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키워드 연성 x 15
간만에 트위터에서 했던 키워드 연성 정리.
[티엔마틴]
·모닥불
그와 나 사이에는 타오르는 모닥불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현실의 무게에 짓눌린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파묻었고, 진한 어둠에 싸여 나는 위태로운 안정을 되찾았다. 절 버려요. 내 이성과 관련이 없는 어느 부분이 속삭였다.
그게 훨씬 나은 선택이에요. 그는 깊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깊은 절망에 휩싸였다. 그의 선택은 정해져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티엔은 단지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도 똑같이 그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는 현명하지 못하시네요. 내 비꼬는 말투에도 관계없이 그는 그저 남아있던 장작을 불 안으로 던져넣었다. 내가 그에 대한 생각을 바꾼 건 아마 그쯤이었을 것이다.
·취중진담
사랑한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아요?
대답은 아주 오랫동안 없었다. 그의 발언이 그 정도의 감정이라 확신해버릴 무렵, 대답은 드디어 돌아왔다.
당신을 생각하고,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을 정도로. 그 정도로는 모자란가?
나는 잠깐동안 생각했다. 그러나 내 안에서 고민은 길지 못했다.
충분할 것 같네요.
이 다음에는 뭐가 있지? 나는 많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내 자신에게 닥쳐올 날을 상상한 적은 없었다.
·늦은 밤의 커피
그는 많은 걸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그것들은 그를 불편하게 만들 수 없었다. 적어도 그가 그와는 전혀 다른 누군가와 인연이란 걸 맺기 전까지는.
그 향만이라면 티엔도 그리 나쁘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다.
식물에서 난 것 특유의 고소함이며 꽃송이와는 다른 그 어떤 내음이라거나. 다만 언젠가 그 진한 음료의 맛을 보았을 때 그게 어떤 식으로 정신을 맑게 하는지를 알고서는 어느 정도의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견딜 수 있는 피로라면 인위적인 힘을 빌리지 않아도 좋을 테고 견딜 수 없는 피로라면 억지로 버티지 않는 편이 나을 터인데.
간만에 보내는 둘만의 시간에서 그가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겨우 그 요망한 음료 탓이다. 물론 보란 듯이 커피향을 음미하는 마틴 본인도 이유라면 이유 중 하나일 게 틀림없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아니."
"네…… 그럼 뭐."
슬슬 그런 그를 모른 척 하기도 어려워지지만, 마틴은 자신의 입맛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좀처럼 볼 수 없는-뭔가가 신경 쓰이면서도 그걸 인정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이 사람의 모습을 보는 건 꽤 나쁘지 않은 구경이었으니까. 게다가 잠이 오지 않는 다는 건, 글쎄,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터였다.
·잉크
울컥 터져 나온 잉크가 종이를 적시고, 멍하니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청년의 손가락 마디도 함께 물들어갔다. 아아, 드디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중요한 문서가 아니라 다행인걸.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서 불의의 사고에 의한 흔적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누군가에게 선물로 받았던 물건을 버리기 아까워한 대가가 이런 것이다.
얼마 쓰지 않은 메모는 새것을 꺼내면 되지만 손가락 마디에 남은 얼룩은 완전히 지워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마틴은 찌푸린 얼굴로 그 검은 자국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이 이상 그 사람의 생각을 하는 건 정말로 이상해진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이런 핑계가 생겨 다행인 게 아닐까, 라고.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괴롭힘에 마틴은 긴 신음을 흘렸다.
·오후 카페에서의 티타임
신경이 다른 곳에 쏠려있다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더 정확히는, 그래,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없으리라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런 사실을 지적하지 않은 이유는.
"오늘은 날씨가 참 좋네요."
"그런가."
하루 종일 질척거리는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무심함에는 익숙해진지 오래지만 일말의 부정도 없는 그에게는 헛웃음이 날 수 밖에 없었다.
"네. 당신만큼이나 좋은 날씨죠…… 조금만 더 여유를 가져보는 게 어때요?"
그제야 의문의 표정을 보이는 그에게 비스킷 한 조각을 건넸다. 가끔은 이런 시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피자
그런 게 있고, 맛있다더라. 어깨 너머로 주워들은 정보를 가지고서 제안한 저녁은 뜻밖의 호응을 받았다.
당신이 그런 걸 다 알고 의외네요.
그 말에는 여러 함의가 담겨있었다. 비록 티엔 본인은 그 뜻을 알아채지 못했지만.
이런 걸 좋아했어요?
