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손이 남자의 흐려진 눈을 가볍게 감겼다. 침대에 가만히 누운 남자는 마치 편안한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 했으나 금발 청년은 그의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졌음을 알고 있다. 곧 다가올 일을 알고 있으면서도 떨림조차 없는 신체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아프지 않을 거예요.”
이미 상대에겐 들리지 않을 의미 없는 말을 꺼내곤, 청년은 남자의 눈을 가리듯 그의 머리를 눌러 단단히 고정시켰다. 아프지 않을 거예요. 여러 번 해봤으니까. 마틴에게 그 말은 그건 상대라기보다는 자기 자신과의 약속에 가까웠다. 잠깐의 묵념 후, 그는 나이프가 들려있는 반대쪽 손에 힘을 더했다.
한껏 일그러진 표정을 한 청년이 한산한 거리에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또 하나, 살기를 원치 않던 사람의 목숨이 사라졌다. 약속대로 끝까지 고통은 없었지만 그 사실은 마틴의 괴로움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못한다. 물론 처음보다 죄책감은 희석되었다. 매번 처음과 같은 감정을 느껴야 했다면 마틴은 이 일을 계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이 자기만족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틴은 무덤덤하지 않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마틴 챌피.”
흑발의 사내는 이 청년이 마치 살쾡이 같은 눈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보다 강한 포식자에게서는 전력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으면서 한껏 노려보는 그 눈빛이.
“누구시죠?”
“티엔 정. 당신 같은 능력자를 스카우트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런. 잘못 찾아오신 것 같은데요. 저는, 능력자가, 아니에요.”
그 말에는 필요 이상으로 강한 암시가 섞여있었다. 언젠가 발각될 수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식일 거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 상황은 위험하다. 게다가, 이 남자에게는 위화감이 있었다. 타인이 있는 장소에서 이 만큼의 고요함을 느껴본지 얼마나 되었을까. 마틴에게 이 적막은 거의 서늘함으로 느껴졌다.
“헛수고다.”
마인드리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과연, 자신이 누구고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안다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찾아올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신이 하는 일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능력만은 높이 평가하지.”
자신의 이름을 티엔이라 밝힌 그는 마틴이 하는 일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떻게? 물론 마틴에게는 한가하게 그런 사항을 물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원하는 게 뭐죠?”
“나와 함께 일해보지 않겠나?”
마틴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본 티엔의 얼굴은 진지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일’이 무엇이든 간에, 마인드리더는 자신을 끌어들이려 한다는 그 자체로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거절한다면요?”
“지금까지의 행적이 공개된다면 당신이라 해도 무사할 수 없을 텐데.”
“빠른 협박이로군요.”
“불합리하다 생각하나?”
“막무가내인 건 여전하군.”
“당신도 제대로 된 인간은 아닌데요.”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동기나 과정이 어쨌건 살인자를 영입하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상대가 위험하기로 정평이 난 마인드컨트롤러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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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말
‘금목서’를 쓰면서 꽃말을 알아보다가.
마틴은 클래식한 꽃넝쿨 장식이 그려진 하드커버의 책과 며칠째 씨름을 하고 있었다. <꽃과 설화들>. 꽤나 직관적인 제목으로,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티엔은 그 책이 자신과는 맞지 않으리라고 간단히 결론지었다. 사실 그건 책을 읽고 있는 당사자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티엔, 겨우살이 장식이 뭘 뜻하는지 알아요?”
이렇게, 평소 독서 중에는 하지 않던 잡담을 간간히 던지는 것이 그 증거였다.
“크리스마스, 입맞춤.”
물론 기억하고 있다는 요지의 짤막한 대답. 그건 전에 티엔이 마틴의 입을 통해 알게 된 서양 문물 중 하나다.
“그 겨우살이의 꽃말이 ‘인내’라네요.”
아이러니하죠, 라며 마틴은 헛웃음 비슷한 걸 내뱉었다. 그에게 이번 독서는 다양한 화제를 위한 일종의 공부였는데, 식물 주제에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며 약간 심통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인내에는 보상이 따르는 법이지.”
“허. 뭐, 말은 되네요.”
적당히 흘려 넘기는 티엔의 대답에 마틴은 눈을 흘기면서도 수긍의 뜻을 비쳤다.
“이런 건 대체 누가 붙여 넣는 건지……. 그러고 보니 탄생화라는 것도 있고요. 음, 4월 29일이 당신 생일 맞죠?”
어지간히 지루했나보군. 그렇게 생각하는 티엔을 뒤로 하고서 청년은 굳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어느 한 페이지를 펼쳐 눈으로 목록을 더듬었다.
“이십… 구일. 동백나무네요. 꽃말은 매력……”
매력이라. 티엔은 그 단어에서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평소 그런 말을 쓸 일은 없었을 텐데. 그가 까닭을 떠올리려 미간을 찌푸렸을 때 마틴이 먼저 입을 열어 그 이유를 짚어냈다.
“와, 진 기분이네요. 어트랙티브는 저인데.”
확실히, 그건 자주 쓸 일이 없어 반쯤 잊고 있던 마틴의 코드네임이었다.
“어차피 누가 붙였는지도 모르는 의미잖나.”
피식 웃어버린 티엔에게 마틴은 짐짓 불만스러운 기색을 비쳤다.
“그래도 기분의 문제죠. 어디, 다음 생일에는 동백꽃이라도 꺾어다 줄까요?”
흠. 티엔은 수를 놓던 손을 멈추고 청년이 쥐고 있는 책을 빼내왔다.
“아, 뭐예요. 돌려줘요?”
“……역경에 굴하지 않는 강인함.”
항의하는 마틴에게 아랑곳 않고 훑어본 2월 14일의 탄생화는 낯선 이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꽃말은 티엔의 것과 달리 조금 거창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꽤 어울리는군.”
“됐거든요.”
티엔이 건네는 책을 돌려받으며 마틴은 작게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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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들
주말 오후의 집안은 조용했다. 읽던 신문을 곁으로 밀어둔 마틴이 문득 넘겨다 본 티엔은 가만히 수를 놓고 있다. 그는 검은 실을 꿴 바늘을 놀리며 흰 천 위에 마치 그의 양팔의 문양처럼 보이는 형이상학적인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건 펜을 들고 있는 사람이 특별한 목적 없이 낙서를 할 때와 비슷한 것 같았다. 마틴은 수공예에 별 조예가 없었지만 신기하리만치 빠른 그의 손이 꽤나 능숙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뒤에서 멍하니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마틴은 티엔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방해를 하고 싶은 마음을 최대한 눌러 담은 결과였다.
“음…….”
