을 구경했고, 너무 많지 않으냐는 티엔의 타박에도 그저 웃으며 군것질거리 한 봉지를 짐 위에 얹을 뿐이었다.
그렇게 즐거워 보이는 마틴을 지켜보고 있을 때에, 티엔은 곳곳에 장식된 반짝이는 선물꾸러미들이 눈에 밟혔다. 선물 같은 것을 줄 생각은 해본 적이 없지만. 오늘 같은 날이라면 그리 나쁠 것도 없으리라.
잠시 양해를 구하곤 어딘가에 다녀온 티엔의 손에는 마틴이 본 적 없는 붉은 색의 목도리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어리둥절해 하는 마틴의 목에 곧장 그것이 둘리고 나서야, 그는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챌 수 있었다.
티엔의 집에 조금씩 늘어가고 있는 마틴의 물건은 거의 그 스스로 고른 것들이었는데, 몸에 걸치는 것들은 특히나 그랬다. 때문에 티엔은 자신의 선물이 마틴에게 어울리는지 확신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고 마틴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을 표하고 있었다.
“이런 거, 별로 필요 없는데요…….”
“날이 춥다.”
그러니 군말 말고 받기나 하라는 소리다. 티엔이 그렇게 고집한다면 마틴은 자신에게 어쩔 도리가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것 같구나.”
자신의 안목을 긍정하며 작게 미소 지은 티엔에게, 마틴은 목에 둘린 목도리를 콧잔등까지 끌어올리곤 고맙다는 말을 웅얼거렸다.
앞서서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마틴은 퍽 따듯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티엔은 만일, 만약 마틴이 이곳을 떠난 후에 또다시 밖을 떠돌게 되더라도. 조금은 나을 거라는, 그런 생각을 했다.
“크리스마스가 어떤 날인지는 알고 있어요?”
집에 도착해 좁은 부엌에서 함께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책장엔 낯선 책들만 가득하고 주위에 관심이라곤 없어 보이는 사람이, 이런 명절에 대해 알고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티엔이 간단히 아는 바를 말하자 마틴은 조금 즐거운 듯한 얼굴로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덧붙였다. 그리 큰 흥미랄 것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티엔은 묵묵히 마틴의 목소리로 재구성되는 성탄절을 귀에 담았다.
“그리고서는, 천사가 내려와서 목자들에게 아기가 태어난 사실을 알렸어요. 그런데 그 첫 마디가 ‘두려워 말라’였다나요…….”
장난기를 머금고 있던 금발의 청년은 여기서 이야기를 멈추고 무언가를 고심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는 이야기꾼이라도 되는 양 능숙하게 말을 풀어내고 있었기 때문에 내용을 잊었다거나 하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티엔이 그 뒤를 묻자, 생각에 빠져있던 마틴은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하더니 즐겁게 이어가고 있던 이야기를 간단한 서술로 마무리해버렸다.
잠시 숨을 돌릴 겸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게 되었을 때, 마틴은 티엔을 앉혀두곤 밀크티를 끓이고 진저브레드를 내어왔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가져보는 제대로 된 여유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달지 않으니까 먹을 만 하죠, 어때요? 그렇게 묻는 말에 티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그의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다른 때라면 티엔은 잡담 시간 같은 것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까부터, 그리고 오늘 내내, 마틴은 티엔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다. 웃을 때도, 다른 말을 하고 있을 때도, 그리고 바로 지금도. 그는 마틴이 어떤 말을 꺼낼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향긋하고 고소한 차도 생강 향이 물씬한 과자도 그의 주의를 눈앞의 청년에게서 돌릴 수는 없었다.
“그, 천사를 주웠다는 이야기 말이에요.”
시답잖은 이야기가 오가고, 뜸을 들이던 마틴이 드디어 입안의 말을 끄집어냈을 때 그는 전에 티엔이 가져온 책에 대해 이야기했다. 티엔에게 마틴을 연상시키는 천사가 나왔던 짧은 이야기. 물론 티엔은 그 이야기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신은 뭐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사실 당신이 천사인 줄 알았어요. 당신이 절 불렀을 때부터요.”
그 책을 읽었을 때부터, 마틴은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었다. 새까만 색으로 몸을 두르고 동양인의 얼굴을 한 천사에 대해 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마음이 읽히지 않는 데다, 소리 없는 비명을 들은 듯 자신에게 똑바로 다가온 그 사람은, 마틴에게 그만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날 밤에도 그냥, 누군가에게 실망했었어요. 다 알면서도 장단에 맞춰준 거였는데, 그런데 그날따라 기분이 정말 나빠져서……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당신이 저를 찾았어요.”
마틴이 털어놓은 진심은 그것만으로는 모자란 것 같았다. 한껏 경계하면서도 얼마나 그에 대해 알고 싶었는지를, 얼마나 큰 위안을 받았는지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를 마틴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망설이고 있었다.
“알고 있어요? 그때 당신이 했던 말들이 저한테는, 죽지 말라고, 아직 살아도 괜찮다고 하는 말로 들렸어요.
……티엔, 전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드디어 고개를 들어 바라본 그곳에는, 짙은 색의 두 눈이 마틴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그 눈빛에 마틴은 조바심이 났다.
“계속 지금처럼 살겠다는 얘길 하는 게 아니에요. 이제 일도 구하고, 집안일도 도울 거고, 절대 귀찮게 하지 않을 거예요.”
“마틴.”
“티엔, 제가 좋은 거죠? 그래서 절 돌봐줬잖아요. 그러지 않겠다고 했으면서요. 저는…… 저도 당신이 좋아요. 진심이에요.”
그 말을 들은 티엔의 표정은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마틴은 그런 그의 반응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가 없는 보살핌은 분명 책임감 이상의 것이었고, 티엔은 분명 타인에게 그렇게 살가울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마틴을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마틴의 호감을 거부했다.
“……너는 이전에도 그래 왔다고 했지. 나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고, 너는 결국 실망하게 될 거다.”
“상관없어요. 저는 당신에게는 그런 식으로 실망하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당신은─”
“챌피.”
티엔은 그 다음으로 어떤 말이 나올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마틴이 자신에게 보이는 호감이 어떤 점에서 기인하는지를 깨달았고, 또 실제로 알아내고야 말았다.
“마음이 읽히지 않는 정도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네 부모님께서 걱정하고 계신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마틴은 그에게 자신의 성을 알려준 적도, 능력에 대해 말한 적도, 하물며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도 없었다.