그의 물음에 티엔은 제대로 된 대답을 주지 못했다. 별 뜻 없는 행동이나 결정에서도 그는 의미를 찾곤 했고, 그런 태도는 곧 티엔의 고심을 낳았다. 자신의 기호가 무엇인지. 또 지금 자신이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주제에 그는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다. 특히나 미식에 관한 것들.
큰 의미가 없어야 했을 말들에 놀라움을 보이는 마틴 챌피의 모습이 즐겁게 느껴졌다. 단지 그뿐이었다.
[벨져릭]
·흡연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런 생각이 잘못된 거라고, 빠르게 마음을 추스렸지만 내가 가진 위화감은 가시지 않았다. 우리는 오래도록 고요함을, 그리고 어색함을 즐겼다.
내 뜻을 다르게 해석한 그는 한 개피의 담배를 건넸다. 거절한다면 이 침묵을 긍정하고, 받아들인다면 나에 대한 그의 해석을 바꾼다. 어느 쪽도 달갑지 않은 채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옅은 연기는 썩 나쁘지 않은 맛으로 피어올랐다.
·향수
─그에게선 어렴풋이 값싼 향수의 냄새가 났다.
사실 저가품이란 것들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는 벨져가 그렇게 확신한 데에는 그게 맡아본 적 없는 향이라든가, 상대가 '일반적인' 향수와는 어울리지 않는 인상이었다는 이유가 있다.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향이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런 걸 신경 쓸 만큼의 관심이 없었고, 그 다음은 서서히 익숙해져 그게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말았다. 벨져가 향의 존재를 다시 깨닫게 된 것은 오랜 시간 모습을 감췄던 릭이 태연한 얼굴로 나타났던 날. 이번에 벨져는 그 익숙함에 안도를 느끼곤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감정에 놀라워했다.
"너, 무슨 향수를 쓰지?"
다시 또 언젠가, 긴 시간이 흐른 후에. 지나가듯 던진 물음에 릭은 어디둥절한 표정을 보였다.
"향수? 별다른 건 쓰지 않는데……. 아, 혹시 장미향을 말하는 건가? 그거라면 오늘 아침에 들렸던 로마에서 말이오, ……"
전혀 상관 없을 이야기를 즐거이 꺼내는 릭을 내버려둔 채 벨져는 홀로 생각에 잠겼다.
아아, 그런 건가.
그는 이내 무언가를 깨달았다.
[하랑마틴]
·첫사랑
하랑은 어렴풋이 제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래의 사내아이들이 으레 가지는 호기심이나 더 진중하게는 연심이란 것들을 좀처럼 상상할 수 없었던 탓인데, 그리도 곱다는 조씨네 둘째 딸을 보고서도 이렇다 싶게 마음이 동한 적이 없었다. 그러면 또 어떠하랴 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뿐이었지마는, 글쎄, 그게 이런 식으로 돌아와 자신을 농락할 줄 아이는 꿈에도 모르는 채였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뭔가가 범상치 않았다. 고향에서도, 바다 건너 낯선 여자들을 잔뜩 보았을 때도 몰랐던 '어여쁘다'는 감상이 무엇인지를 그 청년을 만나고서 알았으니까.
"왜 그래요, 하랑?"
"그냥."
한참 남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사람의 대답 치곤 싱겁기 그지없다.
"형은 뭘 먹고 그리 잘생겼어?"
"뭐예요, 저한테 잘못한 거라도 있어요?"
고운 눈을 휘며 웃음을 터트리는 그를 하랑은 차마 똑바로 마주볼 수 없었다.
아이씨. 나보고 어쩌라고.
그 첫사랑은 유달리 씁쓸하고 달콤한 맛이 났다.
·서랍
그럴 의도는 없었다. 단지, 정말로 우연히 들여다보게 되었을 뿐. 하지만 세상에 호기심을 막을 수 있는 게 어디 있으랴. 그것도 17살 사내아이가 사모하는 사람에게 품은 감정이라면야. 그리고 따지자면 괜히 호기심을 부채질한 쪽에도 잘못이 없지 않았다.
운 좋게도 그 친절한 형의 집까지 초대되었던 그날, 지겹게 따라붙는 일거리와 방문자를 현관에서 맞이하던 마틴은 하랑에게 뭔가를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했다. 어디어디에 있는 서랍의 몇 번째 칸. 한시라도 빨리 방문객을 쳐내길 바라마지 않던 하랑이다. 그래서 흔쾌히 달려간 곳의 서랍장 안에는- 있어야 할 물건 대신 얇은 종이봉투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하랑."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소년은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것만 같았다.
"미안해요, 장소를 잘못 알려줬네요. 서류는 제가 찾을 테니 먼저 가서 앉아있어요."