그의 머리칼 사이로 전에는 맡을 수 없던 약간 향긋한 향이 났다.
“잘 쓰고 있나보네요.”
얼마 전에 마틴이 건넨 선물에 관한 이야기였다. 꽃향기가 물씬 나 여성들에게 인기 있는 종류의 샴푸. 충동적으로 사들인 그걸 하필이면 티엔에게 선물한 건 반쯤 장난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그런 물건에 관심이 있을 리 없다. 단지 그의 작은 부분이 자신에 의해 변한다는 건 꽤 즐거운 일이다.
“있는 걸 쓰지 않는 것도 낭비니까.”
마틴의 짓궂은 생각을 티엔이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에 선선히 맞춰준다는 것 또한 그의 매력 중 하나라고 하겠다. 금발의 마인드리더는 쿡쿡 웃으며 전보다 부드러워진 티엔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흔들지 마라.”
“알아요.”
뒷머리가 더 길었다. 머리를 자주 다듬는 사람이 아니어서 그걸 지적하지 않으면 본인은 깨닫지도 못할 게 틀림없다. 그대로 기를 생각은 없는 것 같지만 마틴이 살짝 쥐어 보니 그 한 움큼 정도는 이미 짧게 묶을 수 있을만한 길이가 되어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티엔은 말없이 천 위에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제대로 하면 전시회라도 열겠어요.”
약간 놀리는 듯한 그의 말에도 티엔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할 말이라도 있나?”
“어떨 것 같아요?”
“있으면 말해라. 듣고 있으니까.”
“뭐, 시시콜콜한 얘기죠.”
마틴은 조심스럽게 그의 곁에 자리 잡았다. 사실 그가 바늘에 찔린다고 별 문제는 없겠지만. 그건 마치 마틴이 상대의 말로 된 대답을 기다릴 때의 배려와 비슷했다.
“밖이 아직 추워요.”
“그런가.”
“그래도 슬슬 새순은 돋고 있더라고요. 곧 꽃도 필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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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
“물론 저도 보고 싶었죠.”
힐끗 곁눈질해본 왼편에서는 티엔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눈빛에 질량이 있다면 그는 마틴을 짓누르기라도 할 셈인 것 같았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네. 후후, 제가 제일 먼저 찾아가면 되겠네요. 물론요.”
짧게 끝나지는 않겠군. 하지만 이것도 일이니 어쩔 수 없다. 마틴이 다시 한 번 돌아본 티엔은 이제 팔짱까지 끼고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진퇴양난이라면 한 쪽을 무시할 수밖에. 전화통화이니만큼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부드러운 미소를 한껏 지어보이며 그와 시선을 피했다.
“……고마워요, 네. 그럼 다음에 뵙죠.”
휴. 긴 대화 끝에 드디어 수화기를 내려놓은 마틴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능력을 쓸 수 없는 전화에서의 접대는 약간 긴장하고 만다. 게다가 이번에는 곁에서 압력을 주는 존재까지 있으니 도무지 통화에만 집중할 수도 없었다.
“금슬이 좋기도 하군.”
“아니거든요. 금슬이란 게 언제 쓰는 말인지는 알고 하는 거죠?”
가시 돋친 티엔의 말에 마틴은 억울함을 담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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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야 했을 기대
암울
“그들 본인은 이런 걸 알고 있나?”
“글쎄요.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있죠.”
마틴이 기억을 지우고 난 뒤에는 자신에게 필요 이상으로 다가오지 못할 암시를 건다. 그것은 그가 보답할 수 없을 감정에 대한 일종의 배려였다. 적어도 마틴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동안 모든 사람들을 이렇게 대해왔나 보군.”
“하하. 전부, 는 아니죠. 절 너무 과대평가하시네요. 아니, 그 반대려나요?”
“말을 돌리는 건가?”
뜻밖에도 티엔은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결코 기만의 대상이 된 적도, 될 수도 없을 것임에도. 마틴은 읽어낼 수 없는 그의 감정에 거의 짜증을 느꼈다.
“음-. 떳떳하지 못하다는 건 인정해요. 그래도 전 누구에게든 상처는 주지 않았어요.”
“하.”
“제가 관여한 건 저 자신에 대한 기억뿐이에요.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요. ……제 인간관계에 불만이라도 있으신가요?”
티엔의 얼굴에 더욱 더 진한 경멸의 표정이 떠올랐다. 오래토록 타인에게서 자신을 향한 적이 없던 부정적인 감정에, 마틴은 마음속에는 흠칫 두려움과 비슷한 무언가가 피어올랐다.
“말할 가치도 없겠군.”
왜 그렇게 반응한 걸까. 역겨워서? 남의 마음을 가지고 놀았다는 말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마틴은 자신이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끼치지 않았노라 생각해왔다.
청년은 티엔 정이 타인의 일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인간에게마저 역겹게 느껴질 자신의 모습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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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몽맥
우울. 마틴 중심. 뒷얘기가 티마...인데 안 써지는군요(침착
그가 보는 광경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그 모든 끔찍함을 한 단어로 압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참상’이었다. 뒤틀린 몸뚱이나 분노에 찬 눈동자, 공허한 손짓은 오직 한 사람을 향한 악의였으며, 가장 끔찍한 점은 그가 눈을 돌릴 수조차 없었다는 점이다. 고통은 새된 비명, 슬픔은 흐느낌과 통곡, 두려움은 소름 끼치는 단어의 나열이 되어 머릿속을 파고 들었다. 원치 않는 공감은 연민이 아닌 혐오와 괴로움을 부르고, 점점 더 가까워지는 소리들은 필사적인 그의 외면을 조롱하듯 메아리 쳤다.
악몽에서 깨어난 마틴은 이불 안에서 한껏 몸을 웅크렸다. 그의 이성은 두려움의 근원이 실재하지 않음에 안도했지만 잔류한 감정은 여전히 그를 괴롭히고 있다. 작은 심호흡. 그는 현실감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괜찮아’라는 말에 위안 받는 기분은 비참하다. 만일 누군가가 곁에 있었대도 그는 같은 말을 입에 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의미였을 테고, 심지어 그 누군가를 안심시키려 웃어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홀로 있을 때의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치 혼자 남았을 때에야 훌쩍이는 어린아이처럼.
