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티엔마틴] 변한 것
[티엔마틴] 남은 것의 뒷이야기.
갑작스러운 시간의 흐름&분위기 변화 있습니다_(:3」∠)_
갑작스러운 변화는 그에 휘말린 이들 모두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마틴의 경우 그의 변화가 가져온 가장 큰 손실은 마틴 본인에게 있었고, 그가 일궈온 모든 것들이 그 영향권 아래 있었다. 당시 마틴은 그랑플람 재단에서 상징적으로나 업무상으로나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그는 변화가 가져온 결과에 대한 감상에 젖을 여유도 없이 결단을 강요 받았다. 안타깝게도, 마틴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는 결코 이전과 같은 위치에 남아있을 수 없었다.
겨울이 다가오던 어느 날, 마틴은 간단한 신변정리와 함께 요양이라는 명목으로 재단을 떠났다. 마틴의 갑작스러운 이탈은 재단 측에서도 당황스러운 사안이었으나 그를 막을만한 명확한 구실이 없었기에 이사회는 마틴이 알고 있는 재단의 기밀사항에 대해 영구히 함구한다는 조건을 걸고 마틴의 탈퇴를 받아들였다. 그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대부분의 절차를 서면으로 처리하였으며, 재단의 이름난 마인드리더, 일명 ‘ATTRACTIVE’는 그렇게 수많은 추측만을 남긴 채 조용히 사라졌다.
그가 환자 행세를 해가면서까지 능력의 상실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자신이 능력을 잃었다는 사실에 대한 타인의 반응을 마주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불필요한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이미 많은 것을 잃은 마틴에 대한 배려로 티엔과 브루스는 그들이 알고 있는 진실을 숨겼으며 특히 브루스는 마틴이 재단을 떠날 때의 뒤처리를 대부분 떠안았다. 때문에 재단 내에서 마틴의 탈퇴는 브루스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으나 그는 어떤 공식적인 입장도 내보이지 않고 묵묵히 마틴이 남긴 업무를 처리할 뿐이었다.
헌데 그렇게 비밀을 공유한 브루스조차 알지 못했던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마틴이 그리 멀리 떠나가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재단을 떠난 뒤, 마틴은 자신을 아는 이들과 마주칠 가능성이 적고 능력자 밀도가 낮은 지역에 방을 구했다. 하지만 그곳은 원한다면 이전의 생활반경으로 충분히 돌아갈 수 있는 거리로, 마틴이 재단에서의 인연과 완전히 관계를 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마틴이 능력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티엔은 마틴을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사실 이 추상적인 약속의 내용은 둘 사이에서 정확히 언급된 바가 없었지만 티엔은 자신 나름대로의 해석으로 약속의 도리를 다했다. 그는 마틴이 가족을 제외하고 연락을 유지한 유일한 사람이었고, 시간이 빌 때는 서로 식사를 대접하거나 티타임을 함께하기도 했다. 이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조합과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런 사적인 만남에서의 대화에 익숙하지 않은 티엔을 앉혀두고 과거의 일부터 일상의 소소한 사건까지 털어놓곤 하는 마틴을 보며, 티엔은 그가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다. 뜻밖에도 이 잠깐의 여유는 티엔에게 그리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으며 드물게는 그가 먼저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비록 티엔이 시간을 내기 어려워 대면하는 일 자체가 드물긴 했지만. 그 둘은 친구라기엔 다소 거리를 유지했지만 더 이상은 직장동료도 아닌, 다소 기묘한 관계를 지속했다.
거의 10년만에 시작하는 평범한 사람의 일상에서 마틴은 지금껏 접하지 못한 삶을 만회하려는 듯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다. 가게의 판매원, 작은 회사의 직원, 식당의 접시닦이까지. 마틴은 어떤 일에도 열심이었고 결코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또 주변 동료들과 가깝진 않더라도 언제나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기에, 직장 내에서 마틴에 대한 평가가 양호했음은 당연했다.
하지만 많은 직업의 수는 그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처음 며칠은 아무런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마틴은 티엔과의 통화나 만남에서 슬슬 일에 익숙해졌다는 둥, 직장동료나 단골 손님과 친해졌다는 둥의 이야기를 전하고, 티엔은 그가 잘 지내고 있다 결론 내린다. 하지만 일정 시기가 지나면 마틴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새로운 일에 대해 언급했고, 이전의 직장에 대해서는 단지 그만두었다는 말뿐인 것이다.