"어- 응."
마틴은 웃는 낯으로 다가와 반쯤 열렸던 서랍을 다시 밀어 넣었다. 그 안에 든 것은 분명 수많은 편지들. 빛바랜 것부터 아직 새하얀 것까지, 크기가 유난히 크거나 작은 것들도 섞여있었다.
처음에는 '무엇?'으로 시작된 의문은 곧 '누구?'라는 의혹으로 번져갔다. 그렇게 많은 편지를 버리지도 않고 보관하고 있다면, 가족, 친구, 혹은… 그런 생각을 떠올린 순간 하랑의 머리에는 위기감이 스쳐지나갔다. 지금껏 참을 수 있던 건 그 형의 곁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만일 그게 아니라면.
한 번 떠오른 조바심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결국 소년은 얼토당토않은 계획을 짜내기에 이르렀다.
[릭마틴]
·도넛과 스콘
그의 입가에 웃음이 퍼진다. 그 이유라고 한다면 마틴이 차에 곁들여 내놓은 버터밀크스콘으로,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면 그가 아직 다과를 입에 들이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다른 걸 꺼낼까요? 전에 릭씨가 가져온 도넛이 아직-"
"아니, 아니오. 잠시 다른 생각이 나서."
웃으며 스콘을 내려다보고만 있던 릭은 그제야 삼각의 작은 덩어리를 베어물었다. 입 안에서 부스러지는 영국 특유의 달지 않은 맛. 릭은 바로 그 맛을 상상하며 웃고 있었다.
아, 역시 영국인답구나, 하지만 블론디 본인은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한데. 마치 잼을 가득 채워 넣고 슈가파우더를 뿌린 도넛처럼. 그래, 결국은 마틴에 관한 생각이었다.
예의상이나마 그의 생각을 물어야 했을 마틴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한 채 릭에게 마주 웃음 지었다. 사랑스럽다거나 달콤한 건 오히려 그쪽이라는 반박도 속에 남겨둔 채로.
[루드릭]
·연락두절
죽었을까?
가장 먼저 그의 뇌리를 스친 발상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생사의 벽을 여러 번 넘어온 그에겐 더할 나위 없도록 타당한 추측이었다. 어디선가, 연락을 취할 도리도 없이 급사해 이대로 영영 다시 얼굴을 마주할 수 없을 거라고.
빛만큼이나 빠른 그도 멀리 떨어져있는 타키온의 생사를 확인할 도리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릭이 죽었다는 가정 하에 행동하기로 했다. 그의 생각이 틀렸다면 더할 나위 없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라면, 그를 해한 모든 것을 흔적도 없게 만들겠노라고.
[벨져데샹]
·짐
오만은 그로 하여금 주변의 모든 것을 짐이라 생각하게 했다. 약하고, 미숙하고, 그의 발목을 잡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지켜야 할 것들. 그리고 간혹 그 중에는 특별히 더 신경 써야만 하는 존재가 있었다. 예를 들어, 팀원의 생존에 벨져 자신만큼이나 중요한 치유능력자라든가. 바로 이날 그와 전투를 함께할 까미유 데샹도 그런 부류 중 하나였다.
그를 만나기 전 벨져는 벌레 능력이라는 설명에 약간 눈살을 찌푸린 적이 있다. 벌레와 치유라, 가히 품위 있다 생각하기엔 어려운 조합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그런 막연한 인상은 그 능력을 직접 목격한 이후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눈이 시리도록 공간을 메워가는 빛의 알갱이들과, 그 앞에서 당당히 웃음 짓는 새하얀 남자의 모습.
"적들은 널 먼저 노린다. 절대 앞으로 나서지 말도록."
"물론 잘 알고 있지. 그래도 홀든가의 도련님께서 지켜주신다면 무서울 게 없겠어."
전투가 시작되기 전. 비아냥거림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에 벨져는 대꾸하지 않았다.
전략적인 특수성, 단지 그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벨져는 전장으로 발을 내딛었다. 또 다른 승리를 거머쥘 시간이었다.
[멜빈릭시]
·발렌타인
멜빈은 제피L의 카메라가 생중계하는 문 밖의 풍경을 믿을 수 없었다. 실물을 보았던 적은 단 한 번. 그러나 바로 전날에도 그는 ‘저것’에 관한 고민으로 밤을 지새운 참이었다. 눈부신 은발. 붉고 푸른 눈동자. 그리고 사람을 닮았지만 결국 숨길 수 없는 무기질의 분위기.
