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아이가 온다, 정도의 이야기는 설풋 들은 기억이 있다. 새 아시아지부 스카우터가 드디어 인재를 찾아 귀환할 예정이라고.
하지만 그 소식이 전해질 당시 정계에서는 능력자와 관련된 중대한 법안이 오가고 있었다. 능력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단체인 그랑플람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고, 그에 따라 다방면의 인맥을 활용해 움직여야 하는 마틴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의 담당이 아닌 새 후원자에 대해서는 자연히 관심이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과하다 싶을 정도의 업무를 떠맡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마틴과 다른 후원자들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법안에 대한 논의는 기약 없이 연기되었다.
습관적으로 이른 아침에 눈을 뜬 마틴은 오늘의 일정을 떠올렸다. 느긋하게 머릿속에 그려본 그의 스케줄러는 깨끗한 공백으로 마틴이 간만에 가지는 휴일을 나타내고 있었다.
바로 어제까지 그를 괴롭히던 법안 건은 막다른 길에 부딪혔지만, 사실 마틴은 그들의 미적지근한 태도를 통해 이런 결말을 예상하고 있었다.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면 그걸로 좋았겠지만, 도리를 지키는 범위 내에서-재단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스스로 정한 도덕을 깨지 않는 선에서-할 수 있는 바를 다 했으니 유감은 없다. 씁쓸하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지만.
잠에서 덜 깬 머리가 오늘 이후의 일정으로 생각을 옮겨가려 하자 마틴은 의식적으로 눈을 감고 이불을 고쳐 덮었다.
그는 재단을 위해 충분히 노력했다. 적어도 오늘 하루는 온전히 그의 것이 될 것이다.
가볍게 흔들리는 커튼 사이로 옅게 새어 들어온 빛은 그의 머리칼을 따스한 금빛으로 물들였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은 부드러운 소음이 되어 방 안을 맴돌았다. 그의 방은 행복한 꿈을 꾸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마틴의 편안한 잠은 오래가지 못했다.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가 자비 없이 그의 귓가로 파고들어 꿈을 헤집어놓았기 때문이다.
“아,아. ……여보세요?”
“여보세요. 마틴 형? ……자고 있었어?”
목을 풀어가며 수화기를 든 마틴은 최대한 잠의 흔적을 지우려 노력했지만 달콤한 잠에서 깨어난 직후에 그렇게 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발신자의 실례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 시계바늘은 평소 마틴의 기상시간보다 훨씬 늦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간만의 휴일이라…. 생각보다 늦잠을 잤네요. 오랜만이에요, 하랑씨.”
다행히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는 이였다. 마틴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미안한 짓을 했네, 얼굴이나 볼 수 있을까 해서 전화했는데. 어디 아픈 건 아냐?”
“아뇨, 좀 피곤했는데 자고 나니 훨씬 낫네요……. 오늘 도착했나요?”
“이거 섭하네. 재단에 미리 연락 넣었잖아-?”
한동안 일에 치여 미처 신경 쓰지 못했지만 마틴은 하랑과 매우 친한 사이였다. 지금은 능숙하게 영어로 대화하고 있지만 처음 만났을 때의 하랑은 여러모로 서툴러 마틴이 그의 적응을 도왔다. 당시의 마틴은 재단 내에서 이렇다 할 책무를 맡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던 듯 하다. 그 이후로도 둘은 틈틈이 짬을 내어 시간을 함께 하곤 했다.
마틴이 지금까지의 일과에 대해 간략하게 한탄하자, 하랑은 알 것 같다는 듯 재단을 힐난했다.
“저번에도 그렇고. 거 참 이사회 영감들한테 형 좀 그만 굴려먹으라 그래. 어디 인재가 형밖에 없나? 이번 일도 제일 귀찮은 건 다 맡겼잖아!”
“하하... 제가 나서는 게 제일 편하긴 하죠.”