티엔은 마틴이 먼저 요청해오지 않는 한 그의 생활에 관여하지 않고 있었으나, 열 몇 번째인가의 반복 끝에 무언가 변화가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자주 환경을 바꾸어 가면서도 지나치게 태연한 마틴의 태도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티엔은 어떤 문제를 가지고서도 그것을 숨기려 하는 이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어설프게 감춰진 사소한 요소들은 티엔이 계획하는 일들을 그르치게 만들 가능성이 있었고, 솔직하지 못한 자들의 태도는 티엔에게 그리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만일 마틴이 티엔을 떠났던 그들과 같다면 둘 사이의 약속엔 별 의미가 없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티엔은 언제나 계획을 세우고, 철저히 그에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이번 일에는 티엔에게 보이지 않거나 관여할 수 없는 요건이 너무도 많았다. 어쩌면 마틴을 외면하고 이 일을 흘려 보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티엔을 움직일 결정적인 요소는 마틴이라는 인물이 과연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는 점이었다.
“마틴. 언제까지 그렇게 정착하지 못하고 있을 생각이지?”
티엔이 이 말을 꺼냈을 때 둘은 한 중국식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장식은 다소 요란하지만 평온한 분위기에, 티엔같은 동양인들이 현지사람들과 섞여있는 이국적인 공간은 두 사람의 이질적인 느낌을 중화시켰다.
이 날은 여김 없이 열흘 만에 한 출판사에서의 일을 그만둔 마틴이 먼저 티엔을 불러냈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 사실을 전한 뒤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려 하던 참이었다. 아마 이곳의 차는 향이 제대로 우러나 향기롭네요, 이 자기는 빛깔이 독특한걸요, 같은 시답잖은 이야기를 꺼내려 했을 것이다.
뜻밖의 질문에 마틴은 티엔의 의도를 탐색하려는 듯 그와 눈을 맞췄다. 마틴은 들고 있던 찻잔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고, 막 우려내 따스한 차를 필요 이상으로 길게 홀짝였다. 그리고 이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띄우며 티엔을 마주했다.
“음……제 구직 상황에는 별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요.”
“그런 표현은 옳지 않군. 그 동안은 당신의 선택을 존중했을 뿐이다.”
“그랬나요?”
뜻밖이라는 어조다. 마틴은 티엔이 자신의 예상과 어긋났을 때 그런 식으로 반응하곤 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계속 존중해주었으면 좋겠네요. 이건 제 사생활이니까.”
여기까지, 더 이상은 다가오지 마세요. 마틴의 눈은 명백히 그런 의도를 전달하고 있었다. 마틴은 지금의 대화를 피하고 싶었고, 눈앞의 무뚝뚝한 기공사가 보이는 예상 외의 관심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도망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나?”
그러나 잠깐의 침묵이 있었을 뿐, 티엔은 더 강한 어조의 말을 내뱉었다. 마틴이 대화를 피하고자 하더라도 티엔은 결코 하려던 말을 도로 삼키는 타입의 인간이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티엔의 무례한 태도에 마틴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티엔은 마틴이 어딘가 피곤해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금발의 청년은 대화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지쳐있는 상태였다.
“전 도망치거나 했던 적이 없어요.”
“내가 보기엔 재단에서 도망쳤을 때와 별 다를 바도 없는 것 같군. 혼자 틀어박히지도, 그렇다고 어딘가에 남아있지도 못해 도망치지.”
“티엔. 지금 당신이 저에 대해 잘 안다고 착각하는 것 같은데요.”
“그렇다고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마틴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그의 말대로 티엔은 그를 깊이 알지는 못할 것이다. 전 마인드리더인 이 청년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스스로를 숨기는 데에 능숙했고, 티엔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묘한 신호를 잡아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티엔은 마틴이라는 인물을 그 어느 때보다도 주시하고 있었고 그에게선 어떤 위화감이 느껴졌다. 만일 그가 예전과 같이 철저히 평정을 가장할 수 있었다면 티엔은 결코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뭔가요, 그새 제 능력이 당신에게 옮겨가기라도 했나 보죠?”
아, 이젠 제 능력도 아니지만. 그렇게 덧붙이는 마틴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자신을 방어하려던 방금 전까지의 미소와 달리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그깟 일 좀 그만뒀다고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네요. 단순히 그 자리가 저와 안 맞았을 뿐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당신이 납득할 이유를 일일이 읊어줄 의무 따위는 없는데요.”