“……언제부터. 어떻게 알았어요? 부모님께 저에 대해서 말했어요?”
망연한 물음에 티엔은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다.
“왜 저한테 먼저 묻지 않았는데요? 절 의심했던 거예요? 그동안 묻지 않았던 건 이미 알고 있어서……? ……티엔, 당신은 제가 남아있길 바라지 않아요?”
그의 마지막 질문에는 배신감 사이에서 그러모은 희망이 담겨있었다. 단지 그렇다고, 남아주기를 바라지만 어떤 이유 탓에 그럴 수 없다는 답이 돌아온다면 마틴은 전부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낮은 목소리는 그 또렷한 희망을 외면해버렸다.
“마틴…… 마틴 챌피. 오늘로 내가 했던 약속은 끝이고, 돌아갈 곳이 있다면 나는 너를 여기 둘 이유가 없어. 내가 할 말은 그것뿐이다.”
모르는 이름이 몇 번인가 언급되고, 마틴의 높아진 목소리는 티엔이 그, 혹은 그들과 똑같다며 매도했다. 마틴의 눈빛은 그들이 만났던 첫날보다도 싸늘했고, 뒤이어 밖을 향하는 이를 불러세웠을 때 돌아온 것은 어차피 내보낼 사람을 상관하지 말라는 거친 언행뿐이었다.
티엔은 한참 동안 제대로 닫히지 않은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틈으로 싸늘한 공기가 새어 들어와 그의 살갗을, 머리칼을 간질였다.
자신의 배경에 대해서는 제대로 언급하지 않던 금발 청년에 대해 조사하게 되었을 때, 마틴이라는 이름이 본명이라는 사실이 조금 기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런 생각들과 함께 티엔의 머릿속에는 마틴의 마지막 말들이 맴돌았다.
─앞으로는 그 목소리도 자신을 괴롭히게 될까.
떠나가길 원한다면 호의 같은 것을 건네서는 안 되었다. 그런 것을 모르지 않았음에도 티엔은 잠시간이라는, 그리고 마지막이라는 명목으로 그에게 잘못된 확신을 주었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티엔의 잘못이었다. 그리고 가장 그의 큰 잘못은 그 확신이 완전한 거짓이 아니게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마틴이 떠난 지는 시간이 조금 흘렀다. 만약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라면 그 애는 또 그 날처럼 위험한 짓을 할지도 몰랐다. 추위를 피할 곳 따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을 텐데도 혼자 떨고 있던 그때처럼.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니 문단속도 하지 못한 채 길을 나선 티엔은 어렵지 않게 마틴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마치 쫓아와 주길 바랐던 것처럼, 마틴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기대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없이 마주 선 그들 사이에는 하얀 입김만 흩어졌다. 그리고 티엔은 여전히 이런 상황에 어떤 말을 꺼내면 좋은지 알지 못했으므로, 먼저 입을 연 쪽은 마틴이었다.
“당신이 얼마나 아는지는 몰라도…… 그런 건 저한테 물어봤다면 알려줬을 거예요. 전 지금까지 거짓말을 하진 않았어요.”
“미안하다.”
뒷조사를 했다는 점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티엔은 마틴이 이곳을 떠나 달리 갈 곳이 있는지를 확인해야만 했다. 이 아이가 떠나지 않고 싶어한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만일 마틴에게 돌아갈 곳이 없었다면 티엔은 마틴의 부탁을 마지못해 수락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시는 내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위험부담을 안고서라도.
“마음이 안 들린다고 제가 바보는 아니에요. 당신한테 제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지금까지처럼 함께 있어 줄 수 있는 거잖아요…….”
아무것도 아니지 않게 되었기 때문, 이라는 말은 둘 중 누구도 굳이 꺼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참을 서 있었고, 또 한참을 걸었다. 두 사람이 만났던 날만큼이나 주위가 어둡고 차가워졌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간혹 눈에 띄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생소하게 보일 정도로, 함께 웃으며 이브의 저녁을 준비하던 것이 한참 전의 일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그때에 반쯤은 일부러 지어보였던 웃음은, 그리고 그것을 대신하고 있는 침묵은 모두 그들이 꺼내지 못하는 말들의 껍질이었다.
티엔은 집에서 가지고 나온 목도리를 마틴에게 건넸지만 마틴은 그것을 그저 손에 쥐고만 있었다. 이걸 제가 들고 나왔으면 던져버리고 싶었을 거예요. 그럴 거면 왜 하필 오늘 이런 것까지 줬느냐고. 쓰게 말한 마틴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저는 열두 살에 능력이 생겼어요.”
숨을 고르고 난 마틴이 입을 열었다.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던 능력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때부터 전 제 능력이 싫었어요. 너무 많은 게 들렸으니까…… 그 나이에는 몰라야 할 것들까지 전부 들어버렸어요. 평범하게 보이던 사람들이 무서워졌어요. 그땐 소리를 지울 수가 없었거든요.
……부모님은 모두 능력자셨는데 저와는 달랐어요. 능력을 가지는 게 이렇게 괴로울 수 있다거나, 그런 말씀은 하신 적이 없었죠. 그분들의 잘못이 아닌데도, 견딜 수가 없어서…… 모두가 괴로웠는데. 그게 전부 들렸는데도 저는 가족들을 더 힘들게 해버렸어요.”
그렇게 말하는 마틴은 언제나처럼 웃고 있었지만 그것은 티엔이 처음 보는 종류의 씁쓸한 웃음이었다. 지나간 일이지만 여전히 후회한다며 마틴은 웃음으로 말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능력을 통제할 수 있게 됐는데도 더는 예전처럼 돌아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래서 집을 나왔어요. 제가 어떤 식으로 살아가든 그분들은 저를 믿지 못할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저도 저를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혼자 있는 건 싫어서. 능력을 써서 누군가와 같이 지냈어요. 그런데 그게 점점 괴로워져서, 능력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다가 다시 실망하고, 실망시키고, 그게 끝나지를 않아서……”
이야기의 중간부터 마틴이 몸을 떨기 시작하자 티엔은 그의 차가운 손을 붙잡았다. 그 떨림은 분명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음을 읽는 능력이란 것으로 한 사람에게 어디까지 실망할 수 있는 것인지. 티엔은 마틴의 삶에 대해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가족들을 볼 자신이 없어요. 전 그분들까지도 능력으로 속였어요. 그리고 앞으로 또 그렇게 될지도 몰라요.”
