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티엔마틴] 독신주의
전개를 생각해두지 않고 손이 가는대로 쓴 글인데 꽤 즐거웠어요!
마틴과 하랑이 친하고 티엔은 마틴에게 마음이 있습니다.
더 쓰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 급한 마무리.
티엔에게 아버지란 신기루와 같은 존재였다. 생김새조차 모르는 아버지가 그의 삶에 실제로 개입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의 곁에는 늘 ‘아버지와 닮았다’라는 말이 함께했고, 그 말과 함께 주어진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티엔은 어느새 아버지의 등을 쫓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목표가 되는 사람의 모습을 알지 못하니 그 등을 따라잡을 길은 없었으며, 소년이었던 그는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자라나 아버지가 아닌 또 다른 목표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가 눈을 돌리면 여전히 희미한 아버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지만 이제 그는 그것이 사라지지도 따라 잡히지도 않는 신기루임을 알기에 미련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그런 환영 같은 아버지가 남긴 눈에 보이는 형태의 유류품은 단 하나, 티엔 정 자신뿐이었다. 아버지와 닮은,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것. 그는 때로 자신이 여전히 아버지와 닮았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잡생각을 허용치 않는 충실한 일정 덕에 이에 대해 숙고할 여유는 없었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티엔은 마음 한 구석에 있는 어떤 다짐 하나를 되새기곤 했다.
아버지가 티엔에게 남긴 인상은 단지 강한 무인이란 것뿐만이 아니었다. 자신과 닮았다는 점에 앞서 아버지에 대한 티엔의 첫 인식은 그의 부재였다. 그 사람은 어떤 이유에서든 티엔과 그의 어머니를 남겨둔 채 떠나간 것이다. 사별인지, 어떤 이유가 있어 함께하지 못한 것인지는 차마 묻지 못했지만 그가 가정 내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만은 확고한 사실이었다.
어린 티엔은 의젓했고 홀로 그를 키운 어머니는 강인했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그런 성정을 가졌는지, 누군가의 빈자리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넉넉하지 못한 삶이나마 티엔이 부족함을 느낀 적은 많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부재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 되었을지 아이였던 그로서는 전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만일 아버지가 살아계시고, 그저 그들 모자를 버리고 간 것이라면. 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라나고 있던 티엔은 생각했다. 만일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지, 아버지를 닮았다는 그는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가족의 존재가 대의에 어긋났기 때문에.
설령 그것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티엔은 자신이 가장 첫 번째로 떠올린 이유를 통해 아버지가 아닌 스스로가 어떤 인간인지를 깨닫고 말았다. 만일 그가 자신의 목표와 가정을 저울질해야 한다면 그는 가정을 버리는 선택을 할 것이다. 실제로 티엔은 사랑하는 어머니를 홀로 남겨둔 채 수행의 길에 올랐으니까. 조용히 티엔을 보내면서도 너마저, 라고 말하고 있던 어머니의 눈빛을 그는 잊지 않았다.
티엔은 결코 자신들 모자의 삶을 슬프거나 비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자신은 자신과 어머니 같은 존재를 남기지 않으리라고, 그는 오래 전부터 다짐했다. 애초에 반려나 가정에 대한 관심이 적기도 했지만 혹여 마음이 흔들려 일을 그르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버리지 않겠다는 다짐보다도 가지지 않겠다는 다짐이 앞서는 자신을 돌아볼 때면 티엔의 판단은 옳을 수밖에 없어 보였다.
마틴에게 말이란 덧없는 허상이었다. 생각이 소리가 되어 공기를 떨리게 만들곤 타인의 생각으로 흘러 들거나 그대로 사라져버리는 것.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모태가 되었던 본래의 생각은 놀라우리만치 원형을 잃어버리곤 했다.
생각과 말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실로 다양해서 사람에게 존재하는 모든 감정이 구실로 덧붙여질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생각과 말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알고 있기에 타인의 말을 다시 한 번 곡해해 받아들이곤 한다. 그 일련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마틴에게는 매우 답답한 노릇이다.
말뿐 아니라 행동도 생각과 다르게 표출되기는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몸짓은 쓸데없는 울림으로 마틴을 괴롭히지 않았다. 사실 그가 말에 부정적인 인상을 가진 것은 생각과 말을 모두 소리로 인식하기 때문이 컸다.
