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박하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의 대화는 어느 순간 뚝 끊겨 버렸고 나는 더 이상 그와 마주 보고 있지 않았다. 내가 이 대화의 위화감을 알아채 버린 탓이었다.
몇 번인가 눈을 깜빡여 보아도 시야는 여전히 어두웠다. 어딘지 갑갑하면서도 포근한 느낌의 정체를 알아채고서 머리까지 끌어올렸던 이불을 걷어 내자 차갑게 식은 공기가 드러나 있는 맨살 위에 휘감겼다. 짧은 오한을 견뎌 내고서 둘러본 침대 바깥은 탁한 새벽빛의 푸르스름한 윤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나치게 이른 기상이다. 그러나 다시 잠들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아 나는 단호하게 몸을 일으켰다.
문득 눈에 들어온 달력에 적힌 숫자들이 놀라울 만큼 생소하다. 가장 크게 적힌 단어는 네 번째 알파벳으로 시작되고, 그 아래 늘어선 작은 날들은 이미 절반이 무쓸모해졌다. 바로 며칠 전 낡은 코트를 옷장에서 꺼내 들었으면서도 나는 시간에 대한 감각이 너무도 무뎌져 있었다.
그가 떠난 지 반년. 정반대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고, 많은 이들이 그를 잊어버렸다. 그러나 그에 걸맞은 슬픔을 짜내려 해봐도 마음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아, 벌써 그렇게 됐나. 이상하기도 하지. 그 정도의 감상.
이전에 가졌던 무거운 감정들은 약간의 찌꺼기를 남기곤 저 아래로 침전되었다. 제대로 슬퍼하기 위해선 작위적으로 바닥을 긁어내 온갖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수밖에.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비통함이 없다고 해서 내가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으니까.
그랑플람 재단 아시아 지부. 나는 그 문패가 눈에 들어오지 않도록 빠른 걸음으로 문 앞을 지나쳤다.
이제 아무도 쓰지 않는 그 사무실은 텅 비어 있는 채다. 재단이 정체되어 있음을 확인사살이라도 하듯 오래전에 비워진 자리는 좀처럼 다시 채워지지 않았다. 티엔이 재단에 들여올 수 있었던 유일한 제자도 몇 달 전에 이곳을 떠나 현재의 부서에 남아 있는 건 순전히 이름뿐.
새로운 담당으로는 내 이름이 잠깐 거론되기도 했던 듯 하지만 당장의 급한 불을 끄길 원했던 이사회는 곧 다른 사안들로 눈을 돌렸다. 그 뒤로도 누구 하나 그 자리에 지원하지 않았던 이유는 앞서 있던 사람의 철저함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조차 좌절을 겪었던 직책에서 선례조차 얼마 없는 궂은일을 맡겠다 나서기 쉬울 리가 없다.
물론 나 자신도 그의 빈자리를 채우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순전한 감정의 문제로 재단에 폐를 끼치는 건 안 될 일이지만 당시에는 나의 일만으로도 충분히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재단을 떠난 그의 제자는 행방이 묘연하다. 고국으로 돌아갔나? 아니면 새로운 목표를 찾아 떠났나. 어느 쪽이든 순탄한 길은 아닐 터였다. 시작은 티엔의 강권이었다고 하나 재단에 들어온 아이의 결심은 결코 가볍지 않았던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하는 생각이 지금도 불현듯 떠오르지만 당시의 나는 그 애를 두렵게 느꼈다. 그 애 앞에서 내 슬픔이 별것 아니게 느껴질까 두려웠고, 또 반대로 그 애의 슬픔이 충분히 무겁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런 이유의 불합리한 원망까지 짊어질 여유가 우리에게 남아 있을 리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떠난 걸 알게 된 직후에도 하랑을 붙잡지 못했다. 그 뒤에는 미안함이, 그 다음에는 죄책감이 내 발목을 잡았다. 그 애라면 잘 해낼 거라는 안일한 생각만이 유일한 위안으로 나는 여전히 사과의 말을 곱씹고만 있다.
비어 버리고 떠나 버린 것 외에 그가 남긴 것이 있던가?
몇 년 동안 착실히 나만의 공간이 되어 온 사무실에 발을 들이자 아침 햇살이 호두나무 책상 한편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그 위에, 그 곁에, 또 이 방 안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선물 교환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티엔에게서 받았던 몇 안 되는 물건은 대부분 소모되어 없어지는 것들이었다. 실용성을 중시한 정말이지 그다운 선물이었다. 그가 그렇게 빨리 떠나게 될 줄을 알았더라면 나도 똑같이 했었겠지만. 내 마지막 선물이었던 만년필로 그는 과연 무엇을 얼마나 쓸 수 있었을까.
머릿속의 음울함과는 상관없이 하루의 일정은 모두 예정대로 흘러갔다. 한 해 동안의 기념사업의 성과 논의며 결함이 발견된 후원품의 처리 문제 등 회의는 올해를 마무리하기 위한 정리로 번잡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명목상으로조차 언급되지 않는 어느 부서가 신경에 거슬려 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괜한 발화로 찬물을 끼얹을 생각이 없는 건 나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점이 꽤나 비참하게 느껴진다.