“네 부모님을 직접 뵌 건 아니다. 너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고. 돌아갈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내 곁보다는 나을 거라 여겼다. 그리고 설령 네가 돌아가지 않더라도…… 그분들을 더 기다리게 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티엔은 그 스스로도 변명이라 생각되는 자신의 입장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마틴이 가족에게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그의 진심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려운 이야기를 꺼낸 마틴 앞에서, 티엔은 그들 사이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무거운 입을 뗐다. 멈춰 선 그들은 여전히 손을 맞잡은 채였다.
“……나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얼굴은 알지 못해. 내가 그분을 닮았고, 강한 무인이셨다는 것이 내가 아는 전부였지.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말씀을 아끼셨다.
홀몸으로 어린 나를 키울 정도로 강한 분이셨지만, 그 무리가 화가 되었는지 독한 병을 앓으셨지. 그러면서도 몸을 챙기지 못하신 건 내가 있는 탓이었다. 그리고 병이 깊어지고 쇠약해지셨을 때…… 어머니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말을 꺼내셨다. 그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때의 일을 티엔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지쳐 계셨고 어렸던 자신도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했던, 그런 시기의 일이었다.
“나는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이제껏 그분을 존경했고, 또 닮고 싶었노라고. 철없던 나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어머니가 홀로 괴로우셨던 것은 그분이 없었기 때문인데도. 나는 사실을 고해서는 안 됐다. ……. ……어머니께서는, 너만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아버지를 미워하라 하셨지. 그래서 그리하였다.”
그전까지 존경하고 또 닮고자 했던 아버지였다. 그 뒤로 티엔은 아버지가 걷지 않았을 길을 걷고,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먼 타국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도 결국은 그런 이유로 말미암았다.
“어머니께서는 떠나신 지 오래고, 나는 아버지의 얼굴조차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분처럼 누군가를 괴롭게 만드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 내 미숙함으로 누군가에게 어머니와 같은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너와 함께할 수 없다. 티엔은 그런 뜻을 담으며 이야기를 끝냈다. 그러나 그가 말을 마치며 마틴을 마주 보았을 때, 마틴은 티엔을 와락 껴안았다. 그리고 가만히 그의 등을 도닥이는 마틴의 손길은 마치 우는 아이를 어르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전 당신이 누구를 닮았는지 같은 건 몰라요. 그리고 상처를 받은 건 당신이잖아요.”
뜻밖의 말에 티엔은 굳어버렸다. 타인에게 처음으로 꺼낸 이야기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도 약하다거나 여리다는 평가를 받아본 적이 없는 그의 상처를 지적하는 마틴의 말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와 별개로 그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떠올릴 때면 아프게 느껴지는 그것을 그는 미처 상처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 당신이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무엇을?”
“행복하게 사는 걸요.”
귓가의 목소리는 그에게 생소한 낱말을 속삭였다. 오랫동안 잊고 살아온 단어였다. 스스로 그걸 생각하지도, 또 그럴 필요도 없었으니까.
“제가 포기했을 때 당신이 절 구했으니까. 전 당신도 저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구나.”
그것은 어쩌면 그의 일생 중 가장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마틴과 함께했던 시간은 그에게 잠시간의 낙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그것조차 옳지 않을 정도로 과분하게 느껴졌고, 그 이상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마틴은 몸을 떼고 티엔의 눈을 들여다보았고, 이번에는 그의 목을 감싸 안고는 발끝을 세웠다. 이내 이마에 가볍게 닿는 입술의 감촉에 티엔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마 그때의 마틴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프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다고, 혼자일 필요는 없다고. 티엔에게 마틴의 말과 몸짓은 그렇게 느껴졌다.
차갑고 어두운 크리스마스이브의 저녁, 흑발의 남자는 검고 흰 손으로 자신을 껴안은 이를 마주 안았고, 금발의 청년은 읽지 못하는 그 마음을 그려보며 얼굴에 미소를 번졌다.
“저번 일도 그렇고, 독립심이 있는 건 좋지만 타인과 함께 일을 하는 방법을 몰라요. 티엔 정은 너무 성급하고 자기중심적이라는 게 제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그 성급한 젊은이를 이끌어줄 적임자가 있지, 안 그런가?”
그게 시작이었다. 그 아일 들여놓는 데엔 재고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는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는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결국 그렇게 나는 짐을 떠안게 되었다.
호방하고, 사람을 보는 눈이 있는 브루스 보이틀러씨. 그분이 말씀하시길 티엔 정은 재단에 도움이 될 뛰어난 인재이며 단지 약간의 지도가 필요할 뿐이다. 재단에서 가장 먼저 나를 신뢰하고 받아들여준 것이 그였기에 나는 브루스씨의 견해를 부정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또 내가 그의 분별력을 의심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티엔은, 그 애는 내가 보기에 아직 너무 어렸다. 이건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가짐의 문제다. 겉으로는 내가 아는 몇몇 동양인 소년들보다 어른스러워 보이지만, 티엔 정은 바라는 것, 하려는 것, 되고자 하는 것은 모두 그 자신 위주로 돌아가고 있다. 강직하긴 하나 그런 성품이 과연 재단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나는 굉장히 회의적이었다.
나는 재단에 마련되어 있는 나의 작은 공간을 사랑한다. 채광이 좋고, 투박하지만 튼튼한 가구가 있고, 선물 받은 소소한 물건들이 보기 좋게 놓여있는 조용한 사무실. 혼자서 일을 하기에도, 누군가와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썩 훌륭한 장소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 평온한 공간에서 탐탁지 않은 존재가 나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있다
“마틴씨.”
“아, 왔어요, 티엔?”
또 딱딱한 얼굴, 그리고 퉁명한 목소리가 내게로 찾아왔다. 밝게 받아주려 노력하는 내 말이 갈 곳을 잃을 지경이었다.
티엔에게 재단이나 능력자 사회, 그리고 영국생활에 대한 전반적인 것들을 알려주기. 그것이 바로 브루스씨가 내게 맡긴 과제였다. 얼마 전까지는 엘리어트와 늘 함께였으니-내가 능력을 조절할 수 있게 되고서는 그와 조금 거리를 두게 되었다–이 편이 적적하지 않고 좋지 않냐는 말씀과 함께.
지금은 그저 업무의 일환으로 여기고 있지만 처음은 꽤 힘들었다. 내가 그 애를 못미더워하듯 그 아이도 나를 곱게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마 내가 어떤 평가를 내렸는지 알고서 그러는 것 같은데, 공정한 의견에 대해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는 것부터가 어리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런 주제에 학생으로서는 모범적이기 그지없는 그 애의 모습이 내게는 오히려 껄끄럽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나도 언제나 모범적이고 훌륭한 선생이 되어야만 하니까.