“형은 거절할 줄도 알아야 돼. 나라도 있었으면 아주…… 하. 이번에 확실히 항의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둬. 맞다, 오늘 쉴 거면 내일이라도 어때? 우리 제자놈도 소개할 겸.”
“제자? ……아하. 새 후원자 말이죠? 하랑씨가 스카우트한. 첫 성과네요, 축하해요.”
조금 복잡한 경로를 통해 영국에 흘러 들어온 하랑은 몇 년 전 재단이 보호하는 형태로 이곳에 정착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가 후원자로서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다 판단한 재단은 그에게 아시아의 능력자를 발굴하여 섭외하는 직책을 부여했다. 이 결정에는 무엇보다도 하랑의 출신이 크게 작용했을 터였다.
“이제서야 첫 성과지만- 제자인 건 어쩌다 보니. 뭐 좀 벽창호 같긴 한데 나쁜 앤 아냐. 그런데 애가 여기서 잘 지낼지 걱정이라……. ”
“무슨 문제라도?”
“내가 처음 왔을 때처럼 그런 거 있잖아. 나보단 목표도 확실하고 상황도 다르지만. 그래도 왠지 형을 만나게 해주고 싶더라고. 거, 피곤하면 다음으로 해도 되고.”
새 후원자는 아직 열 다섯 남짓이라고 들었다. 마틴은 그보다 어린 나이에 전장에 투입되는 능력자도 봐왔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먼 타지에서의 생활은 그런 것과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마틴은 하랑을 통해서, 그리고 하랑은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서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거라면 오늘도 나갈 수 있어요. 하랑씨 얼굴도 보고 싶고. 그 제자가 좋아할만한 곳으로 가면 되겠네요.”
다른 약속이라면 이런 날엔 되도록 사양했겠지만, 반가운 목소리를 들으니 피곤에 절었던 마틴도 기운이 좀 나는 것 같았다. 하랑의 제자가 됐다는 동양의 신비한 아이에 대해서도 호기심이 동한 참이었다.
마틴의 대답에 하랑은 기뻐하며 자신의 숙소에서 손수 요리를 대접하겠다고 제안했다. 아마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하고 싶은 마틴을 생각한 결정인 듯 했다.
“그리고…… 형 능력 말인데. 미리 말해둘까?”
마틴은 마인드리더이자 마인드컨트롤러로, 타인에게 꺼려지기 쉬운 부류의 능력자였다. 심지어 그의 마인드리드는 그가 일부러 통제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에 가깝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를 만난 이들은 때로 배신감이나 수치심을 느꼈고 그들의 그런 생각은 마틴에게 그대로 흘러 들어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능력을 미리 예고 받은 이들의 경계심이 썩 듣기 좋은 것도 아니었다.
마틴에게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하긴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하랑은 적어도 그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고, 마틴은 하랑의 이런 배려에 고마움을 느꼈다.
“글쎄……. 하랑씨의 생각은 어때요?”
“으음~ 어느 쪽이든 티엔은 괜찮을 거야. 미리 말해도 뭐, 사부의 형님이라는데 토를 달겠어?”
가볍게 대답하는 하랑에게 마틴은 웃음으로 답했다. 하랑은 마틴의 능력을 상당히 늦게 안 축에 속했다. 소통의 문제도 있었지만 마틴 본인에게 주저함이 있던 것도 사실이다. 결국 하랑은 타인의 입을 통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서툰 영어로 그에게 해명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마틴의 진심 어린 사과와 하랑의 이해를 통해 둘의 사이는 더 가까워졌지만, 직접 알려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는 하랑의 속마음을 읽은 마틴은 아직도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었다.
“이번에야 말로 직접……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역시 ‘안녕하세요, 독심술사입니다’같은 인사는 어색해서 말이에요.”
“뭐 어때. 다들 나중에는 형을 좋아하잖아?”
“그야 제 매력은 능력에 가려지지 않으니까 그렇죠.”