연이어 들려오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소리는 늘 마틴을 괴롭혔고 그가 생각을 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생각과 전혀 다른 말을 던지는 이들 앞에서 쓴웃음을 참은 지도 오래 되었다. 그것이 예의이고 사람을 대하는 당연한 방식임을 알면서도 그의 마음 한 구석에서 빈정거림이 피어 오르는 것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본래라면 불쾌한 속마음을 감춰주어 감사해야 마땅하겠으나, 마틴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대개 마인드리더인 마틴이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납득하곤 했지만, 마틴은 다른 이들보다 인간관계에 더 많은 관심을 쏟고서야 지금의 성과를 가질 수 있었다. 자신에게 들리는 것들을 어떻게 활용할지, 같은 뜻을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더 호감으로 비춰질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를 포함해 타인의 생각과 말을 구분해 기억하는 것. 마음을 조종해 환심을 사려는 게 아니라면, 타인의 요청이 없을 시 마인드리딩에 대해 드러내는 일은 최소한이어야만 한다. 말은 이런 면에서도 마틴에게 또 다른 과제를 안겨주는 성가신 존재였다.
마틴은 때로 침묵을 바랬다. 말에 의해 왜곡되지도 혼동되지도 않고 온전히 마음만을 나눌 수 있도록. 하지만 마음을 들을 수 있는 쪽은 마틴뿐이었고 침묵은 통상적으로 단절을 의미했다.
지금껏 마틴에게 평균 이상의 호감을 가진 이들은 수없이 많았고 그도 사람인지라 더러 설렘을 느낀 적이 있었지만 진지한 만남을 가진 적은 없었다. 마음을 훤히 들여다볼 줄 알면서 마음을 나눈다는 것이 반칙으로 느껴졌을 뿐더러 사랑하는 이의 말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누군가와 특별한 관계를 맺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말에 의해 고통 받으면서도 말에 의존해 매력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마틴은 거짓이 섞여 더 견고해지는 관계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차마 그 거짓을 알면서 받아들일 자신은 없었기에, 또 거짓이 없을 거라 믿는 순진함도 잃은 지 오래였기에 재단의 마인드리더는 조금은 로맨틱한 연애를 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는 학창시절의 소소한 꿈을 포기하고 말았다. 적어도 지금의 그에게 그런 삶은 먼 곳의 이야기로만 느껴졌다.
그날 마틴은 하랑에게 전해줄 물건이 있었다. 오전 중에 재단에 도착한 우편물 중 ‘하랑 이’라는 이름이 기묘한 서체로 쓰인 편지가 있었고, 자신의 우편을 찾으러 왔던 마틴은 그것이 먼 땅에서 도달한 물건임을 직감했다. 굳이 그가 전달하지 않아도 결국엔 하랑의 손에 들어가게 되겠지만, 마침 일정이 비어있던 참에 소년이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편지와 함께 하랑을 찾아 나서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틴은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와 인사를 건낼 수 있을 정도로 양호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가 세 번째로 들린 곳에서 드디어 하랑을 찾아냈을 때 마틴의 기분은 예상과 다르게 수직선을 그리며 하락하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하랑군. 그리고 티엔.”
“어, 마틴 형? 웬일이야?”
간단한 휴게실 겸 회의실로 쓰이는 그곳에서 잔소리라도 듣고 있던 와중인지, 하랑이 반색을 하며 마틴을 맞아들였다. 그에 비해 맞은편에 앉아있던 하랑의 스승 티엔은 훼방꾼의 등장이 썩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틴, 아직 용무가 끝나지 않았는데 방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여기 사용 등록을 해놓은 것도 아니잖아요. 들어오는 것 정도야 제 자유라고요. 당신은 오늘 안에 올릴 서류가 있는 것 아니었어요?”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는 티엔에게 마틴은 절로 눈을 흘기고 말았다. 있으면 안 될 사람이 왜 여기 있느냐는 타박은 덤이었다.
“그쯤은 처리해둔 지 오래다. 독촉이라도 하려고 일부러 찾아왔나?”
“아- 착각하지 마시죠. 전 하랑을 찾아온 거니까.”