“전에 어디까지 했었죠, 추천한 책은 다 읽어봤나요?”
“예. 저자의 다른 책들도 찾아봤습니다. 흥미롭더군요.”
“아하…… 멋지네요, 도움이 되었을 것 같고…….”
이런 식이었다. 가르치는 보람은 확실하지만, 일종의 선배인 내 입장에선 얕보이게 될까 싶은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굴욕적인 일이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로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이지만- 티엔에게는 나의 능력이 통하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매번 안개처럼 뿌연 느낌밖에 받을 수 없었다. 굳이 통제를 하려 들 생각은 없다. 그저 그 무뚝뚝한 얼굴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려 했을 뿐인데.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정말이지 답답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티엔은, 내가 능력을 썼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마 이 사실이 내가 그 애를 멀리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브루스씨에겐 말하지 않겠다고 본인이 선언하긴 했지만……
“대외적으로는 능력을 쓰지 않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만. 브루스씨가 아셔서 좋을 게 없을 겁니다.”
수 틀리면 다 불어버리겠다는 말이지, 저건. 그게 들킬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내 불찰이었다. 기라는 능력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이다.
그리고 또 불편한 점을 들자면- 함께 있는 시간이 꽤 되다 보니, 가끔은 티엔과 함께 재단 내외의 인사들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좋은 학생일지 몰라도 좋은 동행은 결코 아니다. 인사나 하는 말들을 보면 예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태도가 썩 좋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해하려 노력했다. 원래 성격도 그렇고, 나이도 어린 동양인이니 본인의 노력과 상관없이 업신여겨지기 일쑤일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대도 티엔의 시큰둥한 태도는 도저히 고쳐질 기미가 안 보였다. 특히 몇몇 사람들에겐 거의 퉁명스럽게 보일 지경이라,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의 관심을 돌리려 진땀을 빼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그런 태도는 편견을 조장할 뿐이라고, 사람을 상대하는 것도 일의 일환이라고 열심히 설득해보아도 결국엔 다시 뚱한 얼굴을 하고 있는 티엔은 내게 이해할 수 없는 범주였다.
오늘도 티엔은 화목한 분위기에서 혼자 찬물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것도 이사회의 임원까지 껴있는 자리에서. 재단이 그리 강압적인 분위기는 아니라지만 그런 식으로 구는 게 현명한 짓이라는 건 절대 아니다. 그것도 나를 보호자같은 입장으로 두고있을 때엔 더더욱.
이렇게까지 한다면, 정말로 결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과 헤어져 티엔과 단 둘이 되었을 때 이야기를 꺼냈다. 태도를 지적해봐야 여전히 듣는둥 마는둥 할 것은 뻔하고, 차라리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더 빠르고 간결할 것 같았다.
“티엔. 음, 그러니까. 제가 싫다거나 하는 건 아무래도 좋아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죠. 그래도 다른 분들에게까지 그랬다간 티엔군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도 있어요.”
“……왜 제가 마틴씨를 싫어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처음부터 당황스러운 반응이었다. 애초에 당연한 전제라고 생각한 지점에서 반문이라니. 왜냐고 한다면, 그게 다 보여서라고밖에는.
“어, 싫어한다기 보다는 불편해한다는 쪽이 맞을까요. 어느 쪽이든 제가 편하고 좋은 건 아니잖아요?”
티엔은 조금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하긴,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갑자기 속셈을 토해내라는 데엔 무리가 있을지도 몰랐다.
“저도 아직 미숙한 면이 많고, 잘해주지 못한 것도 많죠. 그 점에 대해선 미안하게 생각하고...... 제가 만족스럽지 못하면, 티엔군이 원하는 다른 후원자 분을 소개시켜드릴 수 있어요. 브루스씨께는 제가 잘 말씀드릴 테니까요.”
이쯤 말했으면 알아들었겠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드디어 해방될 거라 생각했다. 서로 불편한 와중에 이게 뭐하고 있던 짓인지. 다시 생각해도 어리석은 짓이었다.
“아뇨. 저는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뭐?
“……하하.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잠깐. 아니. 전혀 다행이 아니다. 혹시 내 생각을 알고서 일부러 저렇게 행동하는 건가. 정말 이대로가 좋다면 날 곤란하게 만들겠다는 뜻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제가 고쳤으면 좋겠다 하는 점은 있나요? 지금 이대로는 조금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음, 그렇게 생각했다면 미안해요. 저는 이렇게 누굴 지도하는…… 입장이 된 게 처음이고.”
지금까지 했던 말들이 전부 네가 불편해 죽겠다는 말이었는데 그러지 말아달라니. 그리고 이 애가 불편한 이유는 그 외에도 수십 가지였다.
“그리고 제가 전에 능력을 쓰려고 했었던 것도 마음에 걸려서요. 몇 번이나 실례를 한 건데 제대로 사과도 못했었네요.”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가지고 있는 능력을 쓰는 건 당연하고…… 결국 읽지도 못하셨죠.”
마지막 말이 얄밉긴 해도 의외의 말이었다. 당연히 앙심을 품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게다가 브루스씨나 다른 재단 사람들은 내 능력에 대해 부정적인 편이었으니 말이다.
“알았어요, 그럼, 음.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사실……. 티엔도 제가 고쳤으면 좋겠다는 것들을 몇 번이나 말해도 듣지 않았잖아요. 그건 제겐 많이 곤란해요. 방금도 전 굉장히 난처했다구요.”
“……제게도 다른 사람들에게처럼 웃어주십시오. 그러면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하?
“그…… 저는 지금도 웃고 있는데요?”
의외의 말의 연속이어서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다. 더 이상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 티엔의 앞에서 나는 스스로 내 웃음에 대해 고찰해야만 했다. 마틴 챌피는 잘 웃는 사람이고, 껄끄러운 이 흑발 소년 앞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만.
노력하겠다는 말은 전에도 들었지만 조건을 붙이고선 멋대로 무시하지는 않겠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티엔은 더 환한, 그러니까 ‘영업용’이거나 정말 즐거울 때 보이는 웃음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티엔을 대할 때 굳이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그건, 예의상의 문제라고 할까요…… 절대 호불호의 문제는 아니에요.”
"하지만 제게는 그런 표정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티엔은 정말로 내 표정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말을 꺼내기 어려웠던지 평소엔 곧잘 맞추던 눈도 시선을 피하고 있기까지 했고.