마틴에게 남의 생각을 훔쳐 듣는 ‘습관’이 생긴 이래 악몽은 흔한 일이었다. 대개는 이날보다 훨씬 경미한, 그리고 깨어난 후에는 잊혀지는 종류의 것들이었지만 그의 머리를 무겁게 만드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어쩌면 능력의 부작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집요하게 그를 찾아오는 꿈들은 그가 망가지지 않을 정도로만, 정확히 그만큼의 선에서 마틴 챌피를 괴롭혔다. 그 덕에 그는 지금껏 고통을 호소할 수 없었다. 차라리 더 심했다면, 선을 넘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면 비명이라도 지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그가 우는 소리를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릴 적 마틴은 강한 연민을 가진 아이였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 동물, 심지어 들풀이나 떨어지는 물방울마저 가엾게 여길 줄을 알았다. 아마도 감성이 깊다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던 상냥한 어른들의 존재, 그리고 아이로서 누리던 행복이 타인을 향한 넘치는 감정을 허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라며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음을 알았고, 능력을 가지며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시선이 닿는 곳 너머의 목소리마저 들을 수 있는 그에게 과한 공감은 스스로를 해치는 독이며 지나친 연민은 그를 찌르는 칼이었다. 마틴 챌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감정을 없애거나, 적어도 타인과 자신을 철저히 분리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가 능력에 적응했을 즈음, 그의 일부는 분명 죽어있었다.
마틴의 상냥함은 그가 이전과 같은 사람이기 위한 노력이었다.
상대와 너무 닮지도, 너무 다르지도 않게.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그가 고수하는 원칙이었다. 그 외에는 적절한 매너와 흥미로운 화제 정도. 그것만으로도 금발 주근깨 청년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매력적일 수 있었다. 그 외의 일부라고 한다면, 마틴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이들뿐이다.
꿈은 자신의 내면 외에는 무엇도 암시하지 않는다. 그런 믿음은 언제나 불쾌한 꿈에 시달리는 마틴이 내린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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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옅게 드리운 물방울의 장막을 바라보며 금발 청년이 감상에 휩싸인 몇 마디를 내뱉었다.
“또 비네요. 따듯해졌나 했더니 또 차갑고.”
“여기는 언제나 그렇지 않던가?”
감상을 깨부수는 딱딱한 말에 마틴은 가볍게 눈을 흘겼다.
“뭐, 벌써 계절이 바뀌었구나, 싶은 거죠. 이제는 봄비잖아요?”
뜻밖에도 그 말에 티엔은 동조의 뜻을 비쳤다. 그 같은 사람은 계절의 변화 따위에 아무런 감정도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군. 또 한 해가 흘렀어.”
그 말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마틴이 고민하는 동안, 티엔은 또 다른 한 마디를 입에 올렸다.
“그런데도 제자 녀석은 아직 그 모양인가.”
잠시간의 고민이 헛웃음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에게 있어 시간의 흐름이란 그 정도의 의미에 지나지 않는 게 분명했다.
“네, 네. 그러시겠죠.”
청년의 그런 반응에 티엔은 의아한 얼굴이었다.
“뭐가 말이지?”
“아뇨, 아무것도.”
당신이 재단에 들어온 지, 그러니까 저를 만난 지는 또 얼마나 됐으려나요. 그런 생각을 하며 가볍게 웃음을 흘리는 마틴에게 티엔은 이렇다 할 응수를 하지 않았다.
빗방울이 부드럽게 창가를 때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두 사람은 조용히 자신의 할 일에 집중했다. 습한 공기는 그리 불쾌하지 않게 그들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마틴.”
잠시 뒤 먼저 입을 연 건 티엔 쪽이었다. 마틴은 자신의 일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가 하는 말을 기다렸다.
“저녁에 시간이 있나?”
“무슨 일이냐에 따라 다르죠. 저는 꽤 바쁜 사람이니까.”
티엔은 왜 연인의 말에 심술이 드리웠는지 짚이는 바가 없었지만 언제나 그래왔던 바다. 그는 크게 개의치 않고 대화를 이었다.
“식사를 거를 만큼은 아니겠지.”
음─. 마틴은 짐짓 고민을 하는 척, 고개를 갸우뚱해보였다.
“직접 해주기라도 할래요?”
“굳이 원한다면야.”
담백한 대답에 마틴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자, 티엔은 도저히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선 그를 바라보았다.
“그냥, 내가 사귀고 있는 게 이런 사람이구나 싶어서요.”
정말로 그런 것뿐이다. 가만히 내다본 창밖은 여전히 봄비에 감싸여 있었고, 평온한 오전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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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데이트
그 둘은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동양인과 전형적인 영국인, 게다가 아무런 접점도 없을 법한 둘의 차림새라니. 물론 그들에게 드러나지 않을 교차점은 차고도 넘쳤다. 같은 단체에서 일을 하고 있다거나, 그리 많다고 할 수 없는 능력자의 일원이라던가. 그리고 그런 모든 핑계 위에는 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마음을 품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크게 빛나고 있다.
“어……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여기는 제가 잘 아니까 말만 해줘요.”
“음식은 가리지 않는다.”
정말이지, 무엇보다도, 가장 어려운 과제다. 애써 웃고 있던 마틴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물론 상냥한 그는 시선을 돌려 티엔이 눈치 챌 수 없는 곳에 자신의 감정을 흘려버렸다.
“그러면 제가 좋아하는 곳으로 괜찮을까요?”
“물론.”
허락 아닌 허락을 거치고, 마틴은 ‘자신이 좋아하는’ 가게가 어디인가를 잠시간 가늠해야 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상대의 취향에 맞춘 선택을 하기 일쑤였으니까. 그리고 여전히 마틴은 티엔의 대답과는 상관없이 그가 어떤 음식을 가릴지를 고심하고 있었다.
티엔은 정말로 어려운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마음이 끌릴 일도 없었겠지만.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은 그의 가장 큰 매력이었고 동시에 가장 큰 난점이다. 지금까지 상대에 맞춰 모든 걸 조율해왔던 마틴에게 티엔이라는 존재는 일종의 도전이었다. 단지 그게 지금의 상황이 되어 다가올 줄은 꿈에도 예측하지 못했을 뿐.
“저기 말이죠,”
어렵게 뗀 말은 우습도록 가벼워서, 마틴은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지켜왔는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해야만 했다.
“그래도 싫어하는 것 정도는 알려줄 수 없을까요……?”
티엔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어쩌면 고민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고, 해야 할 말을 갈무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게 무슨 이유였든 긴 침묵이 흘렀고 마틴은 그런 조용함을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아, 그래요, 됐어요. 그냥 제 마음대로 갈 테니까…… 대신 불평하기 없기예요?”
차마 웃음을 터트릴 수는 없었지만 평소와는 다른 그의 조용한 끄덕임에 마틴은 속으로 작게 웃었다. 이 사람은 어쩌면 생각보다도 더 어린 아이 같은 게 아닐까. 한편으로는 걱정이, 또 다른 한편으로는 조용한 웃음이 마틴의 속을 메웠다.