이 둘에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다툼이었지만, 그 사이에 낀 하랑은 평소보다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누구라도 찾아와 방해해주길 바라긴 했지만, 반가워하고 보니 하랑에게는 상황이 더 악화되었을 뿐이었다. 지금 티엔의 심사가 뒤틀려 피해를 볼 것은 자신임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아, 사부! 그러니까, 어─”
말싸움이 더 번지기 전에, 하랑은 실없이 티엔을 불러 주의를 끌고는 마틴이 찾아온 용무인 듯한 편지를 잽싸게 받아 들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고맙다는 인사는 빼놓지는 않았다.
“브루스 할배가 그러는데 사부가 여자를 안 만나는 건 할배 따라서 그러는 거라면서? 그게 사실이유?”
뜬금없는 하랑의 질문에 티엔의 굳은 표정이 살짝 움직였다.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브루스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일이다.”
“허…… 내 그럴 줄 알았지. 할배는 마틴형도 그렇다던데.”
“네? 브루스씨가요?”
마틴은 차마 말도 안 된다며 직접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난감한 웃음소리로 답을 대신했다. 아마 질문은 하랑이 먼저 꺼냈겠지만 브루스가 마틴까지 그런 식으로 설명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아마 이전에는 마틴에게도 가끔 던지곤 하던 웃지 못할 농담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뭐야, 그럼 둘 다 아니잖아. 난 혹시 나도 그래야 하나 걱정했네.”
반쯤 진심이 담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제자를 지켜보던 스승은 문득 깨달은 듯 하랑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하랑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흠. 아직도 잡생각이 많은 걸 보아하니 수련시간을 더 늘려도 되겠구나.”
“뭐요? 아, 사부! 저번에는 입맛 없다는 걸로 늘렸잖아! 그거 그냥 다 핑계 아냐?!”
하랑과 티엔이 수련에 관해 티격대기 시작하자 마틴은 그 자리에 더 남아있기가 무안해졌다. 상황을 수습해보려던 하랑의 시도는 오히려 하랑 자신에게 불똥을 튀겼음이 분명하다. 둘의 이야기가 길어질 듯 하고 용무는 어정쩡하게나마 끝낸 참인지라, 결국 마틴은 하랑이 간간히 보내오는 구조 신호에 안타까운 눈빛으로 화답하며 들리지 않는 작별인사와 함께 회의실을 떠났다.
마틴 자신도 알고 있긴 했지만, 일이 바쁘다는 것만으론 사귀는 사람이 없는 것에 대한 핑계가 되지 못하는 듯 하다. 재단의 ATTRACTIVE는 그 이명 그대로 매력적인,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고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를 조금 떨어져 지켜보는 이들은 마틴이 누구에게나 친절할 뿐 특별한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 상대는 없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생각하곤 했다. 물론 그 정도로 마틴의 평판 등에 문제가 되진 않지만, 그런 말을 듣거나 읽었을 때 쓴 맛이 느껴지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능력을 가지기 전에도 그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게 노력하는 편이었지만, 그때까지는 평범하게 설레는 마음을 가져본 적도 있고 미숙하나마 연애 비슷한 관계로 발전하기도 했었다. 모두에게 매력적이게 되었지만 반대로 특별한 한 사람을 가지기는 어렵게 되었다니 우스운 일이다.
만약 자신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면- 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마틴은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의 얼굴을 떨치려 미간을 찌푸렸다. 왜 하필 그런 자가, 그런 능력과 그런 위치와 그런 성격으로 나타났는지 마틴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만약 세계가 마틴의 신경을 최대한으로 거슬리게 만들고 싶었던 거라면 탁월한 선택이라 감탄이라도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해당되는 일이지만, 마틴은 자신을 괴롭히는 종류의 고민과는 일말의 연관도 없을 듯한 티엔이 평소보다도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상에 사탕과 편지에 의한 고문이 있다면 그 고문을 기념하는 날은 바로 화이트데이다. 그 외에는 도무지 유래를 짐작할 수 없는 이 날에 마틴은 올해도 어김없이 그리 즐기지도 않는 사탕을 폭격처럼 맞은 참이었다. 듣기로 이 날은 여성이 선물을 받는 날이라던데, 어차피 그저 즐기기 위해 생겨난 기념일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은 그런 제한에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점심시간을 반쯤 넘겼을 때, 겨우 선물 공세에서 벗어난 마틴은 사탕을 사무실에 놓아두고 편지들을 챙겨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나섰다. 그는 한숨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나중을 위해서라도 편지들의 답장은 미리 생각해두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직접 전달받는 선물은 차라리 낫지만, 우편을 통하거나 부재중일 때 전달된 것들은 마틴의 손목과 어휘를 시험하는 숙제와도 같았다. 물론 호의에는 감사하고 있지만 그는 이런 기념일을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었다.