이건 절대 일부러 날 곤란하게 만들려는 사람의 언행이 아니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지금까지의 생각에서 티엔에 대한 전제를 수정해야 했다. 이 아이는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닐지도 몰랐다.
“알았어요, 앞으로는 노력할게요. 그러면 티엔군도 조금은 웃어주세요. 언제나 화난 것처럼 보인다고요. 다른 분들을 대할 때도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고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그리 미덥지 못했지만 조금 기쁜 듯 보이기도 했다.
마인드리더면서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다니. 편견에 묶여있는 건 내 쪽이었던 모양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런 태도에서 이런 결론이 나올 줄을 누가 알 수 있었을까. 그 무뚝뚝한 얼굴의 수줍음쟁이라니. 그런데다 티엔이 특히나 딱딱하게 굴던 때를 되새겨보니 그건 중요하거나 비교적 친한 사람들을 만났을 때와 일치했다. 그래서 더 거슬리게 느껴지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 날 이후로 티엔을 평범하게 대하기가 전보다 더 힘들어졌다. 하물며 살갑게 웃어달라니. 그나마 다행인 것은 원하는 대로 웃어주고 난 다음에는 그쪽에서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제대로 보지도 못할 거라면 무엇 하러 그런 요구를 했냐고 묻고 싶을 정도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보니 이제는 아직 어린 주제에 짐짓 어른스러운 척 구는 것은 퍽 귀엽게 느껴졌다. 어쩌면 실제로 어른스러운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 앞에서는 아니었다. 협동을 못하는 점은 여전하고, 남들을 대하는 것도 서툰 영락없는 어린애다.
물론 능력이 통하지 않는 데다 감정표현을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니 여전히 껄끄러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전에는 몰랐던 귀여운 구석을 발견하고나니 나도 모르게 웃어버릴 때가 있었다. 놀랍게도.
화나있을까. 과연 그는 무어라 할까. 천천히 다이얼을 돌리는 마틴의 마음은 불안과 기대가 반반으로 섞여 복잡하게 요동쳤다.
부상 중이지만 그도 연락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마틴은 티엔을 마주하기 전에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어쩌면 그는 마틴에게 화가 나있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기뻐해준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게 넘어갈만한 문제가 아닌 것은 마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조바심을 내며 귀를 기울이던 찰나 신호음이 끊기고 찰칵, 하는 금속음 같은 것이 울렸다. 마틴은 긴장에 털이 쭈뼛 서는 듯한 느낌마저 받고 말았다.
따지자면 이 모든 일에 마틴의 잘못은 없었다. 오히려 걱정이나 안도의 말을 듣는다면 모를까. 혹시나 화를 내더라도 마틴에게는 할 수 있는 말이 많았다.
그렇게 마틴이 짧은 시간 동안 온갖 고심을 거치고 있었을 때, 그 짧고도 긴 정적 사이에선 간단한 인사치레조차 들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좋은 징조는 아닐 것 같았다.
“여보세요……? 티엔? 저예요, 마틴.”
턱. 수화기 너머에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저편에 사람이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어- 미안해요, 많이 놀랐을 텐데…… 그러니까…… 전 무사하고……? 여보세요? 티엔……? 거기 있어요?”
어떤 목소리로 사과나 해명을 전해야 할지 진땀을 빼고 있었을 즈음, 몇 번의 잡음이 들려왔다. 그리고선 통화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끊어져 버렸다. 마지막으로 전해져 온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만이 귀에 선명했다.
“-여보세요?”
마틴이 멍하니 반복한 말은 저편으로 전해지지 못했다. 정말로 화가 났나.
“티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붙들고 서둘러 향한 티엔의 거처는 조용했다. 통화를 한지 30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발을 들인 곳에 인기척이라곤 없었던 것이다. 부상을 입고도 일하려는 사람을 반 억지로 집에 돌려보냈다고 들었기에 마틴의 당황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망연자실하게 집안을 둘러보던 마틴은 닫혀있는 서재 문틈으로 약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밖이 아직 어두워지지 않아 현관에서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그 안에서 열쇠로 문을 여는 소리나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을 리는 없었다.
작게 노크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마틴은 작게 심호흡을 했고, 서재의 방문을 열었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 진짜로. 그렇게 되뇌며 마틴은 평정을 가지려 노력했다.
티엔은 책상 앞에 앉아 이마를 짚고 있었다. 문을 등지고 있어 언뜻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했다.
“티엔? 놀랐잖아요, 다쳤다는 사람이 그새 어딜 갔나 하고……”
거기까지 말하고 마틴은 입을 다물었다. 살해당했다고 알려져 놓고는 두 발로 말짱히 돌아다니고 있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혹시 화났어요?”
티엔은 여전히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다거나 아니라는 반응조차 없다. 오직 그에게만 통하지 않는 마인드리딩의 능력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마틴이 슬슬 이쪽에서 화를 내도 좋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었을 즈음, 뒤돌아 앉은 이에게서 한숨 비슷한 것이 들려왔다. 일주일 전 헤어졌을 때 이후로 처음 듣는 티엔의 음성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평소에 듣던 것과는 조금 다른 음색을 띄고 있었다. 조금 더 낮고, 잠겨 든 목 울림.
혹시,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을 보이지 않고, 목소리조차 아끼는 이유는 어쩌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마틴을 굳이 확인사살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 미안해요, 정말 어쩔 수 없었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알리고 싶었는데……”
“처음부터 이런 게 아닐까 생각했었다.”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평소보다 가라앉아있는 목소리. 그것이 평상시와 다른 언어를 쓰고 있기 때문인지, 마틴이 짐작하는 다른 이유가 맞기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위화감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나의 나약함일 뿐이고, 헛된 희망을 가지고선 제대로 슬퍼하지조차 못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함께였다.
…….
사실을 전해 듣고, 목소리를 듣고 나자 그제서야. 그제서야 잃는다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영영 그런 식으로 안도하지 못할 수도 있었지.”
금발의 영국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길게 풀어내고선 티엔은 다시 침묵했다.
“저기…… 괜찮아요?”
“그걸로 끝이었다면 나는 한 번의 울음조차 주지 못했을 거다.”
마틴은 낮게 깔린 목소리에서 자신에 대한 화는 느끼지 못했다. 단지 그가 무언가를 분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어느 쪽이든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그 원인이 어찌되었건 자신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티엔? 계속 그러면 제가 어쩔 줄을 모르겠다고요, 네?”
“책망하는 게 아니다.”