처음이니까. 서로의 서투름을 합리화하는 말이 둘 사이를 멤돌고, 마틴은 결국 이 딱딱한 사람에게 자신이 먼저 져주기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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煙草
마틴 챌피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의 주변에는 지독한 골초인 동료나 상사들이 있고 몇 번인가 한 대쯤 피워보길 권해진 적도 있지만 지금까지 그럴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어쩌면 학생 시절 가졌던 ‘담배는 나쁘다’는 인식이 아직도 머리에 박혀있기 때문인지도, 또 어쩌면 그간 원치 않게 들이마신 담배연기가 썩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많은 흡연자들 사이에서 싫은 티를 낼 수는 없어 마틴은 지독한 연기 앞에서도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이곤 했다.
구석진 곳의 흡연자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와 다를 것도 없는 풍경에 마틴은 이내 눈을 돌리려 했지만, 그곳에 서있는 사람은 전혀 뜻밖의 인물이었다. 얼마 전 그보다 높은 직급으로 부임해온 티엔 정. 마틴에게 직속 상사는 아니지만 썩 마음 편한 사람은 아니다. 물론 그 점에는 그간 소문으로 들어 온 그의 깐깐한 성격도 한 몫을 거들고 있다.
처음엔 그냥 모른 척 지나치려고도 생각했지만, 그때는 이미 그와 눈을 마주친 뒤였다. 이대로 말없이 지나가는 건 예의 바른 마틴 챌피의 철학에 어긋나고 말 것이다.
“안녕하세요, 티엔씨.”
“간만이군, 챌피.”
그는 마틴이 멈춰선 것이 의외라는 눈치였다. 역시 그냥 지나가는 편이 좋았을까. 하지만 이미 멈춰 섰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의외네요, 담배는 하지 않으시는 줄 알았는데.”
“그랬었지.”
이렇다 할 화제를 찾지 못해 생각하는 바를 솔직히 털어놓은 마틴에게 그는 과거형의 대답을 남겼다. 최근에 흡연을 시작했다는 뜻인가. 하긴 그가 회사에서 하는 일의 분량을 생각하면 다소의 술담배는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몰랐다. 마틴은 약간의 안쓰러움을 담아 그에게 격려의 눈빛을 보냈지만 티엔은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사실 마틴은 전에도 간혹 그에게서 옅은 담배향을 느낀 적이 있었지만, 그럴 때면 막연히 그것이 다른 누구와의 동석에서 배인 냄새일 거라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티엔은 약간 생각에 잠겨있는 그를 힐끗 쳐다보는가 싶더니, 깊숙이 들이마셨던 연기를 뱉어내고선 아직 꽤 길게 남아있던 담배를 다른 손에 들고 있던 휴대용 재떨이에 비벼 껐다. 역시 철저하다고 정평이 나있는 사람이었다.
“어……, 저 때문에 그러세요?”
“슬슬 갈 시간이다. 또 보지.”
그 말만 남기고서 티엔은 곧장 자리를 떠나버렸다. 혼자 남은 마틴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혹시 담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 알고 있는 건가. 설령 그렇다고 해도 먼저 가까이 다가간 건 마틴이었다. 그게 정말로 배려였는지, 아니면 함께 있는 자리가 불편했던지 마틴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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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일
<광인일기>에서 좋아하는 대사.
“그게 옳은 일인가요? 전부터 그래왔다고 해서?”
본래 그랑플람 기념사업에 할당되어 있던 재단의 자금이 본래 명시된 것과는 다른 곳, 더 정확히는 이사회의 누군가의 사업장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분명 그 사업의 특성 상 변명의 여지 정도는 있지만 원칙에 어긋나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재단의 명예를 위해 신중해야 한다. 그게 마틴이 받은 대답의 요약본이었다. 분명 이번 일이 알려지면 후원자들 사이에 동요가 일겠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덮어두기에는 ‘숭고한 재단’에 자부심을 가져 온 마틴의 내면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잘못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치가 떨린다.
긴 통화 끝에 마틴의 사무실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힘이 든다. 더 나은 재단을 위해 뛰어 온 결과가 내부에서의 부패라니. 마틴이 억지로 이 일을 바로잡고자 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단지, 그런 식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가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자신과 한 편이 되어 줄 사람, 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마틴은 곧장 가장 가까운 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내 청년은 고개를 흔들고 만다. 그는 이 일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티엔 정은 기본적으로 올곧은 사람이었지만 후원자들의 이익관계가 충돌하는 재단의 사정에는 발을 들이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재단의 신념이나 존속 따위에 상관하지 않는 입장이었으니까. 그런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면서도 마틴은, 그가 아직 행하지 않은 배신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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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바심
“티엔.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라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마틴이 그 말을 꺼낸 건 그들의 하나의 화제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린 직후였다. 그의 물음은 이전의 대화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고, 티엔은 상대의 의도를 잠시간 가늠해보았으나 이렇다 할 단서는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그게 어떤 의미였건 그가 줄 수 있는 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글쎄. 생각해본 적이 없군.”
티엔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바라본 마틴은 가볍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나 평소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곤 하던 그의 시선은 티엔을 피하듯 어딘가로 빗겨나가 있다. 뜬금없는 물음에 대답을 크게 기대하진 않았던지 금발 청년은 실망한 기색 없이 말을 이었다.
“그건 어떻게 보면 상대를 평가하는 말이잖아요. 설령 좋은 의도라고 해도요.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시시하게 생각하지만 당신만은 그렇지 않다’거나요. 꽤 주제넘은 말이라는 거죠.”
청년의 해석을 들으며 무인은 잠깐 고민에 빠졌다. 그건 불필요한 과장이 아닌가. 티엔은 몇 번인가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그런 식의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어쨌거나 티엔은 여전히 마틴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없었다.
“누군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하기라도 하던가?”
“뭐, 그렇기도 하고요. 그게 꼭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덕분에 제가 언어를 선택할 때는 좀 더 신중해질 수도 있었고.”
그렇게 말하며 마틴은 지금까지 들어왔던 ‘칭찬’들을 떠올렸다.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네요. 지금까지 알아온 젊은이들과는 다르군. 뭐 그런 이야기들. 사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전에는 그 누구도 이 마인드리더만큼 그들의 비위를 맞출 수 없었을 터이다. 때문에 마틴에게는 그 말들이 오히려 빈정거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얘기를 꺼내는 걸 고민하고 있었어요. 당신에 대해 어떻게 말하면 좋을 지를요”
“무슨 뜻이지?”
이야기는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떠오른 혹시, 라는 생각에, 티엔의 마음은 순간 어두워졌다.