“그래서 이번 일은 몇 번째였지? 반 년도 안 되는 사이에 사직만 열세 번. 어쩌면 더 있을지도 모르겠군.”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마틴에게 티엔은 거의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가 순순히 문제를 시인하지 않는다면 티엔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물론 마틴도 그 점에선 마찬가지였다. 마주 본 그들 사이에선 미처 다 비우지 못한 차가 서서히 식어갔다.
“편협한 생각에 제 생활을 끼워 맞추지 마시죠. 전 당신처럼 일 하나에 미쳐서 휘둘리고 있어야 숨통이 트이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지금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말하는 건가?”
“그만할 수 없어요? 걱정이라면 고맙지만, 당신은 지금 결론을 내려놓고 제게 그걸 강요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마틴에게선 고마움은커녕, 티엔과 재단에서 대립하던 시절의 냉랭한 기운만이 느껴졌다.
막다른골목이다. 마틴이 이렇게 나온다면 이 논쟁은 끝을 볼 수 없었다. 그 점을 알고 있는 티엔은 결국 되도록 피하고 싶던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말은 잘 하는군. 브루스가 이런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 것 같나?”
“브루스씨 얘기가 왜 여기서 나오죠?”
뜻밖의 이름이 거론되자 마틴의 눈빛에 분노가 서렸다. 둘 사이의 다툼에서 브루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반칙이나 다름 없었다. 비록 이전에도 지금도 마틴과는 단절되다시피 한 인물이지만, 마틴은 여전히 브루스를 존경했고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
“나 하나의 생각으로 인정할 생각이 없다면 어쩔 수 없지.”
“티엔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마음대로 해요. 거기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려고 하다니 비겁하다고요!”
티엔은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기에 그에 대해 이렇다 할 반박을 하지는 않았다. 한편 언성이 높아지는 그들을 훑던 주변의 시선이 경계심을 띄기 시작했지만, 둘 모두 그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 문제 없다면 신경 쓸 필요도 없지 않나? 내일이라도 당장─”
“왜 제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데요?”
티엔의 뻔뻔하기 그지없는 태도에 마틴은 분노했다. 자신을 몰아붙이는 악랄함에는 치가 떨리고, 지금껏 그와 교류하며 잊고 있던 악감정이 되살아났다. 마틴은 그의 발언들을 자신을 괴롭히려는 의도로밖에는 해석할 수 없었다.
그는 결코 그들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가길 바라지 않았다. 싫으나 좋으나 티엔은 마틴의 이전과 지금의 모습 모두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마틴이 자신의 현재나 과거를 숨기지 않고 교류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현재와 과거의 삶을 비교하며 털어놓을 수 있는 것도, 자신은 어떻게 살고 있다는 정도의 안부를 전하는 것도, 가까웠던 이들을 모두 자신의 손으로 밀어내버린 마틴에게는 꽤나 위안이 되는 일이었기에 그는 그리도 껄끄러워하던 이를 불러내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티엔은 지금 마틴에게서 그 정도의 휴식조차 앗아가려 하고 있다. 자신이 숨기고자 하는 것은 모르는 척 넘어가줄 수 있을 것을, 이 완벽주의자는 마틴이 편히 쉬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뜻 모를 약속을 수락하고 지켜주는 그에게 고마움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마틴은 지금의 그가 야속했다. 애초에 그 덕분에 가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최악의 시간으로 만들고 있는 그가 야속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왜냐고요, 지금의 제가 무능하고 불쌍해 보여서? 제가 뭘 하든 비참해 보여서 그래요?!”
“─당신마저도?”
설움이 북받쳐 말을 쏟아낸 뒤, 마틴은 자신이 실언을 했음을 깨달았다. 그의 마지막 말은 자신의 약점을 시인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게 이유였나? 스스로가 비참하게 보일 거라 생각해서?”
티엔은 드디어 꼬리를 잡았다는 듯 본인의 의견도 묻지 않은 채 상황을 정리했다. 아니었다. 적어도 마틴은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곤 여기지 않았다. 그가 굳이 털어놓지 않은 감정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티엔이 말하는 그런 식의 마음가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태도에 질려버린 마틴은 해명이나 부정을 포기하고 눈앞의 이에게 울분을 토해냈다.
“아니요. 하지만 당신 말이 맞는다고 치죠. 그래서 제가 도망치는 게 잘못인가요? 누구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당신처럼 능력이 건재하지도 무신경하지도 못해서 도망쳤다는 게, 그게 잘못됐다고요?”