“어…… 다행이네요. 그렇대도 들어줄 수는 있지만요.”
드디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튀어나왔다. 낮은 목소리는 그대로였지만 그의 어조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마틴은 가만히 티엔에게로 다가갔고, 그는 여전히 마틴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것도 맞다만……. ……돌아와주어서 고맙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라고 약속할게요.”
마틴은 티엔의 목을 가볍게 껴안고 그의 어깨를 도닥였고, 감은 팔을 통해 느껴지는 그의 깊은 숨은 마틴의 마음도 함께 편안케 만들었다. 괜찮아요, 저는 이렇게 무사하잖아요. 그렇게 놀랐을 줄은, 음, 사실 좀 기대하기도 했지만요. 미안해요.
“나중에 무슨 말을 했는지 알려줘요.”
“싫다.”
“……다친 곳은 괜찮아요?”
“대단치 않은 부상이다. 다른 이들의 호들갑이 좀 있었을 뿐이지.”
“당신도 걱정 끼치지 말아요.”
“노력하지.”
여전히 얼굴을 마주보지 않고 이어지는 대화는 뒤늦은 재회의 감격과 걱정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의 것이었을 수도 있었던 미래에 비하면 그것은 실로, 평화롭고도 안락한 끝맺음이었다.
아해야, 그 솜털 같은 것이 무에가 그리 좋더냐? 그것은 네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니. 하기는, 네 아비도 꼭 같았지. 고 계집아이 명줄을 뻔히 알고도 좋다 하지 않던? 재미있구나. 어디 네 원대로 해보아라.
양 손목과 발목이 묶여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게다가 굳게 싸맨 눈 너머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물려진 재갈 밖으로는 작은 소리도 내뱉기 힘겨웠다. 자신이 이런 실수를 하다니. 능력을 사용하면 어떻게든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누가, 어째서 이런 짓을 했는지는 정확히 집히는 구석이 없었다.
마틴의 기억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려 했던 것으로 끊겨있었다. 그 직전에 굉장히 묘한, 기분 나쁜 감각을 느낀 참이었지만 미처 그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 목소리는- 마틴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상황에선 최악과 최선을 모두 생각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어째서?
잠시간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가라앉힌 마틴은 능력으로 주변을 탐색했다. 주위는 조용했고, 사람의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적어도 능력을 쓰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일순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감각. 그의 능력에 가장 처음 감지된 것은 쓰러지기 직전의 그 느낌이었다. 전에는 귀에 들려오는 소리로 착각했지만 오직 마틴에게만 들릴 그것들은 어지럽게 웅성거리는, 속삭이는, 그리고 소름 끼치게 그르렁거리는 짐승의 기척이었다.
“깼어?”
웅성거림의 정체를 파악하려 애쓰던 사이, 혹시나 하던 생각이 어떤 목소리와 함께 현실로 다가왔다. 대체 어째서. 할 수만 있다면 입술을 깨물고 싶었지만 몸의 부자유는 마틴의 그런 행동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답답해? 나도 이렇게 하고 싶진 않았는데- 아, 아닌가? 이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키득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가까워졌고, 마틴은 처음보다 짙어진 공포를 맛보아야 했다.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 시끄러운 소리들로 상대의 마음은 제대로 읽히지 않았고, 그를 조종해보려는 시도 역시 수포로 돌아갔다. 소리가 바로 앞에서 멈춰 섰을 때, 마틴은 숨소리조차 죽이고 상대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건 풀어줄게. 그런데 말이야. 형이 큰 소리라도 냈다간 말이야, 내 기분이 나빠져서 형을 아프게 할지도 몰라. 그렇게 되는 건 마틴 형도 싫지?”
귓가에 들려오는 하랑의 목소리에서 웃음기 같은 것은 사라져 있었다.
“그러니까 조용히 있어줄 거지? 응?”
다음 순간, 그 말을 그대로 현실에 구현한 듯한 서늘한 기운이 타고 올라와 마틴의 가슴팍을, 그리고 목을 조여 들었다. 마틴이 아는 하랑은 결코 그에게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별개로 선택의 여지는 보이지 않았고, 마틴은 하랑의 말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먼저 재갈이 느슨해지고 마틴의 입 안에서 흠뻑 젖은 천조각이 끄집어내졌다.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모를 이물감이 사라지자 도리어 낯선 공허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콜록, 대체 무슨-”
나직이 꺼냈던 말은 갑작스럽게 덮쳐온 따듯하고 축축한 감각에 막혀버리고 말았다. 당황과 충격 속에 마틴은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었지만 어깨를 아프게 붙잡는 손과 지금까지의 언행을 생각하면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마지못해 벌린 입 안으로 침입해온 혀는 탐색하듯 구석구석을 훑었고 겹친 입술은 퍽 부드럽게 상대를 애무한다. 결박된 팔목과 등이 딱딱한 시멘트바닥에 짓눌리는 것이 정말이지 끔찍하게 괴로웠음을 제외하면 얼핏 연인 사이의 입맞춤이라도 되는 모양새였다.
고통과 혼란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던 시간이 지나고 끈적하게 변한 두 입술이 드디어 떨어졌다.
“생각보다는 별 거 없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하랑은 못내 아쉬운 듯 마틴의 입가를 핥았고, 상체를 내리누르고 있던 양 손이 비켜나자 마틴은 그제야 몸을 비틀고 제대로 숨을 몰아 쉴 수 있었다.
“그만, 그만…… 하랑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절 풀어주고서 해요, 다 들어줄 수 있으니까, 네……?”
“아. 형은 그런 걸 좋아하지, 말로 누굴 가지고 노는 거. 재미있었어? 그렇게 다 알면서 웃는 건?”
“……무슨 말이에요?”
곧 마틴의 시야를 막고 있던 것이 풀리고, 어두운 공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붉은 안광이었다. 마틴은 그 섬뜩한 시선에서 눈을 뗄 수 없었고, 밝은 머리칼과 한 쌍의 붉은 눈을 한 그 존재는 더 이상 마틴이 알고 있던 하랑의 모습이 아니었다.
“짜증나. 짜증나. 미치도록.”
한 마디 한 마디가 끝날 때마다, 단호한 손끝이 마틴의 셔츠단추를 하나씩 뜯어내고 있었다.
“얘기라면 질리도록 했잖아. 형은 그때마다 무슨 소리를 했는지 기억이나 하고 있어? 나는 다 기억해. 그때마다 내 속이 얼마나 뒤집어졌는지……”
그렇게 말하며 하랑은 마틴의 복부를 가만히 더듬었고, 그 중 가장 부드럽고 약한 부분을 찾아내 사정없이 찍어 눌렀다.