마틴이 막 건물의 출구로 통하는 복도에 들어섰을 때, 누군가가 빠른 걸음으로 그를 지나쳤다. 몇 번인가 얼굴을 본 기억이 있는 여성 후원자였다. 그 와중 마인드리더에게 무심코 읽힌 그녀의 마음은 부끄러움과 당혹, 그리고 욕설이 섞여있다. 마틴은 ‘꽉 막힌 동양인’이라는 단어에서 그녀의 심기를 어지럽힌 사람이 누구인지를 바로 유추해낼 수 있었다.
“당신이죠? 방금 지나간 분을 화나게 한 게.”
아니나 다를까, 건물 밖에는 딱딱한 얼굴로 어울리지 않는 사탕봉지를 들고 있는 티엔이 있었다. 사탕에 고통 받기는 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상황에서 안쓰러운 쪽은 분명 그 여성이었을 것이다.
“이런 청탁은 곤란하다고 전했을 뿐이다만.”
“이봐요. 그건 성의라든가, 호의의 문제라고요. 이 정도 선물로 기껏 챙겨준 사람에게 무안을 줄 것까진 없잖아요.”
“그게 내 호감을 사고자 한 거라면 청탁이나 다를 바가 없지.”
사탕을 들어 보이며 말하는 티엔에게 마틴은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그의 태도는 사뭇 진지했다.
“가망이 없는 일에 거절 의사를 밝히는 것도 예의의 일종이다.”
티엔이 덧붙인 말은 마틴에게 꽤 의외였다. 그는 머리에 일밖에 들어있지 않아 아예 눈치가 없는 것인가 했는데 마냥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렇네요. 당신은 어차피 일이니 수련에 미쳐서 연애 같은 데엔 관심이 없을 테니까.”
“책임지지 못할 일에 손대서 좋을 게 없지.”
“……누가 들으면 청혼이라도 받은 줄 알겠네요.”
“어차피 거리를 두면서 하나하나 대응해주는 쪽이 더 가혹한 것 아닌가?”
티엔의 시선은 마틴이 들고 있는 편지 뭉치로 향해있었다. 서류 봉투에라도 넣어왔어야 했는데, 하고 속으로 투덜거린 마틴은 그에게 신경 꺼달라며 쏘아붙였고, 티엔도 동감을 표하며 둘은 각자 갈 길을 향했다.
“하랑. 저번에 했던 얘기 말인데요.”
때는 어느 일요일 오후, 하랑에게 거리 구경을 약속한 마틴이 회심의 아이스크림 가게를 소개한 참이었다. 가끔밖에 시간을 내지 못하지만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신기한 단것에 탐닉하는 하랑을 보고 있자면 마틴도 덩달아 유쾌해지는 기분이다.
“하랑군은 제가 애인을 왜 안 사귄다고 생각해요? 다른 뜻은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지가 궁금해서.”
마틴의 질문에 하랑은 아이스크림의 냉기로 시원해진 스푼을 물고 질문의 의도며 적절한 대답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흐응……. 그냥 그럴 생각이 없는 거 아냐? 형이 사람이 없어서 못 사귀진 않을 거 아냐.”
틀렸다고 할 수는 없는 하랑의 대답을 들은 마틴은 웃어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그것이 소년의 머릿속 결론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점도, 마틴이 하랑을 퍽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 중 하나다.
“그것 참 원초적인 대답이네요.”
“아,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할배한테 물어본 건 물어본 건데, 사부야 누구랑 붙어있어 봐야 피곤할 상이고. 형은 뭐…… 여자 없으면 나랑 놀아주고 좋지 뭘.”