“문제를 내버려두고 아닌 척 하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하나 보지?”
마틴이 이를 악무는 기분으로 쏟아낸 말들을 티엔은 강경하게 받아 쳤다.
“기껏 도망친 뒤엔 또 나를 찾아 태연한 척 수다나 떨 생각인가?”
티엔의 말과 함께, 마틴의 안에서 무언가가 끊기는 소리가 났다. 지금껏 이 무뚝뚝한 남자의 불필요한 주의를 끌까 봐서, 혹은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서 웃음지으며 평범하게 나눈 대화들을 그는 단 한 마디로 일축해버렸다. 그 시간들을 즐겁게 여겼던 스스로가 우스워지는 순간이었다.
“하. 결국 그게 문제였나요? 미안합니다. 저같이 나약한 인간이 당신같이 완벽한 사람의 시간을 뺏다니 주제넘었군요.”
말을 마치자마자 금발 청년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실례하죠.”
빠른 걸음으로 가게를 빠져나가는 마틴을 보며 티엔은 작게 한숨 쉬었고, 자리 반대편에 놓여있는 잔을 응시했다. 만일 티엔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오늘의 이 자리도 평범하게, 언뜻 단란해 보이는 담소로 끝맺었을 것이다. 그렇게 두지 않은 자신의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며, 티엔은 마틴의 화난 뒷모습을 뒤따랐다. 그에게는 아직 꺼내지 못한 말이 남아있었다.
둘은 번화가에서 떨어진 장소에 약속을 잡았기 때문에 오갈 사람이 많을 시간대임에도 거리는 꽤나 한산했다. 때문에 티엔은 그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마틴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차도를 건너기 직전 그는 마틴을 불러 세웠지만, 마틴은 그를 돌아보지 않았기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꽤나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나 보군, 마틴. 나는 시간을 낭비하러 온 게 아니다.”
“그렇겠죠. 앞으로는 당신의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러 온 줄 알았는데요.”
티엔은 그 나름대로 최대한 고압적인 태도를 버리고 말하고자 시도했지만, 마틴에게는 결코 그런 식으로 들릴 리 없었다.
“그런 말을 한 기억은 없군. 방금 인정했으면서 또 도망칠 생각부터 하는 건가.”
“도망쳤다고 하지 말아요. 당신의 일이 아니라고 멋대로 판단하지 말라고요. 그리고 전 남이 절 가여워할까 봐 두려운 게 아니에요.”
마틴은 저 무신경한 인간을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노라 되뇌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신경을 긁는 티엔의 말을 참지 못하고 못다한 말을 퍼부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내뱉을 때, 마틴은 티엔을 똑바로 마주 보고 소리질렀다.
“그래서 제가 어쩌길 바라는 건데요? 지금 절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 건 당신이잖아요!”
마틴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티엔은 처음으로 약간 놀란 표정을 보였다. 마틴에게는 그의 태도가 가증스럽게만 느껴졌고, 그가 어떤 대답을 내놓든 뒤돌아 가던 길을 갈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 만일 그가 다시 붙잡는다면 비명이라도 질러 떼어놓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마틴의 눈에는 미처 보이지 않았지만, 티엔에게 전에 없던 망설임과 결단이 스쳐가고 있었다.
어떻게 하기를, 이라. 티엔은 마틴의 말을 반복해 작게 읊조렸다. 그리고 그가 어렵게 꺼낸 한 마디는 마틴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나 해명이라기보다는 어떤 요청에 가까웠다.
“……함께 살지 않겠나?”
잠시 동안 마틴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문장에 담긴 티엔의 뜻은 전 마인드리더의 내면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당신을 혼자 두기엔 안심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마틴을 향해 티엔이 물었다. 막 귀가한 티엔은 어디선가 사 들고 온 물건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집 안에 채워 넣고 있던 참이었다. 서적이나 약품, 옷가지 등, 그는 때때로 그의 공간에서 필요 없어진 물건을 치워내고 새로운 것으로 그 자리를 메우곤 한다. 이제는 익숙하지만 마틴은 여전히 그의 그런 행동에 대해 기묘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음, 그냥. 확 나가서 살까 생각 중이었어요.”
“이제 와서 말인가?”