공학도의 높은 지능도 이런 상황의 대처에는 그리 알맞지 않았다. 상대가 리첼이라면 귀찮아하며 문을 열었을 테고, 이것저것 캐내려 드는 기자라면 집에 없는 척 무시했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가 자신과 할아버지에 의해 만들어진 살인로봇이라면?
그러나 무엇보다도, 왜 저 로봇은 방문자라도 되는 것처럼 문 앞에 서있는 거지?
“집주인은 부재중입니다. 용건을 말씀해주세요!”
“멜빈 리히터와의 대화를 요청합니다.”
기계음이 섞인 대화는 어딘가 어긋나있다.
송신 받은 영상에 의하면 트릭시의 눈- 그러니까 옵틱이 제피가 아닌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보여지는 환경으로 그 각도를 유추해보면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문과 벽을 넘어 멜빈이 있는 장소가 틀림 없다. 설계와 관련된 것 외에는 깊은 생각을 하기를 거부하는 그조차 등줄기에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청년은 그리 침착하지 않은 상태로 보수 중이던 제피R의 전원을 켰다. 다행히도 즉시 작동하기에 문제 없는 가벼운 점검일 뿐이었지만, 상대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이상 어느 정도의 준비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는지는 천재인 그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 정도의 거리를 허용한 이상 도주의 가능성은 불분명했다.
“환영합니다, 용건을 마치고 일찍 돌아가주세요!”
가벼운 스위치 조작으로 현관문은 쉽게 열렸다. 지나치게 솔직하다며 타박을 들었던 제피의 인사말을 뒤로 한 채 안드로이드는 열린 문을 통해 곧장 멜빈이 있는 작업실을 향했다. 역시 그가 집안에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던 것이다.
긴장과 경계로 몸을 웅크린 그. 그리고 완벽하게 당당한 걸음걸이로 다가온 그녀.
“이것이 환자에게 필수적인 성분이라는 주장의 검증을 요청합니다.”
흔한 인사치레조차 없었다. 평소의 멜빈이라면 꽤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그게 자신의 업보로 만들어진 무기라면 달랐다. 게다가 잠시 동안 멜빈은 그것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내민 물건은…… 금박 포장으로 예쁘게 포장되어있는 초콜릿이었다. 살인병기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가 타인에게 건넬 법한 물건의 목록에서 최하단에도 들어있지 않을 먹을 거리. 물론 그 안에 독이 들어있거나 폭탄이 장치되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암수는 최첨단 살인 장비를 갖춘 이 금속 조형물에게 지나치게 번거로운 짓이었다.
이 상황에 대해 판단하기 위해 미간을 찌푸린 멜빈을, 색이 다른 두 눈이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모든 것이 인간과 유사했으나 유독 무기질적으로 보이는 그 눈. 언뜻 본 것만으로도 멜빈은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모브마틴] (수위x, 그냥 누구인지를 모름)
·포스트아포칼립스
-살아나갈 수 있다면 뭘 하고 싶어요?
너무나 단순한 질문이었다.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또 모두가 갈망해 마지않는.
-여자를 잔뜩 만날 거야. 그리고 언젠가 내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내 자식들한테 알려줘야지…….
그는 이틀 뒤에 동료의 오발탄에 쓰러져버렸다.
-여행을 하고 싶어. 평화로운 곳에서, 호화로운 호텔을 잡아다 하루 종일 잠을 자는 거야.
그게 무슨 여행이냐며 비웃음을 샀던 그녀는 며칠 전부터 행방불명. 나는 거리를 돌아다니는 그것들의 차림새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글쎄.
대답이 없던 그는 여전히 내 곁에 남아있었다.
운이 나빴던 거라고, 어쩔 수 없다고. 내가 살아오며 수도 없이 생각해왔을 그런 것들은 이제 생존의 문제가 되어 있었다. 운이 나빴기 때문에 버려지고 어쩔 수 없기에 살해당한다. 그게 최선의 선택이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왜 남았어요?
내 물음에 그는 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인 모양이었다.
-전 원망하지 않았을 테고. 당신도 분명 하고 싶은 일이 있었을 텐데.
내가 이성이 죽어버리기 전에 전부 전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는 남았고, 나는 서서히 죽어버렸다. 그게 끝이었다. 그 뒤가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조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틴&트릭시] 노이즈 (0) | 2017.03.22 |
---|---|
[잭] 인간성 (0) | 2017.03.09 |
[클리브] R1「의혹」 (0) | 2017.02.26 |
[벨져릭] short breaks (0) | 2017.02.20 |
[루이틀비] 황혼이 지는 때 (0) | 2017.0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