“티엔, 전 당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게, 그래서 당신이 제게 특별한 존재라는 게- 꽤 기쁜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해준다는 것에 감사라도 바라는 건가?”
“나쁘지 않네요.”
곱지 않은 그의 대답에 마틴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티엔은 마틴이 그런 고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그런 특별한 존재였다.
“그 이상이라면 더 좋겠고요. 당신도 저를 특별하게 생각해준다거나.”
전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거든요. 어쩌면 당신도.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할 기회는 없었죠. 그러나 티엔의 대답은 결코 마틴이 원하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마치 새 장난감을 원하는 어린애 같군.”
“가능성 있는 이야기네요.”
마인드리더는 옅게 웃었다. 그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춰질지를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그리고 내가 어떤 식으로든 당신에게 협력하게 된다면 당신에겐 몇 가지 이득이 있겠지.”
“그것도 맞는 말이죠. 그래서 그게, 문제가 되나요?”
둘은 서로를 거의 노려보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상대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마틴. 무슨 심경의 변화지?”
젊은 마인드리더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만두라고 말해요. 그걸로 충분하니까.”
적어도 지금은. 만일 거부당한다면, 그리고 마틴이 포기하게 된다면 그들 사이의 미묘함은 결국 그 정도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용기가 아닌 조바심이었고 마틴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지금의 감정이 가라앉는다면 무엇이 남을까.
벗어나려 발버둥 치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를 막아서는 건 그리 엄밀하지 못한 공간의 제약뿐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어딘가 다치고 깨지고 긁힐지라도 그건 결코 불가능의 범주가 아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 의해, 탈출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결국 감금에 대한 암묵적 동의로써 취급된다.
마틴은 그 사실이 싫었다. 그러나 지금껏 그 말은 그의 입에서 언어로써 토해내질 수 없었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그는 수많은 죄책감을 마주해야만 했으므로.
“언제까지 절 가둬둘 생각이에요?”
‘일’을 끝내고 돌아온 티엔에게 던졌던 말은 그들의 사이를 공허하게 맴돌았다. 그는 마틴을 매어둔 이후로 제대로 된 대화를 원치 않는 것으로 보였다. 마틴이 지금까지 퍼부었던 조롱의 말이나 저주의 폭언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곤 짤막한 전달사항이나 마틴의 필요를 묻는 말뿐이었다.
마틴은 거의 외부와 단절되었지만 바깥의 상황이 낙관적이지는 못하다는 것만은 또렷이 알 수 있었다. 티엔에게는 새로운 부상이 한 획씩 늘어가고, 그 수를 새며 마틴은 그의 고통과, 그 고통이 끝나게 될 날을 가늠하곤 했다.
이미 비틀려 서로에게 기대를 걸 수 없는 관계는 단지 물리적으로 아슬아슬하게 지탱되고 있다. 그 사이에 남은 것이라곤 이해에 의한 실망과 불필요한 괴로움, 그리고 타성에 젖은 행위뿐이었다.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 거라곤 생각하진 말아요.”
진정을 담은 경고에도 역시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침울하게 가라앉은 하루 중 유일한 자극이 될 시간.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전달되는 감각들. 그러나 맞닿았던 몸이 떨어지면 그것들은 사라져버린다.
마틴의 말대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결국 티엔이 붙잡기를 원하는 것은 마틴의 몸뚱이가 아니며 마틴이 지키고자 하던 의지는 이미 그에 의해 깨어졌으므로.
─각자의 최선에 의하여, 그들은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어디론가 멀리 가버리는 거예요. 아무도 없는 곳으로.'
허튼 소리.
'당신이 살던 곳은 어때요? 바다 건너에 있는 당신 고향이요.'
……. ……넓은 곳이었다.
더 높고, 더 넓고, 더 크고. 이곳처럼 답답하지 않은.
'좋네요. 그런 땅에서라면 아무도 모르게 살고 죽어버릴 수 있겠어요…….'
……약에 취하기라도 한 건가.
'그럴지도 모르죠.'
…….
'지금하고 별로 다를 것도 없어요. 그냥, 조금 더 멀리 도망쳤을 뿐이잖아요.'
'그냥 그렇게 조용히, 멀리요…….'
“제가 죽는 게 당신 때문이라면 좋겠어요. 이미 그렇게 되고 있는 것 같고요.”
마틴의 입은 웃고 있었다. 전에 없던 섬뜩한 미소가 당연한듯 그 입가에 걸려 티엔을 비웃고 있다. 아무리 지우려 해도 선명하게 떠올라버리는 것. 그때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두 사람 사이의 균형은 서서히 깨어져버렸다.
티엔의 입에서 바로 튀어나온 대답에 마틴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뒤이어 마치 코미디의 우스꽝스러운 한 장면을 본 마냥 숨이 가쁘도록 웃어버렸다.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천진하면서도 섬뜩하게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티엔은 그런 마틴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와. 진짜 그런 사람이 있었네요. 혹시나 했는데.”
겨우 웃음을 멈춘 마틴이 난간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얘기, 보통은 안 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다들 죽고 싶어하는 줄 알았어요.”
“용케도 지금까지 살아있구나.”
“아. 그야, 아깝잖아요. 가끔은 그런 것도 없어서 왜 사나 싶긴 하지만.”
여전히 마틴의 얼굴은 빙긋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티엔의 한 마디가 어지간히도 유쾌했던 모양이었다. 마틴은 고개를 돌려 검은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언제나 무덤덤한 사람이지만 마틴은 이 대화가 일반적으론 불쾌한 종류의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는 티엔에게 마틴이 느끼고 있는 감정은 편안함과 서운함 사이의 어딘가에 자리한다.
“당신은 왜 살고 싶어요?”
“어폐가 있군.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있고, 사는 건 그걸 위한 조건일 뿐이지.”
“언제부터 그랬는데요?”
“언제나. 늘.”
짧은 대답에 마틴의 입매가 다시 호선을 그린다.
“정말…… 달라도 너무 다르네요. 전 평생 당신을 이해 못할 거예요. 물론 당신도 그렇고.”
다음 말을 꺼낼 때까지 마틴은 잠깐 생각의 시간을 가졌다.
“아마 그래서 당신이 좋은가 봐요.”
“그 점만은 그리 다르지 않군.”
잘도. 마틴은 다시 소리 내어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가 어렵게 꺼낸 말이 무색할 정도로, 티엔은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선 잘도 이런 말을 내뱉곤 했다.
“당신도 좀 웃어봐요.”
“충분히 많이 웃고 있다고 생각한다만.”
“비웃는 거 말고요.”