하긴 마틴에게 애인이 있다면 이 시간에 하랑과 디저트를 함께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티엔은 제자와 일부러 화목한 시간을 보내는 데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하랑은 마틴이 이런 시간을 내주는 것을 굉장히 반기곤 했다.
제 스승과는 달리 남을 대하는 모습이 이렇게 귀여운지라, 마틴도 가끔은 소년을 놀려먹기를 즐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하랑군도 티엔처럼 될지도 몰라요, 저야 아직 젊지만.”
“아니거든-? 두고 봐, 내가 번듯한 여자 데려다가 형한테 제일 먼저 소개시켜 준다.”
한입 가득 아이스크림을 물고 하기엔 적절치 않은 말 같았지만, 마틴은 웃으며 하랑의 용기를 북돋아줬고 둘은 한동안 티엔에 대한 가벼운 험담이나 하랑의 미래계획 등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하랑과 헤어져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마틴은 그날 나눴던 대화를 곱씹었다. 만약 하랑이나 다른 가까운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찾아온다면 자신은 그들을 진심으로 축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질투를 떠나 둘 중 하나가 변심하진 않을지, 서로 비밀을 만들고 그 비밀이 탄로나지는 않을지, 그들에게는 실례가 될 암울한 미래들이 먼저 떠오른다. 마틴은 지금까지 본의 아니게 목격해온 갈등이 너무도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애정의 관계를 맺는 이들을 어리석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막 사랑에 빠지고 행복에 젖은 기분이 어떤 것인지도 수없이 읽어왔기 때문이었다. 다만 스스로는 그런 감정을 제대로 느끼기 전에 상대를 판단하거나 환멸을 겪어야 할 뿐.
또다시 생각이 혼자인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별로 달가운 주제도 아닌 것이 자꾸 떠오르자 마틴은 자신이 외로운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사람이 반드시 연애를 하란 법은 없지만 적어도 마틴의 본래 적성에 독신은 그리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인간관계에서의 감정소모는 질릴 정도로 하고 있으면서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아직 여유가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마틴은 비꼬듯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지만 역시 기분은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이러한 사람이면 자신도- 라는 생각에 다시금 떠오른 누군가에 의해 마틴의 기분은 더욱 착잡해졌다. 웃기지도 않는 생각이다. 마틴은 이제 그가 혼자라는 점까지 거슬리기 시작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점에 그의 잘못이랄 것은 없는데도 말이다.
전에 우연히 마주쳤을 때, 티엔은 분명 이성이 그에게 보이는 호의를 ‘책임지지 못할 일’이라고 말했다. 목표가 최우선인 완벽주의자에게 다른 곳에 눈 돌릴 여유는 없다는 뜻이겠지. 그도 마음은 있으나 자제하는 것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마틴에겐 뜻 모를 억울함이 피어 올랐다.
티엔은 적어도 자신의 선택으로 혼자 남았다. 그에 비해 포기를 강요당한 자신이 외로울 때 떠올리는 사람은 다른 누가 아닌 티엔이었다. 그저 능력 때문이라지만 그에게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불쾌함에 더해 마틴의 자존심을 긁어 내리는 일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쾌한 생각에 마틴은 간만에 보낸 유쾌한 시간이 반동을 가져온 것이라 결론짓곤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생각들을 떨쳐냈다. 쓸데없는 잡생각에 시간을 빼앗기기엔 그의 남은 주말이 더 소중했다.
최근 티엔은 자신이 해이해졌음을 느꼈다. 물론 행동으로 드러낼 정도로 정신을 놓친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빈틈이 생겼다. 여기까지 와서 일을 그르칠 수 없었기에 작은 요소도 놓치지 않으며 완벽하게 계획을 따라왔다 생각했건만, 티엔은 지금껏 없었던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문제는 다름 아닌 마틴 챌피, 재단의 마인드리더를 대할 때 생겨났다.
파벌을 달리 하고 있는 둘은 정적이라 할 수 있지만 티엔은 재단 내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제대로 처리할 수 있다면 다른 방면에는 되도록 신경을 쓰지 않는다. 따라서 마틴도 그에겐 그저 같은 집단 내의 한 인물에 지나지 않았지만, 사교성이라곤 없는 티엔의 성격과 마틴의 날 선 태도, 일 처리 방식에 따른 불협화음 등이 겹쳐 몇 번의 입씨름이 있고서 그 청년에게 불필요한 신경을 쏟게 되었다.