그 발언에 진심이 담겨있지 않은 것을 알고 있기에 티엔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지만, 때때로 마틴이 심통이 나면 그런 요지의 말을 꺼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잠시 동안 무엇이 마틴의 심경을 건드렸는지에 대해 고심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틴의 말에 그는 그 이유를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예전 생각이 좀 나서요. ……그때 전 정말 상처받았거든요? 보통 걱정된다는 상대한테 폭언을 퍼붓진 않는다고요.”
“처음부터 순순히 문제가 있다고 시인했다면 결론부터 말했겠지.”
“인정을 잘도 하겠네요. 나는 능력 없이는 사회부적응자라도 된다고.”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티엔의 태도는 언제 봐도 얄미워서, 이 둘의 대화는 서로 비꼬는 것으로 끝날 때가 많았으며 이제는 이런 식의 전개가 거의 일반적인 대화로 느껴졌다. 서로 약간씩 기분이 상하면서도 이런 대화를 그만둘 수 없는 것은 이것이 솔직하지 못한 두 사람이 앙금을 풀어내는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인정했으니 상관 없지 않나?”
“정말로 그런 문제가 아니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마틴의 물음에 티엔은 하던 일을 멈추고 조금 생각하더니, 무언가를 떠올리곤 당시에 가졌던 확신의 이유를 답했다.
“적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굳이 날 찾아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마틴이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점만으로도 티엔의 의심을 뒷받침하기엔 충분했을 것이다. 만일 다투던 와중 그가 이 사실을 언급했다면 마틴은 부정하려 했겠지만 지금 와서는 별 의미가 없었다. 마틴이 당시의 삶에 제대로 적응하고 있었다면 티엔을 찾는 빈도는 훨씬 적었을 것이 분명했고, 그때의 다툼은 처음부터 마틴의 수가 훤히 읽히고 있던 것이다.
“뭐……. 그래도 그 말은 섭하네요. 그냥 보고 싶어서 찾아갔다곤 생각 안 한다는 말이잖아요?”
“흠. 그랬었나?”
“글쎄요. 지금 생각해보면 왜 하필 당신 같은 사람을 찾아갔는지 모르겠네요.”
마틴의 발언은 두 가지 방면에서 상대를 기만했다. 당시 마틴은 티엔의 생각대로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였고, 굳이 다른 이가 아닌 티엔을 찾은 것도 명확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틴의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것이라 여긴 티엔의 추측은 그리 정확하지 않았다. 마틴을 심하게 몰아붙였던 그날 이후론 자세한 사항을 캐묻지 않았기에 밝히지도 않았지만, 마틴의 불안은 대부분 타인을 믿지 못하고 현재의 삶에 실망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에서 기인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 감정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마틴을 괴롭혀 왔으나 약속대로 자신을 떠나지 않는 티엔이 곁에 있어 그는 자신의 감정에게서 눈을 돌리거나 내색을 하지 않고 지나갈 수 있었다.
만일 티엔이 그때의 뜬구름을 잡는 듯한 제안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마틴은 깊게 생각하지 않도록 노력하곤 했다.
“티엔.”
이런저런 생각에서 깨어난 마틴이 티엔을 불렀을 때, 그는 여전히 정리중인 물건을 품에 안고 한 손에는 여러 권의 책을 들고 있었다.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에게 다가가 한참을 말 없이 바라보던 마틴은 그의 검은 눈이 굉장히 마음에 든다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티엔이 자신의 눈을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의문으로 부끄러움을 덮으려 노력하며, 눈을 감고 가볍게 그와 입술을 겹쳤다.
입을 마주 대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티엔의 몸의 일부가 부드러울 수 있다는 사실은 마틴에게 꽤나 생소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단지 감촉일 뿐인 이것이 가슴을 뛰게 만든다는 것은 둘 모두에게 너무도 낯선 일이었다.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살며시 눈을 뜨자 약간 당황한듯한 티엔의 얼굴이 비쳤다. 이전에는 잘도 했던 것을, 이런 뜻밖의 상황에는 그도 어쩔 수 없는 듯 했다. 그들은 아직 서로 알아가야 할 부분이 많았다.
마틴은 그런 티엔의 모습에 만족하며 그에게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지금도 제가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어요.”
마틴은 능력을 잃은 이후 찾아온 또 다른 변화에서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자신이 아닐까 생각했다. 변한 것은 티엔도 마찬가지였지만 마틴의 마음 한 구석에 찾아온 평안과 설렘은 그만큼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대개 서로에게 관대한 편이 아니었고, 마틴의 불안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었으나, 둘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들의 삶을 행복이라 정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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