잠들기 전, 티엔이 램프 불빛을 비춰가며 수첩에 무언가를 적어 내리고 있을 때의 대화였다. 마틴이 지금껏 봐온 티엔의 웃음이라는 것은, 일단 그 빈도가 적기도 했지만 잘 해봐야 오만하다거나 건방지다는 수식어가 붙을 만한 것들밖에 없었다.
“그러는 너도 매번 비웃는 얼굴이지.”
“제 어디가요? 그런 얘긴 처음이거든요?”
“나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받아 치기인지 날카로운 것인지 모를 티엔의 말에 마틴은 발끈했지만, 그것도 티엔은 슬쩍 흘려 넘겨버렸다.
“어휴, 티엔 정씨가 무서워서 어디 보통 사람들은 말이나 붙이겠어요.”
“그래서, 웃는 게 마음에 안 든다 이건가?”
그렇게 말하며 티엔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마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피하려는 줄 알았던 화제를 본인의 입으로 다시 꺼낸 것에 마틴은 약간의 의아함을 느꼈다.
“……제대로 웃는 걸 보고 싶다는 말이죠.”
볼멘소리로 돌아오는 대답에 티엔은 들고 있던 필기구를 내려놓고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잠깐 인상을 쓰는가 한 직후 마틴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류의, 상냥하거나 부드럽다고 표현할 수 있을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은 너무 순식간의 일이어서 마틴은 그를 계속 바라보는 것 외에 무어라 제대로 된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로 만족해줬으면 좋겠군.”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마틴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인 티엔은 다시 수첩을 집어 들었다.
“잠깐만요? 어두워서 제대로 안 보였으니까 다시 해봐요.”
“그럴 마음이 들도록 하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티엔의 필기를 방해해가며 항의하는 마틴의 몸짓은 별 소용이 없었다. 그는 말없이 마틴의 머리칼을 헤집어 놓고는 불을 껐고, 어린애 취급을 받은 금발 청년의 화는 이마 위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고서야 조금 가라앉을 수 있었다.
차라리 꿈이라면 깰 수 있고, 어떻게든 좋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멀쩡히 뜬 눈으로 마주하게 되는 기이함은 오직 자신이나 세상 어느 한쪽이 잘못되어 있음을 알려온다. 웬만한 괴담이란 것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하랑이지만, 지금껏 그런 것들이 자신에게 직접 닥쳐오는 상황을 상정한 적은 없었고 그럴 수 있으리라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가장 처음은 새까만 밤중에 눈을 떴을 때였다.
영국에 도착한 이래 건강하고 충실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 이 소년은 잠을 설치는 일이 드물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바로 직전까지 숙면에 여념이 없었기에, 하랑은 자신이 무엇에 잠을 방해 받았는지를 의아하게 느꼈다.
한 밤의 방은 꽤나 싸늘했다. 하랑은 허리 깨에 걸쳐있던 이불을 끌어당기며 생각했다. 지금은 8월에 오늘은 비도 오지 않는데.
다음 순간, 몸을 뒤척이던 하랑의 발치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소름 돋는 감각이 지나가고, 하랑은 빠르게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침대 위에 그럴만한 물건을 놓아둔 기억은 없다. 결국 몸을 일으켜 그 주변을 더듬어 보았을 때에도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시트가 젖어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 무언가와 닿았던 발 끝도 멀쩡했다.
착각이었나. 그렇다기엔 생생했던 감각이었지만 그 외에 다른 여지가 없는 것이다.
찜찜한 기분을 안고 하랑은 다시 자리에 누워 이불을 고쳐 덮었다. 제대로 자두지 못하면 다음날 스승에게 들을 잔소리만 늘어날 터였다.
하지만 미처 다시 눈을 감기도 전에, 소년은 온 몸에 소름이 죽 끼치는 기분을 맛보아야 했다. 결코 착각일 수 없었다. 발치에서 느꼈던 차가운 기운이 이번에는 하랑의 손등을 끈적하게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이 가사에서 자꾸 마틴이 생각나길래 풀어본 썰. 이야기는 없고 그냥 질문-답변 형식입니다.
Q.
그런 능력을 가진 건 어떤 기분인가요?
A.
음. 조금 불쾌하네요. 꽤 사적인 질문이라는 것 알아요?
후후. 뭐, 자주 있는 일이에요. 그래도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알려드리도록 할까요. 아마 듣고 싶으셨던 종류의 대답은 아닐 것 같군요.
저기 광장 한쪽에서 구걸하고 있던 사람을 기억하시나요?
네, 오른팔이 망가져 있던. 그리 오래 계시진 않았죠. 저는 그 분이 처음으로 구걸을 나왔던 날을 기억해요. 조금 흐린 날씨였고, 저는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어요. 누가 봐도 서투른 몸짓에, 사실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죠……. 그런데, 제가 그 분에게서 읽은 건…… 물론 고의는 아니었어요.
저는 맹세코, 평생 그만큼의 용기를 가져본 적이 없어요. 자세한 사정에 대해 제가 밝힐 수는 없지만. 제가 봐온 사람들 중 가장 용감했다는 말은 아니에요. 단지 마음을 읽기 전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거죠. 그는 절 부끄럽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제가 가진 동전을 전부 털어 넣었을 때도.
음……. 누군가 타인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 가장 먼저 무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죠. 그래서 언제나 그런 건 아니지만, 사람은 늘 타인과 자신을, 타인과 타인을 비교해요. 그리고 전 타인에 대해 더 깊고,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어요. 저는 늘 능력을 통해 제 가치를 재확인해요. 제가 원해서든 아니든. 때로는 제가 누군가 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때로는 그 반대로 말이죠.
이런 능력을 가진 건 어떤 기분이냐고 물으셨죠. 제 능력은 정말로 편리해요. 너무 불공평한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요. 그리고 가끔은 제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끼게 만들어요.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 정도로 노력한다고 해서 의미가 있는지. 또 제가 하려는 일들이 과연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지…….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아요. 고마워요. 그 마음만은 소중히 간직할게요. 그리고…… 덕분에 제가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않을 수 있기도 하죠. 그건 정말이지 꼴사나운 짓이고요.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꿈을 가졌던 그는 그렇게 허무하게 가버렸다. 오만하고, 주제를 모르던 그에게 어울리는 끝이다. 익숙한 장송곡과 형식적인 슬픔, 형실적인 절차. 이것이 그가 원하던 마지막이었을까? 아니다. 분명 아니었을 터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지워져 버렸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남은 이들은 전혀 쓸모 없는 의식을 진행하고 무의미한 감정을 소모한다. 이 모든 것은 자신과 상관 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마틴은 자신에게 타이른다.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그저 하나의 장애물이 사라졌을 뿐이라고.