서로를 대할 때면 두 사람은 마치 원수라도 진 마냥 으르렁거렸고 주변인들이 걱정도 적지 않게 샀지만, 사실 티엔은 그런 말싸움이 기분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티엔은 그런 지속적인 악연을 처음으로 가졌기 때문에 날 선 대화가 꽤나 색다르게 느껴졌다. 마틴 쪽은 진심인 듯 하지만 티엔은 애초부터 별 악감정이 없었을 뿐더러 진지하게 상대하려 했다면 반대로 그를 무시하는 쪽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언제나 딱딱하거나 퉁명함에 가까운 티엔의 태도 덕에 이런 사실이 겉으로 드러날 일은 없었지만 티엔은 이런 스스로의 모습이 평소답지 않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밝은 금발이 반갑게 느껴지는 자신이 점점 낯설게 느껴진다. 겨우 그 정도의 인연으로 친근감을 느끼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상대는 자신과 정반대의 감정을 품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시시한 우화 속 등장인물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티엔도 이것이 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가능하다면 마틴과 평범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고, 짐작은 할 수 있지만 그가 티엔을 그토록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듣고 싶었다. 표면상의 관계가 나쁘다는 점에 방심했던 걸까, 한 번 그런 생각이 들자 떨쳐내 버리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마틴은 하랑과 언제 친해진 건지, 덩달아 티엔과 마주치는 일도 잦아졌다.
자신의 목표와 전혀 관계 없는 자가 눈에 밟힌다. 평소보다 날카로운 태도를 그를 대해보아도 자신이 너무 심했던 것은 아닌가 마음이 쓰이곤 한다. 티엔은 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계획의 흠집이 난 것 같아 불편해지고, 또 자신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는지를 알 수 없어 불안을 느끼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 마음을 다스리면 지나갈 것이다. 티엔은 그렇게 생각하며 문득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가 한 다짐은 지금의 상황과 별 관련이 없다 생각하지만, 목표에 방해가 되는 요소는 제거해야만 한다. 버리게 될 바에야 가지지 않는 편이 나을 터였다.
“왜요, 그럼 진지하지 않은 관계라면 괜찮아요?”
“…….”
퍼뜩 생각에서 깨어난 티엔은 잠시 동안 마틴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하랑과 마틴이 무언가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와중 제자를 찾아온 티엔이 본의 아니게 훼방을 놓았고, 평소처럼 가시 돋친 말 몇 마디가 오간 뒤 티엔은 새로 붙은 공고에 정신이 팔려있던 참이었다.
대답을 찾지 못하고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니, 다른 둘이 하던 대화를 계속하고 있을 때 제자의 말이 귀에 들어온 그가 한 마디를 거들었던 것도 같다. 그리고 마틴은 그 발언에 대해 추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궁금해서라기보단, 대화에 끼어든 티엔이 탐탁지 않았던 탓일 것이다.
“……글쎄.”
애초에 질문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티엔은 대답을 애매하게 넘겼고, 의아해하는 제자의 눈빛을 피해 자리를 떠났다. 뒤에서 하랑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급한 일이 떠오른 양 개의치 않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진지하지 않은 관계라면’.
마틴이 별 의미 없이 던졌을 한 마디가 티엔의 혀 끝을 맴돌았다. 그 말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진지하든 진지하지 않든, 그리고 그것이 어떤 관계이든 목표와 연관되지 않았다면 티엔에게는 모두 방해가 될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티엔은 그 말과 마틴의 얼굴이 함께 떠올랐다.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를 깨닫고 말았다.
마틴이 이런 자신의 마음을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티엔은 괴로워졌다. 그는 비웃을까, 아니면 조금은 안쓰럽다는 눈으로 바라봐줄까, 아니면…….
티엔은, 마틴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점이 지금만큼이나 다행으로, 그리고 아픔으로 느껴진 적은 없었다. 가망 없는 일이고 책임지지 못할 일임을 알면서도 마음이 끌린다는 고통을 그는 알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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