“아윽……!”
“나는 형처럼 잘난 능력도 없는데 어쩌지. 나도 이 손으로 속을 헤집어버리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마틴은 난폭한 손길을 피해 몸을 뒤틀었으나 또다시 휘감겨오는, 그리고 이번에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푸른 뱀의 형상에 붙잡혀 그렇게 할 수조차 없었다.
“차라리 도망치지 못하게 발을 잘라버릴까? 그 다음엔 뭐라도 생각나겠지.”
“……원하는 게, 뭐예요?”
이를 악물어가며 묻는 말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랑은 마틴에게 말을 걸기보다는 그저 그의 고통을 즐기며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래도 형이 좋을 거고, 형도 나를 좋다고 해줄 거잖아. 또 웃으면서 저도 하랑군이 좋아요, 같은 말이나 할 거잖아, 아니야?”
비꼬는 말과 함께 하랑은 손에서 힘을 풀었고, 마치 새 장난감을 찾으려는 듯 다른 곳을 향해 움직였다.
“윽……. 그래서 화난 건가요? 그래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다 알고 있었으면서.”
이제 마틴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훑고 있던 하랑은 감정의 기복과 함께 손등의 얇은 살갗 안으로 손톱을 박아 넣었다. 마틴은 이번에는 소리를 참아냈지만 눈가가 젖어 드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고, 뜨거운 액체가 그의 뺨과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 게, 아니었어요, 전- 제가 어떻게 하면 믿어줄래요? 하랑군, 제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거예요, 네?”
“다 필요 없어. 이 지긋지긋한 곳도 떠날 거고. 이상하게 기분이 정말 좋아졌는데, 형만 생각하면 불쾌해. 짜증이 나.”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하랑은 가볍게 마틴의 몸을 뒤집곤 그의 머리를 바닥에 짓눌러버렸다.
“형은 말이지, 발정한 암캐 같아. 그렇게 실실 웃으면서 사람 몸을 달게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야지.”
며칠 전 집을 나설 때에, 마틴은 뺨에 닿는 공기가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날보다 싸늘해진 바람은 추위에 붉어진 살갗을 매섭게 스치고, 바람에 실린 습기는 껴입은 옷 사이를 파고들어 몸을 떨리게 한다. 이른 아침 그와 첫 인사를 나눈 것은 본격적인 겨울의 날씨였다.
안녕,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마틴이 미소와 함께 건넨 인사는 작은 입김과 함께 추위 속으로 흩어졌다.
겨울은 싫지 않다. 무채색에 가까워지는 조용한 풍경과 서늘함은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한창 업무를 보던 도중 문득 창 밖을 내다본 마틴은 익숙한 풍경 속에 흰 얼룩이 섞여 든 것을 발견했다. 아직은 너무 적어 쌓이지 못할 작은 것들은 바람에 맥없이 흔들리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들은 예쁘다거나 정취 있다 표현하기엔 어딘가 모자랐지만,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 그 볼품없는 눈송이들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첫눈이네요.”
첫눈. 혀끝을 굴러가는 즐거운 어감이었다. 마틴은 자리에서 일어나 따듯한 코코아를 타왔고, 다시 일에 집중하는 한편 달콤한 것을 한 모금 들이킬 때마다 창 밖으로 눈길을 향했다. 끊길 듯 끊기지 않는 약한 눈발은 위태로운 느낌마저 들지만, 단지 이 겨울의 첫 번째라는 것만으로 마틴의 마음을 조금 들뜨게 만들었다.
잠깐 눈을 구경하려 바깥으로 나왔을 때, 뜻밖에도 마틴은 그곳에서 잘 아는 누군가와 마주치게 되었다. 이런 날씨에도 얇은 차림으로 길게 입김을 뿜어내고 있는 그는, 가만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티엔.”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는 동양인은 전혀 추운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외투까지 껴입고 있으면서 추위에 몸서리치는 마틴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뭐하고 있어요?”
“아무것도.”
“별 일이네요.”
티엔의 간단한 대답에 마틴은 작게 웃었다. 일정으로 빽빽하기만 할 것 같은 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보는 사람이 추운데 옷은 제대로 입죠?”
이런 지적에 티엔은 그저 어깨를 으쓱했고, 밖에 오래 있지 말라는 말과 함께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그는 자신보다는 마틴이 더 추위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눈으로 티엔을 배웅한 후 마틴은 그가 바라보고 있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밝고 어둡게 불규칙한 무늬를 이룬 구름 사이로 떨어지는 눈송이는 창문 너머로 보던 것보다는 조금 더 모양새가 좋다.
티엔은 이 풍경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여전히 알기 힘든 사람이다.
그 뒤로 일에 이리저리 치이다 보니 어느새 날은 어두워져 있었고, 눈은 가로등의 불빛이 비추는 곳에서야 간신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귀가 길은 평소보다 더 추웠지만 두 사람이 함께 걷고 있노라면 착각으로나마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다.
“첫눈이 내린 기념으로 오늘 저녁은 고기 요리가 어때요?”
“별 걸 다 기념하는군.”
“어때요. 좋은 일은 많을수록 좋죠.”
잔뜩 얼어서도 미소 짓는 얼굴은 벌써부터 즐거운 저녁식사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 그리고 요크셔 푸딩도요. 오늘이 일요일은 아니지만.
“그러고 보니 말인데요. 낮에는 뭘 보고 있던 거예요? 설마 눈 구경?”
갑작스러운 질문에 티엔은 잠깐의 생각을 거친 후에야 낮에 마틴을 마주쳤던 일을 생각해냈다. 그때 대답했던 대로, 그는 별로 특별한 일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 눈이 얼마나 내릴지를 보고 있었다.”
아. 역시나. 마틴은 잠깐 동안 혼자 상상해보았던 티엔의 속마음을 머리 속에서 지워버렸다.
“역시 당신은 낭만이란 게 없어요.”
마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티엔은 또 그런 말이냐며 연인의 말을 가볍게 흘려 듣는다. 또 다른 대화와 가벼운 웃음 소리, 서로에게 맞추는 발걸음.
그들의 어깨 위로 눈이 내려앉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들이 함께하게 된 이유는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그들이 마주한 것은 억지로라도 누군가와 기대어있어야만 할 만큼 지독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쓰러졌고, 많은 이들의 눈물이 말라붙었다. 지독한, 정말이지 끔찍한 추위와도 같았다.