온통 검은 색으로 치장된 그의 장례식에서 마틴은 작은 아쉬움을 느낀다. 그라면 자신의 마지막조차 흑백의 조화를 맞추려 들지는 않았을까? 의견을 표할 이는 이미 이 세상에 없지만.
그와 '친분'이란 것을 가진 이는 많지 않다. 말 그대로 형식적인 절차를 거친 후 흩어지는 이들에게서는 슬픔을 느낀 자신에 대한 뿌듯함이 느껴진다. 그저 슬픈 음색의 음악에 휩쓸렸을 뿐이면서도. 마틴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은? 온전히 그에 대한 슬픔을 느꼈을까? 엄숙함과 가라앉은 마음 속에는 어떤 감정이 잠들어있을까. 마틴은 그것을 외면하려 노력했다. 자신 답지 않게 다른 이들의 감정에 휩쓸려버렸노라고, 떠나간 이에게 유감을 표하노라고.
만일 이 자리가 그가 아닌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장송곡에 마틴은 꺾여버렸다. 눈물을 흘리고 오열해버렸다. 그것은 분명 떠나간 이에 대한 원망이었을 것이다.
· 티엔마틴, 가시
답지 않게 스스로의 손끝을 노려보고 있는 이에게 말을 건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어쩌면 평소에 보이지 않는 그의 심각한 표정 때문일지도 몰랐고, 유달리 한가했던 자신의 처지 때문일지도 모른다.
"......뭐하고 있는 거예요?"
가시가 박힌 것 같아서, 라는 그의 대답에 마틴은 아아, 하는 성의 없는 반응을 보이고서 넘어갈 참이었다. 헌데 그는 상관없겠지, 라는, 더더욱 성의 없는 자신에게의 대답을 내놓고서는 본래의 업무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
무시하려 해 보아도 신경 쓰인다. 신경 쓰인다. 이런 자신이 싫으면서도 마틴은 결국 그에게 다시 말을 건다. 무슨 가시가 어떻게 박혔길래요? 별 것 아니니 신경 쓰지 말라는 대답. 누가 당신에게 신경이나 쓸 것 같냐고 말해보고 싶어도, 괜한 꼬투리나 잡힐 것 같아 말을 삼켰다.
내어달라 요구하여 받아 든 그의 오른 손끝에는 티끌 같은 작은 가시가 박혀있다. 실로 별 것 아닐 것 같아 그의 손을 떨쳐내고 싶으면서도 괜히 부산을 떤 스스로에게 부끄러워 차마 그러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다 가시 채로 그것을 자신의 양 입술 사이에 살포시 넣어버렸다.
혀끝으로 느껴지는 작은 가시와 그의 육신, 단단한 손톱. 당황스러워하는 그의 표정이 재미있어 진작 뽑아낸 가시를 입 안에서 굴리다 한참 뒤에 뱉어내었다.
이제 됐죠, 라는 말과 함께 지어 보이는 미소는 가식으로 가득 차있지만 그는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돌리지 못하는 듯 하다. 마틴은 이런 자신이 가증스러우면서도 어쩔 줄 모르는 그가 사랑스럽다.
· 티엔마틴, 권태기
"─그래서, 일 자체는 잘 마무리 됐어요."
별 고저도 없는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마틴은 결국 밋밋한 마무리를 내놓았고, 묵묵히 그것을 듣고 있던 티엔은 한참 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하더니 그런가, 하는 요령 없는 대답으로 대화를 끝마쳤다. 만일 식사 때가 아니라 티타임이라도 즐기고 있던 와중이라면 그에게 찻주전자를 엎어버리고 싶었으리라.
이 둘이 업무 외의 이유로 만남을 함께 한지도 오래 되었다. 어쩌면 지나치게 오래 되었다. 생각을 읽지 못해도 마틴은 상대의 다음 수를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었고, 티엔 역시 그것을 알고 평범한 반응조차 제대로 내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예상할 수 있는 언행이라면 무의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지나친 익숙함은 둘 사이의 정체를 불러왔고 마틴은 그들의 관계에서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서로가 바쁜 와중에 만남 이상의 것을 바라는 자체가 사치스러울지라도, 그 만남 자체에 아무런 감흥이 없다면 그것을 지속해야 할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간만에 온전히 둘 만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이런 고민을 하는 마틴의 속을 아는지, 티엔은 짧은 대답을 끝으로 입을 열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 그 날 그들 사이에 필요 이외의 대화는 더 이상 오가지 않았다.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 마틴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말을 꺼내려는 차에 티엔이 먼저 입을 열었다. 힘들 텐데도 이런 시간을 함께 해주어 고맙노라고. 언제나 곁에 있어 감사하노라고. 마틴은 차마 그에게 어떤 대답을 줄 수 없었다.
아아. 어긋나 버렸구나.
그렇게나 익숙해졌음에도 둘은 서로에게 구하고자 하는 것이 달랐다. 웃으며 자신도 그렇다 대답하는 마틴의 목에 걸린 말 한 마디는 그를 아프게 했다.
· 제키리사, 짜장면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는 소녀에게 제키엘은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쓸만한 능력을 가진 사이퍼, 인 소녀가 혼자 동떨어져 있다. 보통이라면 좀 더 하위 계급의 신자가 맡아야 할 일이겠지만 눈앞에 떨어진 먹이를 마다할 정도로 제키엘은 허술한 성격이 아니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말로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손을 잡게 만든 것까지는 나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리사 스트라우스는 울먹이면서도, 제키엘의 손을 잡고서도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단지 그녀의 동생의 이름을 되뇔 뿐. 동생과 어떤 사연이 있는지, 아니면 단지 두려움에 가장 가까운 이의 이름을 부를 뿐인지 그것은 제키엘이 알 바가 아니었다. 단지 자신 외의 다른 이를 보고 있는 불경한 자에 대한 불쾌함을 느낄 뿐이었다.
그 분과 함께하는 자에게 구원이 있느니, 그 분의 대행자인 자신에겐 그의 권능이 함께한다. 제키엘은 그런 자신을 무시하는 오만한 존재를 어떻게 처단할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것이 드디어 불경한 입을 열어 스스로의 뜻을 표하기 전까지는.
"......배고파요." 눈앞의 자신 외의 다른 존재를 부르짖던 작은 영혼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허탈할 정도로 본능에 충실한 것이었다. 당장 이것을 처분해버릴까. 라는 제키엘의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을 막은 것은 자신의 수확에 만족하실 그 분의 모습이었다.
소녀의 바람에 따라 가장 가까운 먹을 거리를 탐색했던 것도, 분명 그런 의지에 따른 것이었으리라.