이어지는 하랑의 야유에도 마틴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사무적 관계에 파묻혀 있던 마틴에게는 이런 한가한 농담이 정말로 반가운 존재였다. 하랑을 시작으로 둘은 잠시 서로의 매력을 비꼬듯 칭찬하는 시간을 가졌고, 구체적인 저녁 약속을 정한 뒤 즐거운 마음으로 통화를 마쳤다.
“제자라…….”
수화기를 내려놓은 마틴은 하랑을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했다. 같은 아시아에서 왔다고 그 아이가 하랑을 닮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이미 예전에 마틴이 했던 역할을 대신 할 하랑이 있다. 그럼에도 마틴은 어쩐지 그 티엔이라는 아이를 하랑과 겹쳐 상상하게 되었다. 더 정확히는 벽창호 같은 면이 추가된 하랑.
어쨌거나 지금은 저녁을 위해 쉬어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며, 마틴은 피곤한 몸을 다시 침대에 뉘었다.
──────────────────────────────
“고 녀석, 고기라도 사다 듬뿍 먹여야지 원.”
직접 만들 저녁메뉴를 생각하던 하랑은 머리를 긁적이며 혼잣말을 던졌다. 하랑과 티엔은 어젯밤 늦게 영국에 도착했다. 긴 여행에 지쳤을 법도 하건만, 하랑이 아침에 찾아갔을 때 티엔의 숙소는 텅 비어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단독으로 수련을 할 수 있을만한 장소를 묻더니 평소처럼 아침단련이라도 나간 모양이었다.
티엔은 하랑만큼이나 ‘동양의 신비한 능력자’라는 이미지에 어울리는 소년이었다. 몸 속의 ‘기’를 다스려 체술에 보조해 사용하거나 심지어 형상화할 수 있는 능력. 능력에 의한 비범한 외모. 그에 더해 티엔 본인은 예의 바르고 과묵하며 맡은 바를 우직하게 해낸다. 기시감마저 느껴지는 티엔의 모습은 마치 허구의 인물이 종이 밖으로 튀어나온 듯 했다.
티엔은 특유의 성실함과 재능이 겹쳐 어린 나이임에도 상당한 강함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하랑은 그가 실전 경험이 없고 스스로의 기를 제어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간파했고, 바로 그 점을 보완하도록 돕겠노라 약속하여 티엔을 재단으로 이끄는데 성공했다. 마침 티엔이 모시고 있던 스승이 그를 반 억지로 하산시킨 직후였던 것도 하랑에게는 행운이었다.
동양 능력자를 섭외하고 그 후로도 재단에 적응하기를 돕는 것이 본래 하랑의 직무다. 하지만 설득의 과정에서-때로는 대화, 때로는 대련의 형태였다-티엔에게 무언가 큰 감명이 있었던 것인지, 티엔은 스스로 하랑을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고집했다. 재삼 거절했음에도 소년의 마음을 꺾을 수 없었기에 결국 하랑은 몇 가지 조건과 당부를 걸고서 그의 스승이 되었다.
‘그랬던 주제에 건너온 첫날부터 사부를 바람맞히다니.’
하랑은 내심 투덜거리며 방을 나서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숙소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티엔은 어제 하랑이 일러둔 공터나 체육시설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제자가 스스로 알아서 한다고 마냥 내버려두는 것은 스승의 도리에 어긋난다.
갑작스레 주어진 스승이라는 이름에 부담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티엔은 또래의 아이들이나 일반적인 사회집단과 어울리지 않고 오직 수련의 길을 걸어왔을 아이다. 만일 티엔이 자신과 가까운 손윗사람을 사제 외의 관계로 정의하는 것에 서투르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계기가 어떠하든, 하랑은 스승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티엔을 이끌어줄 것이다.
자신이 이 딱딱한 소년과 얼마나 잘 해나갈 수 있을까. 하랑은 새삼스러운 불안과 기대를 안고 티엔을 찾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