무덤덤할 수 있었던 일상을 빼앗아 간 것은 그 꿈이었다. 적어도 내 안의 그는 끝까지 내게 좋은 감정을 남길 생각 따위가 없는 듯했다.
……아주 적어도 내 발이 닿는 곳에 무덤이 있어서 그곳에 찾아갈 수 있었다면 조금 나았을 것이다. 오랜만이네요. 저는 잘 지냈어요. 같은 의미 없는 말들을 건네고, 그래. 조금 울 수도 있었겠지. 오늘 같은 날에는 찾아가 긴 묵념을 했을 테고.
하지만 그의 고향은 멀었고 나는 그가 있는 정확한 위치조차 알지 못했다.
“스테플 씨의 능력이라면 원하는 대로 몇 번이고 과거의 일을 돌아볼 수 있겠군요.”
“아- 뭐,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같은 물건이라도 똑같은 사건을 찾아가는 건 꽤 번거롭지만요.”
예상외의 솔직한 대답이었다. 아마 내 능력을 감안한 반응이리라.
사이코메트리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타인의 능력을 상상하는 건 타인이 내 능력을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짓이 틀림 없기에 나는 곧 쓸데없는 생각을 지워 버렸다.
“역시 그런가요? 조금 부러운 걸요.”
“부럽다? 하하, 이거 원. 제가 챌피 씨에게서 절대 듣지 못할 말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기자의 입은 웃고 있지만 그의 눈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 그가 취재하려는 대상은 내가 아님에도 기자의 직업병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 남자와 나는 어떤 면에선가 비슷한 능력을 가졌다. 그러니 그의 말은 이런 능력이 얼마나 어떻게 불편할 수 있는지 잘 아는 사람끼리, 라는 뜻일 게 뻔했다.
“뭔가 잊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봅니다? 달콤한 추억이라거나.”
“그것도 나쁘지 않군요. 저라면 재단에 처음 들어왔을 때나……. 아, 지난 부활절에 가족들과 보낸 시간도 되돌아보고 싶네요. ”
그리 자연스럽지 않게 말을 돌렸는데도 기자는 그의 특기일 완곡한, 또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어쭙잖게 건드렸다가 괜한 미운털 박히기는 사양이다, 는 무난한 처사의 결과였다. 듣던 대로 성품이 좋은 사람이라는 둥 의미 없는 인사치레를 거친 그는 싱글거리던 표정을 덜어내곤 짐짓 진지한 투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세상엔 잊는 게 나은 것들도 많죠. 모르는 게 나을 때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동의하는 바예요. 그런데, 그렇대도 잊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여전히 웃는 낯인 내게 그는 마음 속으로 의외라는 감상을 남겼다. 재단의 젊은 능구렁이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서 감상적인 척을 하나, 라는 사족이 없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러나 억울함을 느낄 만큼 부당한 평가는 아니었다.
“에─ 저는 기자 나부랭이지 상담사가 아니어서. 필요하다면 의사인 제 친구라도 소개 드리도록 하죠. 재미있는 토론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아, 제가 닦달하더라도 비밀은 지킬 녀석이니 안심하셔도 되고요.”
겉으로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기 힘든 그의 말은 감사 인사와 함께 흘려 넘기기로 했다. 남의 마음을 듣기도 신물이 나는 와중에 일부러 내 마음을 떠보려는 사람에게 상담을 청하는 건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다.
그 뒤로도 약간의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고서, 기자는 본래의 목적이던 재단의 과거사 들추기를 적당히 완수하고 떠났다. 대화가 그리 불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어떤 때에나 고요한 속마음을 가졌던 그 사람이 유독 그립게 느껴졌다.
잊고 싶은 기억이 너무나 많다. 그럼에도 다시 떠올리고 싶은 기억이 있다. 그게 달콤한 추억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생각보다도 너무 빨리 무뎌져 버린 감정에 관한 기억.
내가 죽고서 애정 같은 건 금방 식어버렸는데도, 그렇지 않은 척해 왔지 않던가.
알아요. 저도 한참 전부터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그런가. 당신답지 않게 솔직하군.
나를 공격하는 나 자신은 티엔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만 나쁜 사람인 것처럼 만들지 말아요.”
늦은 저녁, 어둑한 방에서 테이블 너머를 응시하며 말을 건넸다. 우스운 꼴이라는 자각은 있지만 다시 그의 꿈을 기다리는 것도 똑같이 우스운 짓이었다.
“그렇게 떠난 당신을 지금도 미워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강한 척을 하고선. 절 배신한 거나 다름 없잖아요. 그런 주제에 지금까지도 내 기분을 망치고 있어…….”
여기서 울어 버린다면 정말로 우습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눈물은 나지 않았다. 입을 열자 하고 싶은 말은 생각보다도 많았고 그 말을 떼기란 생각보다도 어려웠다.
숨을 고르고, 나는 더없이 무의미한 말을 허공에 건넨다.
“……보고 싶어요.”
설령 지금의 이런 감정이 더 이상 애정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전의 나는 분명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