(※그리고 짜장면을 먹으러 갑니다)
· 릭마틴, 시계
언젠가 마틴은 그에게 손목 가득한 시계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세계각 곳을 오가는 그에게 시차는 뻔한 것일 터인데 어째서 이런 번거로운 장식을 고집하냐고. 그리고 릭은 예의 그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던 것 같다. 자신이 평범하면서 특별하단 사실을 이 시계들과 함께잊지 않을 수 있노라고.
마틴이 그에 대답에 대해 곱씹고 있을 때, 릭은 반대로 마틴에게 물었다. 마틴이 지니고 있는 회중시계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느냐고. 그 당시에마틴은 별다른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단지 할아버지의 유품이기 때문에,시간을 알기에 편리하기 때문에, 뭐 그러한 횡설수설한 대답을 내놓았을 것이다.
후에 혼자서 찬찬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을 때에 마틴은 그제서야 자신이 회중시계의 일정한 똑딱임에서 안정을얻고 있음을 깨달았다. 손으로 가볍게 만지작거리며 그것의 작은 떨림을 느끼고 있노라면 타인의 불쾌한마음을 읽었을 때에도 마음이 가라앉으며 차분히 대처해낼 수 있다.
그런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릭에게 전했을 때, 그는 평소와는 달리 조금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표정 뒤에 그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까. 마틴은 그것이 다른 어떤 때보다도 궁금해 견딜 수 없었지만, 다시한 번 시계의 힘을 빌려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그의 마음을 읽지 않으려 노력했다.
다음에 그를 만났을 때 릭은 여전히 행선지를 밝히지 않은 채 마틴을 어딘가로 인도했다. 영국에서 가장 커다란 시계탑의 옥상. 널리 펼쳐지는 풍경에 감탄한마틴에게 그는 이곳에서 마틴의 근심이 전부 사라지기를 바란다며 유쾌함과 씁쓸함 사이의 미소를 지었다.
별 생각 없이 전했던 말에서 그는 얼마나 많은 속내를 읽었을까. 자신은지금 행복하다고, 무엇보다 릭 당신이 있어 다행이라고 웃어 보이며 마틴은 그를 가만히 껴안았다.
· 하랑마틴, 크레페
꼭 부침개같이 생겼네, 라는 것이 첫인상이었다.
뒤이어 달콤한 것들을 잔뜩 올려 돌돌 싸맨 그것에 하랑은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고, 그런 눈빛을 눈치챈 것인지 혹은 하랑의 마음을 훤히 듣고 있던 것인지 마틴은 하랑에게 건네려던 디저트를 자신의 입가로 옮겨 간다.
얌, 하는 의성어가 들릴 듯이 야무지게 베어 무는 동작은 어찌 보아도 하랑에게 보이기 위한 과장이지만 입가의 크림을 핥으며 둥글게 휘는 눈은 진심으로 웃고 있다.
봐요, 맛있다구요.
그렇게 말하는 듯한 마틴의 표정을 멍하니 바라보던 하랑은 잠깐 후에야 마틴이 다시 그 '크레페'라는 것을 자신에게 건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쓱하게 그것을 받아 든 소년은 마틴이 베어 문 둥근 자국을 들여다보다 청년의 과장스런 동작을 흉내 내어 다른 한 끝을 한 입 가득 우겨 넣고 씹어보았다.
크림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과 과일 시럽의 시큼한 맛, 그리고 얇은 반죽의 차진 씹는 맛. 과연 절로 미소가 날만한 신기한 조화였다.
그러나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는 마틴의 시선에 어딘가 부끄러워진 하랑은 뺨에 묻은 것을 닦아내는 척 얼굴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맛있네."
"그렇죠? 역시 좋아할 줄 알았다니까요."
환하게 말하는 청년의 눈은 방금과 같이 어여쁜 곡선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하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이씨. 이게 아닌데.
어떻게 다시 시선을 마주하면 좋을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우물거리는 소년의 입 안에는 연심마냥 달콤한 맛이 가득 퍼지고 있다.
안락한 소파 위, 티엔은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무료하게 책을 넘기고 있었다. 이미 처음부터 끝 페이지까지 꼼꼼히 읽어보았음은 물론이고 흥미가 동했던 부분을 다시 펼쳐보기를 몇 번째, 평소라면 다른 일정으로 넘어갔을 시간임에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다. 그의 몸뚱이 위에 금발 청년이 세상 모르고 잠들어있는 탓이다.
마틴이 피곤하다 한껏 뇌까리며 돌아온 것이 한 시간 여 전, 그의 눈에는 편안히 책이나 뒤적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티엔에게 불평하며 몸을 겹쳐 누운 것이 삼십 분 여 전이다. 피곤하다 했던 것이 빈 말은 아니었는지 썩 편하지 않을 자세로 금방 잠들어버린 마틴은 몇 번인가 몸을 뒤척였을 뿐 일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도저히 다시 펼칠 마음이 들지 않는 책을 근처의 탁자 위로 던져버리고, 티엔은 부드러운 금발에 자신의 손을 간질여보았다. 규칙적인 숨소리와 함께 옅은 색의 긴 속눈썹이 떨리고, 그가 가만히 내뱉는 날숨은 의복 위에서 흩어져 버리고 있지만 어딘가 따스하게 느껴진다. 귀중한 수련 시간이 수포로 날아가 버렸음에도 그리 나쁘게 생각되지는 않는 시간이었다.
생각해보면 마틴이 이곳에 있는 것은 오로지 티엔의 욕심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티엔은 마틴이 안정을 찾을 때까지 가만히 그의 곁을 지킬 수 있었고, 또는 자신보다 그에게 도움이 될만한 사람을 수소문해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었다. 하지만 티엔은 마틴을 자신의 가까이에 두고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
그의 예상 밖이었던 점은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그들 사이의 거리도 가까워졌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티엔은 점점 불안해졌다. 폐부의 팽창과 심장의 두근거림. 그 모두를 느낄 수 있는 거리에 있다고 해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생각이 점점 어두운 쪽으로 옮겨가자 티엔은 자신도 모르게 마틴을 다독이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지금의 자신은 단지 더 미숙하던 시절의 자신과 마틴을 겹쳐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전의 자신이 받지 못했던 것을 그에게 주고 있는 것일지도. 형태는 다르지만 스스로의 능력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느라 너무 일찍 껍질을 쌓아버렸다는 점은 둘 다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한가한 시간은 잡념을 부른다. 티엔은 그를 괴롭히는 생각을 외면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조금만, 아주 잠시만 마틴이 깊은 잠에 들 때까지 기다렸다 그를 옮기고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전까지 티엔은 지금 맞닿은 온기를 가만히 기억해두기로 했다.