본격적인 한기가 다가오기 전, 누군가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 잘 끝날 거야. 모두 원래대로 돌아올 테고, 그 뒤에는 다같이 축배를 들자고. 하지만 이제 그의 말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누군가가 그리는 미래의 풍경도, 그가 아직 살아 숨쉬고 있다면, 그저 살아남는다는 막연한 이미지밖에 남지 않았으리라.
·不眠
“마틴.”
꼼짝도 않고 한참을 엎드려 있던 이를 부르자 그는 작은 손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힘없이 들어올린 손은 이내 다시 책상 위로 떨어져 내리고, 그렇게 금발 청년은 자신이 깨어있음을 알렸을 뿐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 같은 것은 없어 보였다.
“차라리 제대로 누워서 잠이라도 자고 와라.”
“……요즘 못 자는 것 알잖아요.”
티엔의 잔소리에 겨우 몸을 일으킨 마틴은 눈을 가린 채 짜증스러운 어조로 답했다. 최근 들어 부쩍, 그는 피곤하다거나 눈이 아프다는 호소를 하곤 했다.
“그렇게 있으면 나아지긴 하는 건가.”
“다소는요……. 머리 울리니까 나중에 말해요.”
양측이 입을 다물고서도 마틴은 한동안 그 자세 그대로 굳어있었다. 다시 엎드릴 기운조차 없는지, 정신을 차려보려 나름대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티엔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는 잠시간 그 모습을 지켜보다, 마틴이 조용히 쉴 수 있도록 방을 소리 없이 빠져 나왔다.
티엔은 마틴이 저런 상태로 잠들었다가 무언가에 놀라며 깨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제대로 된 잠자리에 들었다간 제때 깨어나지 못해 괴로워한다는 사실도. 하지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는 것은 그것대로 마음이 좋지 않아서,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본인의 입으로 확인 받고서야 뒤돌아 설 수 있었다.
·惡夢
마틴에게 불면증이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티엔은 그를 괴롭히는 악몽이 어떤 것인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당신의 악몽과 비슷한 종류예요.”
그러니 당신은 깊이 알 필요가 없어요. 마틴은 그런 뜻을 전했다.
꿈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티엔이 굳이 타인에게 밝힌 적이 있는 악몽이란, 그 자신의 능력이 스스로를 파멸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사자가 아니라면 온전히 체감할 수 없는 공포와 무력감. 그것은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고 나아지는 종류의 것이 아님을 티엔은 잘 알고 있었다.
티엔과 다른 점이 있다면 마틴은 능력 자체가 아니라 환경에 의해 악몽을 강요 받고 있다. 현실이라는 악몽이 끝나지 않는 한 꿈은 오래도록 그를 괴롭힐 것이다.
·依支
새롭게 폭주한, 그리고 오늘 그들이 제압해야 할 능력자의 명단을 확인하던 마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마틴은 이제 아는 이름을 보는 것에 이골이 나있었고, 이번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것은 안타까움 같은 감정이 아니라 좀 더 현실적인 문제였다.
“이번엔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네요. ”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제가 개죽음 당하지 않게 하려고요?”
티엔의 마음에 들지는 않는 표현이었지만, 내용 면에서 틀린 점은 없다. 마틴의 능력은 이성을 잃은 자들을 상대로 효율이 현저히 떨어져 혼자서는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눈앞의 일에 집중해라, 마틴.”
“네, 네. 저도 죽고 싶다는 말은 아니에요. 무사히 일이 끝나면 다시 보죠.”
둘은 조금 떨어져있는 각자의 위치로 향했고, 마틴은 고맙다는 말이 불길하게 느껴져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한 채 티엔과 헤어졌다. 그런 이야기는 돌아와서 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만일 정말로 끝을 마주하게 된다면, 남은 후회 때문에라도 마지막에 그를 떠올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정작 그는 아무 것도 모를지라도. 그건 그리 나쁜 끝은 아닐 것이다.
·貪慾
“제 사인(死因) 말인데요.”
지친 몸으로 옷을 추스르던 마틴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던졌다.
“어쩌면 당신에 의한 게 더 빠르지 않을까요?”
“먼저 시작한 쪽에서 할 말인가?”
그들의 첫 육체관계는 마틴의 짜증이 극에 달해 있을 때의 충동으로 일어났다. 그때 마틴은 한참이나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고, 그 일을 떠올릴 때면 마틴은 당시에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었음을 확신했다.
익숙하지 않은 행위에는 몇 번의 불협화음과 불쾌한 감각이 함께 했다. 그러나 절정에 달해서는 그런 것들을 전부 잊어버렸고, 그날 밤 마틴은 간만에 꿈이 없는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썩 나쁘지 않았다. 아마 티엔도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았다. 암묵적인 동의로 둘은 그 이후로도 관계를 지속했고, 그것은 대개 마틴이 그날과 같이 불면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에 일어났다.
이번에 마틴은 그렇게 피곤한 상태는 아니었다. 티엔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마틴의 요구를 거부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더 거친 행위로 상대의 진을 완전히 빼버렸다. 그리고 그런 불친절함에 투덜거리면서도 마틴은 결국 그의 곁에서 까무룩 잠들고 말았다.
지금까지도 마틴은 그가 처음에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당혹스러운 제안을 받아들였는지 알지 못했다. 몸을 섞으면서도 둘은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오히려 서로를 필요 이상으로 알게 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基底
“당신이 왜 하랑을 떼어놓고 저와 같이 있는지 알아요. 제가 당신을 선택한 것과 비슷한 이유죠.”
누가 언제 어떻게 누구를 해치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만일 마틴의 차례가 온다면 티엔은 그의 위험한 능력을 견뎌낼 수 있는 몇 안 될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반대는 아니다. 티엔은 그가 어릴 적 꾸었던 꿈을 묘사하며 능력이 통제를 벗어난다면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 말했지만, 그건 근처에 있을 누군가가 안전할 것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그게 섭섭하다는 말은 아니에요. 저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면 그런 식으로 저울질을 해야 했을 테니까. 제가 궁금한 건……”
마틴은 잠깐 말을 멈추고 티엔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그는 지쳐 보였고, 마틴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일에 끝이라는 게 있다면, 우리가 모두 살아남고 자유로워진다면. 그때 우리는 서로에게 의미가 있나요?”
·分岐
긴 침묵이 있었다. 티엔은 눈을 감았고, 마틴은 멍하니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밤 9시, 아마도 28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